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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27-28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024년 올해 여름은 정말 무더웠습니다. 7월 중순 이후로 추석까지 거의 2개월 이상 계속된 밤낮없는 무더위가 이어졌지요. 에어컨 없이는 잠을 이루기 힘든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밤에도 25도 이상을 유지한 열대야가 이어져 그야말로 밤낮없이 더위에 시달렸던 여름이었습니다. 이제 마침내 그 여름은 가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왔습니다. 저는 이 고된 여름을 보내면서, 우리 성도들도 이미 체감하고 계시는 우리나라의 기후 변화, 그리고 지구 온난화 문제에 대해 교회가 어떤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할지를 오늘 읽은 본문과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I. 한국 기후의 아열대화 현상  

우리나라의 기후가 점점 아열대 기후로 변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베트남, 태국 등지에서 온 노동자들이 한국 여름 날씨가 자기 나라보다 더 덥고 습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기후 변화는 지난 20~30년 동안 진행된 지구 온난화 현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지구 전체가 조금씩 데워졌고, 한반도의 기온과 바다의 수온도 조금씩 상승해 왔습니다. 50년 전 한반도의 기후와 오늘날 한반도의 기후가 다르다는 말이지요.  

이런 기후 변화는 미래의 생태계와 인간 사회에 엄청난 피해와 재난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경고합니다. 이미 피해는 드러나고 있습니다. 올여름만 해도 농어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축산 농가에서 사육하는 닭과 돼지 등 많은 가축이 집단으로 폐사했고, 수온이 26도 이상 오른 날이 일주일 이상 계속되어 서해 바다 양식 어장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큰 태풍 피해가 없어 풍년이 예상되었는데, 추석 연휴가 끝나는 시점에 3~400mm의 폭우가 집중적으로 퍼부은 경남과 전남의 일부 지역에는 벼농사와 배추농사가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가을 폭우로 발생한 재해였습니다.  

현재 기후변화로 곳곳에서 기후 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생태와 환경,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기후변화와 생태계 변화,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여러 문제들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지구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우리가 살도록 주신 삶의 터전이며, 피조물들이 함께 살아가야 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II. 기후 위기 그리고 지구촌과 교회의 각성  

먼저 최근에 기후 변화에 관한 방송이나 보도에서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라는 말을 종종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단어는 1988년에 설립된 UN(국제연합) 산하에 있는 ‘기후 변화에 대한 정부 간 협의회’(IPCC,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가 만든 보고서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입니다. [1]

이로부터 이 용어는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요. 기후변화협의회는 IPCC라는 영어 약자로 표현되는데요, 지구촌의 2,500여 명의 과학자들을 주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기구는 지구의 기후 변화 현상과 흐름을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업은 매 6년마다 지구 기후 변화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 보고서를 발표하는 것입니다.  

2007년도에 기후변화협의회(IPCC)는 제4차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이 보고서에서 지구가 급속도로 더워지고 있다는 진단을 하면서,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IPCC는 현재 남북극 빙하의 대폭 감소, 지구 해수면 상승, 섬나라들의 침수 현상, 생물 종의 다양성 감소 현상 등을 지구 온난화가 초래한 결과이자 지구 온난화의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그러면서 보고서는 현재의 지구 온난화 현상은 바로 “인간 행동이 초래한 결과”라는 충격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구 온도가 이처럼 상승하고 기후변화로 기후 재난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된 것은 바로 90% 이상이 인간 행동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을 비롯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국가들이 지난 40~50년 동안 엄청난 수준의 산업화, 도시화를 이루면서 이에 따른 대량의 식료품, 생활용품, 그리고 공산품을 소비하기 위해 대규모의 농경지, 택지를 개발하고 공장들을 건설하고 가동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녹지는 줄어들고 동시에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와 메탄과 같은 가스를 지구 대기에 배출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 가스들이 대기에서 지구를 덮어 마치 온실과 같은 작용을 하여 지구를 데우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2000년대 전후부터는 인구가 15억이 넘는 중국과 인도 같은 후개발 국가들이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엄청난 공장을 가동하며 탄소 가스를 배출해 왔습니다. 2023년 현재 국제 에너지 기구(IEA, International Energy Agency)에 따르면 현재 에너지 사용과 탄소가스 배출 1위 국가는 중국입니다. 그리고 2위가 인도, 3위가 미국입니다. 중국, 미국, 인도, 러시아 4개의 나라들이 현재 지구촌 탄소 배출량의 53%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놀랍지요?  

그런데 대한민국도 만만치 않습니다. 2023년 현재 우리나라는 에너지 과다 사용 국가 순위 11위입니다. 이 좁은 국토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와 이곳에서 생활하는 우리 국민들이 세계에서 에너지를 10번째로 많이 사용하며 산다는 사실입니다. 토지와 인구 대비로 1인당 에너지 사용 비율을 따진다고 하면, 우리나라는 세계 1위인 미국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IPCC는 그 뒤 2015년에 제5차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만약 지구촌 국가들이 현재 추세로 온실가스를 배출할 경우 2100년이 되면 지구 온도가 산업혁명 이전 시기에 비해 약 2.6도 내지 4.8도까지 높아지고, 해수면도 약 48cm에서 75cm까지 상승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이 수치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슴에 잘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온도가 현재보다 1도 정도 올라가면, 땅에 생존하는 생물 종들의 10%가 사라지고 멸종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지구 온도가 2도 정도 오르면 대충 어떻게 될지 감이 오시겠지요?  

그래서 제5차 연구 보고서를 받아든 IPCC 당사국들은 2015년 파리에서 ‘파리 기후 변화 협정’(Paris Agreement)을 채택했습니다. 당사국들은 지구 평균 온도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2도 이하로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나아가 그보다 더 낮게 1.5도 이하로 제한하기 위해 각국은 자발적으로 최선을 다하기로 협약했습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온실가스 배출 세계 10위 이내에 드는 국가입니다. 따라서 큰 책임을 느끼고 2030년까지 전망치 대비 약 24.4%의 온실가스를 감축할 것을 목표로 삼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기후 재난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서구 교회도 이에 대한 위기감과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도 지구 온난화를 늦추기 위한 일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자들이 생태 신학과 생태 환경 윤리를 연구하며 교회의 책임과 활동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들이 환경문제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한 신학적 토대가 되는 성경 본문은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기사,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창세기 1장 27~28절에 기록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창조 명령 안에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III. 기독교 문화 명령이 환경 파괴의 사상적 뿌리?

이제 오늘 읽은 창세기 1장 27-28절 본문 말씀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닷새 동안에는 하늘 궁창, 바다와 육지,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땅에 거하는 동물을 창조하시고, 또 각종 식물을 내셔서 동물과 생물들이 그것을 먹고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엿새 날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27절).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핵심은 28절에 나오듯이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28절) 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28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이 명령을 일명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으로 일컬어 왔습니다.  

바로 이 명령에 따라 사람들은 자연을 잘 가꾸고 동시에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마을과 도시를 건설하고 문명을 일구어 왔습니다. 그런데 18세기 산업화 이후부터 20세기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지구의 환경과 자연은 급속하게 변화하게 됩니다. 도시를 중심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많은 인구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리며 급속히 도시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니 택지와 주택이 필요했고, 또 많은 음식물과 생활용품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위해 택지를 늘리고 경작지를 확대하고 더 많은 공장을 짓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산과 녹지와 같은 자연이 훼손되고 줄어들게 되었고, 땅과 대기는 배출된 탄소와 오물로 인해 오염이 심화되었습니다. 급기야 20세기 후반을 넘어 21세기 문턱에 들어서면서 지구와 생태계 상태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러 지구 온도가 상승하고, 이로 말미암아 기후 재난이 곳곳에서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유명한 영국의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 1919-2022)이라는 학자는 2007년에 책을 내면서 지구가 현재 심한 병에 걸려 자기 힘으로 회복할 수 없는 중병 상태가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2]

그런데 1960년대 후반부터 지구 생태계가 이렇게 파괴된 데에는 기독교가 결정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런 주장을 펼친 대표적인 학자는 미국 UCLA 대학의 린 화이트 2세(Lynn White, Jr., 1907-1987) 교수입니다. 그는 기독교가 지닌 인간 중심적 세계관(anthropocentric worldview) 때문에 서방 세계의 사람들이 자연에 대해 군림하는 자세를 취하게 했고, 이것이 자연환경의 파괴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뿌리”라는 글을 통해 주장했습니다.[3] 그는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창세기의 인간에게 주어진 명령이 기독교가 자연에 대한 인간 지배권을 정당화하는 사상으로 보면서, 기독교는 이 사상에 근거해 사람은 편리한 대로 언제든지 자연을 사용하고 지배할 수 있는 존재로 가르쳤고, 이것이 바로 생태계 파괴를 가져온 사상적 뿌리라고 비판했습니다.  

화이트 교수의 이 주장은 당시 과학계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도 환경 문제를 다룰 때마다 되풀이되어 인용되는 고전적인 주장입니다. 화이트 교수는 기독교 세계관이 자연을 인간의 계획에 따라 마음대로 바꾸고 변형할 수 있는 통치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극치로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이에 따라 기독교 신앙은 자연과 피조계를 무자비하게 이용하는 씨앗을 뿌렸고, 또 기독교의 지배하에 있었던 서방 세계는 그런 행동을 주저 없이 행해 왔다는 것이지요.

 

IV. 문화 명령에 대한 오해와 진정한 의미

그런데 정말 기독교 신앙이 생태 환경 파괴의 주범이고 기원일까요? 결론을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화이트 교수의 비판은 정확하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창세기 1장 27-28절 말씀을 편협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명령과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창조에 관한 내용에 대한 지식도 없이 이 구절에 나온 두 동사인 ‘정복하다’(subdue)와 ‘다스리다’(rule)라는 자구에 국한하여 이 명령의 정확한 의미를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28절에 쓰인 ‘정복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는 ‘카바쉬’(kabash)입니다. ‘카바쉬’는 ‘밟다’(tread down) 또는 ‘속박하다’(bring into bondage), ‘무너뜨리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다스리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다’(radah)는 ‘다스리다’(govern), ‘밟다’(trample), ‘압박하다’(press)입니다. 두 단어가 모두 강압, 무력, 공격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언뜻 보기에는 화이트 교수의 주장이 옳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의 사전적 뜻만 가지고 이 28절 명령이 자연세계를 인간 마음대로 정복하고 통치할 수 있게 한 것으로 해석한 것은 큰 오해입니다. 28절의 본래 의미는 하나님이 하신 이 명령이 언제, 어떤 맥락에서 내려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바른 해석에 꼭 필요합니다. 아울러 이 ‘통치’라는 단어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보아야 그 통치의 개념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다스리라’는 28절의 통치 명령이 나오는 맥락을 보십시오. 창세기 1장을 보면, 이 명령을 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하늘과 땅 그리고 동물과 물고기와 새를 창조하시고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그 여건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1장 20절에서 22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위의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아라 하시고”(20절), 이어 22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22절). 하나님은 물고기와 새들과 땅의 동물이 번성할 수 있도록 복을 주시고 여건을 제공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뒤 인간을 만드시고 이 피조세상을 잘 통치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피조물들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복을 주시고 여건을 마련해 주신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기 편리와 욕심을 위해 자연과 동식물을 마음대로 훼손하는 일을 하라고 하실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고 또 논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다스리라’는 것은 잘 조정하고 돌보며 함께 살 수 있도록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정복하다’, ‘다스리다’라는 단어 자체도 다른 곳에서 쓰인 용례를 잘 살펴보면 이 구절에서 쓰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라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일반적으로 성경의 다른 곳에서 왕의 다스림/통치(rule)의 내용을 묘사하고 설명할 때 사용되었습니다(시편 72:8, 14-20). 특히 신정 국가의 이스라엘 왕에게 적용되는 다스림과 통치의 모습을 설명하는 율법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스리다’는 라다의 개념을 바르게 유추하고 파악할 수 있다고 신학자들은 말합니다.[4] 그 대표적인 본문은 신명기 17장 14-20절에 나옵니다. 17장 19절을 보면 이스라엘 왕은 백성 위에 군림하듯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형제가 다른 형제와 자매를 대하듯이 백성을 대하고, 자신을 위해 은금이나 병거를 축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백성을 여호와 경외하는 길로 이끄는 그런 다스림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왕의 통치의 내용이며, 바로 여기서 라다, 즉 ‘다스리다’는 개념을 추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복하다’라고 번역된 단어 카바쉬는 힘과 무력 사용의 의미가 있지만, 이것을 자연과 피조물에 대한 강압과 착취의 의미보다는 여기에서는 땅에 정착하고 농경의 일을 하는 것을 지칭하는 의미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는 창세기 2장 15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 땅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신 것”이라는 사명을 통해 그런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5] 그렇다면 우리는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로 그 통치를 하라고 명령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첫 사람에게 주신 명령은 바로 피조물들이 자신과 함께 잘 생육하고 살아갈 수 있는 공생자로서 그들을 잘 보호하고 돌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환경 파괴를 야기시킨 사상적 뿌리라고 비판하는 것은 성경을 일방적으로 오해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역사를 통해 보면 기독교회와 서구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여 자연을 마음대로 훼손하고 심지어 착취하는 잘못을 자행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 비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회의 그런 행동이 바로 기독교 문화 명령 때문이라고 비판하며, 이것을 단순화시켜 기독교 신앙 때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6] 설사 그런 경우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욕심에 따라 적극적 또는 소극적으로 자연에 대해 잘못을 저지른 기독교 사회의 문제일 뿐입니다. 통치권을 강조한 성경의 가르침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 자연과 피조물들을 잘 돌보고, 모든 피조물들이 잘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람이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V. 일상에서 기후 위기에 기독교인답게 대처하기

자, 그러면 생태계가 기후 변화로 인간과 동식물들이 모두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저는 큰 방향을 세 가지로 제안하려고 합니다.  

첫째, 개인적으로 우리는 자연과 생태계를 훼손하는 에너지 과소비적 삶의 방식을 줄이도록 의식적으로 힘써야 하겠습니다. 저는 이것을 성도님들이 기억하기 쉽게 ‘에너지 십일조 실천 운동’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생활 실천입니다.  

온실가스 배출이라고 하니 무슨 말인가 싶지만, 쉽게 말하면 에너지 사용을 절약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생활하면서 늘 사용하는 에너지가 있지요. 그것들을 지금보다 약 10분의 1만 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에너지 사용을 절제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자면, 승용차를 10번 타고 다닌다고 하면, 한 번은 줄여서 대중교통을 한 번 더 이용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에어컨 사용, 난방 사용 모두 이런 방식으로 조금씩 절약하고 절제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것에서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그리고 조금만 머리를 쓰면 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 보이고, 또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올 것입니다.  

아주 작은 행동이라, 이것이 기후 변화 흐름의 대세에 무슨 영향을 끼치겠나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이 행동들은 마치 나비효과처럼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비록 개인적 행동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순종하는 일로 여기면서 이런 절약과 절제를 실천해 나가는 삶을 의식적으로 힘써야 하겠습니다.  

둘째,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과 도시 환경을 푸른 생태계로 전환하는 구조적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이는 개인보다는 정부, 국회, 시정부, 시의회가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친환경적인 정책과 법안을 마련해 탄소배출이 많은 사업에 대한 인가를 제한하고, 제재를 가하며, 환경 친화적인 기업에는 혜택을 제공하여 이를 장려해 가는 것이지요.

사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 곳은 가정이 아니라 산업체들입니다. 발전소와 산업체에서 나오는 탄소 배출량이 가정에서 나오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우리나라 경제의 중추는 제조업인데, 이 제조업의 중심이 바로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중화학 공업입니다. 석유화학, 제철, 조선, 자동차 산업 등이 그 예입니다. 그중에서도 제철업은 특히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고철을 수입해 이를 가공하여 철강재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탄소가 발생합니다. 따라서 이런 산업 구조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시민들이 가정이나 자영업장에서 아무리 에너지를 절약해도 탄소 배출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런 구조적 문제를 혁신하고 개선해 나가는 일에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선진국들은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이를 위해 ‘Re100’, 즉 재생에너지 100% 사용 목표를 제시하며, 모든 산업체에 이를 향해 나아가도록 압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도 이에 발맞춰 2018년에 청사진을 발표하고, 플랜 A와 플랜 B를 수립해 현재 시행 중입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산업체들이 기술 혁신을 통해 제조 과정에서 탄소 배출을 줄여나가야 합니다. 이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기업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제사회, 특히 선진국들은 수출과 수입 과정에서 엄청난 탄소세를 부과하고 있기 때문에, 탄소 배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제품들은 수출입에서 불이익과 제재를 받게 되어, 기업과 산업이 지속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정부와 국회, 그리고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 나서서 효과적인 정책과 법을 마련하고, 산업 구조를 변혁해야 할 때입니다. 나아가, 우리 교회도 신실하고 역량 있는 지도자들을 양성하여 이들이 정부, 국회, 시정부, 시의회 등에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문화 명령의 사명을 감당해서 지속 가능한 친환경 사회를 만드는 일에 교회가 기도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도 이 지역에서 친환경적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모델로 보여주기 위해 관심을 갖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그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공동체로서, 교회가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의식적으로 덜 사용한다면, 그리고 그런 방안을 개발해서 실천해 간다면 지역에서 좋은 선례와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도 지금보다 더 줄여가고, 일회용 물품 사용도 지금보다 줄이는 방법을 교회가 조금 더 신경 쓰고 방안을 찾아 실천한다면, 지역 사회에 선한 파급력을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자그마한 일인 것 같지만, 이 일이 지구를 살리는 차원의 의미 있는 일로 간주하고, 이 일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연과 사회에 대한 청지기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VI. 나가면서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피조물들에게 주신 삶의 터전입니다. 기후 재난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현재, 우리는 우리의 편리함과 욕심을 지금보다 조금만 더 절제하며 산다면, 이는 약한 이웃과 약한 피조물, 나아가 지구를 보호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일임을 인식합시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에너지 십일조 실천 생활을 조금만 힘써 실천해 봅시다. 그리하여 이 자그마한 실천을 통해 이 지구와 우리나라에 엄청난 기후 재난들이 임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또 예방하는 삶을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각주

  1. 정부 간 기후변화협의회는 세계기상기구(WMO, 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와 유엔환경계획(UNEP)이 함께 설립한 협의회입니다.
  2. James Lovelock, The Revenge of Gaia, 『가이아의 복수』, 이한음 옮김 (서울: 세종서적, 2008), 29.  
  3.  Lynn White, Jr.,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 Crisis,” Science 155 (10 March, 1967), 1203-7.
  4.  William Dyrness, “Stewardship of the Earth in the Old Testament,” in Tending the Garden: Essays on the Gospel and the Earth, ed. Wesley Grandberg-Michaelson (Grand Rapids, Mich.: Eerdmans Pub. Co., 1987), 53.
  5.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창세기 I』, 임요한 옮김 (부흥과 개혁사, 2016), 148.
  6.  James A. Nash, Loving Nature: Ecological Integrity and Christian Responsibility, 『기독교 생태윤리』, 이문균 역 (서울: 한국 장로교 출판사, 1997), 10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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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윤(KICE) 원장인 신원하 박사는 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B.A.)을 전공했고,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석사(M. Div.)를, 미국 칼빈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와 보스턴 대학교(Boston University)에서 기독교 윤리학으로 석사(Th.M)와 박사(Ph. D.) 학위를 하였다. 이후 고려신학대학원에서 30년 동안 기독교윤리학 교수와 원장으로 재직했다. 대외적으로는 한국 복음주의 윤리학회 회장. 기독교윤리연구소(기윤실부설) 소장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