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스위스에서는 안락사를 위한 기계 장치인 사르코 캡슐이 등장하며 세계적인 생명윤리 논쟁을 촉발시켰다. 사르코 캡슐은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조력 자살 옹호 단체인 엑시트 인터내셔널의 설립자 필립 니츠케 박사가 개발한 것으로, 캡슐 내부에는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등받이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사용자가 의자에 앉아 버튼을 누르면 밀폐된 캡슐 안으로 질소가스가 분사되며, 사용자는 잠든 상태에서 수 분 내에 사망에 이르게 된다. 엑시트 인터내셔널은 이 과정을 평화롭고 빠르며 품위 있는 죽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르코 캡슐의 첫 사용자는 64세 미국인 여성으로, 실제로 이 캡슐을 이용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캡슐을 도입한 스위스의 ‘더 라스트 리조트’ 사가 제품 안전법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질소 사용이 화학물질법의 목적 조항과 상충한다는 점에서 스위스 현행법을 위반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캡슐 사용이 잠정적으로 중단되었으며, 현재 경찰의 수사 대상이 되고 있다.
한편, 한국에서는 안규백 의원 등 10명의 국회의원이 2024년 7월 5일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이 임종 과정에서 치료 효과 없이 단순히 임종 기간만 연장하는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조치에 그치고 있다고 비판하며, 말기 환자가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을 경우 자신의 의사에 따라 소위[1] “조력 존엄사”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하고, 담당 의사가 이를 돕는 것을 허용하는 법안을 발의했다.[2] 이 두 사건은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죽음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고전적인 생명윤리의 질문을 다시금 제기하고 있다.
안락사의 다양한 정의, 그러나 ‘본질은 하나’
안락사를 지지하는 진영은 다양한 방법으로 안락사에 대한 윤리적 비판을 회피하려 시도한다. 그중 하나는 안락사의 다양한 정의를 제시하여, 마치 허용 가능한 안락사와 허용 불가능한 안락사가 존재한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안락사의 정의를 정확히 파악해야 안락사 지지자들의 교묘한 전략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
1.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의 구분
‘좋은 죽음’ 또는 ‘안락한 죽음’을 뜻하는 안락사(euthanasia)는 회복 불가능한 극심한 고통을 동반하는 질병 상태나 이에 준하는 비상한 질병 상태에 처한 환자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직접 또는 후견인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종결해 달라고 요구할 때, 의사가 환자의 생명을 직접 종결시키거나, 환자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장치나 약제를 준비해 주는 행위를 의미한다. 전자는 적극적 안락사, 후자는 소극적 안락사로 구분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환자의 죽음을 의도하고 이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이 구분은 의미가 없다.
2. 자발적 안락사와 비자발적 안락사의 구분
환자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는 경우 시행되는 안락사는 자발적 안락사로, 환자가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추정적이거나 대리적 판단에 따라 시행되는 안락사는 비자발적 안락사로 구분된다. 비자발적 안락사는 환자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은 채 생명을 종결시킨다는 점에서 자발적 안락사보다 윤리적으로 더 큰 문제가 있다.
3. 의사조력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
안락사는 환자의 관점에서 보면 의사의 도움을 받아 행하는 자살로 볼 수 있다. 의사조력자살은 안락사에서 의사의 역할에 주목한 표현일 뿐, 별개의 범주가 아니며 사실상 안락사와 동의어에 불과하다.
4. 자비사
안락사는 고통받는 환자를 돕기 위한 선한 동기에서 행해진다는 점을 부각시켜, 안락사의 비윤리성을 완화하고 이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으로 자비사(Mercy Killing)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안락사를 자비사로 부른다고 해서 그 본질이 변하지는 않는다.
5. 존엄사
존엄사란 환자가 혼수상태 또는 유사한 의학적 상태에서 의사를 명시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 인공음식물투여장치나 인공호흡기와 같은 인공 연명장치에 의존하여 단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상실한 삶이라고 판단할 때,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연명장치를 제거해 생명을 종결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존엄사는 사실 소극적이고 비자발적인 안락사를 미화한 표현에 불과하다.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종결하는 행위에 대해 ‘존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존엄’은 고통 속에서도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 자연적인 수명을 다할 때까지 살아가는 생명존중 행위에 사용해야 할 용어다.
6. 간접적 안락사
어떤 간호사가 환자의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선한 의도로 의료 절차와 준칙을 철저히 준수하며 모르핀을 투여했으나, 예상치 못한 우발적 사태로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를 간접적 안락사(indirect euthanasia)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이중결과의 원리(The Double Effect Theory)에 의해 도덕적 비판에서 면제된다. 의도했던 결과(고통 완화)와 실제로 나타난 결과(환자의 사망)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경우 간호사가 환자의 죽음을 의도하지 않았으므로 이를 안락사로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3]
7. 무의미한 진료의 중단
무의미한 진료의 중단은 치료를 통한 회복이 불가능한 말기 질환 상태에 있거나, 자연적인 노화 과정에서 죽음에 이르는 것이 불가피한 환자가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할 것을 요청할 경우, 의사가 의학적 검토와 병원 윤리위원회와의 협의를 거쳐 치료를 중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의미한 진료의 중단은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이 특수한 연명치료 중단을 의미하며, 일반적인 연명치료 중단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특수한 연명치료는 치료 효과가 없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부착, 방사선 치료 및 항암 치료와 같은 전문적인 치료를 지칭한다. 이러한 치료는 환자의 의사에 따라 중단할 수 있다. 반면, 일반적인 연명치료는 산소 공급, 수액 공급, 자양분 공급과 같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포함한다. 산소, 수액, 자양분 등은 질병 여부와 상관없이 생명 유지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므로, 일반적인 연명치료는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일반적인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환자를 질식시켜 죽이거나, 수분 부족으로 죽이거나, 굶겨 죽이는 잔인한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현행 연명의료법은 특수한 연명치료의 중단은 허용하지만, 일반적인 연명치료의 중단은 금지하고 있다. 이를 통해 비자발적, 소극적 안락사를 차단하고 있다.[4]
그러므로 안락사의 정의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정의가 다양하게 제시되더라도 안락사는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허용될 수 있는 안락사의 유형으로 제시되는 것들은 사실상 안락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심폐사 이전에는 모두 살아 있는 인간이다.
안락사를 지지하는 이들이 안락사가 살인 행위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시도하는 또 하나의 전략은 죽음의 시점을 앞당기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심폐 기능이 정지되는 시점을 죽음의 시점으로 정의해 왔다. 심폐 기능이 정지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그 이전의 인간은 모두 살아 있는 인간으로 간주되며, 이 시기의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종결시키는 행위는 살인 행위가 된다. 인간의 죽음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 말기 환자: 회복이 불가능한 질병이나 노화 상태에 있으나 신진대사, 혈액 순환, 자발 호흡이 이루어지고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상태.
- 혼수상태: 말기 환자 상태에서 대뇌가 기능을 상실하여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없지만, 자율신경계를 관장하는 소뇌는 살아 있어 신진대사, 혈액 순환, 자발 호흡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
- 뇌사상태: 대뇌에 이어 소뇌까지 기능이 정지되었으나 여전히 신진대사, 혈액 순환, 자발 호흡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
- 심폐사: 모든 신체 기능이 정지되는 상태.
여기서 말기 환자를 죽음의 시점으로 간주하려는 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기 환자는 자기 의사를 명확히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시점을 앞당기려는 시도는 죽음을 혼수상태와 뇌사상태로 조정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의 시점을 혼수상태로 앞당기려는 시도는, 혼수상태 환자에게서 연명장치를 제거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안락사(비자발적 소극적 안락사)가 살인 행위라는 비판을 피하려는 의도로 이루어진다. 뇌사상태로 앞당기려는 시도는 장기 적출을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또한 죽음의 시점을 혼수상태나 뇌사상태로 앞당기려는 시도의 배경에는 유물론적 인간관이 자리 잡고 있다. 유물론적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 또는 정신은 뇌신경세포가 작동하는 동안 컴퓨터 화면과 같은 가상현실처럼 떠올랐다가, 뇌신경세포가 죽으면 함께 소멸된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정신 또는 영혼이 소멸되고 신체만 남는다면, 이를 죽음으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긴다.
기독교적 인간관과 죽음
이러한 유물론적 관점은 기독교적 인간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의 신체를 만드셨다(창 2:7).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영혼을 창조하시고, 스가랴 12:1에서 말하듯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로서, 인간 안에 영혼을 불어넣으셨을 때 비로소 신체가 작동하며 “생령”이 되었다. 이 본문은 영혼과 신체의 관계에 관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 영혼은 뇌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혼의 실재는 뇌 기능의 지속 여부와 무관한 문제이다.
- 뇌의 역할은 본부와 같다. 뇌는 신체에 머무르는 영혼이 신체를 통제하고, 자기 자신을 외부에 표현할 때 필요한 역할을 한다.
- 신체의 생물학적 작동은 영혼의 존재를 나타낸다. 신체가 생물학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영혼이 신체를 떠났음을 의미한다.
또한 성경은 영혼에 관해서 한 번 창조된 영혼은 결코 소멸되지 않으며 영원히 존재이며 영혼은 신체를 떠난 이후에도 존재하며 활동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인간관은 정신 또는 영혼의 소멸을 기준으로 죽음을 정의하지 않는다. 기독교적 인간관은 영원히 존재하고 활동하는 영혼이 신체를 떠나, 신체의 생물학적 작동이 중지되는 시점을 죽음으로 본다. 이러한 이유로 심폐사만이 심장과 폐의 기능이 정지해 신체 기능이 전체적으로 멈추는 상태이므로 죽음의 시점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신체적 생명을 피에 두고 있다고 말하는 레위기 17:11과도 조화된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그렇다면 혼수상태의 환자와 뇌사상태의 환자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혼수상태의 환자는 대뇌가 기능하지 못하지만, 신진대사, 호흡 기능, 혈액 순환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환자다. 영혼의 기원이 뇌에 있지 않고, 영혼의 존재와 활동이 뇌의 상태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대뇌 기능의 여부는 죽음의 시점을 결정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대뇌 기능이 손상되었더라도 신진대사, 호흡 기능, 혈액 순환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안에 영혼이 머물러 있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뇌사상태에 들어간 경우에도 일정 시간 동안 신진대사, 호흡 기능, 혈액 순환이 진행 되는 기간 동안에는 뇌사상태의 환자 역시 살아 있는 인간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러한 혼수상태의 환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의학적으로도 증명된 바 있다. 예컨대, 24년간 혼수상태에 있다가 깨어난 독일의 한 환자는 혼수상태에 있었던 24년 동안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두 인지하고 있었으나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따라서 혼수상태 이전의 말기 환자가 살아 있는 인간임은 자명하며, 심폐 기능이 정지되기 전까지 혼수상태의 환자나 뇌사상태의 환자도 살아 있는 인간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환자들에게 의미 있는 특수한 연명치료나 일반적인 연명장치를 제거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는 안락사, 특히 비자발적 소극적 안락사로서 명백한 살인 행위에 해당한다.
성경은 영혼에 관해서 한 번 창조된 영혼은 결코 소멸되지 않으며 영원히 존재이며 영혼은 신체를 떠난 이후에도 존재하며 활동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인간관은 정신 또는 영혼의 소멸을 기준으로 죽음을 정의하지 않는다. 기독교적 인간관은 영원히 존재하고 활동하는 영혼이 신체를 떠나, 신체의 생물학적 작동이 중지되는 시점을 죽음으로 본다.
안락사가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들
안락사는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살이며, 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살인이다. 성경은 자살에 대해 별도의 평가를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살이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범하는 행위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안락사가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들을 뒷받침하는 논증들이다.
1. 살인은 고통 완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안락사 지지자들은 고통받는 환자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죽음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환자에 대한 긍휼의 마음의 표현이며, 황금률(마 7:12)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통의 제거는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어기면서까지 시행되어서는 안 된다. 고통의 제거는 고통이 사라진 이후에도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만 의미를 가진다.
2. 제거되지 않는 고통에는 의미를 물어야 한다.
인간의 삶에서 고통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 있음을 고백할 때, 우리는 제거되지 않고 남아 있는 고통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 이러한 고통은 인간 삶의 신비이자 하나님의 섭리의 일부로 이해될 수 있다.
3. 환자의 자결권은 환자의 의사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고통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종결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환자의 호소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음을 드러낼 수 있다. 환자는 극심한 고통, 가족에게 가는 재정적 부담, 의료 자원의 공정한 분배를 고려하는 사회적 압박 속에서 죽음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이 요청의 이면에는 사람들과의 접촉, 애정, 함께 있어 주는 위로와 격려를 바라는 마음이 숨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4. 인간 생명의 종결권은 하나님께 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자도 여호와”(욥 1:21)라는 욥의 고백과,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 12:10)는 말씀에는, 인간 생명의 주관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하는 신학적 근거가 담겨 있다. 인간은 자기 생명에 대해서도 청지기적 입장을 가져야 하며, 생명의 종결권을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다.[5]
미끌어져 추락하는 인간 생명의 고귀함
안락사는 아무리 엄격한 조건 아래에서 법적으로 허용되더라도, 일단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 점점 더 허용 범위가 확대되어 결국 전면적으로 허용되는 것을 막기 어렵게 된다. 이를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The Slippery Slope)이라고 한다. 미국 헴록협회의 안락사 허용 논리와,[6] 독일[7]과 네델란드[8]의 경우는 이러한 미끄러운 경사면(the slippery slope)[9]의 논증을 경험적, 논리적, 역사적으로 증명한다. 이를 보면 안락사의 미끄러운 경사길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순서를 따라 점차 확대되었다.
첫째, 임종을 며칠 앞둔 말기 환자가 신체적으로 극심한 통증을 겪고 있으며 본인의 동의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제한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한다. 그러나 안락사가 혜택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 임종을 일주일 앞둔 환자가 겪는 고통과 임종을 1년 앞둔 환자가 겪는 고통 중 어느 쪽이 더 큰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당연히 임종을 1년 앞둔 환자가 겪는 고통이 더 클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말기 환자라는 조건이 점차 철폐된다.
둘째,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중 어느 고통이 더 큰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사람에 따라 정신적 고통을 신체적 고통보다 더 크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신체적 고통이라는 조건도 점차 제거된다.
셋째, 안락사라는 혜택을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환자에게만 주고,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환자에게는 주지 않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결국,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환자에게도 안락사가 허용되며, 결국 안락사의 전면적인 허용으로 이어진다.
나가는 말
인간은 심폐 기능이 중지될 때까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심폐 기능 정지 이전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자의적으로 생명을 종결시켜서는 안 된다. 인간의 생명을 자의적으로 파괴하는 행동에 대해 “존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혼수상태의 환자와 뇌사상태의 환자를 포함한 말기 환자는 살아 있는 인간이다. 혼수상태의 환자는 대뇌 기능이 손상되어 자신의 의식적 활동을 외부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따라서 혼수상태의 환자에게 무의미한 특수 연명치료가 아닌 일반적인 연명치료를 중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는 살인 행위에 해당한다.
고통 속에 있는 환자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노력은 숭고한 사랑의 실천이다. 그러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살아 있는 생명을 파괴하는 일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 살아 있는 인간의 생명은 고통에서의 해방을 능가하는 상위의 가치를 지닌다. 인간 생명을 정당한 이유 없이 인위적으로 종결하려는 시도는 성경의 살인을 금하는 도덕법과 인류 보편의 도덕률에 어긋난다. 인간 생명의 절대적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으며, 생명 종결권을 의미하는 자기 결정권은 성립할 수 없다. 안락사는 아무리 엄격한 조건 아래에서도 윤리적이나 법적으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안락사가 하나의 혜택으로 인식되는 순간, 이는 미끄러운 경사길을 따라 점차 조건이 완화되고, 결국 전면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어렵게 된다. 따라서 안락사의 법제화를 막는 동시에, 고통 속에 있는 말기 환자의 고통을 완화하고 자연적인 죽음에 연착륙할 수 있도록 돕는 완화의학과 호스피스 시스템의 강화가 필요하다. 이는 정부 차원뿐만 아니라 교회 관련 공동체와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주)
- 안규백 외, “조력 존엄사 법안,” 제11조, ⓶.
- 안규백 외, “조력 존엄사 법안,” 제13조, ⓵.
- 케보르키안은 자신의 행동을 이중결과의 원리에 의지하여 변호했다. 그러나 케보르키안의 변호는 진실성이 의문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사용한 일산화탄소(carbon-monoxide)는 모르핀과는 달리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고통을 제거할 수 없는 물질이기 때문이다(William F. May, “After the US Supreme Court Decisions: the Politics of Assisted Suicide and the Church’s Role,” Studies in Christian Ethics, Vol.11,No.1 <May 1998>, 49).
-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제19조, 2항.
- Douma, Rondom de dood, (Kampen: Van den berg, 1984), 27; Medische ethiek, (Kampen: Kok, 1984), 269.
- D. Alan Shewmon, “Active Voluntary Euthanasia: Opening Pandora’s Box,” in Last Rights: Assisted Suicide and Euthanasia Debated, ed. Michael M. Uhlmann (Grand RapidsL Eerdmans, 1998), 346.
- Shewmon, “Active Voluntary Euthanasia: Opening Pandora’s Box,” 351-52.
- 이상원 “네덜란드의 안락사: 미끄러운 경사면의 논증에 대한 경험적, 논리적, 역사적 증명,” <소극적 안락사, 무엇이 문제인가?> (서울: 기독교윤리연구소, 2007), 279-304.
- 미끄러운 경사길이란 급격한 낭떠러지 절벽 앞에 서 있는 자동차의 바퀴가 약간이라도 절벽 모서리를 지나 구르기 시작하면 낭떠러지 밑에까지 굴러 떨어지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태를 막으려면 아예 바퀴가 조금이라도 경사면 모서리에 들어가지 않도록 처음부터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원 박사는 한국 개혁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기독교 윤리학자로, 총신대학교 신학과(BA)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Th.M.)와 네덜란드 캄펜 신학대학교(Th.D.)에서 공부하였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23년간 기독교 윤리학과 조직신학을 강의했으며, 신학대학원 원장과 부총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상임대표와 월드뷰 대표주간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