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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위대한 왕 그리스도

(출애굽기 20장 1-17)

 

총선이 가까이 오고 있고, 그리스도인 역시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정치적인 행동, 즉 투표를 해야 합니다. 항상 이런 계절이 오면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인 입장을 놓고 다투거나, 그러한 꼴이 보기 싫다고 말하면서 무관심을 선택하지요. 우리는 흔히 교회가 정치적이지 말아야 하고, 종교적이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교회는 이미 정치적이다.

 생각해 보면 정치는 아주 종교적이지요. 사람들은 쉽게 정치 지도자들을 메시아처럼 대우하고, 정책을 일종의 구원의 교리처럼 생각하기 쉽지요. 정치를 종교로 삼았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상대의 정책, 이념,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을 악마화하는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치인들이 명시적으로 행한 죄는 단죄되어야 하겠지만, 정책과 이념과 사람을 악마화하며 분노를 쏟아내는 것은 유한한 가치와 답인 정치를 궁극의 정답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캐나다의 신학자 알버트 월터스(Albert Marten Wolters)는 성경이 “창조의 어떤 부분을 악역 혹은 구원자로 간주하려는 모든 시도를 전적으로 거부한다.”1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에 정착한 청년들 중 상당수는 지난 교회에서 상처받고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종종 이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떠나왔던 전 교회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정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어요!” 그 목사님들은 대체로 (극)보수적 언사를 하시는 분들이었지만, 개중에는 드물게 진보적 언사를 늘어놓는 분들도 계셨지요. 어쨌든 청년들은 이렇게 많이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교회를 온 것이 아니고 정치 집단에 온 것 같았어요!” 

그러면 어떨까요? 교회는 오직 종교적인 것에 국한한 이야기를 하고,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완전히 피하는 것이 대책일까요? 사실 그건 그리 간단치는 않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이러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정치적 실천과 개입은 기독교 예배라는 ‘실천에 내재되어 있다.’ 기독교 예배는 이미, 본질적으로 정치적 행동이다. 말씀 선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을 위한 해방 서사의 예행연습, 카이사르의 복음에 맞서는 복음 선언이다. 주의 만찬은 ‘없는 것들'(고전 1:28)조차도 왕의 식탁에 앉도록 초대받는 혁명적 식사다. 매주 열리는 성도의 모임은 그들이 지닌 천상의 시민권을 시연하는 의례다.2

무슨 의미일까요? 정치는 이미 종교적입니다. 민주주의는 공론의 장이며, 여기에는 함께 모여 세운 법이 있습니다(헌법과 법률). 국가를 나타내는 여러 상징과 의례가 있고, 공교육은 그 국가에서 살아가는 시민이 추구해야 하는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가르치지요. 헌법은 자유, 인권, 행복 추구와 같은 교리들을 선포합니다. 정치인들은 서로 자기들이 그 교리를 더 정확하고 완전하게 구현해 내고 있다고 사람들을 선전하며, 사람들은 정치인들을 대할 때 (누구나 인정하듯) 일종의 메시아로 대하든지, 아니면 사탄으로 대합니다. 

 

정치는 이미 종교적입니다. ・・・ 정치인들은 서로 자기들이 그 교리를 더 정확하고 완전하게 구현해 내고 있다고 사람들을 선전하며, 사람들은 정치인들을 대할 때 (누구나 인정하듯) 일종의 메시아로 대하든지, 아니면 사탄으로 대합니다.

 

이건 교회가 하는 일과도 비슷하지 않나요? 교회는 왕정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그 왕정이 가지고 있는 헌법과 법률(성경에 기록되어 있는)이 지닌 의미에 대해 자세한 해설을 듣고, 그 왕이 한 일과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들으며, 따라서 왕국의 시민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듣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매주 하지요. 아니, 매주도 모자라서 ‘주일’에만 교회에 출석하는 삶을 ‘선데이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며 좋지 않은 삶의 형태라고 교육받습니다. 이보다도 더 강력한 정치 집단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교회는 ‘그냥 교회일 때’ 이미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입니다. 목사 역시 ‘그냥 목사일 때’, 다시 말하자면 성경을 자세히 강해하고, 성경에 따른 기독교적 삶을 요구하며, 매주 예배를 인도하고 상담하며 교회 내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그냥 목사일 때 이미 정치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누구보다 더 강력한 추종자들을 전 세계에 거느린 정치 지도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치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국가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두 왕국의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속 왕국과 하나님 나라의 이중국적자들인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의 왕(예수 그리스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롬 13:1~2)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속 국가를 살아가면서 국가의 정책에 복종하되,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복종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왕(예수 그리스도)이 명하시는 것. 그리고 그분의 성품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복종합니다. 

 

교회는 ‘그냥 교회일 때’ 이미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입니다. 목사 역시 ‘그냥 목사일 때’, 다시 말하자면 성경을 자세히 강해하고, 성경에 따른 기독교적 삶을 요구하며, 매주 예배를 인도하고 상담하며 교회 내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그냥 목사일 때 이미 정치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누구보다 더 강력한 추종자들을 전 세계에 거느린 정치 지도자입니다!

 

십계명은 왕의 성품을 드러낸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십계명입니다. 그리고 헌법과 법률이 국가의 정신과 성격을 드러내듯, 십계명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지요. 알렉 모티어(Alec Motyer)는 출애굽기 강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각 계명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지닌 한 측면을 표현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은 그분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우리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드러내며,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치 끊임없는 위협 아래 놓이기라도 한 것처럼 불길한 예감을 품고 십계명에 다가가서는 안 된다.3

한 번 정리해 볼까요? 우리는 십계명의 내용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배우고 지킬수록 그분의 성품을 알아가고, 또 지킬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일종의 ‘대항세력’ 혹은 ‘대항문화’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 세력은 정치적이지만, 일반적인 정치세력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지 않지요. 왜 그럴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배우고 지킬수록 그분의 성품을 알아가고, 또 지킬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일종의 ‘대항세력’ 혹은 ‘대항문화’를 형성하게 됩니다.

 

우리의 왕의 성품이 아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왕은 다른 세상의 왕들과는 달리, 찍어 누르고 압제하며 통치하는 왕이 아닙니다. 자신을 낮추고 죄인들과 함께 먹기를 즐기고 포도주를 탐하며 함께 다니고 행하며 보이고 가르치는, ‘섬기는 왕’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압제적/탄압적인 사악한 정치 세력을 전복하고 무너뜨리기 위해 가장 약한 모습으로 나아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음으로, 혁명을 성공시킨 왕이기도 하지요. 왕이 죽었다가 부활할 때, 일상적으로 통용되던 세상의 법칙 – 즉 약육강식과 지배/피지배의 법칙 – 은 결정적으로 패배했습니다. 

교회라는 정치 집단은, 이 왕이 행한 일과 하고 있는 일을 계속 기리며 높이고 가르치며 적용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며 살아가는 이질적인 정치집단이지만, 동시에 세상을 섬기고 융화하는, 적대시하지 않는 정치집단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정치 집단은, ・・・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며 살아가는 이질적인 정치집단이지만, 동시에 세상을 섬기고 융화하는, 적대시하지 않는 정치집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라는 주제 앞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세 가지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하나는 정치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마지막은 우리가 바라봐야 할 분에 관한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어떤 정파를 대하든 거기에 궁극적 희망을 걸지 말아야 합니다. 실재의 정치 체제가 성경의 모든 내용을 절대로 포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실하게 성경적이라면 이것을 느낄 겁니다. 신명기의 가난한 자들을 대하는 여러 율법들은, 현 사회의 정치 스펙트럼상 좌파 쪽에서 좋아하고 선호하는 내용이 많지요. 희년 제도 같은 것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성윤리는 현 사회의 정치 스펙트럼상 우파 쪽에서 더 선호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한쪽 정치 분파가 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 포괄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특정 정치 시스템과 분파를 절대시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정당도 인간이 바라는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존하시기 위해 두신 도구 중 하나일 뿐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와 삶을 치밀하고 깊이 있게 배워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요. 우리가 성경을 잘 모른다면 정치인들이나 정당이 하나님 나라의 원칙에 맞게 행동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섬세하게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행동을 보며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가늠합니다(그들이 성경을 통해 배우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모른 채 세속윤리에 따라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특정 정파나 정당을 편드는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잘못 대변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이해하며 적용하는 것은 단순한 신앙적 행동 이상입니다. 고도의 정치적 행동이기도 합니다. 꼭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일이 직접 참여하는 것뿐이라고 제한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공부하고 이해하며 살아내는 것은 확고한 정치적 선언이며 표현입니다.

셋째, 우리의 왕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죄인과 세리와 창녀와 벗하시며 먹고 마셨지만, 그들과 같은 삶을 살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에 저항하며 사셨지만, 그 저항은 오히려 세상의 희망과 빛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거슬러 사셨지만, 오히려 그분의 삶 때문에 세상은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분의 삶과 사역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분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그분의 삶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모든 세상 나라들이 따라야 할 진정한 나라의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 아멘.

 

꼭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일이 직접 참여하는 것뿐이라고 제한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공부하고 이해하며 살아내는 것은 확고한 정치적 선언이며 표현입니다.

 


(각주)
1) 알버트 월터스, 마이클 고힌, 『창조 타락 구속』, 양성만 홍병룡 옮김 (서울: IVP, 2007), 104.
2) 제임스 스미스, 『왕을 기다리며』박세혁 옮김 (서울: IVP, 2019), 114.
3) 알렉 모티어, 『출애굽기 강해』, 송동민 옮김 (서울: IVP, 2017), p.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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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규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B.A.)와 고려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현재 시광교회(www.seetheglory.or.kr)를 담임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님의 기도학교』(IVP), 『새가족반』(복있는사람), 『그리스도 중심 성경읽기』(IVP)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