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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초저출산 시대와 한국교회

2026년 한국 사회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여전히 최저 수준의 저출산 국가이며 ‘초저출산’(합계출산율 1.3 이하) 기준선의 절반 수준에 머물고 있다. 남성 평균 초혼연령은 33.9세, 여성은 31.6세로 한 세대 전과 비교하여 약 6년이 늦어졌고 35세 이상 고령산모의 비율은 출생아의 37%를 넘어섰다.1) 늦어진 결혼은 자연스럽게 난임과 노산을 동반한다. 우리 시대의 난임은 더 이상 특정 부부들만의 비극이 아니라 인생의 시간표가 어긋난 한 세대 전체의 흔한 사연이 되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2025년 처음 공개한 통계에 따르면, 2022년 한 해에만 난임시술이 약 20만 건 시행되었고 그 가운데 체외수정 시술이 83.4%를 차지하였다. 시술을 받은 부부의 평균 연령은 37.9세였고 시술 건수는 3년 전보다 36.7% 증가하였다.2) 그러나 한국교회가 정작 묻지 못한 질문이 있다. 시험관 아기 시술이 단순한 ‘의료적 도움’인가, 아니면 생명의 시작과 부부의 사랑 그리고 부모 됨의 의미를 동시에 묻는 ‘윤리적 사건’인가?

다수의 배아 생성과 잔여 배아 처리, 착상 전 유전자 진단(Preimplantation Genetic Diagnosis, PGD)을 통한 배아 선별, 비배우자(제3자) 간 정자·난자 기증과 대리모……. 이 길의 어느 지점까지가 신앙 양심으로 받아들일 만하고 어디서부터는 ‘여기까지’라고 멈춰 서야 하는가?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이 질문 앞에서 분명히 답하지 못한 채 난임 부부의 깊은 한숨과 사회의 인구절벽이라는 두 벽 사이에서 침묵해 왔다.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길버트 메일랜더(Gilbert Meilaender)가 강조한 ‘낳음(begetting)’과 ‘만듦(making)’의 오래된 신학적 구분을 길잡이로 삼아 시험관 아기 시술의 윤리적 지형을 그려 보고, 그 모든 분별의 토대가 되는 배아의 도덕적 지위를 신학적으로 정리한 뒤, 언약의 자손을 소망하는 부부와 그들 곁에 서야 할 한국교회를 위한 분별과 돌봄의 길을 제안하고자 한다.3)

기업으로 받을 것인가, 작품으로 만들 것인가: 초저출산 시대, 시험관 아기 시술에 대한 기독교 생명윤리적 분별 | 강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시술대 위의 현실: 늦은 결혼, 깊은 갈망, 그리고 얻어내야 할 자녀

시험관 아기 시술은 본래 폐쇄성 난관, 무정자증 등 명확한 의학적 원인으로 자연 임신이 어려운 부부를 돕기 위해 개발된 보조생식기술(Assisted Reproductive Technology)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이 기술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그 본래 자리에서 한참 옮겨 가 있다. 30대 후반에 결혼하고 이미 노산의 문턱에 다다른 부부에게 시험관 시술은 ‘시간을 따라잡기 위한’ 가장 빠른 우회로로 권유된다. 정부의 난임시술비 지원 확대, 횟수 제한 폐지, 건강보험 적용 확대 등 정책적 격려는 이 흐름을 강하게 떠받친다.

의학적 절차는 비교적 표준화되어 있다. 과배란 유도 주사로 한 주기에 10여 개 안팎의 난자를 채취하고, 정자와 수정시켜 5일 내외 배반포 단계까지 배양한 뒤, 형태와 유전 상태가 ‘가장 좋은’ 배아 1~2개를 자궁에 이식한다. 나머지는 냉동 보관되거나 폐기되거나 연구용으로 기증된다. 착상 전 유전자 진단을 시행할 경우, 다운증후군·낭포성 섬유증 등 특정 염색체 이상이나 단일 유전 질환을 가진 배아는 이식 대상에서 배제된다. 임신 성공률은 평균 36.9%, 25~29세에서는 48%에 이르지만, 40세 이상에서는 10%대로 급감한다.

여기서 한국교회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첫째 질문은 ‘잔여 배아(spare embryos)’에 관한 것이다. 한두 명의 자녀를 얻기 위해 시술이 시작되지만 그 여정의 출발선에는 흔히 10~20개의 배아가 만들어진다. 메일랜더는 미국에서 한 해 약 4만 명이 시험관 아기 시술로 출생하지만 한 부부당 시술 과정에서 최대 100개에 이르는 배아가 생성될 수 있음을 경고한 바 있다.4) 한국의 상황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 ‘여분의 배아’라는 한가한 표현 뒤에는 부모도 사회도 거의 시선을 두지 않는 수많은 인간 생명의 시초가 영하 196도의 액체질소 탱크 속에 잠들어 있다.

둘째 쟁점은 ‘배아 선별’이다. 유전 질환을 미리 걸러 내는 일은 자녀가 겪을 고통을 줄여 주려는 부모의 사랑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동시에 한 사회에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다. “이런 조건을 가진 아이는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

셋째 쟁점은 비배우자(제3자) 정자·난자 기증과 대리모의 문제이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법적으로 제한적이지만 해외 원정 시술과 알선 광고는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타고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정자은행에서 키·학력·외모로 ‘맞춤형’ 기증자를 고르는 일은 더 이상 공상과학(SF)이 아니다. 이때 자녀는 부부의 사랑이 빚어낸 열매가 아니라 시장에서 ‘조달된’ 부품들로 조립된 결과물에 가까워진다.

이 모든 현실의 밑바닥에는 한 가지 시대적 인식이 깔려 있다. 곧 ‘자녀는 우리가 결정하고, 기획하고, 얻어내야 하는 결과’라는 인식이다. 자녀는 인생 시간표 위에서 가장 적절한 시점에 가장 좋은 조건으로 ‘확보’되어야 할 항목이 되고 부모의 사랑은 점차 ‘프로젝트 관리’에 가까워진다. 일찍이 신원하 교수는 현대의 공학기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시행해야 한다”는 ‘기술적 명령법(technological imperative)’에 따라 작동하지만, 생명에 관한 기술은 그 수단과 목적이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있어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법(moral imperative)’의 검토를 결코 면제받을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5) 시험관 시술 자체보다 이 인식의 변화가 더 깊은 곳에서 한국 사회와 교회의 부모 됨을 변형시키고 있다.

 

낳음만듦사이에서: 메일랜더와 함께 다시 읽는 창조 질서

기독교 생명윤리의 출발점은 시술의 절차가 아니라 ‘사람이 무엇이며 자녀란 누구인가?’라는 더 깊은 질문이다. 메일랜더는 그의 책 Bioethics and the Character of Human Life에서 도덕철학의 가장 오래된 구분 가운데 하나, 곧 ‘하는 일(doing)’과 ‘만드는 일(making)’의 구분을 다시 우리 앞에 가져온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가정을 짓고, 보고서를 만들고, 작품을 빚는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저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다. 예배가 그렇고, 놀이가 그렇고, 아름다움 앞에서 감탄하는 일이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나누는 일(making love)’이 그렇다. 부부의 사랑은 자녀라는 결과물을 ‘제작’하기 위해 가동되는 공정이 아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 ‘행위’이다. 만약 그 사랑의 자리에 자녀가 잉태된다면 그 아이는 부부가 ‘만든 제품’이 아니라 그들의 사랑 위에 부어진 ‘복’이며 ‘선물’이다. 그러나 인간을 ‘유전자의 모음집’으로, 자녀를 ‘배아 시장에서 선택된 결과물’로 다루는 시대의 시선은 아이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거스르고 있다. 한 권의 책은 페이지를 임의로 옮길 수 있는 ‘부품의 묶음’이 아니듯이 한 아이도 임의 조작으로 생산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 신학적 직관은 정확히 시편 기자의 고백과 맞닿아 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 본문의 ‘기업’(נַחֲלָה)은 내가 노력해서 획득한 자산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분깃이다. 한나가 사무엘을 얻기까지 흘린 눈물(삼상 1장), 사라·리브가·라헬이 견뎌야 했던 오랜 기다림은 모두 자녀가 결국 ‘나의 기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자녀가 선물이라는 이 한 마디는 자녀를 결과물로 다루는 모든 기술의 자기정당화 앞에서 가장 깊은 균열을 만든다.

폴 램지(Paul Ramsey)는 일찍이 결혼을 ‘결혼과 부모됨의 언약(covenant of marriage and parenthood)’이라 불렀다.6) 자녀는 그 언약의 외부에서 ‘조달’되는 자원이 아니라 그 언약 안에서 ‘잉태되고 환영되는’ 인격이다. 자녀의 정체성은 부모의 기획이 아니라 부부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친히 축복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메일랜더는 여기에 더하여 한층 더 심도 깊은 통찰을 제시한다. 인간은 ‘자유(freedom)와 유한성(finitude)이 만나는 자리’에 서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기술을 발견하고 자연을 다스리도록 부름 받은 자유로운 피조물이지만, 동시에 흙으로 빚어진 유한한 피조물이다. 자유만을 절대화하면 우리는 ‘교만(hubris)’에 빠져 신의 자리를 넘본다. 유한성만을 절대화하면 우리는 ‘나태(sloth)’에 빠져 책임 있는 응답을 회피한다.7)

루이스(C. S. Lewis)는 일찍이 『인간 폐지』(The Abolition of Man)에서 이렇게 경고한 바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이라 부르는 것은 결국 자연을 도구로 삼아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행사하는 권력이 된다.”8) 시험관 시술과 PGD가 지나치게 진행될 때, 그 권력은 가장 약한 인간—곧 배아—에게로 향한다. 메일랜더는 요나스(Hans Jonas, 1903-1993)의 책임원칙을 거듭 상기시킨다. “철저한 무력함은 철저한 보호를 요구한다.”9) 시술의 ‘여분’으로 다루어지는 배아, 유전자 진단에서 ‘탈락’되는 배아, 어차피 폐기될 운명이기에 연구에 써도 된다고 여겨지는 배아—그들이야말로 이 원칙이 가장 절실하게 적용되어야 할 자리에 있는, 우리의 가장 어린 이웃이다.

올리버 오도노반(Oliver O’Donovan)은 그의 책 Begotten or Made?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창조 질서는 두 방향을 가진다. 위로는 창조주를 향한 ‘수직적 정향’이며, 옆으로는 동료 피조물 사이의 ‘수평적 정향’이다. 부부의 사랑이 자녀로 열매 맺도록 정해진 자연적 목적(telos)은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지 우리가 임의로 분리하고 재조립할 수 있는 부품이 아니다. 헨리 그릴리(Henry T. Greely)가 예측한 ‘쉬운 PGD(Easy PGD)’의 시대—실험실에서 만들어진 100개의 배아 가운데 부모가 한 명을 고르는 시대—를 향해 우리는 이미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다.10) 그 길목에서 메일랜더는 부모에게 단호히 묻는다. “당신이 책임져야 할 것은 자녀의 ‘본성(nature)’인가, 아니면 ‘양육(nurture)’인가?” 그리스도인은 자녀의 본성을 ‘설계’하는 자리를 단호히 사양한다. 자녀의 본성을 정하시는 분은 자녀를 주신 분과 같은 분, 곧 하나님이시다.

가장 어린 이웃은 누구인가: 배아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신학적 정리

이상의 신학적 구분은 우리를 한 가지 피할 수 없는 물음 앞에 세운다. 잔여 배아의 처리, 배아 선별, 선택적 감수 등 시험관 시술의 모든 쟁점은 결국 하나의 물음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배아는 누구인가? 수정의 순간부터 인격적 생명이 시작되는가?

이 물음에 답할 때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은 ‘기능론적 인간 이해’이다.11) 플레처(Joseph Fletcher)로 대표되는 이 관점은 자아인식·관계능력·합리성 같은 일정한 ‘기능’을 일정 수준 이상 발휘할 때에만 인격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라이와 콕스(Scott Rae and Paul Cox)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시각이 인간을 세탁기나 자동차 같은 ‘속성사물(property-thing)’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한다. 자동차는 부품들의 총합일 뿐 내적 본질이 없어 부품이 마모되면 그 정체성도 사라진다. 그러나 인간은 내적 본질을 지닌 ‘실체(substance)’여서 인식력·관계능력이 아직 발현되지 않았거나 노화로 쇠퇴하였다 해도 그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만약 인격성을 현재 발휘되는 능력에 결부시킨다면 신생아와 혼수상태의 환자, 중증 치매 노인 역시 보호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고 만다. 배아는 ‘잠재적 인간(potential human being)’이 아니라 ‘잠재력을 지닌 인간(human being with potential)’이다.

성경은 ‘배아’라는 단어를 알지 못하지만 태중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인격적 관계를 놀라울 만큼 일관되게 증언한다. 무엇보다 성육신의 신비가 이 진실을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영원하신 말씀이 사람이 되신 사건은 출생의 순간이 아니라 잉태의 순간에 시작되었으며(마 1:20), 마리아가 잉태한 직후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태중의 요한은 잉태되신 주님 앞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다(눅 1:41-44). 신원하 교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형상이 잉태의 순간부터 부모를 통해 전수됨을 창세기의 본문으로 논증한다.12) 하나님은 아담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셨고(창 1:27), 그 아담은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으며(창 5:3),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할 이유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창 9:6)이 제시된다. 다윗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고백한 것은 자신의 죄의 기원을 수정의 순간으로까지 끌어올린 것으로서 태아 때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사이에 ‘인격적 연속성(personal continuity)’이 있음을 증언한다. 성경적 사고에서 인격의 시작은 자의식이나 이성 같은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먼저 알고 부르시는 ‘관계’에 있다.

이 고백은 시험관 시술의 핵심 쟁점에 곧바로 적용된다. 이상원 교수는 수정란을 독립된 인간주체로 파악하는 인간론을 견지할 때, 배아의 분할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배아의 복제는 전면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며 높은 실패율로 인하여 생성된 배아를 폐기하는 과정을 피할 수 없는 체세포 복제도 금지되어야만 한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13) 곧 배아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고백은 단지 추상적 신념이 아니라 배아를 ‘예비 부품’으로 만들고 폐기하는 모든 시술 관행을 직접 심판하는 실천적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배아는 ‘세포 덩어리’도 아니고 인격 이전의 ‘예비 인간’도 아니다. 미첼(C. Ben Mitchell)의 말처럼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보여주는 무엇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신분의 존재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며, 따라서 배아는 가장 작고 가장 약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우리의 이웃이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라는 선언이 가장 먼저 적용되어야 할 생명이다.

분별의 지점들: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고 어디서부터 멈춰야 하는가

이상의 신학적 통찰과 배아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고백을 토대로 시험관 시술의 각 지점에 대한 분별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부부 사이의 ‘사랑’과 자녀의 ‘잉태’는 원리적으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부부의 사랑이 결실로 이어지는 길에 의료적 도움을 받는 일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도움이 부부의 사랑을 우회하여 ‘실험실의 제작 공정’이 부부의 한 몸 됨을 대체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면 우리는 자녀를 ‘낳지’ 않고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부부 자신의 정자와 난자로 부부 관계의 연장선에서 시술이 진행되는 한, 시술 자체는 신학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의료적 보조의 범주에 머문다.

둘째, 가장 책임 있는 선택은 ‘한 주기에 이식할 수 있는 만큼만’ 수정시키는 것이다(일반적으로 1~3개 안팎). 부득이 더 많은 배아가 만들어진다면 부부는 그 배아 모두를 자신들의 자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분명한 의도 아래 보관·이식하여야 한다. 단지 ‘확률을 높이기 위해’ 다수를 만들고 임신이 성공한 뒤에 남은 배아를 폐기하거나 연구용으로 기증하는 방식은, ‘생성된 배아를 폐기하는 과정’을 구조적으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가장 약한 인간을 ‘예비 부품’으로 다루는 것과 다르지 않다.

셋째, ‘선택적 감수(selective reduction)’—이식된 다배아 가운데 일부를 자궁 안에서 의도적으로 제거하는 시술—는 신학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는 사실상 우리가 만든 생명에 대해 우리가 사망을 선고하는 일이며, 자녀를 ‘관리되어야 할 항목’으로 다루는 가장 노골적인 표현이다.

넷째, 착상 전 유전자 진단(PGD)은 매우 신중하게, 사실상 극히 제한된 경우에만 검토되어야 한다. 출생 직후 사망에 이르는 치명적 단일 유전 질환의 경우 신학자들 사이에 신중한 논의가 있을 수 있으나, 다운증후군·청각장애·근위축증과 같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조건’까지 걸러 내는 일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환영할 자리를 좁히는 일이다. 더구나 성별 선택이나 외모·지능 등 ‘향상(enhancement)’ 목적의 선택은 명백히 거부되어야 한다. 이러한 우생학적 조작이 인류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파괴하고 힘·지능·미모에 따라 인종을 차등화하는 ‘새로운 형태의 인종차별’을 낳아 온 인류를 한 혈통으로 지으신(행 17:26) 하나님의 인류 연대성의 뜻에 정면으로 어긋나기 때문이다.14)

다섯째, 비배우자(제3자) 정자·난자 기증과 대리모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거부되어야 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는 창조의 말씀은 부부의 성적 연합과 생명을 낳는 연합이 하나의 배타적 언약 안에 함께 속해 있음을 선언한다. 램지가 통찰한 대로 사랑의 연합과 출산의 연합은 하나님이 묶어 두신 하나의 실재이며, 제3자의 생식세포를 부부 사이에 도입하는 일은—몸의 간음은 아닐지라도—부부의 한 몸 됨의 생식적 차원에 외부인을 들이는 ‘언약의 균열’이다. 자녀의 자리에서 보면 문제는 더욱 무겁다. 기증 정자·난자로 태어난 이들이 성인이 되어 토로하는 정체성의 혼란과 ‘뿌리’를 향한 갈망은 친부모와의 생물학적 연결이 자녀에게 사소한 정보가 아니라 존재의 일부임을 증언한다.

대리모는 여기에 더하여 한 여성의 몸과 모태를 다른 사람의 기획을 위한 도구로 삼는다. 사라가 하갈을 통해 자녀를 ‘확보’하려 했던 시도(창 16장)가 하갈과 이스마엘과 그 가정 전체에 남긴 깊은 상처는, 언약의 경계 밖에서 자녀를 얻으려는 모든 기획의 결말을 미리 보여주는 거울이다. 이 지점에서 입양과의 차이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입양이 이미 세상에 와 있는 아이가 겪은 상실을 끌어안는 ‘환영’이라면, 제3자 기증과 대리모는 자녀와 친부모 사이의 단절을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설계’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를 거부해야 하는 까닭은 자녀를 갈망하는 부부의 진심을 의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녀가 누구인가?’에 관한 더 깊은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다.

여섯째, 시술의 전 과정은 부부와 자녀 모두의 ‘취약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시험관 시술이 부부에게, 그 중에서도 아내의 몸과 마음에 가하는 부담(과배란 유도, 채취의 통증, 반복되는 실패의 슬픔)이 결혼 관계 전체를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면, ‘멈춤’은 패배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신앙적 분별이다. 자녀를 향한 갈망이 자녀를 주신 분과 자녀를 함께 받을 배우자를 잃게 만든다면 우리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이 여섯 가지 기준은 ‘얼마나 시도하여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부모가 될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그것은 시술 횟수를 계산하는 문제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언약 안에서 부부와 자녀가 함께 누려야 할 생명이라는 선물 본래의 뜻을 지키는 일이다.

맺음말: 언약의 가정을 함께 짓는 교회

분별의 기준이 분명해질수록 교회의 돌봄은 더욱 따뜻해져야 한다. 난임 부부에게 가장 잔인한 교회는 ‘쉽게 답을 주는 교회’이거나 반대로 ‘아예 입을 닫는 교회’이다. 한국교회가 모색해야 할 길은 따로 있다.

결혼 예비 교육과 청년부 사역에서부터 자녀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점을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가르쳐야 한다. 또한 시험관 시술 결정 전에 부부가 담당 교역자 또는 신실한 멘토 부부와 만나 (1) 시술의 의학적 절차와 잔여 배아 발생 가능성, (2) 부부가 받아들이려는 ‘한계선’(예: 한 주기에 수정할 배아 수, PGD 사용 여부, 시술 횟수), (3) 시술 실패 시 어떻게 멈추고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함께 기도하며 약속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권면한다. 결정은 부부의 것이지만 그 결정이 외롭지 않도록 공동체가 곁에 선다.

자녀를 갈망하는 슬픔과 자녀를 받아 키우는 기쁨이 한 공간에서 만날 때, 우리의 신앙은 자녀를 ‘나의 유전자’에 가두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분깃’으로 확장된다. 입양은 단순한 ‘대안’이 아니라 모든 자녀가 본질적으로 ‘받은 자녀’임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복음의 그림이다(롬 8:15).

명절과 가정의 달, 어린이 주일 강단에서 ‘아이를 환영하는 교회’의 언어를 의식적으로 회복하여야 한다. 다양한 가정 형태—아이가 없는 부부, 입양 가정, 늦은 부모, 장애 자녀를 키우는 부모—를 단상 위로 초청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도록 하자. 교회가 생각하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가족’의 기준이 좁을수록 그 틀에 맞지 않는 가정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상처는 더 커진다.

시험관 시술을 통해 이미 자녀를 얻은 부부들이 죄책감 속에 숨지 않게 하여야 한다. 이미 태어난 아이는 어떻게 잉태되었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한 사람’이며 부모의 사랑을 받을 마땅한 가족이다. 과거에 대한 회개와 분별이 필요한 부분은 다루되 그 회개가 자녀를 향한 사랑을 흔드는 자리로 가서는 안 된다.

교단·신학교·기독 의료인 협회는 시험관 시술과 배아 윤리에 관한 ‘한국교회 공동 지침서’를 함께 마련하여야 한다. 사회의 인구 정책이 시험관 시술을 무차별적으로 격려하는 방향으로만 흐를 때, 신앙 양심의 자리에서 ‘여기까지’를 분명히 말해 줄 신학적 나침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우리는 ‘자녀를 적게 낳는 사회’를 향해 단지 ‘더 많은 자녀’를 요구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자녀를 선물로 받는 부모’를 길러내는 교회가 될 것인가? 두 길은 외형상 비슷해 보이지만 가는 길의 깊이가 다르다. 후자만이 자녀를 어떻게든 ‘얻어내야 할 결과물’로 여기는 우리 시대의 잘못된 우상을 깨뜨릴 수 있다.

언약의 자손을 소망하는 부부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아이를 하나님이 주시는 모습 그대로 받기를 소망해야 한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모 됨의 특징이다. 부모 됨의 의미를 함께 공유하며 선물로서 주어지는 자녀들을 ‘함께 기다리고 함께 분별하고 함께 환영하는’ 공동체로 한국교회가 되어가기를 소망한다. (*)


주)

  1. 통계청, 『2025년 인구동향조사 출생·사망통계 잠정 결과』 (대전: 통계청, 2026), 5-6; 통계청, 『2025년 혼인·이혼 통계』 (대전: 통계청, 2026), 12.
  2.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난임시술 진료현황 분석』 (원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2025), 8-15, 22-27; 보건복지부, 『난임시술비 지원사업 안내』 (세종: 보건복지부, 2025), 3-5.
  3. 본고에서 사용하는 ‘낳음과 만듦(begetting and making)’의 구분은 메일랜더와 오도노반의 신학적 직관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Cf. Oliver O’Donovan, Begotten or Made? (Oxford: Clarendon Press, 1984), 1-15; Gilbert Meilaender, Bioethics and the Character of Human Life: Essays and Reflections (Eugene, OR: Cascade Books, 2020), 65-73.
  4. Meilaender, Bioethics and the Character of Human Life, 78-79. 척수성 근위축증 여성의 증언에 대해서는 같은 책, 91을 보라.
  5. 신원하, “게놈시대의 생명공학기술과 기독교 사회윤리,” 「기독교사회윤리」 4 (2002): 36-37. 신원하는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시행해야 한다”는 ‘기술적 명령법’(technological imperative)과, 기술이 채택하는 수단과 지향하는 목적이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있어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법’(moral imperative)을 구별한다.
  6. Paul Ramsey, Fabricated Man: The Ethics of Genetic Control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0), 32-39.
  7. Meilaender, Bioethics and the Character of Human Life, 23-30.
  8. S. Lewis, The Abolition of Man (New York: Macmillan, 1947), 69.
  9. Hans Jonas, The Imperative of Responsibility: In Search of an Ethics for the Technological Ag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4), 39. 요나스의 책임원칙에 대한 메일랜더의 신학적 적용은 Meilaender, Bioethics and the Character of Human Life, 105-7을 참조하라.
  10. Henry T. Greely, The End of Sex and the Future of Human Reproduction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16), 1-12, 75-95. ‘쉬운 PGD’의 시대에 대한 메일랜더의 응답으로는 Meilaender, Bioethics and the Character of Human Life, 123을 보라.
  11. 신원하, “태아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 낙태법 개정을 위한 신학적 분석,” 「갱신과 부흥」 32 (2023): 181-186.
  12. 신원하, “태아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 189-196. 신원하는 창세기 1:27과 5:3, 9:6, 그리고 시편 51:5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잉태의 순간부터 부모를 통해 전수되며 태아와 현재의 자신 사이에 ‘인격적 연속성’(personal continuity)이 있음을 논하고, 미첼(C. Ben Mitchell)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보여주는 무엇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신분의 존재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13. 이상원, “기독교는 생명공학의 발전을 가로막는가?,” 「기독교사회윤리」 4 (2002): 118.
  14. 이상원, “기독교는 생명공학의 발전을 가로막는가?,” 116-118. 이상원은 창세기 1:28의 문화명령을 ‘청지기 직분’(stewardship)으로 해석하여 피조물의 변형이 창조주의 질서와 도덕법(롬 2:14-15)의 한계 안에서만 허용된다고 보며, 생식세포 치료는 안전성이 충분히 증명되기 전까지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Cf. 김상득, “윤리학적 관점에서 본 생명복제,” 「신앙과 학문」 4/3 (1999): 21-41.
  15. 이상원, “기독교는 생명공학의 발전을 가로막는가?,” 117.

강성호 교수는 서울대학교 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를 졸업하고 공군학사장교 기상예보관으로 근무한 후 고려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미국 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철학적 도덕적 신학과 조직신학으로 Th.M, 캐나다 McMaster Divinity College에서 Christian Theology(Theoligical Studies- 세부전공 기독교윤리)로 Ph.D. 학위를 받았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와 윤리적 문제를 성품윤리와 문화 동화 이론으로 분석한 박사 논문을 작성하였다. 현재 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와 시광교회 부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