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고린도전서 7:20-24
들어가며: 불안의 안개와 흔들리는 일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우리 성도님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공통적으로 들리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불안’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불안’이라는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가 짙게 깔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인공지능, 즉 AI가 우리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소식 앞에 “과연 내 일터가 내일도 안전할지, 또 나의 미래가 정말 보장될지” 누구도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없는 고단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이 급변하는 AI 시대 속에 서 있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진짜 직업 소명’이 무엇인지 성경의 답을 찾아보려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요동치며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세밀한 소명의 음성을 듣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능력주의의 종말: 무너지는 푯대와 흔들리지 않는 중심
성도 여러분, 미국에는 한 광부에 관한 전설이 있습니다. 19세기 증기기관 굴착 드릴이 광부들을 빠르게 대체하기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때 한 노동자가 기계와 대결을 자처했습니다. 직업을 뺏길 위험에 처한 동료들의 노동권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존 헨리(John Henry)였습니다. 존은 반나절 동안 쉬지 않고 망치질을 했습니다. 결국 존은 기계보다 암반에 구멍을 더 멀리 뚫었습니다. 존의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결이 끝나자마자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결국 증기기관이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고 많은 사람이 직업을 잃었습니다.
오늘날 21세기에는 더 강력한 AI가 나타났습니다. 현대차의 아틀라스(Atlas) 로봇은 생산라인의 인간 노동을 빠르게 대체할 것입니다. 효율성 면에서 인간은 먹지도 쉬지도 않는 로봇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기업가라면 인간과 로봇 중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세상의 계산은 이미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육체적 노동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스마트폰에 장착된 AI로 통역이 가능하고, 사무 업무는 AI가 몇 사람이 할 일도 금방 해치웁니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AI로 멋진 영상을 제작할 수 있고, 실제로 AI로만 만든 영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도대체 AI가 대체할 수 없는 직업이 있기는 한 것인지 궁금할 정도입니다. 우리는 언제 우리 직업이 사라질지 알 수 없는 두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능력, 지위, 직함을 자랑하던 시대가 저물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우수한 대학에 입학하여 대기업의 직함을 얻으면 평생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 변호사, 판사, 연예인 등은 고수익과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십시오. 이 중에 AI의 위협에서 안전한 직업이 있습니까? 대기업은 AI로 할 수 있는 업무에는 더 이상 신규 고용을 하지 않습니다. 미래 전문가들은 AI가 ‘사’가 붙은 직업을 가장 빠르게 대체할 것이라 예상합니다. AI는 의사보다 진단이 빠르고 정확하며, 변호사나 판사보다 법률 적용을 더 잘하게 될지 모릅니다. 어제의 사회적 지위가 내일에는 쓸모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허무합니까? 성경 전도서 1장 1절과 2절을 보시면 솔로몬의 뼈아픈 외침이 나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세상은 우리에게 “경쟁에서 이겨 성과를 내라” 가르쳤고, 우리도 그 푯대를 향해 달렸으나 이제는 그 푯대 자체가 날아갈 판입니다. 인공지능 시대가 ‘능력주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임기응변으로는 안 됩니다. 그저 새롭게 생각할 때가 아니라 본질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거센 폭풍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남습니다. 과연 성경이 말하는 흔들리지 않는 직업의 진짜 기준은 무엇일까요? 답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직업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라는 의식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보통 직업을 자기 노력으로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명성과 고소득을 약속하는 직군일수록 들어가는 문이 워낙 좁으니 이것이 자기 노력의 열매라는 의식은 훨씬 더 강할 것입니다. 그 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은연중에 패배자로 보지 않겠습니까? 성공했다는 그들은 높은 자리에서 저 아래로 내려다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은 다릅니다. “내가 여기 왜 있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우리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생각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세상과는 다른 정체성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에, 이 지구에, 그리고 바로 여기에 왜 있습니까? 청소년 시기 즈음 되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의문을 가지지 않습니까? “나는 왜 있지?” 저도 이 답이 보이지 않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깊이 사색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치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모습 같지 않습니까?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시 8:3) 하고 노래했던 그 고백 말입니다.
이 질문에 세상은 그저 이렇게 답합니다. “우연이다!” 우주의 탄생부터 인류의 역사가 이렇게 흘러온 것도 그리고 당신이 존재하는 것도 전부 우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도 없습니다. 이에 세상은 우리에게 참 달콤한 비전을 제시합니다. “정해진 게 없으니, 미래는 당신에게 달렸다.” 마치 우리 인생은 흰색 도화지 같은 것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왔을 때 아무것도 그려진 게 없으니 우리 스스로가 인생의 그림을 그리면 된다는 것이지요. 세상은 우리에게 자유라는 선물을 주는 것 같습니다. 내 인생을 내가 꾸리는 자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 세상에 서서 어떻게 될지 모를 미래를 향해 혼자 나아갑니다. 그렇게 나아갈 때 갑자기 AI와 같은 거대한 방해물이 나타나 다시 우리 인생을 쓸어버리고 흰 도화지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맨땅에 헤딩하듯 처음부터 다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우연히 쌓은 인생이 우연히 날아가 버립니다.
우리는 우연히 발생한 (일부러 ‘발생’이라 했습니다!) ‘어떤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중요한 목적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에 아름다운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로봇 아틀라스가 기계적인 일을 대신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이 거룩한 목적만큼은 결코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거대한 우주 안에서 바로 여기에 두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은 그저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사명(使命)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직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업을 보는 관점이 세상과 정반대입니다. 오늘 본문은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 말씀합니다. 기계가 우리 일터의 겉모습은 바꿀 수 있어도,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만큼은 가로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직업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직업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명(召命)이라 합니다. 이 소명은 비단 거창한 직업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가사 노동이나, 누군가에겐 단순해 보이는 사무 업무, 혹은 은퇴 후의 평범한 일상까지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소명의 자리인 것입니다. 물론 직업을 얻기 위해 우리가 노력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우리가 남을 이기고 능력을 스스로 발휘하여 쟁취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가꾸고 다스리라고 아담을 그곳에 두신 것처럼 우리를 어느 직업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핵심은 어떤 직업이냐에 있지 않습니다. 24절에 그 핵심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이 말씀을 풀어 말하자면, “네가 어느 직업에 있느냐, 그 직업이 많은 혜택을 주느냐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네가 어떤 직업을 가졌든 하나님과 함께하는가를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직업은 평생직일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서양을 예로 들면 이름 자체가 직업 이름을 썼을 정도로 태어나면서부터 같은 일만 했습니다. 예를 들면 스미스(Smith)란 영어 이름은 대장장이 아닙니까? 지금은 AI가 나타나면서 우리 인생에 직업이 몇 번 바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소명의 핵심은 직업의 수명이 짧든 길든 그 순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보시는 바는 과연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느냐입니다.
직업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태도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인은 직업을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구별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직업을 통해 어떻게 성공할까, 어떻게 경쟁에서 살아남을까, 그런 고민에만 매몰되어 살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5장 10절 말씀처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하신 그 말씀대로 매 순간 어떻게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할까 늘 시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어떤 급한 상황이 발생했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내 결정과 행동에 따라 내 승진이나 성공 여부가 달라진다고 한다면 보통은 “어떻게 하면 내가 이길까? 어떻게 하면 이득을 볼까?” 생각하며 인간관계가 깨져도 어느 정도 비윤리적인 선택이라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나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달려 있고 지위가 떨어지거나 가지고 있는 권한이 줄어든다면, 남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약간은 비윤리적인 선택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생존의 문제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내가 어떻게든 생존하려면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됩니다.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어 놓고는, 다른 민족의 탐욕을 따라 고기가 없다며,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민 11:4)하고 외치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결국 불안이라는 병을 낳습니다. 살아남는 데에만 생각이 집중되면 “누가 나를 칠까? 언제 내가 직장에서 쫓겨날까?” 이런 생각으로 평생을 살게 됩니다. 짧은 행복이야 올 수 있겠지만, 어느 자리에 오르자마자 또 위로 오르기 위해, 혹은 내가 밑으로 내려갈까 봐 늘 두려울 겁니다.
이때 세상과는 전혀 다른 목표로 사는 사람이 바로 기독교인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근본부터 다릅니다. “나는 이 직업 세계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고 늘 스스로에게 자문(自問)하며 삽니다. 직업에서 살아남느냐, 이 직업에서 얼마나 오래 일할 것인가는 결국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으니 하나님께서 그 직업에서 빼내실 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이 세상 가운데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삽니다. AI 아틀라스가 우리의 성과와 효율은 정의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정체성만큼은 결코 정의할 수 없습니다. 직업이 나를 정의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으로, 직업으로 들어가는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해 주셨습니다(사 43: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의 놀라운 특권이라고 했습니다(요 1:12). 세상은 어둠이고 우리는 빛이며 세상은 죽었고 우리는 살았습니다. 세상은 종말에 불의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우리는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딛 3:7)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세상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지금 여기서, 그리고 미래에 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생존이 문제가 아니란 것이지요.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즐겁게 사는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그 사랑의 표현이 바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어떤 사람은 법과 사랑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가 부모님께 효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도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드리는 것 아닙니까? 그 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매 순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을 기준으로 사는 겁니다.
성경은 우리 삶의 모든 구체적인 부분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슨 직업을 택해야 하는지, AI 관련 직업을 구하는 게 옳은지 아닌지 일일이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거룩한 양심과 정의를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지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른 것을 감지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다만, 그것이 세상의 논리와 악으로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 그 감각을 유지하는 방법은 매일 성경을 묵상하고 주일 예배를 온전히 드리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정신을 말씀으로 물들여야만 매일 바뀌는 상황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됩니다.
이렇게 나의 내면과 정신을 하나님의 법으로 채우고 우리는 사회에 들어갑니다. 거기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웃에게 하나님의 법을 실천합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하신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우리가 경쟁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까? 정당한 경쟁은 발전을 이룹니다. 다만, 회사라면 능력이 모자라서 뒤처지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돕고, 자영업자라면 부하직원이나 종업원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고 행복한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고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생각하기보다 내 부서에서 내가 지역에 소외된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은 가사 노동을 하는 분들이나, 은퇴 후의 삶을 사시는 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소명입니다. 내가 있는 그곳에서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말입니다.
왜 이런 삶이 가능하냐?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이미 받은 은혜가 있고 약속받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세상에 나아가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받은 것이 많으므로 세상에 나가서 나누라는 사명입니다.
마치며: 기술의 파도를 넘는 소명의 충성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세상은 인공지능으로 훨씬 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사회 구조가 어떻게 뒤바뀔지 모르고 기계가 우리 자체를 어떻게 대체할지 알 수 없기에 이 변화는 우리를 참 불안하게 합니다. “정말 내가 내가 아니게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어떻게 변화해도 절대 달라지지 않는 우리의 진짜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건축 노동자로, 은행원으로, 또 어떤 사람은 학자로 부르셨는데요. 핵심은 내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일에 나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어디에 부르셨든 그 일을 통해 나를 증명하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드러내라고 우리를 그 일에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합니다. 그곳이 어디든 우리 삶의 목표는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은 악하지만 우리는 빛으로 살고 세상은 맛을 잃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소금으로 맛을 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AI 도입으로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지만 우리는 세상과 똑같이 외면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기술에 밀려날 위기에 처한 이들을 따뜻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온 나라가 기계화와 효율성만을 좇을 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온기를 간직한 공동체로서 세상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존재 자체’로 환대하고 수용한다면 우리 교회가 세상 사람들이 숨을 쉴 수 있는 ‘살맛 나는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내일부터는 기계 화면을 응시하기 전에 곁에 있는 가족의 눈을 먼저 마주하십시오. 새로운 기술의 발전에 감탄하기에 앞서 내 이웃의 고단한 삶을 먼저 가슴에 품으십시오. 기술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소명에 충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
주)
- AI와 인간을 비교한 교양서적으로는 김재인,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서울: 동아시다, 2017)을 보라.
- 마르쿠스 가브리엘, 『인간은 동물이다』 (파주: 열린책들, 2025), 135.
- 데이비드 갈런드, 『BECNT 고린도전서』 (서울: 부흥과개혁사, 1998), 413.
[2026년 3월 이슈설교 | 설교 작성을 위한 가이드]
제목: AI 시대: ‘성공’의 종말, ‘소명’의 시작
본문: 고린도전서 7:20-24
A. 들어가며: 불안의 안개와 흔들리는 일터
- 현상 진단: AI가 일자리를 위협하며 내일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불안’이라는 짙은 안개가 시대를 덮고 있음.
- 문제 제기: 성과와 경쟁 중심의 ‘능력주의’를 푯대 삼아 달려왔으나 이제 그 푯대 자체가 무너지는 실존적 위기에 직면함.
- 설교 방향: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진짜 직업 소명’의 답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찾고자 함.
B. 능력주의의 종말: 무너지는 푯대와 흔들리지 않는 중심
- 기계로 대체되는 노동의 현실 (전 1:2)
- 19세기 증기기관이 노동을 대체했듯 21세기 AI가 인간의 노동력을 압도함. 효율성만 따지는 세상의 계산 앞에서 인간의 설 자리는 좁아지고 있음.
- 전문직의 위기와 허무의 극복 (전 1:1)
- 의사, 변호사 등 선망의 대상이던 전문직마저 대체될 위기에 처함. 성과를 자랑하던 시대의 종말 앞에서 임기응변이 아닌 말씀의 중심을 회복해야 함.
C. 직업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라는 의식
- 목적을 지닌 하나님의 형상 (창 1:26)
- 우리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라는 거룩한 목적을 위해 창조된 피조물임. 기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거룩한 목적을 대신할 수 없음.
- 쟁취한 결과가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召命) (고전 7:20)
- 직업은 내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자리로 부르신 소명임. 가사 노동부터 전문직까지 모든 일터는 하나님이 부르신 거룩한 자리임.
D. 직업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태도
- 성공과 생존을 넘어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 (엡 5:10; 민 11:4)
- 생존 경쟁에 매몰되어 비윤리적인 선택을 고민하기보다 매 순간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며 살아야 함.
-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고한 정체성 (사 43:1; 요 1:12; 딛 3:7)
- 직업이 나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원한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과 직업 속으로 들어가야 함.
-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는 사랑의 공동체 (요일 5:3; 마 22:39)
- 말씀과 예배로 영적 감각을 유지하며, 정당한 경쟁 속에서도 이웃을 돕고 환대하는 사랑의 법을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명임.
E. 마치며: 기술의 파도를 넘는 소명의 충성
- 메시지: 세상은 효율과 성과를 좇으라 하나 하나님은 소명에 충성하라 하심. 내 능력을 증명하는 ‘직함’보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를 지키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복된 인생임.
- 최종 권면: 기술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소명을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웃을 환대하는 안식처로 삼으시며 흔들리지 않는 참 평안을 주실 것임.
임모세 목사는 부산대학교에서 철학(학사)를 전공하고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네덜란드 캄펀신학교에서 교회사 석•박사를 취득했다. 현재는 남울산장로교회 담임이며 아내와 4명의 아들과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