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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기후환경 문제와 인류세

기후환경 문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당장 지난여름에 우리가 체험한 역대급 폭염을 생각해 보자. 올해 여름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1994년과 2018년의 기록을 깨고, 가장 더운 여름철 전국 평균기온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우리나라 평년 여름 평균기온인 23.7도보다 무려 1.9도가 높은 25.6도로 역대 최고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낮에 뜨겁게 데워진 기온은 밤에도 쉽사리 떨어지지 않아서, 열대야 일수도 무려 20.2일로 평년 6.5일 대비 약 3.1배에 달하는 역대 1위 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다. 이번 9월의 기온이야말로, 대한민국 기상관측 120년 역사상 비교할 해가 없는 극단적 이상기후가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역대 최고의 9월 평균 기온, 최초의 9월 폭염일수, 역대 가장 늦은 폭염일(9월 18일), 역대 가장 늦은 열대야(9월 20일) 등 9월 기온에 대한 거의 모든 기록을 새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이번 추석은 역사상 가장 더운 추석이자, 최초로 열대야를 겪은 추석이 되었으며, 이제 더 이상 추석(秋夕)이 아니라 하석(夏夕)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기상청에서는 일 년을 석 달씩 끊어서 계절을 나누던 우리나라의 사계절 구분을 변경하고, 5월부터 9월까지 다섯 달을 여름으로 간주하는 계절 길이 조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고 한다.

사실, 기후변화와 환경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전지구적인 관심과 협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1988년 유엔 산하의 전문 기관인 세계기상기구(WMO)와 유엔환경계획(UNEP)에서는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라는 정부 간 협의체를 설립했다. 기후 변화의 위험을 평가하고, 이에 대한 국제적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IPCC에서는 평가보고서를 발표하는데, 가장 최근에 발표된 제 6차 평가보고서의 핵심적인 내용은 지구 평균기온 상승의 원인이 인간의 영향일 가능성이 명백하다는 것이다.[1]

같은 맥락에서, 현재 인류가 살고 있는 지질시대를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류세란 미국의 생태학자 유진 F. 스토머가 1980년대에 처음 사용했고,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네덜란드의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이 2000년대 초에 대중화 시킨 개념으로, 온실 가스 농도의 급증과 질소 비료 사용으로 인한 토양 변화 등 인간 활동으로 인해 지구의 기후와 환경이 큰 변화를 겪게 된 새로운 지질 시대를 지칭한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피부로 직접 체험하고 있는 지구 온난화와 급격한 기후 변화의 원인이 인간의 영향으로 밝혀진 만큼, 이 시급한 문제에 대한 교회의 적극적인 대처도 필요한 상황이다.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와 인간유일주의(anthropomonism)

사실, 인류가 직면한 환경 문제의 근원적인 원인이 인간에게 있다는 주장은 예전부터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자연을 인간의 도구로서 착취의 대상으로 삼게 된 배경을 기독교적 세계관의 영향으로 돌리는 주장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목소리는 이제 생태신학 분야의 고전적인 아티클이 된 린 화이트(Lynn White)의 “생태위기의 역사적 근원”(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 Crisis)이다. 화이트는 서구의 기독교가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인간중심적(anthropocentric)인 종교라고 지적하면서, 그 중심에는 우리가 소위 문화명령으로 부르고 있는 창세기 1:26-28절을 기원으로 하는 인간중심적 기독교적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생태신학적인 연구를 하는 많은 학자들은 화이트의 이 같은 지적에 공감하면서, 기독교의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와 신학이 기후 환경 문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음을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루카스 비셔(Lukas Vischer)가 잘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유일주의”(anthropomonism)와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사이에는 섬세한 구분이 필요하다. 비셔에 의하면, “인간유일주의”는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에는 오직 인간만 연관되어 있다고 간주하며, 인간의 관심만이 배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만물들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고 보는 주장이다. 반면에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중심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과 인간이 피조세계와의 관계에 있어 특별한 역할을 성취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나머지 피조세계에 대해서도 마치 그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처럼 여기거나,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계획이 전혀 없는 것처럼 폄하하지는 않는 주장이다. [2]

 

“인간유일주의”(anthropomonism)와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사이에는 섬세한 구분이 필요하다….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중심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과 인간이 피조세계와의 관계에 있어 특별한 역할을 성취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나머지 피조세계에 대해서도 마치 그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처럼 여기거나,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계획이 전혀 없는 것처럼 폄하하지는 않는 주장이다.

 

데이비드 클러프(David Clough)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인간중심주의를 “수단적(instrumental) 인간중심주의”와 “목적론적(teleological) 인간중심주의”로 구분한다. 그는 성경(ex. 롬 8:19-23)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속 역사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간이 그 중심에 있는 “수단적 인간중심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나, 이것이 결코 인간이 창조세계에 비해서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가치우위를 점하는 “목적론적 인간중심주의”를 뜻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구속과 부활을 통한 인간의 구원을 주제로 하는 성경이 어느 정도의 “인간중심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다만, 지나친 인간중심주의적인 사고로 인해서, 자연환경을 절대적으로 도구화시켜 버리는 “인간유일주의”는 신자로서 우리가 지양해야 할 잘못된 태도이다. 필자는 우리 기독교가 지나친 인간중심주의적 태도로부터 벗어나서, 기후 환경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새 창조 신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바울의 새 창조 신학에 대해서 알아보고, 이를 어떻게 기후환경 문제에 적용해 볼 수 있는지 논의해 보고자 한다. 

 

바울의 새 창조 신학과 생태신학적 적용

1. 바울 서신에 나타난 새 창조의 우주적 의미

리처드 헤이스(Richard Hays)는 신약성경 연구를 통해서, 현대의 윤리적 이슈를 다루는 그의 저서 『신약성경의 윤리적 비전』(The Moral Vision of the New Testament)에서 바울서신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내러티브를 표현하는 중심적인 이미지들로 (1) 공동체와 (2) 십자가와 (3) 새 창조를 꼽은 바 있다.[4] 헤이스에 의하면, 이 세 가지 중심적인 이미지들은 신약성경을 해석하고, 더 나아가 현대의 윤리적인 이슈들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 일종의 해석학적 렌즈로 사용될 수 있다. 이 중에서 새 창조라는 주제는 신약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종말론적 긴장을 잘 표현해 주는 이미지로, 헤이스는 이 이미지가 나타나는 대표적인 본문으로 롬 8:22-23을 선택하였다.[5] 사실, 새 창조라는 주제는 신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일 뿐만 아니라, 신구약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성경의 마지막 권인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계 21:1)로 끝나는 책으로서, 신구약 66권 각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라는 종말론적 완성을 궁극적인 주제로 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 창조라는 주제는 신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일 뿐만 아니라, 신구약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신약 성서에서 문자 그대로의 “새 창조”(καινὴ κτίσις: 카이네 크티시스)라는 어구가 나오는 곳은 바울서신인 갈라디아서 6장 15절과 고린도후서 5장 17절 두 군데이다. 이 두 구절을 중심으로 해서 바울서신에서 새 창조가 가리키는 바가 우주적인 것인지 아니면 인간론적인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 모이어 허바드(Moyer Hubbard)는 울리히 멜(Ulrich Mell)의 우주론적인 새 창조 이해를[6] 비판하면서, 바울의 새 창조 주제를 개별적인 신자들의 성령을 통한 회심과 연관시켜서, 새 창조 주제의 인간론적인 차원을 강조했다.[7] 그러나 라이언 잭슨(Ryan Jackson)은 우주론적 해석과 인간론적 해석이라는 잘못된 이분법을 극복하기 위하여, 바울의 새 창조 개념은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우주가 모두 연관된, 종말론적으로 녹여진 구원론의 표현이라고 보다 설득력 있게 제안했다. [8]데이비드 호렐(David G. Horrell) 역시 잭슨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바울의 새 창조 개념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피조물들이 함께 엮어졌으며, 모든 피조세계가 이 완전한 우주적인 변혁에 포함된다”라고 주장한다.”[9] 아래에서 보게 되듯이, 실제로 갈 6:15와 고후 5:17을 살펴보면, “새 창조”라는 어구에는 인간론적인 의미를 포괄하는, 우주론적인 의미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갈라디아서 6:15의 “새 창조”

갈라디아서 6장 14절부터 6장 16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 창조(καινὴ κτίσις)를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윗 구절에서 새 창조개념은 인간론과 우주론, 그리고 교회론이 복잡하게 엮어져 있다. 즉, 여기서 “할례나 무할례”는 유대인과 이방인사이의 구별을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인간론과 연관되어 있고, 14절b에 나타난 “나와 세상(코스모스: κόσμος)의 관계”는 우주론과 연관이 되며, 16절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이라는 표현은 교회론(혹은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0]

이 모든 차원들이 다 중요하지만, 이 중 이 구절에서 가장 중심적인 개념을 뽑는다면, 우주론적인 이해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15절의 새 창조를 받는 것의 의미는 14절 b의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과 같은 의미로 대응이 되는데, 14절 b의 의미는 인간론을 포괄하는 우주론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은, 이 우주론적인 해석의 전제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론적인 해석과 기독론적인 전제는 따로 떼어서 생각될 수가 없다.

코스모스는 바울이 다른 곳(고전 1:20; 3:18-19)에서 “세대”라는 의미의 아이온(αἰών)이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14절의 코스모스도 아이온으로 병치시켜서 이를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옛 세대와 세 세대의 우주론적 구분과 연관시켜보면(갈 1:4), 15절의 새 창조에 우주론적인 의미를 더해 주게 된다. 또한, 14절에 나타난 강한 기독론적인 의미를 생각해 볼 때, 15절의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세대의 도래를 함의하게 된다. 이 새 창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과거의 민족적인 차이와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이스라엘”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 새 창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과거의 민족적인 차이와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이스라엘”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3. 고린도후서 5:17의 “새 창조”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나타난 새 창조의 어구는 이사야서에 나타난 새 창조 주제와 연관된 구절의 인유(引喩, allusion)[11]와 함께 쓰이고 있으므로, 이 구절이 가지는 중요성은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 못지않다고 볼 수 있다. 고린도후서 5:14-17은 다음과 같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창조라 이전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들이 되었도다(ὥστε εἴ τις ἐν Χριστῷ, καινὴ κτίσις· τὰ ἀρχαῖαπαρῆλθεν, ἰδοὺ γέγονεν καινά)

17절에서 바울은 14-15절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긍정적 결과를 묘사한다. 17절의 조건절에 있는 인칭대명사 티스(τις:누구든지)와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은 카이네 크티시스(새 창조)의 인간론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그리스어 원문에서 귀결절은 주어와 동사가 없이 카이네 크티시스라는 어구만 있다. 따라서 17절 a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창조!” 따라서 이 구절의 생략된 주어를 앞 구절의 인칭대명사 티스로 보면, 한글 번역 성경처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다”가 되고, 카이네 크티시스 자체를 주어로 보고 유도부사가 생략된 것으로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창조가 있다”와 같이 번역할 수도 있다.

둘 다 가능한 해석이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 후자의 해석이 더 적절해 보인다. 첫째, 이어지는 문장에서 “이전 것들”(τὰ ἀρχαῖα)과 “새 것들”(καινά)이 둘 다 중성 복수로 나타난 것을 보면, 카이네 크티시스는 사람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피조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이 같은 해석은 바울서신 전체에서의 크티시스의 용례를 볼 때도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바울서신 거의 모든 용례에서 크티시스는 항상 피조세계 전체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로마서 1:20, 25; 8:19, 20, 21, 22). 셋째, “이전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들이 되었다”라는 표현은 이사야서 40–66장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전 일”과 “새 일”의 대조를 연상시키며, 바울은 여기서 이사야서의 표현을 암시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사야서의 새 창조 주제는 우주론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고(사 65–66의 “새 하늘과 새 땅” 모티프), 이 전통을 따르고 있는 다른 제 2 성전기 유대 문헌에서도 새 창조 모티프는 피조세계 전체를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예, 희년서 1:29; 4:26;에녹 1서 10:18-19; 11:1 91:16). 이에 더하여, 고후 5:17의 새 창조 모티프의 우주론적인 의미는 이어지는 18-20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사역을 “화목하게 하는 직분”으로 명명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사역을 통하여 신자들뿐만 아니라 세상(κόσμος, 19절)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다. 뿐만 아니라 18절의 “모든 것”(τὰ πάντα)은 모든 창조세계를 가리킬 수 있으므로(cf. 빌 3:21; 골 1:16-17), 이 구절의 화목의 주제는 우주적인 화목을 나타낸다(cf. 롬 11:15).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주적 화목이라는 주제는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τὰ πάντα)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하나님]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15-20의 주제와 용어 사용은 창조와 화목이라는 관점에서 고후 5:14-20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새 창조 모티프도 갈라디아서 6장 15절과 동일하게 인간론적인 의미를 포괄하는 우주론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4. 바울의 새 창조 신학이 가진 생태신학적 함의       

바울의  새 창조 신학이 가지는 우주론적인 의미는 생태신학적으로도 큰 함의를 가진다.

첫째, 바울의 새 창조 신학은 여전히 인간의 구원에 대한 관심이 그 중심에 있으나, 인간의 구원뿐만 아니라, 전 우주의 종말론적인 회복을 포괄하는 피조세계 전체의 총괄적인 변혁을 의미한다. 앞서 소개한 개념을 사용하자면, 바울의 새 창조 신학은, 여전히 인간중심적이긴 하지만, 인간유일주의는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 세계로 초대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의 대상이 되는 다른 피조물에 대해서도 이들을 지속가능한 상태로 보존시켜야 할 윤리적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의 주인공인 인간과 종말론적이고, 우주론적인 새 창조의 동반자가 되는 피조 세계의 관계는 롬 8:19-21에 잘 표현되어 있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장차 있게 될 종말의 새 창조 세계에는 동식물을 포함하는 피조물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우주적 드라마의 주인공인 인간은, 전지구적 생태환경의 위기에 빠진 피조물을 적극적으로 돌보아야 할 윤리적 책임이 있다.   

둘째, 바울의 새 창조 모티프에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종말론적인 긴장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이미 새 창조를 맛 본 신자들이 미래에 도래하게 될 새 창조를 준비하기 위해 지금부터 새 창조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윤리적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고후 5:17에서 바울이 말하듯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미 새 창조가 임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 속에 이미 새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의미는, 새 창조가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전 창조 세계와 날카로운 불연속성을 가진다기보다는, 현 세계의 변혁(transformation)과 갱신(renewal)을 함의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 창조를 경험하고 있는 신자들은, 종말에 맞이하게 될 만유의 회복과 궁극적인 새 창조를 소망하는 동시에, 우리 속에서 이미 시작된 새 창조를 우리의 이웃인 피조세계 전체에 지금부터 적용시켜가야 할 환경 윤리적 책임도 가져야 한다. 

셋째, 우리는 앞서 고후 5:14-20의 주해에서 확인했던, 바울의 새 창조 신학 속에 녹아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물의 “화목”이라는 주제에 보다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인간은 자연을 인간의 도구로만 인식하고, 자연 환경을 지나치게 개발하고, 착취해서,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심각한 기후 환경문제의 주범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심각한 여러 갈등(민족, 인종, 젠더, 세대 등)을 해결하는 데 힘쓸 뿐만 아니라, 인간과 피조 세계 사이에 있었던 이런 착취 관계를 해결하고,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샬롬을 누리도록 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도래한 새 창조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만유를 회복시키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야 하며(고후 5:15), 하나님과 만물을 화해시키는 “화목의 직분”(고후 5:18)을 받은 자로서, 우리가 직면한 기후 환경 위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힘써야 할 것이다. 

 

 

저항의 읽기에서 회복의 읽기로…

이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가 된 기후 환경문제와 연관된 인간의 책임과,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바울의 새 창조 신학이 가지는 생태신학적 함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바울 본문에 나타나 있는 새 창조 신학은 “인간유일주의”와는 분명히 구별되며, 인간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새 창조 사역의 주인공으로서, 피조세계를 잘 다스리고 보존할 책임이 있는 주체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새 창조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은, 인류가 현재 직면한 이 심각한 기후 환경문제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탄식과 신음 속에 있는 피조세계를 지속가능한 상태로 회복시키고,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이 중차대한 시대적 사명에는 그리스도인 개인 차원에서의 대처뿐만 아니라, 교회 차원에서의 대처도 필요해 보인다. [12]

지금껏 생태신학과 연관된 연구를 수행해 온 성서학자들은 인간중심적인 성경본문들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을 시도하는 “저항의 읽기”(Readings of Resistance) 방식을 따라왔다. 이 해석학적 방식은 방법론적으로 독자반응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과 연관되어 있으며,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기 보다는, 해석자의 환경문제 및 생태학적 관심에 더 큰 우선순위를 부여한다. 이런 성경 해석 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중시하는 복음주의자들에게는 반발을 사온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성경 본문 자체—특히, 그동안 오해되어 왔거나, 숨겨져 있어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던—에서 생태신학적 메세지를 회복하여, 이를 환경윤리에 적용시키는 “회복의 읽기”(Readings of Recovery) 방식을 따르는 접근 방식도 필요해 보인다.[13] 이와 같은 접근방법은 본 글에서 살펴 본 바울의 새 창조 주제뿐만 아니라, 바울신학의 다른 중요한 주제를 통해서도 추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존 바클레이는(John Barclay)는『바울과 은혜의 능력』(Paul and the Power of Grace) 에서 바울의 은혜(선물)신학이 인간과 자연 환경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적용가능함을 보인 바 있다.[14] 앞으로 “회복의 읽기” 방식의 생태신학에 대한 접근법이 보다 활발히 이루어져서, “저항의 읽기” 방식의 접근법과 균형을 이루게 되길 기대한다.

**본 에세이는 고려신학대학원 양낙흥 교수 은퇴 기념 논문집에 수록된 필자의 다음 논문을 일부 참고하여 작성되었다.**[15]


각주

  1.  IPCC 제 6차 평가보고서의 요약본과 3949페이지에 달하는전체 보고서의 전문은 IPCC 홈페이지인 다음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ipcc.ch/report/ar6/wg1/ 
  2. Lukas Vischer, Listening to Creation Groaning:Reports and Papers from a Consultation on Creation Theology Organised by theEuropean Christian Environmental Network at the John Knox InternationalReformed Center [in Le Grand-Saconnex] from March 28 to April 1st, 2004(Geneva: Centre international réformé John Knox, 2004) 21–22.
  3.  David Clough, On Animals: Volume One SystematicTheology (London: T&T Clark, 2012) xix.  
  4.  리처드 B. 헤이스,『신약성경의 윤리적 비전』, 유승원역 (서울: IVP, 2002) 48-73; 307-16.
  5.  헤이스, 『신약성경의 윤리적 비전』, 313.
  6.  Ulrich Mell, Neue Schöpfung: EineTraditionsgeschichtliche Und Exegetische Studie Zu Einem SoteriologischenGrundsatz Paulinischer Theologie (Berlin ; New York: de Gruyter, 1989).
  7.  Moyer V. Hubbard, New Creation in Paul’s Letters and Thought, SNTSMS 119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8.  T. Ryan Jackson, New Creation in Paul’s Letters: A Study of the Historical and Social Setting of a Pauline Concept, WUNT 2.Reihe 272 (Tübingen: Mohr Siebeck, 2010) 2-3. 
  9.  David G. Horrell, “A New Perspective on Paul? Rereading Paul in a Time of Ecological Crisis,” JSNT 33, no. 1 (September 21, 2010): 19.
  10.  갈라디아서의 4장3-4절(“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에서도 코스모스(κόσμος)가 등장하는데, 이 때에도 코스모스는 갈라디아서의 이전 세대와 새 세대라는 우주론적인 두 세대의 구분과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때, 한글 성경에서 “초등학문”이라는 애매한 용어로 번역된 그리스어 스토이케이온(στοιχεῖον)은 대다수의 학자들이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요소(즉, 그리스-로마적 세계관에 의하면 흙, 공기, 불, 물 등)로 해석하여 코스모스의 우주적인 해석의 신빙성을 높이고 있다.
  11.  인물이나 사건 혹은 다른 문학 작품이나 그 구절을 직간접으로 가리키는 것을 뜻한다. 수사법적으로 변화법에 속하며, 인용법(引用法)이라고도 한다.
  12.  현재 인류가 직면한 기후 환경문제에 대한 교회 차원의 대처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는 분은 짐 안탈(Jim Antal) 목사의 『기후교회』(고양: 생태문명연구소, 2019)를 참고하라.
  13. “회복의 읽기”와 “저항의 읽기”라는 해석학적 두 모델을 제안한 사람은 영국 더럼대학교의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인 프란시스 왓슨이다. Francis Watson, “Strategiesof Recovery and Resistance: Hermeneutical Reflections on Genesis 1–3 and ItsPauline Reception,” JSNT 45 (1992):79-103. 데이비드 호렐이 공저한 Greening Paul의 저자들은 왓슨이 제안한 이 두 가지 모델을 차용하여, 성경을 바탕으로 생태신학과 연관된 주장을 하는 접근방법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David G. Horrell, Cherryl Hunt, and Christopher Southgate, Greening Paul: Rereading the Apostle in a Time of EcologicalCrisis (Waco, Tex.: Baylor University Press, 2010) 14–25. Greening Paul은 2023년에 『생태위기 상황에서 다시 읽는 바울서신』이라는 제목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출반부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14.  존 M. G. 바클레이,『바울과 은혜의 능력』, 김형태 역(서울: 감은사, 2021) 302-4. 바클레이는 모든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인간은 자연을 착취할 권리가 없으며, 오히려 이것을 책임감있게 사용할 의무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또한, 바클레이는 우리가 자연을 “자원”으로 여겨서, 그것의 경제적인 효용성에만 관심을 가지고 착취할 것이 아니라, 이 선물의 수여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로 자연을“감사로 받으며, 보살피며, 보존하며, 공유하는 선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5. 김형태, “피조물의 탄식과 기다림: 롬 8:19-23의 신학적 주해를 통한 바울 생태신학의 가능성 모색” 『산 위에 동네가 숨기지 못하리라』 개혁신학과 교회 제35b호 (천안: 고려신학대학원, 2021): 251-78.

한기윤의 연구위원인 김형태 박사는 부산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병역특례 기간을 합쳐 10년간 기업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뒤늦게 고려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목회와 신학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후, 고려신학대학원 해외유학 장학생(옥토장학재단)으로 선정되어, 미국 에모리대학교와 영국 세인트 앤드류스대학교에서 루크 티모시 존슨, 톰 라이트 등의 학자들로부터 신약학을 배웠고, 최종적으로는 영국 더럼대학교에서 존 바클레이 교수의 지도하에 바울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김포 고촌의 주님의보배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목사-신학자(Pastor Theologian)의 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