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초저출산 현상
대한민국은 초저출산 현상으로 인해 급속도로 노화되고 있다. 한국 사회의 노화를 잘 보여주는 단면은 분만 산부인과와 소아과의 숫자가 급속도로 감소하여 이제 소멸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1] 한국의 출산율을 보면 이러한 현실을 납득할 수 있다. 1960년대 초 6.0명에 이르던 우리나라의 합계 출산율은 1980년 2.8명으로 줄더니, 2023년에는 0.72명까지 고공낙하하였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합계출산율인 1.59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수치이며, 회원국 중 합계출산율이 1도 안 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저출산으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우리의 기현상을 이제는 ‘초’자를 붙여 초저출산사회라 부른다. 세계적인 석학인 조앤 윌리엄스(Joan C. Williams)가 한국의 출산율을 듣고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 와! 그 정도로 낮은 수치의 출산율은 들어본 적도 없어요”라고 소스라치게 외칠만한 상황인 것이다. [2]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유독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인들이 유별나게 개인지향적이고 이기적이라서 그런 것일까? 심지어 서구 선진국들의 개인화되고 원자화된 시민들보다 말이다. 그런 방식으로, 즉 개인의 문제로, 특히 ‘자신만 아는 요즘 젊은 것들의 문제’로 치부하며 손쉽고 간단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그 젊은 것들’이 기성세대인 우리와 우리가 만들어낸─우리가 비록 막강한 세속 권력과 실행력이 없어 만들어내지는 못했어도 적어도 순응하고 묵인함으로써 만들어낸─사회의 맹아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자끄 엘륄(Jacques Ellul)이 말한 것처럼, 현대 문명과 사회의 죄악들은 고도로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 자신을 순수하거나 완벽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사회와 개인들의 죄악으로 인한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3]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공포스럽게 저조한 원인을 특정 세대와 그들의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가치관에만 돌릴 순 없다. 이들의 신체와 영혼은 달나라에서 태어나고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라는 특정한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생명을 부여받고 형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저출산의 원인들
한국의 저출산 원인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사회경제적 요인, 문화적 요인, 가치관의 변화 등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원인과 요인들을 분석하여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로 전문가들은 한국의 초경쟁사회가 청년들이 졸업과 취업이라는 생애주기의 문턱을 넘어 결혼과 출산으로 나아가는 길에 심각한 장애물로 작용을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이 늘면서 안정적인 지위와 연봉을 보장하는 양질의 일자리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과거보다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년층(15~29세)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중은 2003년 31.8%에서 2022년 41.4%로 상당폭 증가(9.6%p)하였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한 무한경쟁의 시대 속에서 우리나라의 MZ세대는 다른 나라의 동일한 세대보다 더 과도한 불안과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4]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임금 격차가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청년들의 경쟁압력과 그에 따른 불안증세를 이해할 수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즉 양질의 1차 노동시장(대기업, 정규직)과 열악한 2차 노동시장(중소기업, 비정규직) 사이의 이질성에 기인한다. 임금을 비교해보면 2023년 기준 정규직은 비정규직보다 1.9배 많은 월급을 수령하며, 이러한 격차는 2004년 1.5배 수준보다 확대된 것이다. 벌어진 임금의 격차뿐 아니라 1-2차 노동시장 간 이동이 어려워졌다는 현실이 청년들의 경쟁압력을 높이고 있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일자리 이행률이 2006년에는 11.7%였는데, 2021년에는 3.7%로 축소되었다.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의 이행률 역시 2006년 5.3%에서 2021년 3.3%로 줄어들었다.[5]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일자리를 옮길 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이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든 것이다. 자기계발을 통해 더 나은 처우를 보장해주는 직업 환경으로 이직할 수 있다는 희망이 소거된 상황은 청년들의 경쟁압력과 불안감을 고조시킨다.
취업경쟁률 역시 상승했는데, 가장 최근에 시행된 신입사원 채용실태조사를 보면, 2008년 26.3:1의 취업경쟁률이 2017년 대기업을 중심으로 35.7:1로 상승하였다. 수시채용의 증가로 인해 2017년 이후 조사는 중단되었지만, 경력직 중심의 채용을 지향하는 최근의 흐름을 감안했을 때 청년들의 취업은 더욱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6]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들이 ‘경력직 선호 등에 따른 신입 채용 기회 감소(28.2%)’를 가장 큰 어려움으로 선택하기도 하였다.[7]
이와 같이 상호경쟁과 견제가 첨예화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은 청년들이 희망하는 자녀의 숫자를 감소시킨다. 한국은행이 갤럽에 의뢰하여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경쟁압력이 높은 집단, 즉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타인과의 경쟁을 피할 수 없다,’ ‘나는 남들보다 뒤쳐질까봐 불안한 마음이 든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서울이나 수도권에 살아야 한다’와 같은 종류의 물음에 ‘매우 그렇다’ 혹은 ‘그렇다’라고 답한 25~39세의 젊은이들이 경쟁압력이 낮은 집단보다 희망자녀수가 낮은 것으로 나왔다. 즉, 경쟁압력이 높은 청년들일수록 희망하는 자녀수가 낮아지는 결론이 도출된 것이다.[8]
두 번째 이유는 경제적 비용과 관련이 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솟아버린 주거비와 양육비, 교육비 등은 청년들의 결혼과 출산을 막는 주요한 요인이다. 미혼자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청년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 가장 주된 이유로 ‘결혼을 하고 싶지만 취업, 생활안정, 집 마련 문제 등으로 인해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즉 경제적 요인을 꼽은 비중이 35.7%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기혼자 2천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본인이나 주변인들이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로 ‘아이 양육 및 교육비용이 부담돼서’라는 응답이 44%로 가장 많았다.[9] 또한 박진백과 권건우의 연구는 특정한 시기에 상관없이 주택매매가격의 상승 충격이 발생하면 일정한 시차를 두고 자녀의 출산율이 하락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하였다. 연구자들은 특히 2010년 이후 사교육비의 증가와 함께 주택매매가격의 상승을 출산율 하락의 주요 요인으로 분석하였다.[10]
세 번째 요인으로는 청년들이 지니는 가치관의 변화를 생각해볼 수 있다. 미혼자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청년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 가장 주된 이유에 대한 응답과 관련하여 경제적 요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비중(26.4%)으로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싱글 생활을 선호)’를 선택하였다.[11] 요즘 청년들은 전통적인 가치관에 따라 장성하면 당연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인생주기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1차적 공동체를 형성하여 그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행복을 찾으려 들지도 않는다. 이들은 사회적 관계와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안락함과 소소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2023년에 방영된 EBS의 다큐멘터리 ‘인구대기획 초저출생 3부: 2030 심리 보고 시대 현상소’에서는 소셜빅데이터를 분석함으로써, 청년들이 행복과 관련하여 어떤 표현어들을 사용하는지 분석하였다. 2018년에는 청년들이 행복과 관련하여 ‘사랑’, ‘사랑하다’, ‘만나다’라는 연관표현어들을 빈번하게 사용한 반면, 2022년에는 ‘먹다’, ‘맛있다’, ‘건강하다’와 같은 표현어들을 더 자주 언급한 것으로 나타났다.[12] 이는 타인과의 만남과 사귐, 그리고 사랑의 관계 안에서 행복감을 느끼기보다는, 개인의 건강과 웰빙,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는 소소한 삶의 낙에서 행복을 향유하고자 하는 젊은 층의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청년에게 적용할 순 없겠지만, 개인 안에서 삶의 충족성과 행복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은 굳이 많은 에너지와 비용, 그리고 미래의 불확실성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가부장적인 가정환경이나 집단주의적인 공동체에서 어렸을 때부터 자라서 공동체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행복과 기쁨, 의미에 대해 알지 못하다면 그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정지우가 『분노사회』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의 젊은 세대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위계질서, 집단적으로 정해진 하나의 답을 강요하는 공동체, 개인의 공간과 시간을 허용하기보다는 개인 간의 거리를 무시하는 문화에 치욕과 분노를 느끼는데,” 그러한 가부장적 가족 공동체, 심지어 교회 공동체를 경험한 이들은 자발적으로 가족을 형성하거나 교회 공동체에 가입하려 들지 않는다.[13]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낮은 사회·경제적 이유, 가치관 측면에서의 원인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무한경쟁의 사회이다. 매순간 경쟁압력을 체감하며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스트레스에 노출된 청년들은 결혼과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한다. 이들은 경제적 요인들, 가령 도통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는 우리의 월급과 비교했을 때 비정상적으로 상승한 주거비와 양육비, 교육비 등으로 인해 분노하며 결혼과 출산에 대한 소망을 내려놓기도 한다. 가치관의 변화 역시 주요한 원인이다. 결혼과 출산의 과정을 인생주기의 상수로 놓았던 과거 세대와 달리, 요즘 세대는 가수 김연자가 부른 ‘아모르 파티(Amor Fati)’의 가사처럼 “결혼은 선택, 연애는 필수”라 생각을 한다.
지면상의 제한 때문에 더 언급하지 못했지만, 이외에도 높은 강도의 노동과 맞벌이를 해야 하는 상황 등 많은 이유들이 젊은이들의 결혼과 출산을 제한한다. 각 나라 육체노동자의 삶을 비교해보면 한국인들의 노동 강도가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14] 쿠팡맨들은 홀로 운전을 하여 무거운 짐들을 고층 아파트나 미로 같은 주택 앞까지 날라야 한다. 늦은 밤과 새벽에 일하는 것은 기본이다. 최근 과로사한 41세 쿠팡 노동자는 “개처럼 뛰고 있긴 해요”라는 문자를 배송 담당자에게 보낼 정도로 배송압력에 시달렸고, 결국 사랑하는 가족의 곁을 떠났다.[15] 반면 필자가 유학하면서 스코틀랜드에서 보아왔던 아마존맨들은 둘이서 움직였다. 한 명은 운전을 하고, 다른 한명은 짐을 운반했으며, 이들은 결코 밤늦게까지 혹은 새벽같이 일하지 않았다. ‘9 to 5’ 혹은 ‘9 to 6’의 근로시간이 지켜지는, 즉 노동의 윤리와 더불어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이들은 살아간다.
이 모든 외적 요인들을 종합해봤을 때, 한국 사회는 시쳇말로 ‘빡센 사회’이다. 청년들은 이러한 한국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윌리엄스가 말하듯, 청년들은 사회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 아이를 낳을 것이다. 내 소중한 자식들이 한반도 땅에 태어나서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일말의 확신이 있을 때 아이를 낳을 것이다.[16]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은 결혼하고 2년이 되어가던 겨울, 남편과 아이를 낳는 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17] 한강은 “잔혹한 현실을 볼 때면 아이를 낳는 게 부모의 이기적인 선택은 아닌가 고민했다”고 한다. 한강의 이 말은 오래 전에 한 말이지만 요즘 청년들의 생각을 잘 포착하여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라는 외부적 환경과 요인 외에도 심리적이면서 신학적인 요인도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합리화를 넘어 신격화가 되고 있는 ‘자기중심성’의 사상과 문화가 결혼과 출산에 대한 청년들의 생각을 근본부터 바꿔놓고 있다. 사디어스 윌리엄스(Thaddeus J. Williams)는 ‘자기중심성’이 고대 기독교의 팽창, 중세 이슬람교의 팽창 수준으로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윌리엄스는 10대·20대 젊은이들의 추종을 이끌어내는 자기숭배적 프로파간다와 해시태그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내가 행복하면 된다, #꼰대는 사절이다, #내 마음을 따른다, #나에게 충실할 뿐이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 #답은 내면에 있다, #진정성이 최고다, #내 꿈은 이루어진다, #사랑은 사랑이다.” 더 큰 문제는 그리스도인조차 이 오래된 종교의 신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윌리엄스는 고백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자아 숭배를 거침없이 비판한 내가 실제로는 그 종교의 독실한 신자였고 지금도 그렇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종교의 성인에 가깝다. 여태도 그랬고, 죽는 날까지도 길고 고통스러운 배교과정이 계속될 것이다.”[18]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도 1,600년 전에 비스무레한 이야기를 이미 했다. 인간은 의지와 사랑이 자아에게로 내곡된 존재(homo incurvatus in se)이며, 이 때문에 “내가 나에게 문제가 되었다”(I have become a problem to myself)고 말이다. [19]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패러디하여 “인간의 최고 목적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자신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내재화한 이들에게 결혼과 출산은 어울리지 않는 프락시스(praxis), 즉 실천이다. 결혼과 출산을 통해 타인의 존재를 책임과 헌신으로 맞아들이는 삶은 자신의 행복 추구와 상충되는 행위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상의 문화적 매체와 예전은 그러한 생각을 강화시킨다. 소위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이혼은 내가 한 결정 중 가장 잘한 것이다’와 같은 메시지를 흥미로운 문화적 컨텐츠에 녹여 전달하기에, 우리는 경계심과 분별력의 무장을 푼 채 그것들을 흡수하는 경향이 있다. 문화적 세례를 받은 세상의 메시지들은 사상과 행위를 주조하는 강력한 형성력(formative power)을 지닌 채, 결혼과 출산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성경적 기준을 전복시켜 놓았다.
공감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노력
한국 사회에서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한국의 ‘잔혹한 현실’을 직시하며, 이 때문에 결혼과 출산을 꺼리는 청년들의 처지를 진심으로 공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공감과 헤아림이 첫 걸음인 것이다. “이웃이 걸린 암보다 내가 앓고 있는 감기가 더 아프고 고통스럽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타인의 당혹스러움을 공감하기란 실제로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높은 경쟁압력과 경제적 비용의 부담을 느끼며 취업과 결혼, 출산이라는 삶의 높은 문턱 앞에서 서성이는 청년들의 불안한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그러한 공감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시는”(히 4:15)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보여주신 본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우리가 젊었을 때는 훨씬 더 어려웠는데 무슨”,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한국전쟁 중에도 사랑이 꽃피우고 아이들을 여섯, 여덟씩이나 낳았는데,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왜 아이를 안 나?”와 같은 비공감적 언사는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기성세대를 향한 젊은이들의 마음 빗장을 닫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헤아림과 공감이라는 전제 위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내러티브와 신학을 이야기하며 가정과 아이들이 한강 작가가 말한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여름 수박 같은 존재임을 변증해야 할 것이다. 또한 어려운 시대를 사는 청년들에 대한 공감과 변증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차원에서도 교회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창조하도록 공공의 일에 헌신해야 한다. 특히 공공의 일에 종사하고 있는 기독 정치인과 사회인들은 청년들의 결혼과 출산을 가로막는 요인인 경쟁압력과 도시에 집중되어 있는 인구밀도를 줄이고, 출산비, 양육비, 교육비, 주거비와 같이 각 생애주기에 수반되는 경제적 비용들을 낮추고 지원해주기 위한 정치적·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선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함으로 우리 공감과 변증의 진실성을 나타내야 한다.
더 나아가 교회는 약육강식과 치열한 경쟁의 원리가 당연시되어 작동하는 세속 사회와 달리, 사자와 양이 서로 해함 없이 공존하는 사회, 뒤늦게 참여한 일꾼들에게도 동일한 임금을 주는 은혜중심적 사회가 여기 도상에 있음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경쟁하느라 지친 청년들이 교회에서만큼은 경쟁으로부터 가쁜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공간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맥락의 실천에서 목회자들은 교회 프로그램과 행사에서 도입하는 경쟁 구조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찬양대회나 암송대회와 같이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에서까지 탁월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순서에 따라 1, 2, 3등을 매겨 상을 차등하게 수여할 뿐 아니라, 성도와 학생들이 서로 경쟁하여 준비하게 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의문을 던져야 한다. 대한민국의 아이들과 청년들은 교회 밖에서 이미 수많은 경쟁을 하고 비교를 당하고 있다. 마치 요셉과 형들 같이 가정에서도 경쟁과 비교를 할 수 있고, 학교와 학원, 그리고 직장에서 높은 경쟁압력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다. 우리는 교회에서라도 다음 세대가 경쟁과 탁월성, 비교와 순위가 아닌 다른 시각으로 서로의 존재를 생각하고 바라볼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업적과 성취, 물질에 매몰되어 있는 이들이 하나님과 이웃, 배우자와 아이들의 존재를, 그 존재의 당위성과 아름다움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안식처를 형성해야 한다.[20]
성경의 내러티브에 기반한 변증
교회는 비혼주의를 지향하거나 현실의 문제 때문에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청년들에게 이를 ‘변증’해야 할 사명도 있다. 과거 세대와 달리 청년들은 결혼과 출산을 의례히 해야만 하는 생애주기의 필수적 단계로 더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인간들로 하여금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이루도록 의도하셨는지에 대하여 성경의 말씀과 내러티브를 근거로 변호하고 논증하여 다음 세대를 설득해야 한다. 한국의 혹독한 현실에 압도되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해버린 청년들에게 하나님께서 헛된 헤벨의 인생과 악한 세상 속에서 결국 인간의 행복을 위해 배우자와 자녀들을 선물로 주셨음을 설득해야 한다. 특히 인생의 허무와 세상의 악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면서도, 삶의 의미와 목적, 참된 행복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치는 성경의 지혜서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 안에서 풀어냄으로써, 청년들의 마음에 결혼과 출산의 아름다움과 당위성을 서술할 필요가 있다.
헤벨의 인생 가운데 주신 기쁨들: ‘성취’가 아닌 ‘존재’
하나의 예로서, 전도서를 바탕으로 다른 존재와의 만남인 결혼과 출산에 대한 변증을 시도할 수 있다. 청년들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비현실주의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결혼과 출산을 종용한다고 불만을 한다. 경제가 얼마나 힘든지,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팍팍한지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충고를 한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경만큼 인간과 세상을 리얼리즘에 입각해 묘사하고 있는 내러티브가 없다. 성경은 뿌리 깊은 죄성(sinfulness)에서 나오는 인간들의 악랄한 욕망과 행위들을 가감 없이 폭로하며, 그 어떤 책보다 인생의 허무와 세상의 악함에 대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성경의 저자들은 우리 인생과 세상이 얼마나 힘들고 팍팍한지를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성경은 사막과 같은 인생과 세상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존재들, 특히 배우자와 아이들의 존재가 오아시스와 같이 여행자들에게 쉼과 소생케 하는 물을 제공한다고 이야기한다.
우선 인생과 세상의 가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전도서 저자의 리얼리즘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세상과 인생의 부조리와 헛됨을 표현하기 위해 히브리어 단어 ‘헤벨’을 사용하는데, 시적 운율에 맞춰 이를 노래한다: “헤벨들의 헤벨! 코헬렛(전도자)이 말했다. 헤벨들의 헤벨! 모든 것은 헤벨(전 1:2).” ‘허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헤벨’은 인간이 도무지 움킬 수 없는 ‘숨’(breath)이나 ‘증기’(steam, smoke)를 의미한다. 또한 코헬렛은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What does man gain from all his labor at which he toils under the sun?)”라고 물으며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동, 그리고 그로부터 산출되는 성취가 ‘헤벨’이라 말한다. 인간이 평생 노동해서 얻는 성취가 고작 ‘헤벨’, 곧 ‘숨’과 ‘연기’라는 것이다. 필자가 어렸을 땐 소독차가 동네 곳곳을 다니면서 연기를 뿌리고 다녔다. 그러면 어린 아이들은 신나서 그 연기를 만지고 잡아 보려 소독차를 쫓아 다녔으나 잡을 수 없었다. 우리가 평생 노동하고 성취하려는 행위는 그와 같이 도무지 움켜지지 않는 연기를 잡으려 발버둥치는 것에 불과하다.
코헬렛은 인생이 허무한 여러 가지 이유를 이야기한다. 첫 번째로 인간의 성취라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허무하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 1:9-10).”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의 수고와 성취를 허무하게 만든다. 게다가 인간은 ‘땅’으로 대표되는 자연에 비해 하루살이와 같은 짧은 인생을 살기 때문에 우리의 성취는 더욱 무의미해진다(전 1:4). 우리가 아무리 거창한 업적들을 성취했어도 우리 세대는 찰나에 지나가버리고 다음 세대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인생이 허무한 두 번째 이유는 시간의 측량할 수 없음과 불확실성에 있다. 우리에게는 좋은 일만 생기지 않는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측량할 수 없는 시간에 불현 듯 찾아온다. 그 점에 대해 코헬렛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라고 전한다. 전도자는 측량할 수 없는 인생과 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체적 서술을 하기도 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 3:1-8).
인생의 시간 동안 우리의 기대와 예측대로 웃고 춤추는 시간만 일어나지 않는다. 미워하고 분노해야 하는 시간이 불청객과 같이 찾아오기도 한다. 서로 사랑을 해서 행복하고 기쁜 시절도 있지만, 서로 미워하고 전쟁을 해서 불행한 시간, 마치 시간이 추운 겨울과 같이 차갑고 더디 지나가는 시기도 찾아온다. 코헬렛은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의 고약함을 생각할 때 인생이 허무하다 말한다.
이 같은 방식으로 코헬렛은 마치 현대인이나 청년들과 같이 현실주의적으로 인생의 허무와 세상의 부조리를 그린다. 그런 점에서 모든 시대가 힘들며, 결혼과 출산에 적합한 좋은 시대는 엄밀한 의미에서 지상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전도자는 이 시대(this age) 안에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하신 기쁨과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가르친다. 성경의 저자들은 헛된 인생과 세상에 주신 선물과 기쁨이 바로 ‘존재’와 ‘만남’이라고 주장한다. 성취와 업적이 아니다. 가령 전도자는 배우자의 존재와 그와의 만남을 강조한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전 9:9).” 헛된 날에 배우자와 즐겁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몫의 선물이다. 배우자와의 즐거운 사귐은 죽을 일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견디고 살아갈 수 있는 안식과 용기와 기쁨을 준다. 코헬렛은 존재와의 만남이라는 인생의 참 의미가 극치로 성취되는 지점이 여호와와의 사귐과 경외라고 결론을 맺기도 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아이들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편 127편의 기자는 악인과 원수가 많은 세상에서 자식들의 존재가 우리로 하여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한다고 말한다.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일차적이면서 본질적 공동체는 견고한 성루와 같이 악한 세상에서 서로를 보호한다. 자식들은 세상이라는 허허벌판에서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는 장수인 부모들의 든든한 화살과 같다(시 127:4). 부모가 일방적으로 자녀들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자녀들이 부모를 지탱하고 살게 하기도 한다. 자녀들의 존재 자체와 맑은 웃음이 우리를 하루하루 살게 한다.
교회는 청년들에게 바로 이 점을 변증하며 설득해야 한다고 본다. “맞다. 허무한 인생이고 불의한 세상이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라는 것을 말이다. 허무한 인생이고 악한 세상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존재’라는 선물, 특히 배우자와 자녀라는 존재를 상호적인 행복과 기쁨을 위해 주셨음을 성경과 우리의 경험을 통해 서술해야 한다. 이 실제계의 사막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어딘가에 ‘존재’라는 빛나는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린왕자가 말하듯 이야기해야 한다.
마음 성찰
마지막으로 기독 청년들도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자기 마음을 성찰하고 지키는 일이다. 중세 신학자 보나벤투라(Bonaventure)가 말하듯, 그리스도인은 “어둠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비추는 “마음의 거울”(speculum mentis)을 매순간 되돌아봐야 한다.[21] 사회의 잔혹성과 경제적 상황 때문에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거나 미룬다는 생각 뒤편에 ‘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합리화된 자기중심성은 없는지 말이다. 혹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나의 인생, 그리고 자녀의 삶을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잔혹한 세상에 대한 현실적 감각과 경험에 압도되어 출산을 지양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악한 시대와 세상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녀를 출산하여 양육하는 것은 어찌 보면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실천적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는 세상의 캐치프레이즈들을 분별하여 마음을 지킬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 가치중립적인 메시지와 내러티브는 없다. 물론 그 모두를 악마화해서도 안 되지만,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도 안 된다. 결혼과 출산보다는 홀로움과 무자녀의 삶을 행복한 인생이라 광고하는 문화적 메시지들로부터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원시가족공동체를 향해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묵상을 통해 들어야 한다.
나가는 말
이 글을 통해 대한민국의 초저출산 현상과 그 이유들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팍팍한 한국 사회에서 청년들은 불안하여 취업과 결혼과 출산의 거대한 산 앞에 서성이고 있다. 교회 공동체는 이런 청년들의 이야기를 잘 경청하고 헤아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첫 걸음이다. 그리고 청년들이 조금이라도 신뢰할 수 있는 사회와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은 최선의 경주를 해야 한다. 동시에 교회는 성경의 내러티브와 우리의 실천적 경험을 통해 결혼과 출산의 당위성을 변증하여 서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상충되지 않는 우리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 삭막한 인생 가운데 결혼과 출산을 통한 존재와의 만남, 그 오아시스를 허락하셨다고 말이다. 정현종의 시가 말하듯 한 존재가,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우리는 이 경이 [驚異]를 우리의 언어로, 즉 성경적이면서 시적인 언어로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 한다.
각주
- 고정민, “10년 뒤면 산부인과 의사 사라진다. 지금 회생 못하면 끝,” 청년의사, 2022. 10. 17. https://www.docdocdoc.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28188
- EBS 다큐멘터리 <인구대기획 초저출생 4부-조용한 혁명: 일, 가정, 시간>.
- Jacques Ellul, Presence in the Modern World, trans. Lisa Richmond (Eugene: Cascade, 2016), 5. 여기서 엘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신을 순수하다고 생각하거나 세상의 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선언할 수 없습니다. 우리 문명의 중요한 사실은 죄가 점점 더 집단화되고 있으며 각 개인이 죄에 참여하도록 강요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각 개인은 다른 사람의 범죄로 인한 결과를 감당해야 합니다. 가령, 전쟁에서 특히 그렇지만 다른 모든 사회적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잃어버린 세상 안에서 ‘완벽할 수 있다’는 환상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 황인도 외 11인, “초저출산 및 초고령사회: 극단적 인구구조의 원인, 영향, 대책,” 「경제전망보고서」(한국은행, 2023년 11월호), 74. 우리나라에서 비정규직은 ① 한시적 근로자(계약직, 무기계약직 등) ② 시간제 근로자(주당 36시간 미만 근로자) ③ 비전형 근로자(파견, 용역, 특수형태 근로자 등)를 말한다.
- 앞의 논문, 75. 이 통계는 전년도 고용지위 대비 변화 확률, 즉 일자리 1년 이행률에 해당된다. 가령, 전년도 조사 당시 ‘비정규직’이라 답했으나 금년도에는 ‘정규직’이라 답한 응답자들의 비율이 2006년에는 11.7%였으나 2021년에는 3.7%로 대폭 축소되었다.
- 앞의 논문, 75.
- 이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전국 4년제 대학 재학생 및 졸업(예정)자 2,469명을 대상으로 2022.9.15.-30일 실시한 「2022년 대학생 취업인식도 조사」 결과이다.
- “초저출산 및 초고령사회: 극단적 인구구조의 원인, 영향, 대책,” 78.
- 앞의 논문, 83.
- 박진백·권건우, “저출산 원인 진단과 부동산 정책방향,” 「국토정책 Brief」(국토연구원, 2024년 1월호), 2-8.
- “초저출산 및 초고령사회: 극단적 인구구조의 원인, 영향, 대책,” 83.
- EBS 다큐멘터리 <인구대기획 초저출생 3부-2030 심리 보고 시대 현상소>의 17분 40초부터 참고하라.
- 정지우, 『분노사회: 현대사회의 감정에 관한 철학 에세이』(부산: 도서출판 이경, 2014), 75.
- 조규준, “우리나라 장시간 노동 현황과 건강,” 「노동리뷰」(한국노동연구원, 2024년 2월호), 69-73. 다른 주요 국가들(미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 일본 등)에 비해 한국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과 장시간 노동자 비중이 높은 편이다. 장시간 노동자의 비중이 낮은 나라들은 뇌졸중·심장질환이 낮으며, 자살률 또한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 김해정, “숨진 41살 쿠팡 기사 ‘개처럼 뛰고 있긴 해요’ 밤샘 주63시간 노동,” 한겨례, 2024. 6. 27. 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1146779.html
- EBS 창사특집 <조앤 윌리엄스와의 대화>.
- 곽동건, “‘아이 낳자’ 남편의 설득도 화제,’ MBC뉴스, 2024. 10. 13. 출산에 부정적이었던 한강에게 남편은 ”그래도 세상은 살아갈 만도 하잖아? 여름엔 수박도 달고, 봄에는 참외도 있고, 목마를 땐 물도 단데, 그런 거 다 맛보게 해주고 싶지 않냐. 빗소리도 듣게 하고, 눈 오는 것도 보게 해주고 싶지 않냐”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한강은 여름 수박에서 느닷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설탕처럼 부스러지는 수박을 베어 물 때 내가 아무런 불순물 없이 그 순간을 맛보았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라고 술회한다. 그러면서 한강은 “그 수박의 맛이 그날 이후 나의 화두가 되었고, 내 단단한 마음에 금을 그어 간 균열의 처음이 되었다”며 출산을 결심하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 Thaddeus J. Williams, Don’t Follow Your Heart: Boldly Breaking the Ten Commandments of Self-Worship, 윤종석 역, 『마음을 따르지 않을 용기: 이 시대를 집어삼킨 ‘나’라는 신에 맞서다』(서울: 두란노, 2024), 22.
- Augustine, Confessions, 선한용 역, 『고백록』(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9), X. 33.
-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목적과 이유가 존재에 대한 경외와 사유에 있다고 주장하는 월터 브루그만의 책,『안식일은 저항이다』(서울: 복 있는 사람, 2015)를 참고하라.
- 보나벤투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여정』, 서문 4.
김풍룡 교수는 수도국제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합동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스코틀랜드에 있는 아버딘 대학(University of Aberdeen)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중심으로 정치 신학을 연구했다. 박사 논문은 두 출판사(Lexington Books와 Fortress Press)의 joint monograph로 2024년에 출간되었으며, 책의 제목은 Augustine’s Apocalyptic Political Theology in the Evil Saeculu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