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저항으로서의 안식
지난 학기 ‘일의 신학’(theology of work)이라는 과목을 강의했다. 많은 학생이 관심을 보이며 필요성에 공감한다. 일터 사역, 직업 소명, 일의 윤리라는 표현도 신선하게 들리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만큼 우리는 일과 영적 소명을 연결하는 과제에 대해서는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그런데 ‘휴가’, ‘쉼’, ‘놀이’라는 단어에 신학적 언어를 붙이면 사정이 달라진다. 휴가의 신학, 쉼의 소명, 놀이의 사역이라는 말은 문법적으로 가능해도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쉬고, 놀고, 가만히 머무는 일에 신앙적 의미를 부여하는 데 우리는 아직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성경과 기독교 전통을 들여다보면 쉼과 휴식, 축제와 놀이, 기쁨과 즐거움은 신앙의 주변부에만 머물지 않는다. 창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기쁨, 안식일의 제도, 절기의 축제, 식탁 교제, 새 하늘과 새 땅의 잔치 이미지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쉼과 즐거움을 포함한다. 더군다나 성경적으로 안식은 분명히 명령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 안에서는 쉼보다 헌신이, 놀이보다 사명이, 가만히 머무는 시간보다 바쁘게 섬기는 시간이 더 쉽게 신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것은 한국교회만의 문제라기보다 근면과 성취를 강조해 온 한국 사회의 역사와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어느 교회에서 담임 목사의 여름휴가 안내문을 본 적이 있다. 목사는 쉼과 영적 재충전을 위해 잠시 휴가를 다녀오겠다고 알리면서도 한여름에 생계를 위해 땀 흘려 일해야 하는 성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죄송하다고 했다. 성도들의 삶을 헤아리는 겸손한 마음은 감동적이었지만 동시에 목회자의 쉼조차 송구스럽게 설명되어야 하는 현실이 마음에 남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쉼은 단지 재충전을 위한 시간이 아니다. 쉼은 우리가 멈추어도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신앙의 고백(“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 시 46:10)이자, 인간이 자기 노동과 성과로 세계를 지탱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 살아가는 피조물임을 인정하는 신앙의 실천이다. 그러므로 안식은 개인 성과주의와 소비주의 시대에 대한 구체적인 저항이다.
워라밸의 증대와 피로의 새 얼굴
쉴 시간은 있는데 왜 쉬지 못하는가
한국인의 노동시간은 국제적으로 볼 때 여전히 높은 편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워라밸의 조건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근로시간 단축, 연차 사용에 대한 인식 변화, 재택근무와 유연근무제의 확산, 여가와 자기돌봄에 대한 관심은 이전 세대와는 다른 생활 감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여가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인구의 비율은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1) 이는 한국 사회에서 쉼이 삶의 필수적 구성 요소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워라밸의 조건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음에도 사람들의 체감 피로는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휴가를 다녀와도 몸과 마음이 개운하지 않고, 여가 시간이 생겨도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이 따라붙는다. 정신과 의사인 김은영은 현대인이 쉼에 대한 불안, 죄책감, 성취 강박, 자기관리 압박, 비교 심리로 인해 온전한 쉼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온전한 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멈춤과 회복인데 현대인은 신체적 멈춤보다는 마음의 회복이라는 과제에 더욱 직면하고 있다고 본다.2) 쉬는 시간은 늘었지만 안식은 깊어지지 않는 이 역설은 휴가 시간이 얼마나 확보되었는가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문제는 쉬는 시간이 주어졌는가만이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떤 마음과 질서 안에서 받아들이는가에 있다. 여기에는 쉼을 대하는 현대인의 마음, 그리고 자신을 끊임없이 관리하고 증명해야 한다는 시대의 분위기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
의무의 피로에서 성과의 피로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과거 산업사회에서 사람을 지치게 한 것은 주로 외부의 명령과 강제였으나, 이제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은 “할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과도한 긍정과 성과를 통해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압박이라고 한다.3) 공장, 학교, 군대, 병원, 회사와 같은 제도는 사람에게 정해진 규칙을 부여했고 개인은 그 규칙에 맞추어 움직여야 했다. 그 사회의 언어는 대체로 “해야 한다”, “해서는 안 된다”, “복종해야 한다”에 가까웠다. 사람을 억압하는 힘은 바깥에 있었고 피로는 외부의 강제에 의해 노동하고 복종하는 데서 생겨났다. 물론 이런 피로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긴 노동시간, 불안정한 고용, 조직의 압박 속에서 지친다.
한병철이 보기에 현대사회에서는 또 다른 종류의 피로가 덧붙는다. 오늘의 사회는 겉으로는 더 자유로워 보인다.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지고 있고, 자기계발과 성취의 기회도 넓어진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바로 그 자유의 언어가 새로운 압박으로 작동한다는 데 있다. 이제 사람을 몰아가는 말은 “너는 해야 한다”보다 “너는 할 수 있다”에 가깝다. 더 성장할 수 있다, 더 건강해질 수 있다,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 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이 우리를 격려하는 동시에 몰아붙인다. 과거의 인간이 명령에 복종하는 주체였다면, 오늘의 인간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관리하는 성과 주체가 된다. 밖에서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사람은 자기 안에 감독관을 세워 놓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쉬는 시간조차 완전히 쉴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과거의 휴가가 외부의 노동 명령에서 잠시 벗어나는 시간이었다면, 오늘의 휴가는 자기관리와 경험 생산의 또 다른 무대가 되기 쉽다. 잘 쉬어야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고, 여행도 나를 성장시키는 경험이어야 하며, 여가도 나의 취향과 정체성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이 따라붙는다. 그래서 사람은 휴가지에서도 SNS에 접속하여 사진과 소감을 남기고, 쉬는 시간마저 의미 있게 사용해야 한다고 느낀다. 노동의 장소는 떠났지만 성과의 논리는 마음 안에 남아 있는 셈이다.
거룩한 비움에서 상품이 된 휴가로
휴가를 뜻하는 영어 단어들은 흥미로운 신학적 암시를 담고 있다. 영어의 holiday는 본래 holy day, 곧 거룩한 날에서 비롯되었다. 휴일은 일을 하지 않는 날이라는 의미를 넘어 시간 속에서 거룩함을 경험하는 날이었다. 일상의 반복적 노동에서 물러나 하나님과 공동체와 창조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이 바로 휴일이었다. Vacation 역시 ‘비어 있음’을 뜻하는 라틴어 vacare, vacatus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비어 있음”, “자유로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의미를 지닌다. 휴가는 더 많은 활동을 채워 넣기보다 비워 둠으로써 자기 자신과 하나님 앞에 다시 머무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4)
하지만 현대인은 이러한 “비어 있음“을 쉽게 견디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불안하게 느껴진다. 휴가를 가면서도 일정을 촘촘하게 짜고, 낯선 곳에 가서도 사진을 찍고 기록하고 공유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낀다. 쉬는 시간마저 의미 있게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휴가 중에도 업무 이메일을 확인하고, 여행지에서도 자기계발서를 읽어야 마음이 놓인다. 아이들에게 더 많은 체험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끼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 쉬러 떠났다가 돌아와서는 더 피곤하다고 말하는 일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휴가도 상품으로 바꾸어 놓았다. 어디에 갔는가, 무엇을 먹었는가, 어떤 숙소에 머물렀는가, 어떤 사진을 남겼는가가 휴가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관광 산업은 휴가를 고급 상품으로 포장하고, 광고는 이국적인 장소와 완벽한 풍경을 제시하며, 그곳에 가면 행복해질 것처럼 약속한다. 그러나 장소는 바뀌었지만 마음이 그대로라면 휴가지는 또 다른 비교와 불안과 소비의 무대가 될 수 있다.
휴가와 쉼의 신학
기독교 신앙은 휴가와 쉼을 다음 단계를 위한 재충전과 같은 공리적 쓸모가 아닌 창조 신앙과 연결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쉼 그 자체가 목적이며 충만한 의미를 갖는다.
창조 세계는 생존의 자원만이 아니라 기쁨의 선물이다
미국 칼빈대학의 철학자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칼빈주의의 핵심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관점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선물 사상은 구원론만이 아닌 창조론에도 적용된다.5) 하나님은 인간과 세상을 어떤 외적 필요 때문에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즐거움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사랑의 행위로 세상을 지으셨다. 그렇다면 창조 세계는 인간의 생존과 생산을 위한 자원 창고로만 이해될 수 없다. 세계는 하나님의 기쁨에서 나온 선물이며, 인간은 그 선물을 감사함으로 누리도록 부름받은 존재다.
개혁주의 신앙은 종종 금욕적이고 엄격한 이미지로 이해되지만, 칼뱅의 창조 이해는 감각적 즐거움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는다.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하나님이 음식을 창조하신 목적을 말하면서 음식이 사람의 생명을 지탱하는 필수품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기 위해서도 창조되었다고 말한다.6) 그는 사물의 필수적 용도만 인정하고 그 외의 용도를 부인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그런 태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베풀어지는 정당한 열매를 빼앗아가는 것이며, 인간이 모든 감각을 잃어 목석이 되지 않는 한 실현되기도 어렵다고 보았다. 이 대목은 오늘의 휴가 신학에 적지 않은 통찰을 준다. 하나님은 인간을 일하는 존재로만 만들지 않으셨다. 인간에게는 맛보고,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감탄하고, 웃고, 노래하고, 쉬고, 즐거워하는 능력이 주어졌다. 이 감각적 능력은 죄의 통로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는 창조주의 선물이다.
시편 104편 15절은 “포도주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기름이 얼굴을 윤택하게 하며, 양식이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한다”고 노래한다. 성경은 음식을 생존의 연료로만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필수적 용도와 더불어 아름다움과 기쁨의 가치를 주셨다. 감각적 즐거움은 무제한 긍정이 아닌 절제와 함께해야 한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롬 13:14). 음식과 휴식과 즐거움이 하나님을 잊게 만들고, 이웃을 외면하게 하며, 자기 욕망에 사로잡히게 한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적 휴가 윤리는 즐거움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탐닉을 경계한다. 금욕주의와 방종 사이에서 창조의 선함과 타락의 현실을 함께 붙드는 지혜가 필요하다.
놀이와 여가에는 초월을 향한 감각이 있다
휴가에는 종종 놀이가 수반된다. 사람들이 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데에는 놀이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영향을 준다. 그러나 놀이는 인간 삶의 부차적 장식이 아니다. 화란의 역사학자이자 문화이론가인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놀이는 문화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말한다.7) 이러한 주장은 인간이 먼저 생존과 노동의 질서를 만들고 그 후에 여유가 생겨 놀이를 발명했다는 식의 이해를 흔든다. 오히려 놀이가 더욱 원초적 인간성이며 문화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규칙, 상징, 경쟁, 축제, 예술, 의례와 같은 문화의 중요한 요소들이 놀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L. Berger, 1929-2017)는 이와 같은 놀이의 원초성을 초월의 흔적으로 본다. 그는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도 인간이 초월을 경험하는 일상의 흔적 다섯 가지로 질서, 유머, 권선징악, 희망과 함께 놀이를 제시한다. 아이들이 놀이에 깊이 빠져들거나 어른들이 음악을 연주하거나 스포츠와 예술 활동에 몰입할 때, 사람은 일상의 물리적 시간을 잠시 잊는다. 놀이의 경험은 인간이 생존과 생산의 기계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8) 우리는 놀이와 쉼 속에서 시간의 노예가 아니라 영원을 향해 열린 존재임을 어렴풋이 경험한다.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통찰을 창조 신앙 안에서 더 깊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생존을 위한 자원만이 아니라 감사와 경탄과 기쁨으로 누리도록 주어진 선물이다. 그러므로 쉼과 놀이는 노동 이후에 남는 부스러기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로 살아가는 한 방식이며, 세계를 선물로 받아들이는 감각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안식은 멈춤과 기쁨을 함께 배운다
기독교적 쉼은 안식의 영성 안에서 더 깊어진다. 안식일은 일을 하지 않는 날이라는 뜻을 넘어,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고백하고 드러내는 날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세계를 돌보도록 부름받았지만 세계를 구원하거나 유지하는 최종 책임자는 아니다. 우리가 멈출 때,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이 아님을 배운다. 몇년 전에 세상을 떠난 미국의 영성신학자 마르바 던(Marva J. Dawn, 1948-2021)은 안식일의 첫째 의미를 ‘그침'(ceasing)으로 본다. 그것은 일을, 생산과 성취를, 근심과 걱정을, 더 나아가 하나님이 되려는 노력을 그치는 것이다.9) 안식일의 우선적 의미는 종교 활동에 참여하거나 일을 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도록 자신을 맡기는 훈련이다.
안식은 또한 비움만이 아니라 기쁨의 회복이다. 쉼이 깊어지려면 일을 멈추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이 주신 세계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다시 받아들이는 감각이 필요하다. 미국의 목회상담학자 댄 알렌더(Dan B. Allender)는 안식일을 “단순한 휴식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즐거움을 경험하는 날”이라고 단언한다.10) 따라서 먹고, 걷고, 웃고, 대화하고, 음악을 듣고, 자연을 보고, 공동체와 함께 식탁을 나누는 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안식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물론 이 기쁨은 모든 일을 다 끝낸 뒤에야 누릴 수 있는 보상이 아니다. 목회도, 부모의 일도, 직장의 책임도, 연구와 가르침도 완전히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안식은 미완성의 삶 한가운데서 멈추는 믿음이다. 끝나지 않은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주어진 시간과 몸과 관계와 세계를 은혜로 다시 받는 것이 쉼이다.
안식은 함께 쉬게 하는 공의의 리듬이다
안식은 개인의 영적 회복에 머물지 않는다.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의 안식일 계명은 자녀와 종과 가축과 성문 안의 나그네까지 쉬게 하라고 명령한다. 레위기 25장의 안식년과 희년은 이 쉼을 땅과 가난한 자와 빚진 자에게까지 확장한다. 일터신학자 이효재는 현대인들의 쉼은 개인에 집중하지만, 성경은 함께 쉬는 안식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11) 이러한 안식의 의의는 근본적으로 고대 노예 노동의 질서와 다른 사회적 질서로 제시된 것이다. 미국의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이 말하듯 안식은 사람을 상품처럼 소비하고 끊임없는 생산을 요구하는 사회 관습과 그 배후에 자리한 우상들을 거부하는 공적 선언이다. 이집트에서 히브리 노예들에게는 안식이 허락되지 않았고, 바로의 체제는 오직 불안과 성과로만 사람을 몰아붙였다. 안식은 바로 이 불안의 체제에 “아니오”라고 말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살아가는 대안적 삶의 질서를 드러내는 새로운 실천이다.12)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 안식은 개인을 위한 보호와 명령을 넘어서 분주함과 수고로움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돌보고 배려하는 사랑으로 완성된다.
디지털 시대의 안식은 산만함을 거스르는 증언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안식의 필요가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오클라호마침례대학교 영문학 교수 앨런 노블(Alan Noble)은 현대의 중요한 영적 장벽 가운데 하나를 “끝없는 산만함”(endless distraction)으로 진단한다. 오늘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홀로 있는 시간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스마트폰, 소셜미디어, 스트리밍 서비스, 알림, 이메일, 뉴스 피드, 짧은 영상은 우리의 남는 시간을 거의 모두 차지한다. 이 산만함은 단순한 시간 낭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깊이 마주할 여백을 빼앗는 영적 문제다.13)
디지털 시대의 가장 큰 도전은 우리에게 성찰과 묵상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숏폼과 알고리즘이 삶의 리듬을 장악할수록 침묵, 기다림, 반복, 여백과 같은 신앙의 리듬은 쉽게 균열된다. 신속성과 편재성, 기술적 효율성과 정보화 속에서 아날로그적 경험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인간은 더 빠른 반응과 즉각적 소비에 길들여진다. 이러한 시대에 홍광수는 아날로그적 저항을 제시한다.14) 스마트폰과 SNS 접속을 내려놓고 자연 속의 느림과 묵상에 자신을 맡기는 시간은 알고리즘이 조직하는 시간 감각에 맞서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고 머물고 반복하는 신앙의 리듬을 회복하는 저항적 실천이다.
모두가 즉각 응답하고, 끊임없이 연결되고, 쉬지 않고 소비하는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의도적으로 멈추고 침묵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식탁을 나누는 것은 이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작은 표지가 된다. 노블은 그리스도인이 안식을 실천하는 것은 산만하고 강박적으로 일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시대의 신념적 기반을 뒤엎는 증언(disruptive witness)이라고 주장한다. 안식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의 행위이며 인생의 충만한 의미는 성과를 위한 분주함에 달려 있지 않음을 고백하는 것이다.15)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쉴 것인가?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근면, 책임, 성취, 헌신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아 왔고 교회 역시 그 문화 안에서 봉사와 사명을 강조해 왔다. 이런 배경에서 쉼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쉬려 하면 미안함과 불안이 따라붙기 쉽다. 그러므로 여름휴가와 안식의 회복은 더 좋은 여행지를 찾는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삶의 주도권을 다시 하나님께 맡기며, 가족과 이웃과 창조 세계를 새롭게 만나는 신앙적 훈련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섯 가지 실천을 제안할 수 있다.
첫째, 멈춤을 믿음의 고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휴가의 첫걸음은 일을 잠시 내려놓는 것이지만, 현대인에게 멈춤은 생각보다 어렵다. 일을 멈추면 뒤처질 것 같고, 연락을 끊으면 무책임한 사람이 될 것 같고, 교회 사역을 잠시 쉬면 공동체에 부담을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쉬지 않는 도구로 부르지 않으셨다. 엘리야가 지쳐 쓰러졌을 때 하나님은 먼저 그를 먹이시고 재우셨다(왕상 19:1-8). 영적 회복은 때때로 육체적 쉼에서 시작된다. 내가 멈추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고, 내가 쉬어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고백이 휴가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교회도 성도들에게 더 많이 봉사하라고 격려하는 것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잘 쉬라고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시간을 비워 두고 디지털 안식을 실천해야 한다. 휴가가 또 다른 과제가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모든 시간을 채우려는 마음 때문이다. 휴가지에서도 일정표와 맛집 목록과 인증샷 포인트가 휴식을 지배하면 쉼은 줄어든다. 리젠트칼리지 명예교수 폴 스티븐스(R. Paul Stevens)가 “시간을 낭비할 계획을 세우라”고 말한 것은 모든 시간을 유용성과 성과로 완벽하게 계산하려는 강박에서 해방되라는 뜻이다.16) 늦게 일어나 천천히 아침을 먹고, 목적 없이 걷고, 책을 조금 읽다가 덮고, 가족과 결론 없는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휴가 중에는 업무 메시지뿐 아니라 SNS 스크롤과 비교의 습관도 잠시 멈출 필요가 있다. 일정 시간 알림을 끄고, 식사 시간에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하루의 처음과 마지막을 화면이 아니라 침묵과 기도와 감사로 채우는 작은 실천이 필요하다.
셋째, 멀리 소비하기보다 가까운 장소를 새롭게 보아야 한다. 휴가는 반드시 먼 곳으로 떠나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집과 동네를 하나님의 선물로 다시 받아들이면 가까운 곳도 충분히 휴가의 자리가 될 수 있다. 집에서 천천히 식사하고, 동네 길을 걷고, 가까운 숲이나 강변을 찾고, 지역 시장을 둘러보고,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일도 깊은 쉼이 될 수 있다. 미국의 작가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세상을 두루 살피는 일은 마음을 두루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이며, 세상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17) 즉, 걷기는 생각과 몸을 연결하며, 장소와 세계를 새롭게 경험하여 감각의 회복을 이끌어 낸다. 그리스도인에게 걷기는 기도와 묵상의 훈련이기도 하다. 걷는 사람은 풍경을 지나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길가의 나무, 바람, 냄새, 사람들의 표정, 하늘의 빛을 조금 더 오래 마주한다. 휴가는 낯선 곳을 찾아 떠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익숙한 곳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다시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넷째, 느리게 걷고 창조 세계 앞에서 경이를 회복해야 한다. 미국의 해양생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은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18) 따라서 자연을 배우는 일은 지식을 많이 얻는 것보다 먼저 함께 보고, 듣고, 놀라워하는 데서 시작된다. 자녀와 함께 바다를 볼 때 모든 것을 교육 프로그램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파도 소리를 듣고, 조개껍질을 만지고,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창조 세계 앞에서 잃어버린 경이의 감각을 조금씩 회복할 수 있다. 천천히 걷는 일은 애쓰지 않고도 세상을 음미하게 되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자연의 사소한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것은 곧 시편 기자가 말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시 19:1) 광경을 마주하는 것이다.
다섯째, 나만 쉬는 휴가를 넘어 함께 쉬게 하는 안식을 실천해야 한다. 여름 휴가철은 어떤 사람에게는 쉼의 시간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더 긴 노동과 감정노동의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안식은 나와 내 가족의 회복에서 끝나지 않고, 나의 쉼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기억하는 방향으로 넓어져야 한다. 여행지의 서비스 노동자를 존중하고, 과도한 요구와 무례한 소비를 줄이며, 배달과 편의 서비스를 당연한 권리처럼 사용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휴가로 돌봄 공백을 겪는 이웃의 아이들을 살피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쉼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만드는 일 역시 안식의 실천이 될 수 있다.
나가며: 휴가, 은혜의 질서로 돌아가는 작은 회심
여름휴가와 안식의 재발견은 바쁜 현대인을 위한 생활 조언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피로 사회와 성과주의를 거스르는 신앙의 실천이며, 함께 쉬게 하는 공적 윤리이다. 오늘의 사회는 일뿐 아니라 쉼까지 소비와 전시와 효율의 언어로 번역하지만, 복음은 우리가 성과로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안에서 사랑받는 피조물이며 자녀라고 말한다. 쉼은 단지 다시 일하기 위한 재충전이 아니라 내가 멈추어도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믿음이고, 시간과 몸과 장소와 관계가 내 소유가 아니라 선물임을 묵상하고 인정하는 감사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헌신의 아름다움과 함께 안식의 은혜도 선포해야 한다. 이번 여름, 우리는 휴가를 더 멀리 가고 더 많이 소비하는 시간으로만 여기지 않고, 더 깊이 머물고 더 감사히 누리는 시간으로 배울 필요가 있다. 이는 스마트폰의 알림과 시계의 압박에서 잠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장소와 사람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좋은 음식을 감사함으로 먹고, 바람을 느끼며 걷고, 가족의 말을 듣고, 오래된 친구를 만나고,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일이다. 참된 쉼은 공허한 멈춤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다시 인간됨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내가 쉬어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고, 내가 멈추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이 믿음 안에서 누리는 여름휴가는 은혜의 질서로 돌아가는 작은 회심이 될 수 있다. (*)
주)
- “국민 삶의 질 지표: 여가시간 충분도” https://www.index.go.kr/unify/idx-info.do?idxCd=8090
- 김은영, 『나는 왜 마음 놓고 쉬지 못할까』 (서울: 심심, 2025), 49-50.
- 한병철, 『피로사회』 (서울: 문학과지성사, 2012).
- Paul Stevens, “Vacations,” in The Complete Book of Everyday Christianity, eds. Robert Banks and R. Paul Stevens (Downers Grove: IVP, 1997), 1061.
- James K. A. Smith, Letters to a Young Calvinist (Grand Rapids: Brazos, 2003), 15.
- 존 칼빈, 『기독교강요-중』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7),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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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일 교수는 아신대에서 신학(B.Th.)을 공부한 뒤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 과정을 마치고, 동 대학원에서 전도학과 실천신학을 전공하여 박사(Ph.D.)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에 귀국하여 캠퍼스 선교와 지역교회 목회 사역을 하였으며, 현재는 경기도 용인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실천신학과 선교와문화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 연구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도의 유산』(SFC, 2014), 『기독교적 회심의 해석과 실천』(새세대, 2023)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