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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공공성의 위기

  최근 한국 교계에 ‘교회의 공공성’, ‘복음의 공적 능력’과 같은 용어들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 주제와 관련된 도서와 연구 논문들이 다수 출판되고 있다. 특별히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한국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게 되면서 그 원인이 무엇인지 자문하게 되었고, 그 많은 원인들 중에 기독교가 사(私)적 종교로 퇴보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동안 한국 교회가 부흥과 성장의 시기를 지나면서 성도들의 신앙 생활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 이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 주로 교회 안에서의 활동, 즉 예배, 기도, 헌금, 봉사 등에 집중되었다. 

성도가 교회 안에서 말씀과 예배로 양육되어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기본기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의 신앙 생활만 강조하면 불균형으로 인한 문제가 노출된다. 의도된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런 경향은 ‘교회 안에서의 신앙 생활’을 ‘교회 밖에서의 신앙 생활’과 구분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교회 안에서의 삶은 신앙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만, 교회 밖에서의 삶은 차츰 신앙 생활과 별개의 것으로 여기게 된다. 신앙 생활에 대한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기독교인들의 삶의 태도에도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성도들은 좋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교회 안에서의 삶, 즉 주일의 삶에서는 매우 헌신된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예배 후 교회 문을 나설 때, ‘신앙의 옷’을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두는 것 같다.

  이런 이유로 일반 시민들 가운데 기독교인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2020년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실시한 종교인에 대한 대국민 인식조사의 결과가 이를 보여주는 듯하다.1) 이 조사에서 국민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거리를 두고 싶은’ 32%, ‘이중적인’ 30%, ‘사기꾼 같은’ 29%, ‘이기적인’ 27%, ‘배타적인’ 23%, ‘부패한’ 22%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상위 여섯 개의 답변이 모두 부정적이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를 향한 일반 국민들의 정서를 대표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무시할 수 없는 수치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기독교인들은 위의 결과를 전혀 인정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이런 조사 결과의 원인이 기독교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은 비기독교인 응답자에게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주로 “현대인들은 비과학적인 종교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거나 “초대 교회 이후로 기독교가 핍박당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는 말로 항변한다.

하지만 같은 조사에서 국민들은 기독교를 제외한 불교와 천주교와 같은 종교에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다는 것을 볼 때, 이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는 힘들어 보인다.  불교에 대하여는 ‘온화한’ 40%, ‘절제하는’ 32%, ‘따뜻한’ 27%, ‘윤리적인’ 23%, ‘착한’ 13%, ‘신중한’ 13%, ‘고지식한’ 12% 이미지를 가진다고 답했다. 천주교에 대하여는 ‘온화한’ 34%, ‘따뜻한’ 29%, ‘윤리적인’ 23%, ‘깨끗한’ 19%, ‘가족적인’ 18%, ‘착한’ 18% 이미지라고 답했다. 만약 응답자들이 비과학적인 종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다른 종교에 대하여도 부정적인 답변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결과에서 보여주듯 다른 두 종교는 거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또한, 기독교의 역사가 핍박의 역사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과연 교회사 속에서 볼 수 있는 초대교회가 받았던 핍박의 이유와 근래에 들어 한국 교회가 받는 핍박의 이유가 같은지 살펴봐야 한다. 위 설문 조사의 답변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가 지탄 받는 대부분의 이유는 초대교회와 달리 ‘비윤리적인’, ‘반사회적인’ 모습 때문이다. 비기독교인들보다 차원 높은 수준의 윤리를 보여줘야 할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그들보다 못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받는 비난이다. 특히, 기독교인은 ‘이중적인’ 이미지라는 답변은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에서의 삶과 교회 밖에서의 삶 사이에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보면, 최근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외면 받고 비판 받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는 일상의 모습이 실망스러운 것에 기인한다고 볼 여지가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교회 밖에서 보여주는 실망스러운 모습은 ‘교회 안에서의 삶’만 강조된 교회의 풍토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24년 9월 22일부터 28일까지 한국에서 개최되는 제4차 로잔대회는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제시한다. 로잔 운동은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시작된 이래, 복음 전도와 사회 정의라는 두 가지 원리를 선교의 핵심으로 강조해 왔다. 이는 단순히 영혼 구원에만 집중하던 기존의 선교 패러다임을 넘어, 전인적이고 총체적인 복음의 실천을 추구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개최되는 이번 대회는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라는 구호 아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이를 통해 한국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재확인하고, 동시에 우리 사회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이는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와 함께 고민하고 대화하며, 글로벌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는 짧은 기간 동안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고, 현재는 세계 선교의 주요 주체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경험은 세계 교회에 귀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

 

1974년 제1차 로잔대회

제4차 로잔 운동과 ‘총체적 복음’의 이해

  로잔 운동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총체적 복음’이다. 이는 복음이 단순히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인적 삶과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과 피조 세계 전체를 아우른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반면에 그 동안 한국 기독교에서는 교회 밖의 더 넓은 사회에 대해 등한시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흐름이 있어왔다. 주로 ‘세상’을 영적 전쟁의 대상으로 인식하기에 그들과 협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인식해왔다. 창조-타락-구속의 관점에서 세상은 ‘타락한 존재’로 여기며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상대로 바라봤다. 때때로 교회에서는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일수록 ‘성령충만한 성도’로 칭찬 받기도 했다. 신앙이 보수적일수록 ‘반문화주의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총체적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가져온 구원의 의미를 개인의 영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환경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에 주목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현재의 세상 속에서도 실현되어야 함을 강조한다.2) 즉,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내세의 구원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 기인한다. 『케이프타운 서약』 1항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모든 창조세계를 향한다”고 고백한다. 따라서 “외국인과 원수를 포함해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고 “독생자를 주시고 그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라”고 강조한다. 보다시피 세상을 적대시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아직 하나님을 모르지만, 미래에 우리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잠재적 신앙의 형제들이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결국 선교의 목표는 ‘교회의 설립’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을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자연스럽게 복음 전도와 사회 정의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게 된다. 복음 선포와 사회 정의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두 가지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는 한국 교회가 전통적으로 강조해 온 개인 구원과 전도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 균형 잡힌 접근을 가능케 한다. 이에 따라 로잔 운동은 “공적 영역에서 최고의 지적, 공적 수준으로 성경적 진리를 변론하고 방어할 수 있는 이들을 찾아내고, 구비시키고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하며, “교회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에게, 모든 신자들이 용기와 적절한 수단을 갖추어, 일상의 공적 대화에서 예언자적 적실성을 지닌 진리를 말하고 우리가 속한 문화의 모든 방면에 참여하도록 구비시킬 것을 촉구”하는 것을 강조한다.3) 이렇게 “역동적인 교회는 자신의 기본적 메시지를 변화시키지 않은 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4) 일부 기독교인은 로잔운동의 총체적 복음 운동이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를 약화 시키며, 나아가 사회 운동이 복음 전도를 대체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로잔 언약’ 제 5항에서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물론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며 또 사회 참여가 곧 전도일 수 없으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전도와 사회 정치적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임을 인정한다.”5) 로잔 운동은 시종일관 각종 문서들을 통해 ‘복음 전도의 우선성’을 표명해 왔다. 

  이러한 ‘총체적 복음’의 이해는 한국 교회에 중요한 도전을 제시한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개인의 구원과 교회 성장에 주로 집중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적 책임과 공적 참여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이다. 이는 단순히 사회봉사 활동을 늘리는 것을 넘어,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에 대해 깊이 있게 접근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포함한다. 동시에 ‘총체적 복음’은 한국 교회가 직면한 여러 도전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 젊은 세대의 이탈, 교회에 대한 사회의 비판적 시선 등의 문제는 교회가 얼마나 사회와 소통하고 공헌하는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총체적 복음’의 실천을 통해 한국 교회는 사회와의 단절을 극복하고, 더욱 의미 있는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공적 참여

  교회의 공적 참여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분명하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사회적 불의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24)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예수님께서도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라고 명하셨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마가복음 10:21)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19) 

  사도들 역시 초대 교회 공동체를 통해 사회적 책임을 실천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사도행전 2:44-45)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야고보서 1:27) 이러한 성경적 전통은 교회가 단순히 개인의 영적 생활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함을 보여준다. 독일개신교협의회의 전 의장인 하인리히 베드포드-슈트롬(Heinrich Bedford-Strohm) 교수는 “교회는 항상 공적 교회였으며 교회의 공적 발언이 교회의 가장 중심적인 사명”이라고 강조한다.6)

  한국 교회 역시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왔다. 일제 강점기와 민주화 운동 시기에 한국 교회는 사회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민족의 독립과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헌신했으며, 이는 한국 사회에서 교회의 공신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병원과 학교를 세워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도 의료 혜택을 받고 여자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종교개혁자 장 칼뱅이 종교만 개혁한 것이 아니라 제네바라는 도시의 정치, 문화를 개혁하였듯이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한국의 역사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사회 변혁에 이바지해왔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한국 교회의 공적 참여에 대한 중요한 유산이자 자산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공적 참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교회는 복음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어떻게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고 대화할 수 있을까? 이는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또한 교회가 특정 정치적 입장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사회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이는 교회의 예언자적 역할과 관련된 중요한 질문이다. 교회는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하지만, 동시에 특정 정파나 이념에 종속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질문들은 쉽게 답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반드시 고민하고 답을 찾아야 할 문제들이다. 이를 위해서는 깊이 있는 신학적 성찰과 함께 실천적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과 한국의 현대적 상황, 그리고 세계 교회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공공신학: 이중 언어를 사용한 번역

  기독교가 더 넓은 사회의 풍요로움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여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와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념을 숨기거나 포기해야 한다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도 비기독교인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와 설득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공공신학적 접근이 도움을 줄 수 있다.7)

  일부 기독교인이 사회적 책임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과는 정 반대로 또 다른 일부 기독교인들은 광장에서 적극적으로 정치적 행동과 발언을 추구하기도 한다. 이들은 한국 사회가 기독교사회(크리스텐덤)라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이들은 기독교적 언어와 논리를 광장에서 날 것 그대로 사용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기독교인의 정치적 행동이 공공신학의 모델이 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러나 공공신학은 공론장에서 종교적 언어와 논리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으며,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종하거나 혐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공신학은 직접적인 영향보다, 사람들의 정치적 선택 과정에 영향을 주는 ‘윤리적 기준’을 제공하면서 간접적으로 관여하려고 노력한다. 

  공론장에서 기독교인이 기독교적 용어와 논리를 사용하여 발언하면, 비기독교인은 그 말을 알아듣지도 못할뿐더러 설사 알아듣는다고 하더라도 설득되기 어렵다. 특히 성경은 기독교인에게는 진리의 말씀이지만 비기독교인에게는 그저 하나의 종교적 경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독교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따라서 만약 공론장에서 기독교인이 어떤 주장을 펼칠 때 “성경이 이렇게 써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면 비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대화 종결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이 공적 담론에 참여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기독교인이 공론장에서 기독교의 신념을 가지고 발언하고 설득하려고 할 때는 성경의 메시지를 비기독교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번역을 위해서는 간학문적 연구가 필요하다. 일반 학문과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 진리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그럴 때 비기독교인도 기독교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시민사회의 대표들, 다른 비기독교 그룹들과도 공공선을 위해 협력할 수 있게 된다. 

 

공공선을 위한 협력 VS 신학적 차이

  로잔 대회에 다양한 신학적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인해 로잔 대회 참여를 망설이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최근 로잔 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로잔 운동이 ‘신사도운동’이나 ‘인터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거나, 3차 로잔 대회에 로마 카톨릭, 정교회, WCC 관계자들이 1000명 정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로잔 위원회의 신학위원회가 모두 사실 무근이라고 해명했다. 보수적 개혁신학 노선을 추구하는 기독교학술원(김영한 원장) 역시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으며 대회의 성공을 위해 함께 기도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로잔 대회가 성경에 기초한 복음주의 선교운동을 지향하며, 복음 전파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복음주의 안에도 다양한 교파가 존재하고 이들이 모여서 논의하기에 신학적 차이로 인한 갈등이 노출될 수 있다. 하지만 로잔 운동은 ‘복음주의’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각자의 독특한 신학으로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즉, ‘통일성’ 안에 ‘다양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로잔 운동은 각 교파 간의 차이점에 주목하기 보다는 공통적 노력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한다. 사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위해 각 교파가 함께 협력함에 있어서 복음주의 안에 있는 각 교파 간의 신학적 차이가 그렇게 큰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많지 않다. 

  만약 약간의 신학적 차이로 인해 로잔 운동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한국 기독교가 연합하는 모든 운동에 참여하기도 어렵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된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할 수 없다. 성결교와 침례교가 협력할 수 없다. 이런 자세는 결국 교회를 더욱 분열하게 만들 뿐이다. 로잔에 참여하는 다양한 교파의 신학적 다양성 때문에 참여를 거부하거나 대회 자체를 보이콧 하기 보다는, 적극 참여하여 로잔 운동이 더욱 더 성경적 운동에 가까워지도록 기여하는 것을 택하는 것이 좋다. 신학이 조금 다르다고 하나씩 단절하다보면 시간이 지나 자신만 작은 섬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교단 간 대화와 협력이 절실하다. 신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가 공통으로 추구할 수 있는 사회 정의의 과제들을 찾아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정기적인 교단 간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공동의 실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는 한국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을 높이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한국적 맥락에서의 십자가의 복음과 사회 정의의 조화

  제4차 로잔대회는 한국 교회에게 중요한 도전과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총체적 복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한국적 맥락에서 어떻게 십자가의 복음과 사회 정의를 조화롭게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복음 전파와 교회 성장에 큰 열정을 보여왔다. 이제는 이러한 열정을 사회 정의와 공적 참여로 확장할 때이다. 이는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총체성을 더욱 풍성하게 실현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펼칠 때 주의할 점은, 항상 복음의 본질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참여가 복음 선포를 대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복음의 실천적 표현이 되어야 한다. 즉, 모든 공적 참여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이 세상에 구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일방적인 선포나 비판이 아니라, 겸손하게 경청하고 대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교회는 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하고,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과제는 쉽지 않다. 교회 내부의 갈등, 사회의 비판적 시선,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 등 많은 도전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고 보내시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을 굳건히 붙들면서도, 동시에 이 시대의 ‘광장’으로 나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와 성찰, 그리고 실천이 필요하다. 개인적 경건과 사회적 책임, 영적 성장과 공적 참여, 교회의 정체성 유지와 사회와의 소통 등 이 모든 것들 사이의 균형을 지혜롭게 유지해 나가야 한다. 제4차 로잔대회를 앞두고, 한국 교회가 이 시대의 도전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진지한 대화의 장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이를 통해 한국 교회가 더욱 성숙하고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더욱 풍성히 구현해 나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각주

  1.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 ‘종교(인) 및 종교인 과세 관련 인식 조사’ 2020.07.17.
  2. 로잔 운동, 최형근 역, 『케이프타운 서약』 (서울: IVP, 2014), 22-23.
  3. 로잔 운동, 『케이프타운 서약』, 70.
  4. Lausanne Occasional Paper, 8, “Christian Witness,” 15.
  5. 로잔 운동, 『케이프타운 서약』, 219-220.
  6. Heinrich Bedford-Strohm, “Klar und versändich,” in Position beziehen: Perspektiven einer Öffentlichen Theologie (München: Claudius Verlag, 2012), 47.
  7. 공공신학의 특징에 관하여 다음 논문을 참고하라. 김민석, “하인리히 베드포드-슈트롬이 제시한 공공신학의 특징”, 「한국조직신학논총」 제63집(2021): 37-75.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의 연구위원인 김민석 교수는 백석대학교(조교수)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 공공신학연구소의 소장이며 스텔렌보쉬대학교 신학부의 선임연구원으로 섬기면서 공공신학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 한국적 공공신학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인 “Public Theology in Korea?”가 저명한 공공신학 시리즈인 Theology in the Public Square (Lit Verlag) 의 13번째 볼륨으로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