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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완벽한 편리함의 시대,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볼 것인가?

우리는 편리한 시대를 살고 있다. 손가락의 움직임과 터치 혹은 클릭 한 번으로 세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처한 작은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손가락 터치로 로봇 청소기는 나의 공간을 쓸고 닦는다. 거의 빈틈없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벽하게 편한 시대만은 아니다. 드높은 습기와 온도가 이어지는 여름과 같은 계절에 고무장갑을 끼고 녹색 수세미를 들고 락스를 칙칙 뿌리면서 화장실 타일과 세면대, 변기를 문지를 때면, 나는 불평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다. “테슬라나 삼성은 도대체 뭐 하는 거야? 화장실이나 베란다를 청소하는 로봇 하나 만들지 못하고!”

그러나 배달 서비스만큼은 더 이상의 편리함과 발전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만족도가 높다. 배달앱을 열고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생생한 음식 사진과 소비자들의 리뷰를 볼 수 있고, 결제를 하면 20~30분 안에 집 앞까지 배달이 된다. 라이더와 대면하는 어색함마저 감수하기 싫다면 ‘초인종 누르지 않고 문 앞에 놓고 가기’ 옵션을 선택하면 된다. ‘청소의 영역’과 다르게 ‘배달의 영역’은 불편과 불만을 느낄 새 없이 거의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 완벽한 서비스를 현실태로 만드는 요인으로는 ‘배달의 민족’이나 ‘쿠팡이츠’ 같은 대기업의 자본과 기술력이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일개미처럼 바지런히 움직이는 수많은 배달원들의 수고가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개의치 않고 때로는 목숨을 담보하면서까지 질주하는 배달원들의 땀방울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편리한 배달 서비스를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누릴 수 있다.

그런데 ‘배달사회’라 불릴 만큼 최첨단의 배송 기술과 서비스를 누리는 한국의 현주소가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그려주는 청사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빛 아래에서 한번쯤 달리 생각해보는 존재들이다. 배달사회가 제공하는 일반은총적 혜택을 누리면서도 그 어두운 측면을 직시하며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다.

배달사회, 편리함의 윤리: 비대면 편의의 시대, 환대와 책임을 묻다 | 김풍룡 교수 (수도국제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배달사회의 혜택: 윤리적 성찰을 위한 출발점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이 그러하듯, 배달 서비스 역시 장점과 단점, 즉 빛과 그림자가 뒤섞여 공존한다. 기독교 윤리적으로 볼 때 배달 서비스는 나와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는 유익한 사회적 장치이면서도 나의 편리함을 위해 지구환경과 배달 노동자, 공동체성을 희생시킬 수 있는 생활양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혜택을 살펴보는 일은 뒤따를 비판과 분리된 이야기가 아니라 각각의 혜택이 어떤 조건에서 그림자로 뒤바뀔 수 있는지를 함께 생각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첫째, 배달 서비스는 일상생활의 편리성과 시간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가장 분명한 장점을 갖고 있다. 바쁜 직장인, 맞벌이 가정, 육아 중인 부모,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 1인 가구에게 배달은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직접 장을 보고 요리하는 시간과 노력을 줄여 노동의 부담과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것이다. 특히 남편과 아내 모두 힘겹게 일을 마치고 돌아와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보통 부담이 아니며, 심지어 이는 가정불화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배달 서비스는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유용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배달 서비스와 기술은 나와 내 가족의 편리함을 위한 도구일 뿐 아니라 이웃을 섬기고 돌보는 환대의 수단으로도 선용될 수 있다. 코로나가 만연한 시절에 우리는 그 가능성을 십분 활용했다. 멀리 있는 가족에게 음식을 보내거나, 아픈 사람에게 죽이나 식사를 배달하고, 바쁜 친구에게 따뜻한 한 끼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사용될 때, 배달 서비스와 기술은 개인주의적 소비가 아니라 이웃 사랑과 섬김의 매개체적 도구가 될 수 있다.

셋째, 배달사회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에게 새로운 판매의 기회를 제공한다. 좋은 목에 자리 잡은 가게들뿐 아니라 골목상권의 작은 식당들도 배달앱을 통해 더 넓은 지역의 소비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고, 홀 영업만으로 생존을 도모할 수 없는 매장에게 배달 플랫폼은 추가 매출의 통로가 된다. 이런 점에서 배달사회는 시장 접근성을 확대하고 음식점의 영업 방식을 다양화하는 긍정적 기능을 가진다.

넷째, 배달사회는 새로운 일자리와 소득창출의 기회를 만든다. 배달대행업체, 배달 라이더, 포장재 업체, 플랫폼 운영자 등 다양한 노동이 배달경제 안에서 발생한다. 일자리의 질은 별도로 평가해야 하겠지만, 단기든 장기든 소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진입 장벽이 낮은 노동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배달사회는 소비자들이 다양한 음식문화를 쉽게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집 주변 음식점에 한정되었던 선택지가 배달 플랫폼을 통해 훨씬 넓어져, 멀리 떨어져 있는 식당의 음식을 주문해 경험할 수 있고 소규모 전문 음식점도 특정 취향의 소비자와 연결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배달사회는 현대인들의 음식문화를 풍요롭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달사회가 주는 혜택과 편리성에도 불구하고, 마냥 그 윤택함을 즐길 수 없는 불편감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 불편한 감정의 까닭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아마도 배달사회는 윤택함뿐 아니라 결코 무시 못 할 여러 폐해와 부작용을 낳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러한 부작용을 기독교 윤리적으로 살펴보고,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소할지라도 공동체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해 보도록 하자.

신음하는 창조세계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공짜가 아닌 편리함: 플라스틱 폐기물과 생태계의 비명

배달사회는 데이터를 보지 않더라도 수많은 플라스틱과 일회용품의 사용을 크게 늘리고 있다. 배달음식의 위생과 보온, 이동 중 누수를 막기 위해 다량의 플라스틱 용기, 일회용 젓가락과 수저, 비닐봉지 등이 쓰인다. 환경부의 폐기물 통계를 분석한 그린피스와 충남대학교의 2023년 연구를 보면, 코로나 시기에 배달과 포장 중심의 소비가 확대되면서 한국의 일회용 플라스틱 소비와 폐기물이 크게 증가했지만 정부의 재활용 및 감축 정책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1)

구체적 수치를 살펴보자. 2021년 국내에서 발생한 전체 플라스틱 폐기물은 약 1,193만 2천 톤으로, 2017년 약 798만 1천 톤보다 무려 49.5% 증가한 규모이다. 특히 배달음식 용기를 포함한 ‘기타 폐합성수지류’의 하루 배출량은 2019년 715.5톤에서 2021년 1,292.2톤으로 80.6% 늘어났다. 배달과 포장 중심의 소비문화가 플라스틱 폐기물 증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2) 개인 단위로 보면, 2020년 기준 국민 한 사람이 1년 동안 소비한 대표적 일회용 플라스틱은 배달용기 568개, 비닐봉투 533개, 생수 페트병 109개, 플라스틱 컵 102개로 합하면 연간 1,312개, 무게로는 약 19㎏에 이른다. 배달용기만 놓고 보면 한 사람이 하루 평균 약 1.56개를 사용한 셈이다.3)

문제는 이렇게 배출된 플라스틱의 상당 부분이 실질적으로 재활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2021년 전체 플라스틱의 물질 재활용률은 약 27%였지만, 생활계 플라스틱은 약 16.4%에 불과했다. 생활계 플라스틱의 70% 이상은 소각되거나 고형연료로 처리되며, 소각 과정에서 온실가스가 배출된다는 점에서 플라스틱 문제는 폐기물 처리뿐 아니라 기후위기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4)

이 수치들은 배달사회의 편리함이 환경적으로 공짜가 아님을 보여준다. 소비자는 시간과 수고를 절약하지만, 한 번의 주문에 여러 개의 용기와 비닐, 포장재가 쓰이면서 편리함의 비용은 생태계와 미래세대에 이전되고 있다.

총괄갱신신학과 만물을 돌보는 공적 책임

기독교의 초대 교부인 이레네우스(Irenaeus, 130~198년경)의 ‘총괄갱신신학’은 배달사회와 플라스틱 문제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응답의 좋은 신학적 토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기독교적 구원’을 인간 영혼과 천국의 문제로만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레네우스에게 기독교적 구원이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창조의 본래 목적을 되찾는 사건이다. 교부는 하나님을 선한 목자에 비유하면서, 목자가 양 떼를 돌보고 인도하듯 하나님께서 인간뿐 아니라 피조세계 전체를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궁극적인 완성을 향해 이끄신다고 보았다. 인간의 역사는 신적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온 피조세계를 창조의 최종 목적지로 인도하시는 과정인 것이다. 이레네우스는 이러한 구원의 비전을, 인류가 아담 안에서 상실한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된다는 바울의 ‘총괄갱신’ 사상(엡 1:10)에 기초하여 발전시켰다.5)

중요하게도, 이레네우스는 자신의 총괄갱신신학을 바탕으로 영적인 것은 선하고 물질적인 것은 열등하거나 심지어 악하다고 보는 영지주의를 비판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세계는 본질적으로 선하며, 그리스도의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은 자연과 물질을 자신의 번영과 편리를 위해 마음대로 소비하고 폐기할 수 없다. 총괄갱신의 신학은 물질을 창조와 구원 세계의 일부로 존중하며, 생산부터 폐기까지 전 과정을 책임 있게 살피도록 요청한다.

이러한 교부의 총괄갱신신학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번역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털 하나하나까지 세실 정도로 우리 인간에게 관심이 많으신 하나님은 참새, 백합화, 그리고 심지어 이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배달사회의 수많은 플라스틱에도 관심이 지대하시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창조세계 전체의 목자가 되시는 주님의 관심을 좇아 불필요한 포장과 일회용품 사용을 거절하고, 불편하더라도 배달 주문의 빈도를 줄이며 직접 음식을 준비하거나 다회용기를 선택해야 한다. 더 나아가 교회와 공적 자리에서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배달 플랫폼과 기업이 다회용기 회수 및 세척 시스템을 마련하도록 요구하고, 정부가 플라스틱 생산 감축과 생산자 책임 제도를 강화하도록 촉구할 수 있다. 소비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일회용품 외에 선택지가 없는 구조라면 근본적인 변화가 어렵기 때문이다. 총괄갱신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처럼 개인의 습관뿐 아니라 환경파괴적인 생산·유통·폐기 구조를 새롭게 하는 공적 책임을 포함한다.

즉시성의 문화와 인내의 회복

속도에 길들여진 사회와 보이지 않는 대가

배달사회의 다른 부작용은 ‘즉시성의 문화’에 영향을 받고 또 그 문화를 강화한다는 점일 것이다. ‘즉시성의 문화’란 사람들이 갈망하는 상품과 서비스, 정보 등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얻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일컫는다. 스마트폰을 항상 소지하고 디지털 플랫폼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면서 주문과 결제, 배달과 소통, 오락 등이 실시간으로 이뤄지고 이 과정에서 속도와 편리성이 제일의 가치가 되었다. 한국의 새벽배송이나 당일배송, 빠른 음식 배달, 실시간 메시지와 숏폼 콘텐츠는 이러한 문화를 잘 보여준다.

중요한 점은 즉시성의 문화가 시간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린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온라인 구매를 하더라도 물건을 받기까지 며칠, 심지어 몇 주를 기다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작은 시간의 지연도 서비스의 실패와 불편으로 받아들여 인내하기보다는 쉽게 불평과 분노를 쏟아낸다. “원하는 것을 즉시 얻어야만 한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인내를 잃어버린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배달 플랫폼과 기업들은 더 빠른 서비스를 경쟁적으로 약속한다.

이 즉시성의 문화가 가장 잘 구현되는 곳 중 하나가 배달 서비스 영역일 것이다. 음식을 주문하고 30분이 넘어가면 벌써 마음이 초조해지면서 “왜 이렇게 늦게 배달되는 거야?”라는 불만이 내면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소비자들의 조급함을 잘 아는 배달 플랫폼들은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배달을 수행하도록 음식점 종사자들과 배달 노동자들을 압박하며 그 과정에서 음식의 질과 안전이 심각한 수준으로 희생되기도 한다. 특히 매순간 시간 압박을 받는 배달 라이더들은 늘 사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또한 박수민이 자신의 논문에서 지적하듯, 즉시성의 문화는 배달 노동자들의 ‘그림자 노동,’ 즉 시간을 투자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노동 시간을 늘리기도 한다. ‘배달의 민족’이나 ‘쿠팡이츠’는 많은 노동자들을 앱에 접속시켜 놓고 주문이 들어오는 즉시 누군가가 수락하도록 만드는 방식을 사용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배달 속도가 빨라지지만, 노동자 개인은 주문을 받기 위해 더 오래 기다려야 하고 수입도 불안정해진다. 효율성과 속도는 높아지지만 그 비용은 라이더들의 무급 대기시간, 불안정한 수입과 심리적 피로로 전가되는 것이다. 그래서 배달 노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도로 위를 빠르게 달리는 노동자만 볼 것이 아니라, 길가에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앱을 바라보며 주문을 기다리는 모습도 함께 보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빠른 배달’은 사실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기다림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6)

초대 교회의 인내와 일상 속 참음의 실천

배달사회가 강화하는 즉시성의 문화는 우리의 내면과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다림과 인내, 숙고와 절제와 같은 능력을 약화시키고 빠른 반응과 즉각적인 만족만을 추구하게 만든다. 인간관계마저 효율과 속도의 기준으로 평가하면서, 우정이나 돌봄과 같이 긴 시간의 숙성이 필요한 관계가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즉시성의 문화에 익숙해진 우리는 기도와 응답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행위에 매달리기보다 내가 직접 모든 일을 처리하고 즉시 인생의 답을 얻고자 한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즉시성의 문화를 전적으로 거부하진 못할 것이다. 이 문화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불가역적으로 세팅된 환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내가 누리는 이 편리성과 즉시성을 위해 누가 대가와 비용을 치르고 있는가?” “배달 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지역 교회라면 라이더들이 대기하는 동안 쉼을 제공할 공간을 마련할 수 있진 않을까?” “더 근본적으로, 나의 모든 필요가 즉시 충족되는 것이 꼭 좋은 삶이라 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우리는 ‘즉시성의 문화’ 속에서 ‘인내의 습관과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앨런 크라이더(Alan Kreider)가 자신의 책 『초기 교회와 인내의 발효』(The Patient Ferment of the Early Church)에서 주장하듯,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 교인들은 ‘인내’를 기독교인의 가장 본질적인 덕목이자 하나님의 핵심 성품으로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사회 속에서 기나긴 박해와 불의에 직면했을 때, 힘으로 맞서 즉각적으로 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참아내는 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았다. ‘인내’는 악인들을 오랫동안 참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초대 교회의 핵심 덕목이었다. 그들의 인내하는 믿음이 오랜 시간 발효됐을 때, 로마인들은 비로소 그 삶과 신앙에 주목하기 시작했다.7)

그리스도인들은 이 ‘인내’의 덕목을 현대적 상황에 맞게 적용하고 습관화할 필요가 있다. 주문한 음식과 물건이 기대와 달리 늦게 배송될지라도,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고려해 채근하지 않는 것이다. 효율성과 속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기업들을 향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공적 자리의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러한 가치에 희석될 수 없는 안전을 보장하는 정책을 실현하는 것이다. 또 평일에 공간을 내어줄 수 있는 지역 교회들은 라이더들이 주문 콜을 기다릴 동안 믹스커피 한 잔 마시며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상생하는 배달사회를 위하여

앞에서 배달사회가 가져온 혜택으로 자영업자들의 확대된 시장 접근성과 배달 라이더 같은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의 빛 안에는 어두움이 공존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빛에 기생하는 어두운 측면을 직시하며 모든 주체가 상생하는 배달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즉시성의 문화’와 같이 문화적으로 바꿀 것은 바꾸면서 동시에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개선을 도모해야 한다.

라이더의 위험 노동과 플랫폼의 책임

우선, 배달 라이더의 노동 문제를 살펴보자. 이는 알고리즘에 따른 배차, 건당 보수, 산재보험 문제가 맞물리면서 발생한다. 배달 라이더는 자유롭게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주문 배정과 이동 경로, 배달시간을 결정한다. 그 기준이 충분히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라이더는 배차를 거절할 경우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일한다. 또한 건당 보수 체계에서는 주문이나 조리를 기다리는 시간에 돈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더 많이 벌려면 더 많은 배달을 빠르게 수행해야 한다.8) 2023년 7월부터 여러 플랫폼에서 일하는 라이더도 산재보험의 보호를 받게 되었지만 안전 책임의 주체가 불분명하고 라이더가 보험료의 절반을 부담한다는 문제가 남아 있다.9) 따라서 라이더 개인에게 안전운전과 금전적 희생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배차 기준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대기시간에 적절한 보상을 제공하며 플랫폼의 안전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

자영업자의 고율 수수료와 상생의 윤리

배달 노동자뿐 아니라 대부분 영세한 자영업자들의 수익을 보장하기 위한 구조적 개선도 필요하다. 배달 플랫폼은 새로운 소비자를 동네 가게에 연결해 주지만 주문이 늘었다고 수익까지 반드시 늘어나는 구조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중개수수료와 배달비, 광고비 등을 빼고 나면 실제로 남는 돈이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25년 조사를 보면, 음식점 매출의 36%가 배달앱을 통해 발생했지만 이용료(중개수수료 및 배달비)에 만족한다는 응답은 28.3%에 불과했고 평균 중개수수료는 무려 8.2%였다.10) 광고와 리뷰 경쟁에서는 자본과 인지도가 높은 프랜차이즈가 유리해 작은 가게들이 앱에 더욱 의존할 위험도 있다. 소상공인들의 생존을 위해 우리는 동네 가게에 직접 주문하거나 방문포장을 이용하고, 수수료가 0~2%로 비교적 낮은 공공배달앱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11) 교회도 각종 모임과 행사를 위해 지역의 작은 가게를 직접 컨택하여 정당한 값을 지불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식사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기

개인적 소비로 축소되는 배달사회의 식탁

마지막으로 배달사회는 우리들의 식탁 공동체를 약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배달사회가 확대되면서 식사의 의미는 점점 개인화되고 소비화될 위험이 있다. 배달 플랫폼은 각자의 취향에 맞는 음식을 빠르고 편리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동시에 식사를 함께 준비하고 기다리고 나누는 과정을 약화시킬 수 있다. 가족이나 이웃들이 같은 식탁에 앉아 동일한 음식을 나누기보다 각자가 자기 방에서 핸드폰 화면을 보며 원하는 음식을 따로 주문하는 모습이 더 익숙해질 수 있다. 이때 식사는 공동체적 만남의 시간이 아니라 개인적 만족을 위한 소비 행위로 축소된다. 음식은 더 이상 함께 나누는 선물이 아니라 돈만 지불하면 나의 취향과 욕구를 즉각적으로 충족시켜 주는 상품이 된다.

밥상 교제 전통과 예수 그리스도의 식탁 사역

이러한 우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음식과 식사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약학자 스콧 바치(Scott Bartchy)는 고대 유대 사회에서 식사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1세기 지중해 유역의 사회에서 밥상 교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식사는 개인이 영양분을 섭취하는 일 그 이상이었다. 다른 사람의 식사에 초대받는 것은 그들과의 우정, 친밀함, 일치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의식이었다. 따라서 식사를 함께 한 사람에 대한 배신이나 불충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로 여겨졌다. 또한 식사 초대는 관계가 소원해진 사람들이 다시 화해할 통로가 되기도 했다.12)

나와 다른 얼굴과 인격을 마주보고 더불어 식사를 나누는 행위는 유대 사회에서 친밀함과 우정을 나누는 행위였으며 서로 으르렁대던 존재들이 화해로 나아가는 첩경이 되기도 했다. 식사의 이러한 의미와 기능은 유대 사회를 넘어 예수 공동체와 초대 교회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계승된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식탁은 죄인과 세리,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맞아들이는 환대의 장소였으며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포용성, 공동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자리였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회개시켜 구원하기 위해서” 유대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도 했다”(눅 5:32-33). 특히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온다. 레위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5장),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7장), 오천 명과 더불어(9장),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10장) 식사를 하셨고, 친구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식사에 초대하라 가르치셨으며(14장), 세리 삭개오와 함께 식사하셨다(19장). 부활 후에는 엠마오에서 두 제자와 식사를 나누시고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생선을 드셨다(24장). 그런 점에서 기독교 전통 안에서 식사는 개인적 소비가 아니라 관계적 행위이며, 음식은 그저 상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정신이 스며드는 복된 통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음식을 나누는 식탁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신학과 신앙을 몸소 실천하셨다.

효율을 넘어 감사와 환대의 식탁으로

물론 배달음식 자체가 식탁 공동체를 반드시 와해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배달음식은 바쁜 가족이 함께 식사하도록 돕는 유용한 수단이자 아픈 사람이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음식을 보내는 돌봄의 방식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배달이 예외적·보조적 수단을 넘어 식생활 전체를 지배하는 문화가 될 때 발생한다. 함께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하고 조리하는 시간을 기다리고 식탁을 차리고 함께 먹고 치우는 과정 속에서 가족과 공동체는 서로의 수고와 헌신을 배우고, 감사와 배려를 익히며, 일상의 리듬 속에서 관계를 형성한다. 배달사회가 이러한 과정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 때, 식사의 공동체적 의미는 점차 약화된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의 관점에서 배달사회는 식탁의 의미를 다시 묻게 만든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얼마나 빠르고 편하게 얻을 수 있는지에만 혈안이 될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을 통해 누구와 연결되고 있는지, 누구를 환대하고 있는지, 누구의 수고를 기억하고 있는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식탁은 소비의 자리가 아니라 감사와 교제, 환대와 나눔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배달사회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식사를 공동체를 세우고 이웃을 환대하며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는 삶의 자리로 회복해야 한다.

나가며: 편리함을 넘어 생명을 살리는 배달사회로

기독교 윤리는 배달 서비스의 편리함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배달은 바쁜 현대인의 수고를 덜어주고, 아픈 이웃을 돌보며, 가족이 함께 식사하도록 돕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다만 그 편리함이 누군가의 노동과 위험, 환경적 희생을 통해 가능해졌는지를 물어야 한다. 현관문 앞에 놓인 한 끼 음식에는 시간에 쫓기는 배달 노동자의 수고와 기다림, 한 번 쓰이고 버려지는 플라스틱, 점차 약화되는 식탁 공동체의 문제가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배달사회의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절제와 인내의 문화를 실천해야 한다. 불필요한 주문과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조금 늦은 배달을 너그럽게 기다리며,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속도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또한 식사를 개인의 욕구를 충족하는 소비 행위로만 여기지 않고, 가족과 이웃을 연결하는 감사와 환대의 자리로 회복해야 한다. 교회 역시 배달 노동자에게 쉼을 제공하고, 환경친화적 제도와 안전하고 정의로운 노동 조건을 요구하는 공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배달이 사라진 사회가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건강한 배달사회이다. 더 빠른 배달만을 요구하기보다 노동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창조세계의 신음에 귀 기울이며, 식탁에서 이웃을 맞아들이는 것, 이러한 실천들이 사람과 피조세계가 더불어 살아가는 정의롭고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


주)

  1. 김나라 외, 『코로나19 시대 플라스틱 대한민국 2.0』 (서울: 그린피스 동아시아 서울사무소, 2023), 5.
  2. 김나라 외, 『플라스틱 대한민국 2.0』, 8-9.
  3. 김나라 외, 『플라스틱 대한민국 2.0』, 10-11.
  4. 김나라 외, 『플라스틱 대한민국 2.0』, 16.
  5. Irenaeus,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 5.18.1.
  6. 박수민, 「플랫폼 배달 경제를 뒷받침하는 즉시성의 문화와 그림자 노동」, 『경제와사회』 제130호 (2021), 213; 225-31.
  7. Alan Kreider, The Patient Ferment of the Early Church, 김광남 역, 『초기 교회와 인내의 발효』(서울: IVP, 2021), 19-24.
  8. 박수민, 「특고·플랫폼 노동자 권리보호 방안」, 『월간 노동리뷰』 244 (2025), 21-27.
  9. 고용노동부, “2023년 7월 1일, 더 넓어진 산재보험이 함께 합니다,” 2023년 6월 7일.
  10. 중소벤처기업부, “배달3사 체감도 조사·입점업체 인식 조사 결과 발표,” 2026년 2월 4일.
  11. 정준화·김선아, “공익 기능 큰 공공배달앱의 경쟁력 제고 방안,” 『이슈와 논점』, 국회입법조사처, 2025년 12월 7일.
  12. Scott Bartchy, “Table Fellowship,” Dictionary of Jesus and the Gospels, ed. Joel B. Green and Scot McKnigh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2), 796. (다음 책에서 재인용: Tim Chester, A Meal with Jesus: Discovering Grace, Community, and Mission around the Table, 홍종락 역, 『예수님이 차려주신 밥상』(서울: IVP, 2013), 26.

김풍룡 교수는 수도국제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이후 스코틀랜드에 있는 아버딘 대학(University of Aberdeen)에서 현대 정치신학자들과 대화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과 정치신학을 연구하였다. 박사 논문은 두 출판사 Lexington Books와 Fortress Press의 공동학술 시리즈로 2024년에 출간되었으며, 책의 제목은 Augustine’s Apocalyptic Political Theology in the Evil Saeculum이다. 고대 교부들의 풍성한 신학과 사회 윤리가 우리 시대 교회와 사회가 놓인 길에 어떤 빛을 비춰줄 수 있을지 관심을 기울이며 연구를 이어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