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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이 되기까지 너희를 품을 것이라”

(이사야 46:3-4)

 

 

여전히 육아중인 우리의 부모들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이분들은 60년대 혹은 50년대 혹은 40년대 그 이전에 태어나신 분들입니다. 부모님들의 헌신적인 삶을 통해 우리 자녀세대가 이전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늘은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의 부모님들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가정의 달인 5월이 되면, 교회에서는 어린이, 다음 세대, 자녀 교육 등의 단어들이 주를 이룹니다. 어버이 주일이 되면 잠시 노인 성도님들에게 교회에서 준비한 선물을 주는 것으로 끝내고 맙니다. 하지만 다음 세대도 부모라는 생명의 뿌리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는 인간의 인생의 처음과 끝과 같습니다. 자기를 희생시켜, 여러분의 생명을 있게 했고, 스스로 생명이 시드는 것을 보여주며,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녀에게 알려주는, 그런 존재가 부모라는 것입니다. 최근 번역된 책들 중에서 “50이면 육아가 끝날 줄 알았다”는 제목이 있습니다. 부모들의 육아는 늙어도 끝이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여전히 육아에 전념하는, 이런 우리 부모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 부모님을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격려, 사랑의 메시지를 설교하고자 합니다. 특별히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희생적인 부모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50년대에서 60년대에 태어나서 베이비부머라 불리는 부모들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릴 향하여 주시는 이 말씀의 은혜를 누리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다음 세대도 부모라는 생명의 뿌리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는 인간의 인생의 처음과 끝과 같습니다. 자기를 희생시켜, 여러분의 생명을 있게 했고, 스스로 생명이 시드는 것을 보여주며,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녀에게 알려주는, 그런 존재가 부모라는 것입니다.

 

 

후진국에서 태어나 선진국에서 은퇴하는 부모님들

최근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 이후의 노후 생활을 연구하여 주목받고 있는 미래에셋캐피탈 대표였던 경제학자 김경록 씨가 쓴, 『60년대생이 온다』라는 책을 보면,1960년에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였다고 합니다. 상상이 되시나요? 이것은 당시 아프리카 가나와 비슷한 국민소득이었습니다.  세계은행은 우리 나라보다 필리핀이나 미얀마의 미래를 더 밝게 전망했습니다.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 있던 한국 경제를 긍정적으로 전망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60년대생 부모님들은 이때 태어났습니다. 지독하게 가난한 나라에서 삶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산업의 인프라가 없었습니다. 부모님들이 청년이 되었을 때는 일자리가 많지 않아 고생을 하셨습니다. 다행히도 1980년대가 되자 달러가 약화되고, 금리가 낮아지고, 유가가 낮아지는 등 경제에 호의적인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수출이 증가하고, 외채 부담이 줄고, 원유 수입액이 줄어들자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 79달러였던 1인당 GDP가 1980년에는 1714달러, 1987년에는 3555달러가 되었습니다. 2000년에는 1만달러가 되었고, 놀랍게도 오늘날 한국의 1인당 GDP는 3만2천달러입니다. 가난한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일찍이 1996년에 선진국들의 모임인 OECD회원국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현재 필리핀은 3천4백달러, 가나는 2천3백달러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지독히 가난한 때 태어났지만 엄청난 번영의 때 시대를 열었고, 이제 인생의 2막을 앞두고 계십니다. 지난 60년 동안, 후진국, 중진국, 선진국을 삶에서 모두 경험한 유일한 세대가 60년대생 부모님 또래 인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이렇게 빈부를 다 경험한 세대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빌립보서 4장12절에서 바울이,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고 말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마치 바울의 고백대로, 부요와 가난을 다 겪어 보아서, 풍부한 상황이든 궁핍한 상황이든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들 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마치 바울의 고백대로, 부요와 가난을 다 겪어 보아서, 풍부한 상황이든 궁핍한 상황이든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들 입니다.

 

“마처” 세대의 은퇴와 노후 준비

그런데 그 부모님 세대가 이제 막 은퇴를 하셨거나 은퇴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 중에서도, 최근 2년 동안 자영업이 아닌 회사를 다니시던  네 분의 장로님들이 은퇴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60년대생 부모님들은 마음 편하게 은퇴를 하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평생 직장에서는 은퇴를 해야 하지만, 실제로 경제적인 짐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부모님들은 조부모님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조부모님이 아프시면 모시고 병원을 드나드는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더하여 우리 부모님들의 육아는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여전히 결혼하지 못한 자녀들의 학업과 미래를 위해 돈을 보태야하고, 결혼한 자녀들을 위해서는 이들의 내집 마련을 위해서도 경제적 도움을 줘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분들의 자녀세대는 현재 대부분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인데, 부모님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약한 세대입니다. 그래서 사회학자들은 60년대생 부모세대를 ‘마처’세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녀에게서 부양받비 못하는 처음 세대”(마지막이자 처음 세대)는 뜻입니다. 부모도 부양해야 하고, 자녀도 돌봐야 하는데, 결국 자녀에게는 보답을 받지 못하는 세대가 부모님 세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분들의 자녀들은 왜 부모를 부양하지 못할까요? 60년대생 부모의 자녀들은 대부분 소위 MZ세대라 불리는 현재 30대 자녀들입니다. 이들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입니다. 경기침체 속에서 역사상 가장 박한 월급을 받으며 직장을 다니고, 그러면서 가장 높은 집 값을 감당해야 하고, 여전히 엄청난 교육열 속에 자녀들의 사교육비를 감당해야 하는 세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을 부양하는 MZ 자녀를 찾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 세대의 다수는 재취업의 길을 택합니다. 평생 직장에서 은퇴는 하였지만 여전히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고, 자녀의 취업과 결혼에 힘이 되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건강하고 두뇌회로가 잘 돌아가는데 일반적인 은퇴 연령인 60세는 여러 면에서 이른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은퇴하신 네 분의 장로님들 역시 대부분 재취업을 하셨고 다시 일을 하고 계시는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재취업 한 직장은 예전의 평생직장이 아닙니다. 연봉도 훨씬 낮아지고, 직급도 낮아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평생 다녔던 첫 직장에 비해서 소속감도 낮고, 근로기간도 훨씬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재취업을 했더라도 수년 안에 다시 퇴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부모님은 사회의 주무대에서 물러나시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생의 큰 변화가 가져다주는 상실감, 공허함, 우울감을 겪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젊을 때 우리 부모님들은 부모이면서 자식으로서 분명한 역할을 갖고 계셨습니다. 직장에서도 부장, 팀장, 과장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이런 역할이 사라진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벗고 나면 처음에는 홀가분합니다. 하지만 점차 배역 없는 배우처럼 공허함을 느낍니다. 자녀들이 떠나버린 빈둥지에서 외로움을 느낍니다. 사회에서 필요 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아 우울감에 빠집니다. 설상가상으로 나에게 큰 의미를 주었던 인간관계도 허물어집니다. 젊을 때는 부부, 가족, 친구, 사회의 관계망이 복잡하고 탄탄했습니다. 그러다 퇴직을 하고 나면 관계망이 급격히 축소됩니다. 이제는 가족이 거의 유일한 관계망입니다. 

그런데 가족의 관계망도 건강하게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도성장 시기에 눈코뜰새 없이 직장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애쓰느라, 가족의 관계망을 탄탄하게 만들어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부 사이에 속깊은 이야기를 털어놓기가 어렵습니다. 대화를 하자고 하다가 말다툼으로 끝나기 일쑤입니다. 자녀들과도 대화를 하려다 결국 잔소리로 흘러서 자녀들이 대화를 피합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특히 아버지들은 대화하는 법을 잘 모릅니다. 사회를 주무대로 삼다가 이제 가정을 주무대로 삼는 삶으로 변화를 경험하는 우리 부모님들. 어떻게 해야 이분들이 행복한 인생 후반전을 살아가실 수 있을까요?

 

무거운 짐을 벗고 나면 처음에는 홀가분합니다. 하지만 점차 배역 없는 배우처럼 공허함을 느낍니다. … 설상가상으로 나에게 큰 의미를 주었던 인간관계도 허물어집니다. … 그러다 퇴직을 하고 나면 관계망이 급격히 축소됩니다. 이제는 가족이 거의 유일한 관계망입니다.

 

복음을 통해 용서하고 회복되는 가정

부모님들이 가정에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족끼리 서로 용서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누구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받고 살까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 가족에게 가장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지만, 가장 오래 붙어 있고, 가장 많은 일을 함께 겪다보니, 가족들에게 받은 상처가 오래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부모님에게 상처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녀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심하게 체벌한 기억이 상처로 남기도 합니다. 다른 형제자매를 나보다 더 이뻐하고 공평하게 대하지 않은 것 때문에 상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 사이에 잦은 다툼이 상처로 남을 수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자녀가 필요한 것들을 제때에 공급을 해주지 못한 것때문에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부모  또한 자녀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사춘기를 심하게 앓은 자녀의 경우 자녀의 심한 말과 과격한 행동으로 부모가 스트레스와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녀에게 효도를 기대하지만 기대에 미치지 않을 때 부모의 실망스런 마음이 상처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부부 사이에도 상처가 남습니다. 배우자가 기대한 대로 하지 않을 때 실망하고 비난의 언어를 쏟아낼 때 상처가 됩니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충분히 서로를 사랑하고 지지해주지 않을 때 상처가 남습니다. 주로 남편은 직장에서 일에 시달리고, 아내는 가정에서 육아와 가사에 시달리면서,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식어질 때 서로를 향한 마음 문이 닫히게 되고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는 부부들이 적지 않습니다. 형제자매 사이에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처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가족간에는 온갖 이유로 서로의 진심과 달리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을 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나이 들어가고, 퇴직하여, 이러한 상처투성이의 가정으로 돌아오고 계십니다. 돌아온 가정에 아직 자녀가 있을 수도 있고, 이미 독립했을 수도 있지만, 몸이 떨어져 있어도 혈연으로 묶인 가정은 여전히 가정입니다. 이 가정에서 상처가 극복되고, 회복이 일어나려면 우리와 우리 부모님들은 무엇을 의지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에는 이에 대한 다양하고 많은 해결책들이 있는 것처럼 광고합니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를 찾아보라는 조언, 가족 상담을 해 보라는 충고, 부모가 경제적으로 충만하면 자녀들이 복종하니 확실한 곳에 투자하거나 사업을 하라는 경제적 조언 등, 너무도 다양하고 그럴 듯한 말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합니다. 이런 조언들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 우리 주변의 여러 말보다 먼저 집중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통한 용서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이 지배하는 가정은 서로의 연약함과 실수를 덮어줍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덮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에 죄를 지었고, 지금도 죄를 짓고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고 있지 안나요?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사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칭의의 은혜를 의지하여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가 아닌 율법과 정되가 지배하는 가정은 어떨까요? 서로의 잘못을 들춰내고, 서로의 잘못을 고자질하기 바쁩니다.  한 쪽에서는 정죄하고, 다른 쪽에서는 방어하기 바쁜 그런 가정이 됩니다. 숨이 막히는 가정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가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가정으로 합당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 우리 주변의 여러 말보다 먼저 집중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통한 용서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이 지배하는 가정은 서로의 연약함과 실수를 덮어줍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덮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 역사하는 가정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고 용서가 필요합니다.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으로 따지고 들면 남편과 아내가 화해할 수 없고, 부모님과 자녀가 화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정죄함에서 벗어났고,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고백한 바울처럼, 우리도 그 은혜로 다른 사람의 죄를 덮어주고 용서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라고 노래한 시편 저자처럼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롭기까지 하시며, 거기 더하여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다고까지 말씀하시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는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서로를 사랑하고 죄를 덮어줄 때, 관계가 회복되고,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복음에 사로잡힌 가정이 될 때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부모님들이 은퇴하고 가정으로 돌아와 처음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바로 용서를 통해 상처를 치료하고 회복하는 일입니다. 가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고 복음이 주는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면, 아무리 상처가 많은 가정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정을 통해 의도하셨던 모든 것들의 회복은 복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복음으로 구원받고 변화받은 가족들이 복음으로 서로를 대할 때, 사랑, 격려, 위로, 안식 같은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서로를 탓하던 가정이, 요셉과 형들처럼 동기간에 시기질투하던 가정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한 팀이 되어 주님을 위해 사는 가정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말씀처럼 서로를 사랑하고 죄를 덮어줄 때, 관계가 회복되고,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복음에 사로잡힌 가정이 될 때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우리 부모님들은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냈고, 나라와 후손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분들이 이제 일터를 떠나 가정으로 돌아오고 계십니다.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막상 우리 부모님들의 손에 쥐어진 것은 많지 않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을 했었는데, 이제는 찾는 이가 없어 나를 써달라고 요청하는 처지가 된 부모님들입니다. 배우자와 자녀와 친구와의 관계에서 많은 것을 잃은 것 같아 공허함을 느끼는 부모님들입니다. 건강의 문제, 노후 생계의 문제,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여전한 근심은 지금도 부모님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숙제들입니다.

이런 부모님들을 향해 하나님이 약속의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 46:3-4). “내가 널 업겠다! 내가 널 품을 것이다! 내가 널 지었으니 내가 업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널 안을 것이다!” “내가”의 반복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십니다.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포로기에서 살아남았거나 포로기 중에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고통스러운 포로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안아주셨고 계속 안아주시리라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어머니의 태에서 태어났고, 유아기를 지나 청소년기와 성인의 시기를 경험했습니다. 이제는 백발의 노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변해온 그들의 인생 안에서 변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을 품고 업어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자기 백성, 자기 자녀를 돌보시고 품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구약 성경에 여러 번 묘사되었습니다. 신명기 1장 31절은 하나님을 자녀를 안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신 1:31). 시편 28장 9절은 하나님을 양을 안은 목자로 묘사합니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시 28:9). 출애굽기 19장 4절은 하나님을 새끼를 업은 독수리로 비유합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안고 품어 보호하는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은 포로기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을 영원히 돌보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과거 이스라엘에게만 아니라, 우리 노년의 부모님들에게도 해당되는 동일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네가 노년이 되어도, 네가 백발이 되어도, 여전히 너는 내 아들딸이다! 네가 아기로 태어났을 때부터 백발의 노인이 될 때까지, 언제나 내가 너를 보호함을 잊지 말아라! 너의 인생 끝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도우며, 너를 지킬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남은 생애를 나와 함께 하자꾸나!” 사람들의 주목받는 장소를 떠나, 친숙하면서도 낯선 가정으로 돌아온 우리 부모님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네가 노년이 되어도, 네가 백발이 되어도, 여전히 너는 내 아들딸이다! 네가 아기로 태어났을 때부터 백발의 노인이 될 때까지, 언제나 내가 너를 보호함을 잊지 말아라! 너의 인생 끝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도우며, 너를 지킬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남은 생애를 나와 함께 하자꾸나!”

 

하나님이 주시는 새 소명의 자리에서 다시 만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전지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며, 누구도 의지하지 않으시며, 실수가 없으시며, 변함이 없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부모님을 안아주시고 품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녀인 성도님들은 오늘 집에 돌아가셔서 사랑하는 부모님들께 “너무 수고하셨다고, 너무 감사하다고, 너무 사랑한다고, 더 잘 섬기겠다”고 말씀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세상의 일터에서는 물러나시지만, 가정에서 가족들의 위로와 격려로 힘을 얻어, 다시 하나님 나라의 사역으로 나아가 쓰임 받으실 것을 기대합니다. 새로운 일터에서, 동호회에서, 이웃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삶을 사시길 기대합니다. 또한 교회의 목장에서, 찬양대에서, 새가족부에서, 방송실에서, 안내부에서, 교육부서에서, 주차안내부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따라 주님의 몸을 섬기는 소명의 자리에서 백발의 성도님들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창훈 목사
고려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을, 고든콘웰신학교와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공부했다. 남서울교회와 향상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했고 지금은 울산시민교회를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 <마태가 그린 하나님의 아들 예수: 마태복음의 기독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