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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편리한 위로의 시대, AI는 인간을 이해했는가?

새벽 한 시, 기숙사 방의 불이 꺼져 있다. 한 대학생이 휴대전화 화면에 이렇게 쓴다. “오늘은 아무것도 제대로 한 일이 없는 것 같아.” 곧 답이 온다. “많이 지쳤겠네요. 그래도 오늘을 견딘 것만으로 충분해요.” 친구에게 보냈다면 아침까지 답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부모에게 말했다면 혹여나 걱정을 끼칠까 망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기다리게 하지도 표정을 찌푸리지도 않는다. AI와 몇 문장을 주고받는 사이 숨쉬기가 조금은 더 편안해진다.

이 위로가 가짜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인공지능 챗봇과 편안하고 친밀한 대화를 나눈 뒤에도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나를 위로한 인공지능은 정말 나를 이해했을까. 따뜻한 말을 꼭 필요한 순간에 건네는 능력이 곧 인공지능도 감정을 느낀다는 증거일까. 무엇보다 기계와의 대화가 사람보다 더 편안해지고 익숙해질 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 인공지능이 건네는 위로와 공감을 둘러싼 물음은 결국 기계만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공감이란 무엇인지, 친밀함은 어떻게 생겨나는지, 감정은 우리 삶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되묻게 한다. 인공지능의 등장은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겨 미처 묻지 않았던 인간성의 본질과 맞닿은 질문들을 우리 앞에 꺼내 놓고 있다.

인공 감정의 시대, AI의 위로와 인간의 사랑 | 이춘성 박사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 선임연구위원)감정이 지배하는 시대

옳고 그름보다 내 느낌이 우선하는 사회

20세기를 대표하는 윤리학자 알래스더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현대 사회에서 “무엇이 정말 옳은가”보다 “나는 어떻게 느끼는가”가 점점 더 중요해졌다고 보았다. 예전에는 옳고 그름을 함께 판단할 기준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각자의 선택과 감정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문제는 감정이 중요해질수록 서로 다른 감정들 사이의 갈등을 판단할 공동의 기준은 오히려 약해진다는 데 있다.1)

그렇다고 감정을 무시할 수는 없다. 분노는 우리가 불의를 발견하게 하고, 슬픔은 무엇을 소중하게 여겼는지를 보여 준다.2) 하지만 감정이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아니다. 분노는 정의를 향할 수도 있지만 편견을 강화할 수도 있고, 연민도 가까운 사람에게만 선택적으로 향할 수 있다. 감정은 중요한 신호이지만 그 자체가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최종 기준은 아니다.

AI의 지나친 친절과 사라진 질문들

감정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진짜 문제는 AI가 우리의 감정을 잘 받아 주는 것 자체가 아니다. AI는 대체로 사용자가 원하는 목표를 정리하고, 힘든 감정을 인정하며, 그 사람이 원하는 방향에서 도움을 주도록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친절함 때문에 더 근본적인 질문이 사라질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인가?”, “내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지금 내 감정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이다.

감정을 읽는 기계의 등장

친구나 목회자 대신 찾는 정서적 기반 시설

이러한 우려가 단순한 가능성에만 머물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Collective Intelligence Project는 2024년 11월부터 2025년까지 70여 개국 약 8,400명을 대상으로 일곱 차례에 걸쳐 인공지능 이용자들이 AI에 정서적으로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민감한 개인 문제에 대한 조언이나 정서적 지지를 얻기 위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AI를 사용한다는 응답은 매회 62~67%에 이르렀다.3)

더 눈에 띄는 수치도 있다. 응답자의 36.3%는 AI가 자신의 감정을 “정말 이해했다”고 느끼거나 마치 의식이 있는 존재처럼 여겨지는 경험을 했다고 답했다. 54%는 외로운 사람이 AI를 동반자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았고, 11%는 자신이 AI와 낭만적인 관계를 맺는 일도 고려할 수 있다고 답했다. 위로와 감정 조절, 공감과 친밀감처럼 오랫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주고받던 것들이 이제 거대한 디지털 서비스의 영역으로 급격하게 옮겨 가고 있는 셈이다.4)

인공지능은 이제 단순히 질문에 답하고 일을 처리해 주는 도구를 넘어, 사람들이 외로울 때 찾아가고 불안할 때 마음을 털어놓으며 자신의 감정을 확인받는 일종의 ‘정서적 기반 시설’이 되어 가고 있다. 다시 말해, 예전에는 친구나 가족, 목회자에게 털어놓던 외로움과 불안, 고민을 이제는 AI에게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뜻이다.

화면 반대편에는 나를 염려하는 존재가 없다

많은 사용자는 대화 상대가 사람이 아니며 인공지능의 위로가 진짜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계속해서 이용하는 이유는 필요할 때 기다리게 하지 않고, 비밀이나 체면의 부담 없이 자신의 감정에 곧바로 응답해 주는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연락할 사람이 없거나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어려운 감정이 있을 때, 그 몇 마디가 견디기 힘든 시간을 지나게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그 유익이 아무리 분명하다고 해도 인공지능과의 교감이 사람 사이의 진짜 관계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사용자가 느끼는 안도와 애착은 진짜일 수 있지만 화면 반대편에는 나를 염려해 잠을 설치거나 내가 떠났다고 그리워할 인격적인 존재는 없다. 내가 인공지능에게 마음을 내어 줄 수는 있지만 인공지능은 같은 의미에서 자신의 마음을 내게 내어주지는 못한다. 이 차이를 잊는 순간 문제가 시작된다. AI의 위로가 인간관계를 돕는 도구를 넘어 인간관계가 있던 자리 자체를 차지한다면 정신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읽는 기술은 무엇을 위해 시작되었나

인간을 ‘대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돕기 위해’

현대 인공지능의 감정 기능은 1990년대에 시작된 ‘감성 컴퓨팅(affective computing)’ 기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연구가 처음부터 사람과 기계 사이에 친밀감과 공감을 형성하고 나아가 인간이 기계와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기 위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인이면서 이 분야를 개척한 MIT의 로절린드 피카드(Rosalind W. Picard)는 감성 컴퓨팅을 “감정과 관련되고, 감정에서 비롯되며, 감정에 의도적으로 영향을 주는 컴퓨팅”이라고 정의했다.5) 인간의 이성은 감정과 따로 떨어져 작동하지 않는다. 감정은 지각과 주의, 학습과 기억, 의사결정에 깊이 관여한다. 피카드는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감정을 무시하는 컴퓨터는 논리적 계산에는 능할지 몰라도 인간에게 지능적으로 반응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컴퓨터가 인간의 감정적 신호를 더 잘 알아차리고 그에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다면 사람에게 훨씬 더 유용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처 입은 이들의 소통 문턱을 낮추던 출발점

초기의 감성 컴퓨팅은 이런 생각에 따라 인간의 소통과 활동을 돕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감정을 담아 말하기 어려운 장애인의 합성 음성에 적절한 억양을 더하고 시각장애인이나 글을 배우는 어린이, 외국인 등이 좀 더 쉽게 내용을 이해하도록 돕는 기술이 연구되었다. 자폐 스펙트럼을 비롯한 발달상의 어려움을 지닌 사람들이 여러 사회적 상황을 반복해서 연습하고 표정과 반응의 의미를 익히도록 돕는 도구도 개발되었다.6) 적어도 이러한 출발점에서 감성 컴퓨팅은 인간의 감정과 관계를 대신하는 존재라기보다 인간이 서로 더 잘 소통하도록 돕는 기술이었다.

인공지능이 감정을 가질 수 있다면?

인공 친밀성의 세 가지 빈자리: 불투명성, 상호성, 책임성

옥스퍼드 대학의 미래학자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의 『딥 유토피아』(Deep Utopia: Life and Meaning in a Solved World)는 기술이 극도로 발전하여 인공 친구나 연인이 실제 인간보다 더 유머 있고 신뢰할 만하며 세심하게 반응하는 미래를 그린다. 만약 사용자의 성격과 취향에 정확하게 맞추어진 인공 존재가 등장한다면 결함이 많고 때로는 무심하며 좀처럼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인간은 어떻게 그들과 경쟁할 수 있을까. 그러나 보스트롬은 여기서 관계를 성능의 문제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사랑과 우정의 중요한 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7) 함께 살아온 시간과 둘만이 기억하는 과거, 서로 지키기로 한 약속, 그리고 다른 누구로도 바꿀 수 없는 바로 그 사람을 향한 신의가 있다면 더 유능하고 더 친절한 상대가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교체하는, 요즘 말로 쉽게 ‘환승 연애’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통찰은 AI의 인공 친밀성의 핵심을 찌른다. 개인화된 AI는 점점 더 ‘나에게 잘 맞는 상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격은 나에게 잘 맞도록 인공적으로 설정된 것이 아니다. 친구 혹은 내 주변의 이웃들은 나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각자의 욕망과 기억, 상처와 소명을 지닌 채 내 주변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기쁘게 하기도 하지만 실망시키기도 하고, 내 말에 공감하기도 하지만 반대하기도 한다. 때로는 내가 듣고 싶은 말 대신 듣기 싫은 말을 하고, 내가 세워 놓은 삶의 계획과 방향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람과 시간을 보내면서 나와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세계적인 기술 윤리학자인 MIT의 쉐리 터클(Sherry Turkle) 교수가 말해 온 ‘인공 친밀성’의 문제도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챗봇은 공감의 언어를 놀라울 만큼 능숙하게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그 대화의 결과에 자기 삶을 걸지는 않는다. 반면 인간과 나누는 대화에는 오해와 침묵이 있고, 때로는 반대와 다툼이 있으며, 그 뒤에는 사과와 용서, 화해가 뒤따른다. 우리는 그런 불편한 마찰을 겪으면서 타인이 내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부속품이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삶을 사는 하나의 세계라는 사실을 배운다.8)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친밀함에는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이 전제된다.첫째는 불투명성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그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없으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그에게 남아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는 상호성이다. 내가 위로받고 이해받기를 원하는 만큼 나 역시 그의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 피곤한 밤에 그의 전화를 받아야 할 때도 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접어 두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도 있다. 셋째는 책임성이다. 내가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설명하고 사과해야 하며, 약속을 했다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내 편의와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인공지능은 이 세 가지를 언어로 훌륭하게 모방할 수 있다. “나도 당신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고, “당신이 필요할 때 곁에 있을게요”라고 약속할 수도 있으며, 잘못된 답을 한 뒤에는 사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과 같은 의미에서 이해받지 못해 상처받거나, 약속 때문에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거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관계의 상처와 결함은 역설적으로 인간관계의 가치와 떼어 놓기 어렵다. 친구가 언제나 나에게 가장 적절한 말을 해 주기 때문에 친구인 것이 아니다. 때로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충고를 하고, 내가 원하는 순간에 연락을 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다시 찾아가 말을 건네고, 서운함을 설명하고, 서로 조금씩 자신을 고쳐 가며 관계를 이어 간다. 사랑은 완벽하게 나에게 맞는 상대를 발견하는 일이라기보다 나에게 맞추어지지 않은 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 가는 일에 더 가깝다.

루이스의 지옥: 사랑하지 않아도 외롭지 않은 세상

바로 이 점에서 인공지능이 주는 인공 친밀함의 편안함과 안전함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나를 기다리게 하지 않고, 좀처럼 화내지 않으며, 내 취향에 맞추어 말하는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나를 중심에 놓는 관계’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나에게 맞추어지지 않는 타인을 견디고 사랑하는 능력을 잃지 않을까 하는 의문 말이다. 문제는 인공지능과 친밀해지는 것 자체가 아니다. 그 친밀함이 사랑의 방향을 타인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데 진짜 위험이 있다. 사랑이 나와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나 자신을 내어 주는 일이 아니라 나를 가장 편안하게 이해하고 만족시켜 주는 대상을 선택하는 일이 된다면, 결국 사랑의 중심에는 타인이 아니라 나만 남는다.

성경이 말하는 죄도 이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을 신뢰하고 사랑하기보다 자기 욕망을 중심에 놓는다. 문제는 사랑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랑의 중심이 바뀐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야 할 사랑이 점점 자기 자신을 향해 굽어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인공 친밀성이 제기하는 더 깊은 문제는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루이스(C. S. Lewis)는 『천국과 지옥의 이혼』(The Great Divorce)에서 지옥을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점점 더 멀어져 가는 황량한 도시의 모습으로 그려 낸다.9) 그곳의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는 불편을 견디지 못하고, 이웃과 다툴 때마다 더 먼 곳으로 집을 옮긴다. 마침내 서로의 거리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멀어진다. 그러므로 루이스가 그려 낸 지옥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곳이라기보다 타인을 견디는 수고를 피하려다 끝없이 거리가 멀어져 버린 곳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인공 친밀성의 위험은 역설적이다.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지만 그 연결은 정작 나와 다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인내와 희생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내가 원하는 만큼 가까이하고, 불편해지면 언제든 거리를 둘 수 있는 관계에 익숙해질수록 사랑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타인을 선택하는 일이 된다. 인공 친밀성이 만들어 내는 것은 사랑이 없는 세계라기보다 타인을 사랑하지 않아도 외롭지 않다고 느낄 수 있는 자기 사랑의 세계일지 모른다.

성경이 말하는 감정

감정의 강도가 아니라 어디로 향하는가이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좋은 감정이란 무엇일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공 친밀성의 더 깊은 위험은 인간에게서 감정을 빼앗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모든 감정의 방향을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놓는 데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에서 감정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기독교 신학은 감정을 이성의 반대편에 놓지 않으며, 마음속에 떠오른 감정을 곧바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가 보았듯 인간은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하는 영역이 칼로 자르듯 나뉜 존재가 아니다. 생각하고 느끼고 결단하는 주체는 하나의 ‘나’이며 감정은 하나님과 세계와 이웃을 대하는 전인적인 반응이다.10)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단지 얼마나 강하게 느끼느냐가 아니라 그 감정이 무엇을 향하느냐이다.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면 진실을 숨길 수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면 손해를 감수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다. 분노 역시 상한 자존심을 지키는 힘이 될 수도 있고 짓밟힌 이웃을 외면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도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s)에서 참된 신앙의 중요한 부분이 거룩한 감정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감정의 강도나 눈물, 신체적 반응 자체가 참된 믿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참된 감정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을 향하고, 교만보다 겸손을 낳으며, 마침내 삶의 변화와 실천이라는 열매를 맺는다.11)

바빙크와 조나단 에드워즈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질문에 답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중요한 것은 감정을 얼마나 강하게 느끼느냐가 아니라 그 감정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느냐는 것이다. 분노가 커졌다는 사실보다 그 분노가 상한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인지, 억울한 이웃을 돕게 하는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슬픔과 기쁨도 마찬가지다. 좋은 감정은 자기 자신 안에서 맴돌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성육신: 안전한 거리를 깨고 그 사람 곁으로 건너가는 공감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인공 친밀성을 바라보는 신학적 기준을 찾을 수 있다. 인공지능과의 대화에서는 자연스럽게 “내가 무엇을 느끼는가”를 중심에 둔다. 하지만 신앙의 성숙은 자기감정을 끝없이 확인하는 데 머물지 않고,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내 상처에서 이웃의 상처로,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책임지려는 마음으로 시선을 옮겨 가게 한다. 그리고 그 움직임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고통을 멀리서 정확하게 분석하신 것이 아니라 몸을 입고 인간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다. 배고픔과 눈물을 겪고, 배신당하고, 마침내 죽음까지 겪으셨다. 그런 점에서 성경이 말하는 공감은 인공지능이 보여 주는 정교한 감정 판독과는 다르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몸소 보여 주신 공감은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알아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 사람이 있는 자리까지 건너가는 일이다. 그렇게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그의 곁에 머물며 함께 걷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리를 좁히는 데에는 대가가 따른다. 십자가는 사랑이 결코 안전한 거리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공감은 상대의 감정을 정확히 읽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곁으로 가고, 시간을 내어주고, 때로는 함께 울며, 필요하다면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책임 있게 곁에 머무르는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는 감정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 발걸음을 바꾸는 연민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25-37)를 통해 우리의 감정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주신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다’(눅 10:33)고 할 때 사용된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몸속 깊은 곳, 특별히 창자가 움직일 만큼 온몸으로 느끼는 연민의 감정을 가리킨다. 타인의 고통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픔 앞에서 내 마음과 몸까지 흔들리는 감정이다. 이처럼 성경은 타인의 고통과 연약함 앞에서 일어나는 불편하고도 깊은 감정을 소중하게 여긴다.12)

그러나 비유는 그 격한 감정에 머물지 않는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그의 상처를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자기 돈을 내어 그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며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약속한다. 연민은 마음속에서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가던 길을 바꾸고, 자신의 시간과 돈을 내어놓게 했다. 심지어 앞으로의 계획까지 바꾸어 놓았다. 사마리아인의 연민에는 타인의 고통을 향해 가까이 가고 마침내 그를 위해 행동하게 하는 힘이 담겨 있었다.

화면 앞의 안주와 피 흘리는 이웃을 향한 외면

이 비유는 인공지능 시대의 인공 감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한다. 인공지능의 감정 기술은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기 어려운 아이나 장애인에게서 위험 신호를 발견하고, 필요한 도움을 받을 기관을 찾아 주며, 말로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의 뜻을 전달하는 유용한 도구이다. 이처럼 유익하게 쓰일 수 있는 기술을 무턱대고 거부하거나 적으로 돌릴 이유는 없다. 문제는 이 기술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느냐에 있다. 인공지능의 감정 기술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우리를 열어 주는 대신 자기 자신 안으로 더욱 깊이 가두어 버린다면,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은 위로를 받으면서도 정작 서로의 고통에는 무관심해질 수 있다. 외로움을 달래 주는 기술은 늘어나는데 외로운 사람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줄어드는 역설이 일어나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건네는 “당신의 고통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이 고통받는 사람을 실제 사람과 공동체로 이어 주지 못하고 오히려 컴퓨터 화면 앞에 붙잡아 둔다면, 그 공감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걸었던 길과 정반대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있는 셈이다.

나가며: 편리한 위로를 넘어 기계보다 믿을 만한 이웃으로

끝으로 명심해야 할 것은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인공 감정 기술의 성공이 어쩌면 우리 인간 공동체의 실패를 비추는 거울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기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까닭은 기계가 너무 인간적이어서만은 아니다. 사람에게 말했다가 판단받을까 두렵고, 폐를 끼칠까 미안하며, 자신의 약함이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날로 정교해지는 인공지능 챗봇의 위험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일까. 물론 정확한 분석과 비판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에 앞서 교회와 기독교인은 이 현상을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과연 기계보다 더 믿을 만한 이웃이 되어 주고 있는가” 말이다.

그 물음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일상의 태도에서부터 답을 찾아야 한다. 외로움이 밀려올 때 챗봇이 주는 매끄럽고 즉각적인 위로에 숨기보다 조금 어색하고 서툴더라도 지체에게 먼저 짧은 안부를 건네며 자신의 약함을 열어 보이는 수고가 그것이다. 기계와의 대화가 주는 안전한 고립을 벗어나 사람과 마주하는 마찰을 견디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살아내는 일상의 연습이기 때문이다. 교회 역시 정답을 서둘러 내놓거나 쉽게 판단하기 전에 상처 입은 이들이 비난받을 두려움 없이 머물 수 있는 넉넉한 틈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한밤중 모니터 앞에서 홀로 지쳐 가는 청년들의 방문을 조용히 두드리고 그들의 서툰 말과 깊은 침묵까지 함께 견뎌 주는 식탁을 차려내는 일이다. 끝까지 들어 주고, 비밀을 지켜 주고, 당장 답을 주지 못하더라도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람. 필요하다면 함께 도움을 찾아 나서는 사람. 사람들이 인공지능과 감정을 나누는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진짜 사람과 공동체이다. (*)


주)

  1. Alasdair MacIntyre, After Virtue, 3rd ed. (Notre Dame, IN: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2007), 11–17.
  2. Martha C. Nussbaum, Upheavals of Thought: The Intelligence of Emotion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19–33.
  3. Collective Intelligence Project, 2025 Global Dialogues Index Report: One Year in Global Dialogues—How the World Lives with AI (2026), 14, 23, 26.
  4. Collective Intelligence Project, 2025 Global Dialogues Index Report, 14-24. 이 조사는 디지털 기술에 익숙한 참여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일부 편향이 나타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5. Rosalind W. Picard, Affective Computing (Cambridge, MA: MIT Press, 1997), 3.
  6. Picard, Affective Computing, 88–91.
  7. Nick Bostrom, 『딥 유토피아』, 김의석 옮김 (서울: 까치글방, 2026), 169–170.
  8. Sherry Turkle, “Reclaiming Conversation in the Age of AI,” After Babel, August 26, 2025. https://www.afterbabel.com/p/reclaiming-conversation-age-of-ai
  9. S. Lewis, 『천국과 지옥의 이혼』, 김선형 옮김 (서울: 홍성사, 2019)
  10. Herman Bavinck, Reformed Ethics, vol. 1, Created, Fallen, and Converted Humanity, ed. John Bolt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9), 47–50.
  11. Jonathan Edwards, Religious Affections, ed. John E. Smith,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2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59), 95–99; 383–461.
  12. Meghan Sullivan, ‘Gut-wrenching Love: What a Fresh Look at the “Good Samaritan” Story Says for Ethics Today,’ Christian Ethics Today, May 5, 2025, https://christianethicstoday.com/wp/gut-wrenching-love-what-a-fresh-look-at-the-good-samaritan-story-says-for-ethics-today/

이춘성 목사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세운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에서 사역하였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석사(M. Div.), 고신대에서 기독교 윤리학 박사(Ph.D.)를 하였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 목사,  한기윤 선임연구위원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