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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6일부터 8월 11일까지 제33회 올림픽 경기가 파리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올림픽은 1896년 이후 매 4년마다 세계 유명 도시에서 열리는 최고의 국제 스포츠 대회입니다. 이 대회를 통해 전 세계는 인종, 언어, 지역, 그리고 이념을 초월하여 하나가 됩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빠르게’라는 슬로건과 함께,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는 선수들의 투지와 기록들을 보면서, 전 세계는 감동의 도가니 속에 열광하게 됩니다. 올림픽은 짙은 인류애와 함께 화합을 이루는 장입니다. 과연 올림픽만큼 인류의 가슴을 뛰게 만들고, 큰 감동과 기쁨을 선사하는 행사가 있을까요? 그러나 큰 감동을 선사하는 만큼, 올림픽은 인류 사회에 크나큰 부작용도 야기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능력주의’를 인류 사회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한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마태복음 20:1-16에 묘사된 포도원 비유를 통해 올림픽 안에 내재된 능력주의를 잠시 조망해 보고자 합니다.

 

 

올림픽과 능력주의 

기원전 8세기경 고대 올림픽은 제우스 신을 기리기 위한 종교 축제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고대 올림픽의 근본 정신은 아르테(arete: 미)입니다. ‘아르테’는 영어의 ‘탁월함’ 또는 ‘우수함’(excellence)을 의미하며, 이는 인간의 지성, 신체, 도덕의 조화로운 발달을 통해 인간의 전인적 완성과 미를 추구하는 정신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올림픽 정신은 그리스를 뛰어넘어, 국가들 간의 평화와 단결을 도모하는 하나의 스포츠 축제로 발전하였습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은 올림픽의 근본정신을 “신체적 강건 뿐만 아니라 도덕적 숭고 및 순화의 총체를 의미한다”라고 역설하였습니다. 그는 고대 올림픽의 정신인 아르테를 계승하고자 한 것입니다. 

올림픽 역사연구가이자 IOC 위원인 메실리(Fr. Messerli)는 근대 올림픽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올림픽 경기는 개인적으로는 선수의 신체, 정신 및 영혼을 조화, 발전시킨다. 세계의 국민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함으로써 우정을 돈독하게 하며 나아가서 세계의 평화에 기여한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올림픽의 근본 목적은 스포츠 활동을 통해 인간의 완성과 국제 평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올림픽은 그 어떤 행사나 모임보다 강력한 인류애적 연대감을 형성하며, 국제 사회의 정치, 경제, 교육, 그리고 국제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이 가진 역기능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올림픽은 국가나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식민지의 열등함을 드러내는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올림픽은 인간의 탁월한 능력을 자랑하고 이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 홍보하는 대표적인 수단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올림픽은 선수들의 ‘능력’과 ‘업적’을 열광적으로 칭송함으로써, 봉건사회 이후 ‘능력주의’가 사회제도의 시스템과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도록 견인하였습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선수들의 노력, 승패를 가르는 극적인 긴장과 스릴, 그리고 승자가 받게 되는 국가적 환대와 이후의 금전적 보상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능력 지상주의를 수용하게 됩니다. 4년 동안 모든 선수들이 피땀 흘려 올림픽을 준비하지만, 시합을 통해 승자와 패자가 나뉘기 마련이고, 승자는 영광과 보상을 누리지만, 패자는 씁쓸하게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능력과 효율의 가치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피 땀 흘려 수고하고 노력하는 자들이 인정받고, 대우 받는 것은 마땅합니다. 하지만 타고난 천부적 재능과 능력을 가진 자들만이 사회를 이끌어야 하고, 각 개인의 능력과 성취를 따라 부와 지위를 나눠야 한다는 능력주의는 문제가 됩니다. 이와 같은 능력중심의 평가는 대학입시, 채용 경쟁, 그리고 스포츠의 경기 등에서 널리 적용되는 사회의 보편적 원리이자 시스템입니다. 한국 또한 “자본주의-능력주의의 체제의 최첨단에 선 사회”입니다. 하나의 보상체계로서 능력주의는 능력이 우월할수록 더 많은 몫을 가지고, 능력이 열등할수록 더 적은 몫을 가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듭니다. 결국, 능력주의 가치 체계는 승리와 패배를 자연스럽게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사회의 불평등과 양분화를 고착시키는 불합리한 결과를 양산하였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무능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은 주변인으로 전락하게 되거나 도태되고 맙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너나없이 몸과 마음이 병들기 마련입니다. 

 

포도원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포도원 주인과 일꾼들

마태복음 20:1-16의 포도원 비유는 능력주의 사회와 대별되는 새로운 공동체, 즉 하나님 나라를 소개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같으니”로 시작하는 이 비유는 크게 두 단락, (1)포도원 품꾼의 고용(1-7절), (2) 포도원 주인의 임금 지불(8-16)로 나뉩니다. 

비유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포도원을 경영하는 한 주인이 이른 아침 일찍 장터로 나가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합니다. 주후 1세기 이스라엘 사회에서 노동자는 하루 12시간 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이른 아침은 일출과 함께 일의 시작을 알리는 제 1시(아침 6시)를 의미합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임금을 약속하였는데, 이 금액은 그 사회에서 노동자가 하루 일당으로 받았던 법적 금액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원화로는 대략 10만원정도 되겠습니다. 그런 후, 주인은 제3시(오전 9시), 6시(정오), 9시(오후 3시), 11시(오후 5시)에 동일하게 장터에 나가 일꾼들을 포도원에 고용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건장하고 힘이 센 자들은 이른 아침에 고용주들의 눈에 띄어 포도원이나 일터로 일찍 고용되었습니다. 반면, 힘 없고 병약해 보이는 일꾼들은 오래 기다리거나 하루 종일 기다려야 했습니다. 때로는 어떤 일꾼들은 하루 종일 기다려도 고용되지 못한 채 무일푼으로 집에 돌아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주인이 다가가서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라고 질문하며 그들을 고용하였던 것입니다(6절). 실상 그들은 장터에서 빈둥거리며 놀고 있던 것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자신들을 고용해 줄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은 그 일꾼들에게 “상당한 임금(ᾖ δίκαιον δώσω)”을 약속하였습니다(4절). 여기에서 “상당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디카이오스(δίκαιον)는 ‘정의롭다’ 또는 ‘공정하다’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그들에게 ‘공정한 품삯’을 약속하며 고용하였던 것입니다. 

해가 저물고 포도원의 일이 마무리되자,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를 통해 나중에 온 일꾼들부터 이른 아침에 온 일꾼들에게 품삯을 나눠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상치 못한 반전이 두 번 일어납니다. 첫 번째 반전은 가장 늦은 시간, 즉 제 11시(오후 5시)에 온 일꾼들이 단 한 시간 일하였는데, 하루 노동의 품삯인 한 데나리온(대략 10만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제 9시(오후 3시), 6시(정오), 3시(오전 9시)에 온 자들도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무척 기뻐하며 집으로 갔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면, 아마도 이른 아침 제1시(새벽 6시)나 제3시(오전 9시)에 온 일꾼들은 더 많은 임금을 받을 것을 기대할 만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번째 반전이 일어납니다. 놀랍게도 이른 아침 제 1시에 포도원에 와서 하루 종일 햇볕을 견딘 일꾼들도 동일한 한 데나리온의 임금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4절에서 포도원 주인이 말한 “공정한 품삯”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하루 종일 일한 일꾼 중 한 사람이 주인을 향하여 따져 물었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취급하였습니다(12절). 우리는 억울합니다.” 그때 주인은 아침 일찍 포도원에 온 일꾼을 향해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내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고 질책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였기 때문에 법적으로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분명, 포도원 주인의 행동은 뭔가 좀 이상하고 융통성이 없어 보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포도원의 주인이었다면, 그 일꾼들에게 품삯을 어떻게 나눠 주었겠습니까? 아마 제1시에 포도원에 온 일꾼들을 먼저 불러 한 데나리온을 준 후에 돌려보냈을 것입니다. 그 다음 일찍 온 일꾼들을 차례대로 불러 그들에게 정해진 임금을 주며 돌려 보내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였다면, 포도원 주인은 분명 존경받는 사람으로 모든 이들에게 칭송받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포도원 주인은 일한 만큼의 금액을 그들에게 임금으로 주어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말하는 공평과 정의이지 않나요? 그러나 포도원 주인의 행동은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갑니다. 왜 포도원 주인은 일한 만큼 일꾼들에게 임금을 주지 않았을까요? 왜 시간과 상관없이 그들에게 동일하게 임금을 주었을까요? 과연, 포도원 주인이 생각한 공정은 무엇입니까?

 

포도원 주인의 근원적 공정과 배려

우리는 마태복음 20:1-16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몇 가지 사항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이 본문은 ‘비유’라는 점입니다. 비유는 일반적으로 중요한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그 내용을 과도하게 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본문도 하나의 교훈적인 비유로서 과장을 통해 당시 사회의 통념을 깨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당시 사회의 포도원 주인은 장터로 나가 일꾼들을 직접 고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한 포도원 주인은 직접 장터에 나가 일꾼들을 고용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포도원 주인은 부를 축척하기 위해 권력과 결탁한 후, 일꾼들의 임금을 체불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은 일꾼들을 향해 친절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과도한 임금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비유에서 가장 큰 손해를 본 사람은 다름 아닌 포도원 주인입니다. 그는 마땅히 소유해야 할 자신의 이익과 금액을 늦게 온 일꾼들을 위해 기꺼이 포기하고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포도원 주인은 세상의 공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공정과 배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분명 이 세상의 공의를 따라 일한만큼 차등적으로 임금을 지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한 시간과 상관없이 일꾼들에게 동등한 임금을 지불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요? 그가 가진 가치 판단의 기준은 자신의 부와 경제적 번영이 아니라, 힘없고 병든 자들이 그 사회에 함께 공존하며,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포도원을 중심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도록 하는 구조안에서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근원적인 공정(ἐπἰἐἰκἐἰά)’을 구현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포도원 주인이 고려한 공정함은 유능한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주변부에 있던 연약한 자들과 병약한 자들을 위한 공정함과 배려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통해 이 땅에 성취하고자 한 근원적 공의와 배려에 근간을 둔 새로운 공동체, 즉 하나님 나라를 보여 줍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비유는 1절에서 “하나님 나라는…마치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시작한 것입니다.  

  

 

올림픽을 넘어 하나님 나라로….! 

올림픽은 인간의 탁월함과 능력을 추구하는 이 세상 나라의 ‘총화(whole)’입니다. 올림픽을 통해 보듯이, 성실하게 노력한 자들이 유능함을 선보이고, 좋은 결과와 함께 칭송받는 것은 마땅합니다. 하지만, 만일 경기에서 이긴 선수들만 성공과 번영을 누리고, 패배자들은 그 어떤 돌봄과 회복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 올림픽의 근본정신을 망각한 것입니다. 인생의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올림픽뿐 아니라, 이 사회도 능력지상주의를 추구하고,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 만연한 능력주의를 뛰어넘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야 하겠습니다. 포도원 비유는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배려를 잘 보여줍니다. 구체적으로, 먼저, 교회는  ‘공존’의 틀속에서 능력있는 자들 뿐 아니라, 힘없고 연약한 자들도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 비유의 포도원 주인은 무려 다섯 차례나 직접 장터로 나가서, 일이 없어 생계를 걱정하는 유약한 일꾼들을 고용하였습니다. 그는 늦게 온 자들, 즉 힘없고 무능한 자들을 위해 자신이 챙겨야 할 당연한 몫을 양보하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약자와 무능한 자들을 향해 긍휼과 자비의 시선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는 이 땅의 주변인들을 향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진 긍휼의 마음과 자비를 대변해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사회가 고아, 과부, 그리고 나그네를 특별히 환대하고, 돌봄으로써, 그들과 공존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신 10:18-19; 사 1:17).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무능한 자들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됩니다. 하늘 아버지를 섬기는 교회는 포도원 주인의 공의와 희생을 실천함으로써, 연약한 자들과 힘없는 자들도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그분의 가족으로 받아들인 자들을 환대하며 포용해야 합니다.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는 열 두 지파로 나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 조상 아브라함의 후예로서, 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한 가족 의식을 깊이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일가친척을 돕는 “고엘제도”는 그런 의식을 잘 보여줍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런 한 가족 의식을 유념하여, 늦게 온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반면, 아침 일찍 포도원에 온 일꾼들은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주인과 자비를 받은 연약한 자들을 혐오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큰 아들이나 하루 종일 일한 일꾼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종종 인종, 경제, 능력과 성과에 따라 하나님이 받으신 자들을 차별하거나 배척합니다. 이는 그들의 교만과 완악함을 보여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허무는 악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는 포도원 주인의 시선을 가질 수도 있고, 아니면 일찍 온 일꾼들의 시선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교회, 그리고 참된 성도는 하나님께서 받으신 연약한 자와 병약한 자를 긍휼과 자비의 시선으로 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때, 교회는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구현하는 새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끝으로, 적용의 측면에서, 눈을 들어 우리 공동체의 주변으로 밀려나 있는 분들을 돌아봅시다. 가족, 직장, 학교, 그리고 교회에서 주변부로 밀려 소외와 어둠가운데 있는 분들은 없나요? 혹시 우리 교회는 유능하고 세련된 성도만 대접받는 그런 능력주의 공동체는 아닌가요? 긍휼의 시선으로 연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포용하고 돕는 그런 성도가 됩시다. 하나님 아버지가 보이신 사랑의 마음으로 이 땅의 슬픔과 어둠을 품을 때,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하는 그런 교회 공동체를 구현하도록 합시다.

 


참고자료

김학철, “정의롭고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정의와 호혜의 관점에서 마태복음 20장 1-16절 읽기,” 「신약논단」 23 (2016):895-931.
그랜트 R. 오스본, 『강해로 푸는 마태복음』, 김석근 역 (서울: 도서출판 디모데, 2015).
박권일, 『한국의 능력주의:한국인이 기꺼이 참거나 죽어도 못 참는 것에 대하여』, (서울:이데아,2022).
이시철, “메리토크라시의 주요 쟁점 분석: 공공 영역을 중심으로,” 「한국행정논집」 33 (2021): 711-734. 
이지성, “능력주의” 사회에 대한 기독교 사회윤리적 제언, 『능력주의의 함정: 기독교윤리의 관점에서 본 능력주의』 (서울:새물결플러스, 2023): 55-85.
윤여탁, “근대올림픽의 기독교적 요소를 통한 현대스포츠교육의 방향,” 「한국여성체육학회지」 9 (1995):107-114..
조용훈, “능력주의 사회에서 한국교회의 사회윤리적 과제에 대한 연구,” 『능력주의의 함정: 기독교윤리의 관점에서 본 능력주의』 (서울:새물결플러스, 2023):19-49.
Sun Byung Kee, 『Olympic and Politics』 (Seoul: Hyung-Sul Publishing Co, 1984).                             

최윤갑 교수는 고신대 신학과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부산 사직동 교회에서 협동목사로 영어 예배부를 담당하고 있으며, 한기윤의 연구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