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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1편

문장환 목사(진주 삼일교회)

 

“내 인생의 강물이 끝까지 넘쳐흐르게 하소서”

        어떤 분이 “50대 중반까지는 인생이 보이더니, 그때를 넘어서니 죽음이 보인다”고 말하였습니다. 인생이 날아가는 화살이라 하더니, 저도 벌써 인생이 아니라 죽음을 보면서 걸어가는 나이에 왔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에는 삶이 보이더니 이제는 죽음이 보이고, 노년에 대한 막연한 염려도 찾아옵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점 두려워지는데, 마치 고치 속에 있는 누에처럼 다른 것과 단절하고 자기 안에만 안주하고 싶어지고, 나도 모르게 고집만 늘어가는 것 같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인생의 연륜이 많아지는 만큼 성숙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고집 센 늙은이가 되고, 사람들에게는 퇴물로 취급을 받으니, 늙은 게 두렵고 서글픕니다.

        영국의 경건한 목사이면서 저술가였던 마이어(F. B. Meyer) 목사는 노년에 접어들 때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강을 끝까지 넘쳐흐르게 하시기를 바라네. 나는 내 인생이 늪에서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하네.” 이것이 마이어 목사만의 소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의 소원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시작 못지않게, 시작보다 더 끝이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시편 71편은 노년을 앞둔 어떤 성도의 기도입니다. 성경학자에 따라, 저자가 이미 인생 말년에 들어선 사람이거나 노년을 앞둔 중년으로 보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저자가 노년의 위기를 두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9절).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18절). 시편 기자는 노년 혹은 중년에 인생의 끝을 바라보면서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고 또 일어날 것을 깨달았습니다. 노쇠함에 따라 여러 문제가 일어나고, 평소의 문제들도 더 어려워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시편 저자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고 봉사하였던 사람입니다. “주는…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5-6절).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17절). 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경건하게 살았고 청년기와 장년기의 시기도 올곧게 살아왔습니다. 그렇다고 노년기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노년의 위기를 그가 만든 건 아니지만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잘 통과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여, 내게 백발이 찾아올 때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가 되어 주소서.” 이 기도는 우리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어느덧 노년에 이른 분의 기도이고, 노년을 바라보는 중년의 기도이고, 언젠가는(생각보다 빨리) 노년을 맞이해야 할 젊은이의 기도이고, 노년의 부모를 두고 있는 자녀의 기도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하나님이 이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시편 71편은 1-8절, 9-15절, 16-24절, 이렇게 세 연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연의 마지막 절(8절, 15절, 24절)에는 모두 “종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8절);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15절);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24절). 시편 기자는 기도에 응답하여 노년에 피난처가 되어 주신 하나님께 종일토록 감사 찬송합니다. 늙었을 때도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종일 전하고 자랑합니다. 백발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종일토록 묵상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기도와 응답과 감사는, 바로 우리 것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기도와 응답과 찬송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1-8절).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인가요 아니면 안타까운 일인가요? 축복인가요 아니면 저주인가요? 성숙인가요 아니면 퇴행인가요? 아마 대체적으로는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노화와 죽음을 자연적 현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성경에 따르면 죽음은 인간의 범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하나님의 본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리시는 형벌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당장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 과정을 노화라고 한다면, 노화 역시 하나님의 본래 계획에서 벗어난 형벌입니다. 그러므로 죽음도 노화도 악, 일종의 해악입니다.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노화기가 진행될수록 죽음의 해악들이 심하게 나타나기에,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반갑지 않은, 힘겨운 일입니다. 

        우리의 연륜이 성숙해지는 연륜만 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무력해지는 연륜입니다. 나이 듦에 따라 달갑지 않은 것들이 찾아오는데, 특히 무기력함이 발생합니다. “늙을 때에…내 힘이 쇠약할 때에”(9절). 무엇보다도 육체적으로 무력해집니다. 육신이 내 원대로 되지도 않고, 나를 스스로 보호할 수도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의 무례한 행동을 보고 분노를 하지만, 몸으로는 어쩔 수 없어서 부르르 떠는 노인들을 보게 됩니다. 또한 여러 가지 병마에 노출됩니다. 젊었을 때는 걸리지도 않았던 병에 자주 걸립니다. 몸살이나 감기라는 건 모르고 살았는데, 이제 몸살도 자주 나고 한번 감기에 걸리면 빨리 낫지도 않습니다. 몸의 부분들이 고장도 잘 납니다. 별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어깨가 결리고 허리가 아프고, 약간 부딪혔는데 골절이 되고, 넘어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칩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경제적인 염려도 커집니다. “노년에 경제적으로 감당이 될까?” 어쩔 수 없이 연금을 계산해 보고 통장을 염려합니다. 또 다른 걱정이 생기는데 위신에 대한 걱정입니다. “초라한 늙은이가 되어서 자식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나 되지 않을까?” 시편 저자도 같은 걱정을 하였습니다.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1절). 더 두려운 것은 악한 사람과 얽히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4절). 마음이 악하고 말이 통하지 않고 기본 예의가 없고, 무지막지한 사람이 전에는 날 피해 가더니, 내가 나이가 드니 피하지도 않고 맞붙어서 내게 수치를 안깁니다. 나는 점잖게 살고 싶어도 예기치 않게 이런 악한 사람들을 만나기 십상입니다. 

        또 하나 두려운 것은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 같이 되었사오나…”(7절). 여기에 나오는 “이상한 징조”는 섞이지 못해서 비방 거리나 주목 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지만, 내가 그들과 맞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꼴이 되고, 젊은 사람들이 슬슬 피합니다. 이런 일들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옵니다. 늙는 것이 서글픕니다. 어르신들이 늙음의 설움을 많이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면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피할 곳이 우리에게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육체의 무력과 질병이라는 찬 서리가 내리고, 경제적 어려움과 염려라는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늙은이로 당하는 초라함과 구박과 비참함의 구름이 잔뜩 끼고, 소외와 서러움이란 비가 퍼부을 때도 우리가 피할 수 있는 바위가 있습니다. 그 무서리, 그 비바람이 오지 않게 한다고 약속하지는 않습니다만, 감사하게도 그것을 피할 피난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피난처입니까?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7절). 주님이 나의 피난처입니다. 주님이 나의 견고한 피난처입니다. 세찬 비바람이 몰아칠 때, 찬 서리가 내릴 때, 야산의 돌들이 굴러 내릴 때, 맹수들이 울부짖으며 달려올 때, 하나님은 우리가 숨을 견고한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이 확신 가운데 있었기에 시편 기자는 앞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3절).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저를 구원하라”고 온 세상에 명령을 내리십니다. 모든 자연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후대하라고 명령을 내리십니다. 곰의 손에서 다윗을 지켜 주시고, 사자의 입에서 다니엘을 지켜 주신 하나님이 우리를 악한 사람과 악한 일에서 지켜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시편 기자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나의 요새, 나의 반석, 나의 소망, 나의 견고한 피난처라고 부르듯이, 하나님이 바로 내 구원, 내 반석, 내 산성이 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요, 어떤 경건한 사람들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바로 내 하나님이십니다. 

“늙을 때 나를 버리지 마소서”(9-15절).

        인생이 황혼기에 이르면 고독과 외로움이 찾아옵니다. 친하던 이웃들도 멀리 이사를 가버리고, 친구들도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가고, 품 안에 있던 자식도 떠나갑니다. 시편 기자도 그런 고독을 두려워하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9절). 그런데 이 외침에는 고독의 아픔만이 아니라, 모두에게서 버림을 당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누구나 노년이 되면 그런 두려움이 생깁니다. 

        시편 기자가 원수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도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수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은즉 따라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11절). 버림을 받았다는 것처럼 인생을 절망하게 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버림받은 사람은 육체는 살아있지만, 이미 마음은 죽어 있습니다. 이런 걸 노년에 많이 경험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2절). 하나님만이라도 자기를 멀리하지 말아 달라고, 원수들이 공격할 때 도와 달라고 간청합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노년이 되도 버리거나 멀리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백발이 되어도 품으시고 동행해 주십니다. 더 이상 그 분께 봉사할 힘이 없을 때도 사랑과 호의를 줄이지 않으십니다. 원수들에게서 꼭 구원해 주십니다. 

        그런데 시인의 고독과 외로움에 대한 본질적인 두려움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에 있습니다. 그가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가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말고, 멀리하지 말라는 간구입니다. 이 간구는 물론 사람에게서 버림받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이제 자신 앞에 다가온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죽음은 분리의 공포심을 줍니다. 자신의 존재가 멸절하는 공포심을, 모든 관계가 끝나는 공포심을, 모든 게 사라지는 공포심을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거나 멀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장 충만하게 적용되는 순간이 죽음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우리를 붙잡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은 그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적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죄에 따른 개별적 형벌로서 죽음은 더 이상 효력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신자가 이 땅에서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의 대속 사역의 유익을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적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와 그 해악을 단번에 주시지 않은 것처럼, 죄와 그 해악을 단번에 제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종말 때까지 유예하셨다가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비로소 죽음을 포함한 죄의 모든 효력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동반되는 노화와 질병을 겪다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신자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신자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고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외롭고 고독한 노년의 시기, 죽음을 앞둔 시기에 오히려 주님께 소망을 품으리라고 결심합니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14절). ‘소망’은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는 마음과 더불어 찬란한 기대감으로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소망이란 스스로 빠져드는 자기 확신이나 상상력을 발휘하여 갖는 고취감이나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도 아닙니다. 신자의 소망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인격과 말씀하신 약속을 기초로 합니다. 

        욥이 가진 소망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죽일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소망)하리라”(욥 13:15). 욥이 가진 소망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고독과 소외의 아픔에서도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살아계시며 상한 영혼과 고독한 심령에 가까이 오셔서 친히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육체 밖으로 나갈 때에도 여전히 대속자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6).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노년에 함께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떠날 때도 함께하십니다. 바울은 신자의 죽음을 고린도후서 5장 1-10절에서 몇 가지 비유와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바울에게 죽음이란 무너진 육체라는 장막 집 대신에 하나님이 직접 지으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1절).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는 것입니다(2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는 것입니다(4절). 주와 함께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8절). 그리고 주님의 시상대에서 상을 받는 것입니다(10절). 죽음이 이러할 진데 우리가 어찌 죽음을 두려운 존재로만 생각하겠습니까? 어찌 항상 소망을 품고 주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늙어서도 나를 사용하소서”(16-21절) 

        나이가 들면 서러운 것이 모든 일들을 젊은 사람들에게 내주고 뒤로 나앉는 것입니다. 과거의 역군들이 초라하게 내몰리는 것을 보면 서글퍼집니다. 회사나 사업이나 가정이나 교회의 일들을 하나씩 놓습니다. 그때 찾아오는 허무감과 무력감은 견디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처럼 절망 되는 일이 있을까요? 그런 처지에 있는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18절). 그가 하나님께 버리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고 동행하여 달라고 간청하는 이유는 주님의 힘과 능력을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특히 후대의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외형적으로 불 때 우리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용하길 기뻐하시고, 우리가 쓰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20-21절). 사람들은 우리를 볼 때 심한 고난의 세월 후에 이제 기력도 잃어버렸고, 땅속에 묻혀있기나 해야 할 것 같고,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으로 여길지 모릅니다만,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고 끌어올리시고 창대하게 하시고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노쇠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요? 그건 여전히 우리에게 머무는 주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노년이 될수록 더 온전하게 역사하는 주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바울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니라…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늙어갈수록 육신은 낡아지고 힘은 약해지고 인지기능도 떨어지지만, 내 속에 계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내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되는데, 더욱 새로워진 노년기 그리스도인은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만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바로 그런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끊임없이 전할 수 있었습니다 (참조, 15,16,17,18절). 그는 말과 행동과 삶으로 주님을 전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제 끝났다” 하는 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 있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92편에 나오는 “여호와의 집에 심긴 나무”와 같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시 92:13-14). 우리 어르신들 모두 여호와의 집에 심겨 하나님의 뜰 안에서 끝까지 번성하기를 바랍니다.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길 바랍니다.

“나의 혀도 종일토록 찬송하겠나이다”(22-24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강이 끝까지 넘쳐흐르게 하실 것입니다. 노년의 수많은 위기와 난관 중에서도 언제나 함께 해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영원한 소망을 주시고, 마지막까지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정말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비파로, 수금으로, 입술로, 혀로, 영혼으로, 온 삶으로 노년까지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22-24절). 

        러시아 속담에 “전쟁에 나가려면 한번 기도하라. 배를 타러 나가려면 두 번을 기도하라. 결혼을 하려면 세 번을 기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노년의 항해를 앞두고는 몇 번을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그 답은 “종일토록” 입니다. 노년의 시편 기자는 종일토록 주께 찬송과 영광을 돌렸고, 종일토록 주의 공의와 구원을 전하였고, 종일토록 주님의 의를 묵상하였습니다. 노년의 항해를 위해서는 “종일” 하셔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종일 찬송하기를 바랍니다. 비파로 수금으로 입술로 영혼으로 혀로 삶으로 종일 찬양하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노화와 죽음, 비록 달갑지 않은 손님 같지만, 따지고 보면 귀한 손님입니다. 노화와 죽음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겠습니까? 아마 끔찍할 것입니다. 비록 죄의 결과이고 해악이지만 우리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노화와 죽음은 더 크고 완성된 영광의 때를 가져오는 시간이며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노화와 죽음을 잘 준비하시고, 수용하시고,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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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후, 고신대 신대원(M.Div.), 스텔렌보쉬대학교에서 수학했다(M.Th. cum laude, D.Th.). 바울서신과 사회수사학적해석을 전공하며, 현재 진주삼일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