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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읽기 전에

이 설교는, 매주 일정한 분량의 말씀을 통독하고 있는 공동체에서 소예언서를 함께 읽은 주간에 나눈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정의가 아니라, 울부짖은 소리와 신음과 탄식에서 일어나는 정의임을, 나의 권리와 자유를 강변하는 정의가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정의임을 일깨우고 싶었습니다. 

한 때, 교회의 공적 참여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우리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각별하게 사랑하신다는 걸 생각했고 이런 우리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삶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우리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실천 같았습니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따로 모색하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말씀에 응답해서 울부짖는 자의 소리를 들으시는 우리 하나님과 오늘 함께 하는 길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사회 안에서 정의의 물길을 새로 트는 길이며 공적 참여의 ‘오래된 미래’가 아닐까 합니다. 

 

1. 

얼마 전, 책을 만들며 늘 언어를 다루는 지인이 노래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이런 노래였습니다. 

 

간밤에 바람은 말을 하였고/ 고궁의 탑도 말을 하였고/

할미의 패인 눈도 말을 했으나/ 말 같지 않은 말에 지친 내 귀가/

말들을 모두 잊어 듣지 못했네//

여인의 손길은 말을 하였고/ 거리의 거지도 말을 하였고/

죄수의 푸른 옷도 말을 했으나/ 말 같지 않은 말에 지친 내 귀가/

말들을 모두 잊어 듣지 못했네//

잘리운 가로수는 말을 하였고/ 무너진 돌담도 말을 하였고/

빼앗긴 시인도 말을 했으나/ 말 같지 않은 말에 지친 내 귀가/

말들을 모두 잊어 듣지 못했네/ 말들을 모두 잊어 듣지 못했네//

 

저는 이 노래를 처음 들었습니다. 근데, 이 노랫말이 많이 공감이 되었습니다. 말같지 않은 말들을 듣느라, 말같지 않은 말들을 쏟아내느라, 말다운 말을 잊어버리니, 말 다운 말을 할 수도 없을 뿐더러 말다운 말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정작 들어야 할 말이 있는데도 듣지 못합니다. 바람의 말을 듣지 못하고, 주름진 할미의 한숨소리를 듣지 못하고, 여인의 손길 같은 삶의 애환이 담긴 말을 듣지 못합니다. 가난한 거지의 애원소리를, 또 죄수의 탄식 소리를, 그렇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말을 듣지 못합니다. 

 

2.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는 겁니다. 

 ‘말다운 말을 들어온 이가 있다면?’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말들, 그 욕망과 야망을 투사한 말들, 한꺼풀 벗겨보면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탐욕스러운 말들. 이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우리가 잃어버린 말들, 그러니까 피조세계의 말과 바람의 말과 쓰러진 가로수의 말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탄식과 울부짖음을 들어온 이가 있다면?’

 ‘들어온 이가 있다면?” 이라는 표현은 그분을 생각하면 옳지 않습니다. 이런 가정이야말로 옳지 않습니다. 그분은 이미 듣고 계셨습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의 탄식, 황폐한 땅의 탄식을 듣고 계셨습니다. 당신께서 각별하게 살피시는 이들, 가난하고 소외된 자, 유리하고 방황하는 자의 울부짖음을 이미 들으셨습니다. 불법이 자행되고 망가진 세계의 비명을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들이 잊어버린 말들을 진작부터 듣고 계셨습니다. 

 

3. 

한 주동안 소예언서를 읽어나가다가, 저는 “정의”라는 주제에 골몰했습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예언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께서는 요엘, 아모스, 미가, 호세아 같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불의를 질책하셨습니다. 요엘은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할 ‘여호와의 날’을 예고하고, 아모스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24) 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요청합니다. 오늘 본문 미가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담은 미가서에서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대목인 오늘 본문도,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장 8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을 갖다 바칠까? 어떤 번제물로 제사를 드릴까? 어떤 헌물을 드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이를 묻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세 가지 입니다. 

첫째, 정의를 행하는 것. 

둘째, 인자를 사랑하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은혜대로 사는 것. 

셋째,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단순하게 말하자면 정의와 사랑과 겸손한 동행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바로 ‘정의’ 입니다. 예언서는 우리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이야기하는데, 대체 정의란 무엇입니까? 

 

4.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신앙인의 질문이기도 하지만, 정치 철학과 윤리학 같은 일반 학문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가 행복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하고(공리주의), 어떤 이들은 한 개인의 존엄한 권리,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합니다(자유주의). 어떤 이들은 사람들 사이의 수많은 이견을 받아들이고 공동의 선을 함께 고민해 가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합니다(공동체주의). 이런 정의를 위한 이론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 우리 사회가 정말 살 만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인가를 성찰할 수 있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에 예언서를 읽어나가다가, 우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정의는 고민의 출발 자체가 특별할 뿐더러, 정의의 초점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5. 

 “이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가?” 

 “무엇이 정의이고, 어떻게 하면, 더 공명정대한 사회가 될 것인가?  

성경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정의란 이런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예언서는 정의를 정의해 주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미 정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전제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때”에,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정의를 요청하십니다. “어떤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이 정의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어떤 때”에 그렇습니다. “어떤 때?” 

바로 소리가 들릴 때입니다. 말다운 말들이 들릴 때입니다. 울부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될 때입니다.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어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미가3:3-4)

하나님께 누구의 소리가 들립니까? 지도자들에게 짓밟히는 백성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탄식하고 울부짖으며 도움을 청하는 소리가 통치자들에게는 들리지 않아도 하나님께는 들리는 겁니다. 

 “근래에 내 백성이 원수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에서 겉옷을 벗기며 내 백성의 부녀들을 그들의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원히 빼앗는도다”(미가2:9-10)

하나님께 누구의 소리가 들립니까? 피난민들의 소리, 부녀자들의 소리, 어린아이들의 소리입니다. 

 

6. 

기독교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정의’에 대한 탁월한 저작을 낸 분입니다. 월터스토프는 자신에게 정의에 대한 ‘각성’, 즉 완전히 새롭게 깨어났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1975년 9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한 대학에서 열린 국제 학술대회에 참여했을 때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학자들이 당시 시행중이던 극단적인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너무 자연스럽게 여기더랍니다. 월터스토프는 이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또 다른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남아공 출신의 흑인과 유색인 학자들의 소리였습니다. 이들은 분노하기보다 상처입은 자처럼 말했습니다. 그들이 매일 당하는 치욕에 대해서, 그들이 어디까지 내몰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월터스토프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충성한다면, 그는 그런 불의의 희생자들을 위해서 목소리를 내야 했습니다.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외면하시지 않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외면할 수가 없는 겁니다. 

 

7. 

예언자들이 말하는 정의는, 정의로운 사회를 학문적으로 규정하는 정의가 아닙니다. 토론하는 정의가 아닙니다. 세미나와 포럼에서 오가는 학자들의 담론이 아닙니다. 황폐한 땅의 탄식과 상처받은 이들의 비통한 울부짖음이 들리는 데도, 이런 불편한 소리에 귀막고 있는 이들을 흔들어 깨우는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사변적 정의, 논리적으로 정합적인 정의가 아닙니다. 불의하고 불법한 사회에서 울부짖는 자의 소리를 들으신 분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지고, 한 존재가 한 존재로 대접받지 못할 때에 터지는 신음소리에 귀 기울이는 분의 정의입니다. 그러니까 그분의 정의는 현장의 정의이고, 현실의 정의입니다. 

 

8.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정의는 ‘초점’ 자체가 다릅니다. 정치 철학자들이 우리의 행복, 개인의 권리를 주창할 때에 일차적인 관심은 바로 ‘나’입니다. 나의 행복, 나의 권리, 나의 자유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공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는 걸 주목해서 보십시오. 

누군가 무임승차를 합니다. 회사에서 공고를 내고 사원모집을 하는데, 이미 내정자가 있습니다. 교회 식당에서 우동을 타려고 줄을 서고 있는데, 담임목사라는 사람이 줄도 안 서고 앞에 가서 탑니다. 그러면 화가 납니다. 채용을 기대하며 원서를 낸 나는 분노하고, 우동 타려고 긴 줄에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나는 분노합니다. 나는 그가 가진 특권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걸 용인하는 사회는 내게 행복하지 않은 사회입니다. 공명 정대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라면, 모두에게, 그러나 누구보다도 내게 똑같은 권한을 줘야 합니다. 권리 뿐만이 아닙니다. 자유도 보장해줘야 합니다. 정의를 이렇게 고민하는 것도, 무엇보다 내가 손해보지 않는 세상, 내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울부짖는 자를 위한 정의입니다. 권리를 박탈당하고, 자유를 빼앗긴 자를 위한 정의입니다. 나를 위한 정의가 아니라, 그 힘없는 타인, 다른 사람을 위한 정의입니다.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미가2:1,2)

정의를 위해 일어선 예언자가 누구를 질타합니까? 부유한 압제자들을 질타합니다. 

왜 질타합니까? 이들이 빼앗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힘없는 자들의 산업을 강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두고만 보실 수가 없습니다. 구약 성경 안에는 거듭 등장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편파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할 만큼, 우리 하나님께서 각별히 생각하시는 네 그룹이 있습니다. 바로 ‘가난한 자, 과부, 고아, 나그네’ 입니다. 이들은 짓밟힌 자들이고 힘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늘 이들의 소리부터 반응하십니다. 하나님께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이사야10:1,2)

이렇게 우리 하나님의 정의는 ‘나의 정의’, ‘우리 모두의 정의’가 아니라 ‘타인의 정의’입니다. 학자들은 ‘나 아닌 모든 것’이라 하여 ‘타자’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정의는 ‘타자’, 특별히 힘없고 짓밟히고 학대받는 타자들을 위한 정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학대하는 이들이 당신의 백성이라도 가만 두실 수가 없는 겁니다. 울부짖음은 들려오는데, 이들을 계속 울부짖게 하는 압제자와 짓밟는 자들이 비록 당신의 백성들이라 할 지라도 가만 두실 수 없는 겁니다. 

 

9. 

예언자들은 정의를 역설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외칩니다. 우리 하나님의 정의는 ‘나의 정의’, ‘나의 행복과 나의 권리, 나의 자유를 위한 정의’가 아닙니다. ‘남의 정의’, ‘힘없는 자의 행복과 힘없는 자의 권리를 위한 정의’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울부짖는 자의 정의입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부터 시작해,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우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힘없는 하나님의 형상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였고,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 울부짖는 자의 소리를 들어, 울부짖게 하는 자의 편이 아니라 울부짖는 자의 편이 되기를, 빼앗는 자가 아니라 빼앗긴 자의 편이 되길 원하고 계십니다. 

 

10. 

클레어 키건이 쓴 짤막한 소설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아일랜드의 한 작은 도시에서 석탄 목재상을 하는 빌 펄롱이라는 이가 주인공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다섯 명의 딸을 키우며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실은 그는 미혼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미혼모였던 어머니와 그를 그 도시에서 혼자 사는 개신교도 였던 미시즈 윌슨이 거두어주었습니다. 그는 그런 미시즈 윌슨에게 감사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펑롱은 그의 주고객이자 그 지역에서 영향력이 대단한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갑니다. 그러다 수녀원에서 젊은 여자와 어린 여자 아이들 여남은 명이 바닥에 엎드려 죽어라 바닥에 광택을 내고 있는 걸 봅니다. 그들의 상태는 끔찍했습니다. 그 아이들은 펄롱에게 달려들며 말했습니다. “아저씨, 우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그 다음 번에 수녀원에 갔을 때에 펄롱은 수녀원 석탄 창고에 갇혀 있는 한 여자아이를 발견합니다. 그 아이는 하룻밤 이상 거기에 머물러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머리가 엉망인데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습니다. 수녀원에서는 펄롱에게 감추려 들었습니다. 펄롱은 갈등했습니다. 그 아이들을 보고 났더니 예배당에서 예배도 제대로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에게 말을 꺼냈다가, 아내에게 핀잔을 들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이 아니잖아 하는 소리와 함께. 

그러나 그는 결국 수녀원으로 향합니다. 물론 그는 가면서도 거기서 아이들을 만나지 말기를 바랐습니다. 근데 아이가 있었습니다. 펄롱은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그는 아이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는 아이와 함께 오면서 그녀의 어머니와 자신을 거두어준 미시즈 윌슨을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어머니도 그곳으로 갔을 거라고,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소설 말미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지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11.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하지 않은 일입니다. 할 수 있는 데 하지 않은 일. 내가 해야 하는 데 하지 않은 일. 그 일은, 그들의 소리를 듣지 않은 일입니다. 그들의 소리를 듣는 그분의 소리를 듣지 않는 일. 가난하고 짓밟히고 괴로워하는 그들의 소리를 외면한 일. 말같지 않은 말들을 듣느라, 들어야 할 말을 듣지 않은 일. 

그러나 반대로 최선의 일은 듣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들의 울부짖음을 듣는 것입니다. 예언서 같은 말씀을 읽어나가는 것이 불편하고, 이 예언서 때문에 그들의 울부짖음을 듣기 시작하면, 내가 감수해야 할 일들도 있습니다. 그 일이 때로 내게 손해가 되며, 또 귀찮은 일에 말려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최선은 짓밟힌 자의 소리, 힘없는 자의 탄식, 울부짖는 자의 하소연을 듣고, 하나님의 정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12.

남아공에서 학대받는 이들의 소리에 각성한 다음, 월터스토프는 ‘하나님의 정의’를 일평생 그의 학문적 주제이자 실천과제로 삼았습니다. 그는 정의가 좌절되는 상황을 거듭 목격하면서도, 불의한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희망을 이루어가실 것인가를 숙고하면서, 수많은 지성인들에게 사랑과 정의의 확성기가 되었습니다. 

그러고보니 가까이에도 있습니다. 울부짖는 자의 소리에 반응하는 우리 성도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한 권사님이 노숙하고 있는 한 자매를 집에 데려다가 씻기고 먹였다는 이야기를, 어떤 분이 제게 살짝 들려줬습니다. 그 권사님이 지내온 혹독한 시간과 탄식을 익히 아는 저로서는, ‘울부짖는 소리를 울부짖는 자가 먼저 듣는구나’ 생각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은퇴권사님은 지금도 여전히 수감된 죄수들을 찾아가고 그들에게 편지를 쓰고 계십니다. 몇 달 전에는 사랑을 사랑으로 갚지 못하는 한 죄수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도 그 권사님의 기도와 사랑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13.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그러고 보면, 정의를 행하는 것과 인자를 사랑하는 것,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의 권리와 행복을 위해서 그들의 울부짖음에 반응함으로써 하나님의 정의에 참여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소리를 듣고 계신 하나님과 겸손하게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야 말로 우리의 최선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정의를 묵상하다보면, 말같지 않은 말소리 대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한때 울부짖던 우리의 탄식을 떠올리게 하는 울부짖는 소리,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순간조차, “내게 뭘 감수해야 하나, 내게 어떤 손해가 날까” 하며 절로 셈을 하게 되겠지만, 이제는 용기를 내 보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용기, 사랑의 용기, 정의의 용기입니다. 

한기윤의 연구위원인 강영롱 목사는 고려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와 문화”로 박사 학위를 하였다. 소망교회에서 부목사로 지내며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출강하다가 2021년 4월부터는 대구에 있는 삼덕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