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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롬 8:19-23)

 

우리는 이야기를 한다.

소개팅에 나간 두 청년을 상상해 봅시다. 서로를 탐색하는 동시에 자신을 소개하고 싶을 겁니다. 그러면 보통 어떤 대화를 하게 되나요? 물론 각자는 상대방이 지적인 사람인지, 친절한 사람인지, 재미있거나 책임감 있거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를 알아보려 할 겁니다(물론 여러분들은 “예쁜(잘생긴) 것이 제일 중요한데요?”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그건 처음 보자마자 식별할 테니 논외로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질문을 하나요? 어떻게 말을 하나요? “저는 책임감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대단히 지적인 사람입니다.”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나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들은 이야기를 합니다. 주로 자신의 과거 경험을 이야기해주지요. 과거 학창시절 때 어떤 일을 겪었는지(물론 이 과정 중 은근 학벌 자랑을 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님과 어떤 일을 겪었는지(부모님 자랑을 할 수도 있지요), 제일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었으며(자신의 인내와 끈기를 자랑할 수 있지요), 즐거웠던 일은 무엇이었는지를 말하며 상대방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지요. 둘은 서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헤어질 때는 “저 사람은 사려깊게 들어주는군” 또는 “저 사람은 지적인 사람이구나.”라고 평가하지요.

어떤 명제, 혹은 주장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온갖 주장, 명제, 아이디어를 전달하기 위해 이야기라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또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주장을 전달하기도 하지요. 우리가 이야기를 그토록 좋아하기 때문에, 그걸 들으며(혹은 보며) 울고 웃으며 즐거워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화자가 하고 싶은 주장에 동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향을 받게 되지요.

 

이야기는 행동을 낳는다.

심지어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가 향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지시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보지요.[1] 당신이 길거리를 지나가다 한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분노하며 따귀를 때렸다고 합시다. 여성은 노발대발하며 이후 또 남자를 더 때리려고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당신의 행동은 전후맥락. 즉 이야기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세 가지 경우의 이야기를 상상해 봅시다.

 

첫째, 둘은 연인이고, 남자는 바람을 피웠습니다. 여성은 분노합니다.

 –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럴 땐 끼어드는게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는게 낫습니다.

둘째, 여성은 고등학교의 선생님이고, 남자는 학생입니다. 여성은 학생을 학대하고 있습니다.

 – 가만히 놔두면 안 되지요. 경찰에 신고해야 합니다. 

셋째, 첫 번째 케이스와 상황이 동일한데, 문제는 여성이 내 딸입니다.

 – 저 같으면 같이 남자를 두드려 팰겁니다.

 

보이시나요? 우리는 우리가 어떤 이야기 안에 있는지를 식별하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는 당신이 듣는 이야기가 당신의 삶을 결정한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이는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의 가르침을 받는다 하더라도, 성경의 가치관과 충돌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 성경이 원하는 대로 형성되는데 방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예를 들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목회를 길게 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담임목회 15년차이니까 그렇게 적게 했다고 말하기도 어렵겠지요. 약 15년 간의 시차를 두고 분위기를 생각해 볼 때, 저는 과거보다 현재에 훨씬 더 ‘용서’라는 주제를 말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용서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과거의 사람들은 그것이 ‘꼭 해야만하지만 내가 부족해서 잘 하기 힘든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요. 하지만 현재는 ‘왜 내가 피해를 보았는데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커져갔습니다. 갈수록 사람들은 자신을 가해자라기보다는 피해자로 인식합니다. 또는 ‘잠재적 가해자’로 자신을 보기보다는 ‘잠재적 피해자’로 자신을 생각합니다. 이는 용서라는 주제를 설교하기 더 어렵게 만듭니다. 

글쎄요. 이것이 드라마와 영화와 무관한 일일까요? <테이큰>이나 <아저씨>와 무관한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올드보이>가 얼마나 잔인한지를 말하며 그 해악성을 지적하지만, <올드보이>는 복수의 허무함과 도돌이표에 대한 자기성찰을 담고 있습니다.[2] 하지만 <테이큰>과 <아저씨>는 복수의 후련함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지요. 나쁜 놈을 처벌하지 말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게 전부냐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이생이 전부라면, 복수는 후련한 것이고 용서는 부질없는 것입니다. 삶도 부질없는 것입니다. 아마 이 설교를 듣는 분들 중에서는 기독교인이 아닌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런 분들은 아마 육체의 생과 죽음이 삶의 전부이며, 유물(唯物)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영혼과 하나님 같은 것은 그저 상상일 뿐일거라고 생각해 보신적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일관적이라면, 우리는 약간 모순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다음 글을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까?

저는 1인칭의 죽음은 힘들지 않다고 말해요. 내가 죽으면 고통은 없으니까요…. 여러분들 자살하는 게 힘들 것 같죠? 가령 10층 건물 옥상에서 떨어진다고 해 보세요. 올라가서 뛰어내리기까지만 힘들지 뛰기만 하면 저절로 모든 게 해결돼요. 죽으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아요…. 죽으면 고통이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희망이에요. 그래서 진짜 힘들면 자살을 하셔야 돼요. 진짜 고통스러워서 자살하는 사람이 그래서 생기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여러분의 애인이나 아이가 죽어 있는 걸 봤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침에 눈 뜨는 게 고통스러운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자살하는 거예요. 누가 뭐라고 그러나 신경 쓸 필요도 없어요. 죽었는데 무슨 상관이에요. 죽으면 모든 게 끝나요. 깔끔한 거예요. 힘드시면 자살하세요. 농담 아니에요. 이게 철학자로서 마지막 충고예요. 바둥바둥 살지 말고, 비루하게 살지 말고요. 아무리 해도 이 고통에서 빠져나갈 데가 없고 내일은 더 절망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비굴한 모습 보이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건 행복한 거예요…. 지혜로운 사람은 알아요. 자살이라는 건 굉장히 편안해지는 거예요. 우리는 자살을 두려워하도록 약하게 길러진 거죠. 우리가 안 죽으면 국가는 좋잖아요. 연금도 내고, 부모님 부채도 물려받고요. 이런 것들을 우리가 해 줘야 되니까 국가에서는 자살을 방지해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당당한 권리가 있어요. 자살을 하건 말건 국가가 무슨 상관이에요?[3]

철학자 강신주씨의 이 말에 동의가 되나요? 만일 무신론이 사실이고 유물론이 사실이라면, 강신주씨의 주장은 일관적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당신의 사랑하는 가족이 이 말을 듣고 “그래, 자살해야겠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강신주씨의 말에 동의할 건가요? 아니면 “내가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삶은 살 가치가 있어! 죽으면 안 돼!”라고 말할 건가요? 만일 당신이 후자라면, 유물론과 생의 가치를 동시에 인정하는 것은 비일관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나요? 그러면 뭐가 틀린 걸까요? 놀랍게도, 때로 드라마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2022년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주인공 염미정은 로맨스 상대인 구씨에게 이런 말을 하지요. 

어려서 교회 다닐 때, 기도 제목 적어 내는 게 있었는데 애들이 쓴 거 보고 ‘이런 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 관계, 고작 이런 걸 기도한다고? 신한테? 신인데?’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나 뭐예요?’ ‘나 여기 왜 있어요?’ 91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50년 후면 존재하지 않을 건데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존재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영원할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에 시달리면서도 마음이 어디 한 군데도 한 번도 안착한 적이 없어. 이불 속에서도 불안하고, 사람들 속에서도 불안하고. ‘난 왜 딴 애들처럼 해맑게 웃지 못할까?’, ‘난 왜 늘 슬플까?’, ‘왜 늘 가슴이 뛸까?’, ‘왜 다 재미없을까.’ 인간은 다 허수아비 같애.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어떻게 보면 건강하게 잘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질문을 잠재워 두기로 합의한 사람들일 수도. ‘인생은 이런 거야’라고 어떤 거짓말에 합의한 사람들. 난 합의 안 해. 

이러한 대사들은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왜 당신은 이생이 전부라고 말하면서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는 거죠?”가고 묻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왜 당신은 이생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마치 이생이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는 거죠?” 이야기는 이 모든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이러한 대사들은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왜 당신은 이생이 전부라고 말하면서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는 거죠?”가고 묻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왜 당신은 이생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마치 이생이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는 거죠?” 이야기는 이 모든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성경은 ‘이야기’한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피조물’(19절)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지음받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또한 “허무한 데 굴복”(20절), “썩어짐의 종 노릇”(21절)이라는 표현으로 우리가 타락했음을, 혹은 올바른 상태가 아님을 말해주지요. 하지만 ‘해방’(21절), ‘영광의 자유’(21절), ‘몸의 속량’(23절) 이라는 표현으로 우리가 여기서 벗어나 최종적으로 아름다운 상태에 이를 거라는 희망을 던져줍니다.

저는 압축적으로 이 모든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로마서의 구절을 제시했지만, 성경에는 이야기가 충만합니다. 당신은 창세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당신은 아브라함이나 야곱, 요셉 등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대하드라마로서, 모든 이야기들이 피조물로서의 자기를 자각하는 것과 거대한 고통을 당하는 것.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바라며 삶을 놓지 않고 고통에 맞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냅니다. 그들이 대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지요. 

신약으로 넘어와서, 당신은 더 용기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당신은 엉망 진창이고 우유부단했던 베드로가 놀라운 용기와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변화시키는 사도로 거듭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 교회를 박해하고 죽이려 했던 바울이 교회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이야기를 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극적인 변화는 너무나도 놀라워서, 거의 모든 이야기가 인간 승리를 말해주지요. 하지만 그들의 승리는 그들이 괜찮고 대단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 모두는 자신이 놀라운 이야기 안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창조 – 그들은 모두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졌음을 진정으로 인식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과 운명을 모두 주관하실 거라고 믿었지요. 거기서 그들은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냈지요.

타락 – 그렇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이 문제가 있는 죄인이라고 인식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그들은 자신의 죄악됨을 더 깊이 인식하는 동시에 더 겸손해지고 선행을 더 많이 하는 삶을 살아가는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사랑스러워집니다.

구속 – 그들 모두는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엄청난 은혜를 받았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문제적 존재지만, 엄청난 희생으로 자신을 구원하실 하나님을 바라보거나(구약의 사람들), 이미 십자가의 거대한 희생으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신약의 사람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몸과 영혼을 모두 구원하시고 이 모든 고통에서 건져내실 것을 확신하며 희망했습니다.

자 이 이야기를 모두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4-47)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나누어주었으며, 용납했고, 함께 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아름다움은, 그들이 다른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집단의 예가 아닌 개인의 예를 들어볼까요?

성경에서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창 37:3), 어느 정도 교만한 마음으로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형들의 질투를 사게 되고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지요(창 37:23-32). 하지만 그는 그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믿지요. 그래서 신실하게 삶을 살아가고(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을 믿기에) 죄를 멀리합니다. 그에게도 성적인 유혹이 있었는데, 그는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그의 삶은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더 끔찍한 고통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하지만 그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고, 삶의 해석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습니다(창 40:8). 이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이집트 왕 파라오는 그를 총리로 세우게 되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지혜로 이집트와 온 나라를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던 형들을 보게 되는데,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라는 더 큰 이야기 안에 있었다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자신이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형제들을 용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겪는 고통스러운 일이 그 일이 없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더 좋은 이야기의 전주곡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첫째, 성경의 가르침을 충분히 숙고하고 이해함으로서 성경의 이야기를 살아가십시오. 당신은 성경을 이야기로, 또 교리로 계속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일관적인 성경 이야기를 통해 성경이 명령하는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당신이 성경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성경과는 다른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들으며 성경을 멀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이야기가 도무지 진실처럼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둘째, 성경의 가르침을 살아가는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제 친구가 온통 무신론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수개월을 지낸 이야기를 제게 들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딱히 비윤리적이거나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친절하고 똑똑하며 명민한 사람들이었지요. 하지만 그들과 더불어 수개월을 지내다 보니, 점점 죽음 이후의 삶을 묵상하지 않고 자꾸 이생만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는 그 때 복음 이야기 공동체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셋째, 모든 이야기를 성경의 이야기와 비교하며 읽어내십시오. 무조건 영화와 드라마를 경계하고 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당신은 무신론자 감독이 만든 이야기 안에도 문제가 생긴 인간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영웅을 볼 수도 있습니다. 아이언맨이 타노스를 물리치며 목숨을 버릴 때, 당신은 인생에서는 목숨보다 소중한 무엇이 있을 수 있다고, 그리고 그것은 아름답다고, 인생은 이게 끝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신론적 목소리는 아니지요. 그 목소리는 오히려 목숨을 버리신 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갈망하는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넷째, 이 모든 것 가운데서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진정 아름다운 이야기를 믿게 해달라고, 그래서 그 이야기를 믿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게 해달라고. 당신의 삶이 그렇게 변하게 해달라고 말이지요. 아멘.


각주

  1.  이 예화는 다음 책에서 나온 예화를 다르게 각색한 것이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이진우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1997), pp. 308-309. 
  2.  주인공 이우진의 대사를 보라. “상처받은 자한테 복수심만큼 잘 듣는 처방도 없어요. 한 번 해봐. 15년간의 상실감. 처자식을 잃은 고통···. 이런 거 다 잊어버릴 수 있을 거야. 다시 말해서 복수심은 건강에 좋다! 하지만, 복수가 다 이뤄지고 나면 어떨까. 아마⋯ 숨어 있던 고통이 다시 찾아올 걸?” 실제로 이우진은 복수를 마무리한 후 자살한다.
  3.  강신주, 『강신주의 다상담 3』, (서울: 동녘, 2013), pp. 293-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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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규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B.A.)와 고려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현재 시광교회(www.seetheglory.or.kr)를 담임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님의 기도학교』(IVP), 『새가족반』(복있는사람), 『그리스도 중심 성경읽기』(IVP)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