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러더포드의 정치 원리를 통해 민주주의 정치 원리와 교회에 대해서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주셨다.
4월 총선이 다가오면서 교회 안에서도 정치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다시금 불붙고 있다. “혐오와 증오”를 반대하는 방향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 “차별금지법” 반대를 더 중요하게 보는 이들, 정치에 대한 논의에서 한걸음 물러나 복음이라는 본질에 집중하자는 이들 등으로 서로 다른 주장을 접하게 된다.1) 미국에서도 대선을 앞두고 교회를 정치 홍보의 장으로 사용하지 말자는 주장과 더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부딪치고 있다.2) 헌법에 명시된대로 민주공화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기에 책임감을 갖고 사용해야 한다. 그렇기에 선거를 앞두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치에 대해,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 원리 중 하나인 민주주의에 대해 고찰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와 역사 의식
사실 그리스도인은 삶에서 최소한 두 종류의 정치를 마주한다. 하나는 국가 정치, 다른 하나는 교회 정치다. 정치는 우리 삶에서 뗄 수 없다. 심지어 우리가 즐겨보는 스포츠도 역사적으로 정치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국가나 교회의 정치적 결정이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정치가 그만큼 우리 삶에 밀접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이미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정치란 어떠해야 한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 이때, 사람들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전제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교회 정치를 생각해보자. 오늘날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일종의 도덕적 규범이다. 민주주의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3) 모두가 평등한 권위를 갖고 있단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 시대에 어떤 개인이나 공동체가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 부당하게 여겨진다. 그렇기에 교회도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개념은 너무나 당연한 말로 들릴 것이다.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삼권 분립이라는 원리를 적용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교회에 민주주의를 적용하려고 할 때, 칼뱅을 비롯한 개혁파 전통, 나아가 장로교 전통을 역사적인 근거로 종종 사용한다.4) 하지만 근대 초기 신학자들이 교회를 다스리는 ‘주권’은 성도에게 있다는 개념의 민주 정치를 교회에 적용하려고 했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일원들 중 다수는 교회는 왕정과 귀족정과 민주정이 하나로 어우러진 형태라고 생각했다. 즉, 왕이신 그리스도, 귀족에 비유되는 이들로서 직분을 받은 장로들, 그리고 선거권이 있는 신자들로 이루어진 체제로 이해했다.5) 이들은 성도들의 투표나 동의가 중요하다는 측면에서 부분적으로 민주적 요소가 있음을 인정했으나 교회가 순전히 민주 정치가 이루어지는 공동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일종의 도덕적 규범이다. ・・・ 그렇기에 교회도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개념은 너무나 당연한 말로 들릴 것이다.
국가 정치에 있어서도 역사 이해는 중요하다. 우리는 선거철이 다가오거나 또는 어떤 정치적 이슈가 화제가 될 때 ‘정교 분리’나 ‘교회가 국가 정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제를 중심으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종종 목격하는데, 이때도 역사적 근거는 중요하게 사용된다.6) 개혁파 내에서 신칼빈주의 진영과 두 왕국 교리를 지지하는 진영 사이에서 정치 참여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는 것도 종교개혁과 그 이후 개혁파 전통의 정치 신학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과 관련이 있다.7)
그렇기에 역사 이해는 우리가 정치 참여에 대해 논의할 때 필요하다. 정치 사상이 발전하는 과정에 기독교, 특히 근대 초기에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예들의 기여는 오늘날에도 학자들 사이에서도 인정받고 있다.8)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 존 녹스나 조지 뷰캐넌, 제네바의 테오도르 베자 같은 이들은 신앙을 억압하는 세속 군주들에게 저항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정치 사상과 이에 관련된 인권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때 논의되는 정치 사상은 단지 저항권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박해와 갈등이라는 상황 속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세속 군주의 역할의 중요성과 그 군주의 권한의 한계, 그리고 군주가 잘못된 길을 갈 경우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 귀족 또는 관료들의 역할 등에 대해서도 논의했다.9) 즉, 16-17세기에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예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정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논의했고, 이는 정치 사상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정치와 국가 정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논의할 때 이들의 정치사상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16-17세기와 현재 시대는 400년에서 500년 정도의 차이가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당시 유럽 사회처럼 기독교 국가가 지배적이지도 않기에 과거의 정치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적실성이 있냐고 질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교회와 국가가 긴밀하게 얽혀있었기 때문에 둘 사이의 관계와 국가 정치의 원리가 철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논의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 세속 국가 모두에 속한 이들로서 이 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시기의 논의를 살피는 것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다. 특별히 이 글은 17세기 스코틀랜드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1600-1661)의 정치 원리를 소개할 것이다. 그는 당시 대표적인 장로교 목회자이자 신학자로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스코틀랜드 사절단 중 일원으로서 참여하고 여러 저술을 통해 장로회주의 정치 원리를 변론했다. 또한 『법과 군주』 (Lex, Rex, or, the Law and the Prince, 1644)라는 책을 통해서 영국 국왕 찰스 1세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정당화했고, 국가 통치에 있어 법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국가를 다스리는 권위에 있어서 국민의 힘이 국왕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장로회주의 교회 정치체제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또한 17세기 정치 철학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인물로서 최근까지도 연구되고 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이 정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 러더포드의 정치 원리를 살펴볼 가치가 있다.
교회는 민주주의인가?
먼저 교회 정치에 대한 그의 견해를 살펴보자. 교회 정치와 관련해서 중요하게 논의된 주제는 바로 교회를 다스리는 힘, 소위 그리스도께서 주신 ‘열쇠의 힘’이 누구에게 주어졌냐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회중파는 교회의 신자 전체에게 주어진다고 주장했고, 로마 가톨릭은 교황에게 주어졌다고 보았으며, 러더포드 같은 장로회주의 신학자들은 직분자, 특히 ‘장로들의 회의체’를 강조했다.10) 러더포드는 한편으로는 교회에서 성도들이 가진 투표권과 같은 권한을 인정하고 이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교회 정치체제를 순전히 민주주의로 보는 시각을 반대했다. 물론 당시에는 아직 민주 정치체제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도 하나의 요인일 수 있다. 그러나 러더포드의 견해는 교회를 다스리는 ‘열쇠의 힘’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개념과 깊이 연관된다. 그는 이 힘이 교회의 사역을 위해, 즉 성도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성례를 집행하고 목양하고 권면하고 치리하기 위해 주어졌다고 가르쳤다. 이 힘의 목적은 사람들의 구원이었다. 치리, 특히 출교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출교된 자와 교회 안에 남은 성도들 모두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러더포드는 이 열쇠의 힘이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해서’ 주어졌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 힘은 국가를 다스리는 권한과는 종류가 달랐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정치의 권세를 대표자들에게 부여한다. 그러나 교회의 권세는 그리스도께 있으며 이를 사역자들에게 직접 주신다. 이런 의미에서 성도의 투표는 ‘개인이 가진 교회를 다스릴 권세’를 직분자에게 부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즉, 그 형태에 있어서 교회 정치를 민주주의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내용을 보면 세속 정치에서 말하는 민주주의와는 차이가 있었다.
러더포드는 한편으로는 교회에서 성도들이 가진 투표권과 같은 권한을 인정하고 이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교회 정치체제를 순전히 민주주의로 보는 시각을 반대했다.
여기서 교회와 국가의 차이가 강조된다. 러더포드는 교회는 세속 국가와는 달리 영혼 구원의 역할을 하기에 세속 정치 원리를 그대로 교회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마치 중세시대처럼 성직자와 평신도를 가르고 위계를 나누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러더포드는 이 힘이 자격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다고 가르쳤다. 즉, 열쇠의 힘을 받은 이는 그가 다른 이들보다 더 거룩해서 이 힘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심지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열쇠의 힘을 받은 직분자로서 사역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가르침은 사역자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방종을 허용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러더포드는 사역자들의 책임과 윤리에 대해 매우 엄격했다. 은혜로 이 힘이 주어졌다는 말은 교회 사역의 궁극적인 주권과 효력이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께 있음을 확언하는 것이었다.11)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자신의 책임을 엄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사역의 효력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고 겸손해야했다. 이러한 견해는 초대교회 때부터 견지되어왔으며, 특히 도나투스파를 비판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러더포드에게 세속 정치와 교회 정치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했다. 세속 정치의 원리를 지나치게 교회에 적용하려고 해서는 안 되었다. 교회를 다스리는 힘은 구원 사역을 위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사역자들에게 주셨고, 그 힘의 효력은 삼위 하나님께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사역자들은 자신의 책임을 엄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사역의 효력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고 겸손해야했다.
세속 국가와 민주주의
러더포드가 근대초기 정치사상에서 기여한 부분 중 하나는 저항사상이었고, 특히 개인의 권리와 동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가정 이상의 정치적 공동체를 이룰 때 개개인은 정부에게 자신을 처벌할 권세를 주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자연 법칙을 거슬러 개인의 자유를 희생하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개개인의 동의가 중요했다. 이러한 법칙은 세습으로 왕위가 이어지는 체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세습 과정에서 국민의 암묵적 동의가 동반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더포드는 동의를 통해 권세를 정부에 수여한다고 하더라도, 국민은 그들이 가진 ‘자기 방어권’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왕이 다스리더라도 국가 정치의 궁극적인 힘은 그 원천인 국민에게 있었다. 그리고 러더포드는 이러한 자기 방어권 개념에 기초해서 국민을 위협하는 독재자에 대해 저항할 수 있다고 변론했다. 이 권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연법에 기초했기에 객관적인 토대 위에 세워졌지만, 동시에 개개인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것이기도 했다.12)
러더포드의 정치사상이 민주주의와 입헌주의의 토대가 되는 자연권과 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를 포함해서 그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대체로 민주 정치체제를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두가 왕정을 최고라고 여긴 것도 아니다.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본 이들도 많았다. 러더포드는 왕정, 귀족정, 민주정 체제 모두 적법한 정치 체제지만 각각 단점이 있다고 보았다. 절대적 군주제는 독재가 되고 귀족정은 적절한 조절 없이는 당파 싸움이 되듯이, 민주정도 혼돈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각각 장점도 설명한다. 그는 군주제는 명예롭고 영광스러우며, 귀족정은 의논을 통해 의사 결정을 하기 적절하고, 민주제는 자유와 부를 위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러더포드에게는 어떤 특정한 정치체제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각 체제의 단점을 보완하도록 적절히 혼합된 형태가 제일 낫다고 보았다. 게다가 그는 가정 이상의 정치체제란 타락 이후 폭력과 불의를 방지하기 위해 필요해졌다고 가르쳤다. 즉, 정치체제 자체는 인간이 가진 사회적인 특징을 볼 때 필요한 것이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방식의 정치체제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13) 이러한 이유로 러더포드는 타락한 세상에서 완전한 정치체제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주목할 점은 언약 국가는 이 땅에서 완전한 사회를 만드는 목표를 갖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교회의 사역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당시 유럽이 기독교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과 세속 정치를 분리하기란 쉽지 않았다. 러더포드의 정치사상에서도 이러한 신앙적 요소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중요한 개념은 바로 ‘언약’이었다. 이것은 개혁파에서 가르쳐진 언약 신학, 특히 은혜 언약 교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은혜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구원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언약이다. 이 언약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택함 받은 이들과 맺어졌다고 보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이 언약의 성취를 누리는 이들이 예정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많은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 은혜 언약이 설교를 통해서 택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선포된다고 여겼다. 게다가 종교개혁 때부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개신교 국가들은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일종의 언약 국가로서 하나님과의 외적인 언약을 종교개혁을 통해 갱신했다고 믿었다. 실제로 참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회를 개혁하겠다는 국가적인 언약들이 17세기에 이루어지는데, 대표적인 언약이 스코틀랜드의 ‘국민언약’(1638)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맺은 ‘엄숙한 동맹과 언약’(1643)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러더포드는 이 국가적인 언약이 일종의 은혜 언약에 속한다고 가르쳤다. 비록 택자에게만 주어지는 진정한 ‘내면적 은혜 언약’이 아닌 ‘외면적 은혜 언약’에 해당되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의 언약 국가가 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각 나라의 교회가 은혜 언약의 외적인 혜택을 잘 누리도록 돌볼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바로 설교, 성례, 치리, 목회적 돌봄 등이 그 혜택이었으며, 이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구원을 위한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러더포드는 언약 국가의 왕은 언약을 지켜서 참 신앙을 보호하고 국민들이 목회적인 돌봄을 잘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왕이 교회에 직접적인 간섭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구원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영적인 목회 사역은 교회만의 역할이었으며, 국가는 이것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고 이단들을 막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 앞에서 이를 수행하기로 국민과 언약을 맺은 왕이 이러한 의무를 등한시하고 언약을 깨버린다면, 언약이 준 권리에 기초하여 국민은 왕에게 저항할 수 있었다.14) 그러므로 언약 국가로서 정부가 언약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국정을 운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원리는 러더포드의 정치사상에서 매우 중요했다. 주목할 점은 언약 국가는 이 땅에서 완전한 사회를 만드는 목표를 갖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교회의 사역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가 헌법으로 규정되어 있고 다양한 종교를 믿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대한민국과 같은 사회에서 언약 국가 개념에 기초한 정치 사상을 주장하기란 어렵다. 러더포드도 참 신앙을 지키는 경건한 군주의 역할은 기독교 국가에서나 가능하지, 당시 존재하던 다른 비기독교 국가의 군주에게 이런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현실적으로 러더포드의 언약 국가 개념을 세속 정치에 있는 그대로 적용할 수가 없다. 그 당시에도 온 국민, 최소한 절대다수의 국민이 종교개혁을 따르는 신앙을 고백해야 비로소 언약 국가로 여겨질 수 있었다. 종교의 자유가 헌법으로 규정되어 있고 다양한 종교를 믿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대한민국과 같은 사회에서 언약 국가 개념에 기초한 정치 사상을 주장하기란 어렵다. 러더포드도 참 신앙을 지키는 경건한 군주의 역할은 기독교 국가에서나 가능하지, 당시 존재하던 다른 비기독교 국가의 군주에게 이런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언약 국가 개념을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적용이 가능한 정치 원리들은 남아있다. 러더포드는 동의와 자기 방어권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국민의 동의를 통해 국가를 다스릴 권세를 받은 지도자는 국민 전체의 공동선을 위해 힘쓸 의무가 있다고 보았다. 이 공동선은 물질적이고 도덕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영적인 부분도 포함한다. 국왕은 국가의 정의를 세우고, 평화를 지키고, 국민의 영적인 건강에 위협을 주는 이들로부터 자기 백성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국민으로부터 받았다. 그래서 러더포드는 공동체 전체의 영적인 공동선을 지키기 위해 자기 방어권에 기초해서 국민은 국왕에게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동선과 자연법을 강조하는 정치 원리는 우리 시대에 적용하기에도 크게 무리가 없다. 물론 여기서 무엇이 공동선인지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다. 러더포드를 비롯한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은 정치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윤리의 핵심적인 토대는 성경이라고 가르쳤다. 그들에게 윤리란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야 하기에 궁극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윤리는 기독교 윤리였기 때문이다.15) 그러므로 그들이 공동선을 논할 때 성경은 자연법보다 더 본질적인 권위를 가졌고, 나아가 자연법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성경과 신학은 중요한 원리가 되었다.
교회와 국가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근대 초기 개혁파 신학자들은 교회를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여긴 반면, 국가는 창조주로서의 성자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교회와 국가가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서로 다른 역할을 맡고 서로 다른 통치 원리 아래에서 다스림을 받는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국가의 통치 원리에 있어서 창조 시에 사람들 마음에 새겨진 자연법이 중요했다.16) 러더포드의 정치 사상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이중 왕국’(Christ’s twofold kindom)이라는 개념을 잘 반영하고 있다.
러더포드의 정치 사상에서 어떤 점들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 그는 교회가 세속 정치 원리에 함몰되지 않도록 경계했다. 이 땅의 교회는 구원 사역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셨고, 여기서 국가를 포함하는 다른 세속 집단과 교회의 본질적 차이가 드러난다. 교회 정치에서 최우선적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은 바로 머리이자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그 가운데 교회가 맡은 독특한 역할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둘째, 러더포드는 국가 정치가 가진 한계를 분명히 인식했다. 세속 정치체제는 어떤 체제이던 간에 타락 이후에 세워진 일종의 증상 완화를 위한 방책이다. 타락이 없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형태와 방식으로 정치체제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한 가지 방식의 정치 사상이나 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거기에 궁극적인 소망을 두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소망은 타락한 세상에서 완전함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거를 앞두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정치의 한계를 인식하고 지나친 갈등을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다.
셋째, 러더포드는 국가 정치의 한계를 가르치지만 그럼에도 타락 이후에 세워진 정치 체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모든 문제의 답이 될 수는 없지만, 이 땅에서 사람들의 삶을 보호하고 평화, 정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지키고 복음 안에서 자라고 복음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토대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러더포드의 정치 사상은 그리스도인이 세속 정치에 참여하고 그 안에서 자연법의 원리에 따라 공동선을 추구하는 일을 장려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선거를 앞두고 어떤 방향성과 방식으로 공동선을 추구할지, 그것이 성도가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것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논의하면서 정치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러더포드는 목회자가 국가 정치와 관련된 직위를 맡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목회자의 역할은 교회에 있기 때문이다.
러더포드의 교회 정치와 세속 정치 사상은 교회와 국가의 본질, 한계, 역할이 무엇이냐는 신학적인 확신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가 가르친 원리들 자체도 유익하지만, 그의 본을 따라 성경을 토대로 교회와 국가의 정치에 대해 고찰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여전히 맡겨진 과제다.
러더포드는 목회자가 국가 정치와 관련된 직위를 맡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목회자의 역할은 교회에 있기 때문이다.
(각주)
1)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다. https://www.gospel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627; http://m.newspower.co.kr/57780; https://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199.
2)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59820
3)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정치학 교수진, 『정치학의 이해』 (서울: 박영사, 2019), 2.
4) 예를 들어 다음 기사들을 참고하라.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0444;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8922;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7507.
5) Hunter Powell, The Crisis of British Protestantism: Church Power in the Puritan Revolution, 1638-44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15), 156.
6) https://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102623/20200114/기고-웨인-그루뎀의-성경과-정치.htm;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6970.
7) Michael N. Jacobs, “The Resurgence of Two Kingdoms Doctrine: A Survey of the Literature,” Themelios 45 no.2 (2020): 314-32.
8) John Witte, “Reformation: The Protestant Reformation of Constitutionalism,” in Christianity and Constitutionalism, ed. Nicholas Aroney and Ian Leigh (Oxford University Press, 2023), 126–48; The Reformation of Rights: Law, Religion and Human Rights in Early Modern Calvinis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XI.
9) David VanDrunen,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0), 119-48. 물론 근대 초기 정치 사상의 발전이 전적으로 이러한 이들의 기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중세 사회에서 발전된 공동체의 권리 개념, 교황에 대한 교회 전체의 저항을 정당화한 공의회주의(Conciliarism)의 발전, 그리고 인문주의의 등장과 함께 재조명된 스토아주의 정치사상 등 이 시기에 영향을 미친 다양한 정치사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종교개혁가들과 그 후예들은 이전에 있었던 여러 전통과 사상의 영향 속에서 이를 종교개혁 신학의 토대 위에 빚어 그들의 정치사상을 형성시켰다. 다음을 보라. Francis Oakley, The Conciliarist Tradition: Constitutionalism in the Catholic Church 1300-1870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Roger A. Mason, Kingship and the Commonweal: Political Thought in Renaissance and Reformation Scotland (East Linton: Tuckwell Press, 1998).
10) 물론 장로회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힘이 교회 전체에 주어지지만 그 사용 권한은 장로에게 있다고 본 이들도 있고, 러더포드처럼 이 힘은 목사를 포함하여 장로에게만 주어졌다고 주장한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 당시 각 교파 내에서도 다양성이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열쇠의 힘에 대한 논쟁과 러더포드의 견해는 다음 논문에서 다루었다. Jaekook Lee, “Reformed yet Catholic: The Ecclesiology of Samuel Rutherford reflecting Conciliarism, the Scottish Banding Tradition, Covenant Theology” (Ph.D Dissertation, The University of Edinburgh, 2022), 120-56.
11) Samuel Rutherford, A Peaceable and Temperate Plea for Pauls Presbyterie in Scotland (London, 1642); The Due Right of Presbyteries (London, 1644).
12) Simon J. G. Burton, “The Scholastic and Conciliar Roots of Samuel Rutherford’s Political Philosophy: The Influence of Jean Gerson, Jacques Almain, and John Mair,” in Scottish Philosophy in the Seventeenth Century, ed. Alexander Broadi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20), 208–25.
13) Samuel Rutherford, Lex, Rex: The Law and the Prince (London, 1644), 5, 209, 387.
14) Jaekook Lee, “Reformed yet Catholic,” 199-280.
15) Luca Baschera, “Ethics in Reformed Orthodoxy,” in A Companion to Reformed Orthodoxy, ed. Herman Selderhus (Leiden: Brill, 2013), 519-52.
16) Jonathon D. Beeke, Duplex Regnum Christi: Christ’s Twofold Kingdom in Reformed Theology (Leidin: Brill,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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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국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 과정을 이수하고,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 신학석사(MTh) 및 박사(PhD) 학위를 받았으며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 및 그의 언약 신학과 정치 사상을 연구했다. 현재 서울에 있는 시광교회에서 협동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