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사회 속의 교회, 성경적 노화와 죽음 인식
신원하 원장(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
2024년 2월 현재 대한민국은 고령사회이다. 국제연합(UN)의 기준에 따르면 65세 노인 인구가 7%를 넘으면 고령화 사회(aging society), 14%를 넘으면 고령사회(aged society) 그리고 20%를 넘으면 초고령사회(post-aged society)이다. 대한민국은 2017년에 이미 고령사회에 들어섰고, 내년 2025년에는 초고령사회가 된다고 한다. 1월에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2023년도 주민등록 인구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70대 이상 노인 인구가 20대 청년 인구를 처음으로 추월했다. 2023년도의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약 973만 명인데, 이는 한국 총 인구의 19%에 해당한다. 현재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초고령사회의 턱밑에 이른 상태이다.1)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한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노인의 복지와 의료에 더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있다. 정부는 노인이 건강한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복지와 의료 혜택을 더 많이 제공하기 위한 정책을 강화해오고 있다. 이런 고령화 추세에 편승하여 많은 출판사들이 노년의 건강에 대한 책들과 특히 노화를 막아 소위 노년기를 건강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이른 바 안티에이징(anti-aging)의 습관과 방법을 다룬 책들을 계속 내어놓고 있다. 방송국들과 여러 매체들도 이 주제에 관한 각종 프로그램과 동영상을 그야말로 쏟아내고 있는 형편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죽는다.
사람은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죽는다. 아무도 예외가 없다. 청년기에 쌀 한 가마니를 거뜬히 들던 건장한 사람도 노년이 되면 기력이 쇠해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들게 되며 마침내 죽는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50대가 되기까지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자신은 아직 죽음과는 무관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기 때문이 더 큰 이유이다. 그러나 60대 중반에 이르고 자신이 신체 기능과 건강이 조금씩 저하되는 것을 느끼게 되면 비로소 자신의 노화를 인식하고 비로소 ‘죽음’에 대해서도 조금씩 의식하게 된다.
노화 그리고 항노화와 역노화
인류 사회는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급속한 과학과 의료 공학 기술의 발전을 거듭해 오면서 이전에 불치병으로 여겨졌던 많은 질병들을 치료하면서 인간 삶의 질을 많이 향상시켜 왔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연장 의료공학과 기술을 개발하여 인류가 그토록 염원했던 건강한 몸으로 젊음을 유지한 채 오래 사는 법 즉 노화를 막고 젊은 몸으로 장수하는 안티에이징 즉 항노화(抗老化)의 기술과 방법을 찾게 되었다. 현재 과학과 생명 연장 공학의 거듭된 성과로 21세기 지구촌의 선진 사회에 사는 국민들은 이전에 비하면 안티에이징의 혜택을 실제로 누리고 있는 형편이다. 즉 해가 갈수록 노화가 조금씩 늦춰지고 그에 따라 현대인의 수명도 늘어가고 기대수명도 실제로 늘어나고 있다.2)
그런데 21세기가 들어선 이후 최근 약 10년 전부터 선진국의 과학자들은 노화를 예방하는 안티에이징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아예 노화를 되돌리고 젊음을 지속하려는 ‘리버스 에이징’(reverse aging or age reversal)즉 ‘역노화’(逆老化)를 미래의 목표로 제시했다. 그리고 이 일에 막대한 재정과 연구 인력을 쏟아부어 왔다. 이러한 연구는 어느 정도 성과로 나타났다. 미국 하버드 의대 유전학 교수 싱클레어(David Sinclare) 박사는 자신을 비롯한 세계 노화 연구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서 노화가 인간의 불가피한 삶의 일부가 아니라 일종의 질병이기 때문에, 다른 질병들을 고치듯이 노화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면,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3) 싱클레어 박사는 그의 『노화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이 잘못된 식습관을 바꾸고, 노화를 억제하는 운동과 영양제를 꾸준히 복용한다면 노화를 막고 되돌릴 수 있다고 설파한 바 있다. 그리고 세계 보건기구(WHO)도 이런 의학계의 기류를 반영하듯 2018년에 노화를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하여 그것에 질병코드를 부여한 바 있다.4) 대한민국도 2022년에 이에 관한 연구를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기 시작했고 현재 삼성의료원 혈관내과 김동익 교수와 그의 연구팀을 중심으로 노화 역전 연구를 진행해 오고 있다. 이제 지구촌이 노화를 이전과 달리 보고 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노화는 인생이 거치는 당연한 생리학적 과정이 아니라 잘 대처하면 극복할 수 있는 질병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인간
항노화에 이어 역노화를 향한 선진사회의 열정은 표면적으로는 건강하게 장수하기를 바라는 염원과 희원에서 말미암는 것이지만 이면으로는 인간이 죽음에 대해 갖고 있는 근원적인 공포감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이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갖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각도로 분석할 수 있지만 대강 몇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려는 본능 즉 생존본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생명이 위협받는 순간과 마주치면 본능적으로 살려고 발버둥친다. 이런 이유는 생물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몸에 생존본능이 있어서 생명을 지키려는 생물학적 신체본능이 작동한다는 것이다.5)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거부하고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둘째, 사람은 죽음을 자신의 존재가 멸절되고 이 땅에서의 존재하며 남겼던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지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이 땅에서 일생 동안 힘들게 일구고 획득했던 소유와 지위, 가치 있는 것들로부터 그리고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지내왔던 가족들과 사람들로부터 영원히 결별되고 사라지는 것으로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이러한 일이 자신에게 결코 오지 않기를 바란다.
셋째, 현대인들은 물리적으로도 죽음이 매우 낯선 사건으로 인식되는 시대적 환경과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60대 이하의 시민들은 대부분 사람이 죽는 모습을 가까이서 직접 보지 못하며 성장했다. 그 이전의 과거 세대들은 대부분 대가족이 함께 살던 가정이나 지역동네에서 함께 생활했고 심지어 삶의 마지막도 가정에서 맞기도 했다. 그래서 이전 시대 사람들은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뿐만 아니라 심지어 형제들이 집에서 죽는 모습도 보곤 했다.6) 그러나 20세기 후반기 이후부터 핵가족 시대의 가정에서 자란 세대들은 죽음을 가까이 볼 기회나 경험을 거의 해보지 못했다. 현재 임종을 맞는 사람들 가운데 4명 중의 3명은 모두 병원에서 유명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장례식장에 가지 않는 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직접 마주칠 기회를 갖지 못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아주 낯설게 여길 수 밖에 없고 자신과는 동떨어져 있는 일로 생각하며 살간다. 실제로 대부분의 청장년들은 ‘지금 여기서’ 자기의 행복과 성공을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특별한 계기와 사건이 없으면 죽음을 가까이 느끼거나 생각해 볼 기회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죽음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하더라도 죽음은 자신에게 찾아온다. 아무리 자신이 필멸한다는 사실이 공포를 가져오고 그래서 그 공포를 피하고 싶어 외면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마침내 죽는다.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죄의 형벌 그리고 노화와 죽음
죽음의 기원과 의미 성격에 대해 성경은 그 어떤 종교와 경전에 비해 죽음의 기원과 그 성격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죽음은 인간이 범죄한 결과로 초래되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하나님은 창조의 마지막 존재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만드신 세상과 피조물들을 돌보며 다스리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을 건설하며 살 것을 명령하셨다. 그러면서 첫 사람 아담에게 만약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경우에는 반드시 죽게 될 것도 말씀하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께 복종하며 살려고 하기 보다는 지혜를 알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기를 꾀하며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 범죄에 대해 심판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형벌을 선고하셨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창 3:19). 죽음을 선고하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기원은 바로 이것이다. 즉 첫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서 죽음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담이 사망 선고를 받고 당장 죽지는 않았고 죽음이 오랫동안 유예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선고에 따라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노화를 거치게 되었고 노쇠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게 되었다(창5:5).
이것이 인간의 죽음이 그리고 노화가 초래된 이유와 경위에 대한 구약 성경이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바울 사도가 이에 대해 설명한 것을 명료하게 기록하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3:23a).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처럼 죽음과 노화는 하나님의 본래 계획이 아니라 인간의 범죄에 대해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로서 사람에게 임하고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이후로 태어난 사람들은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예수의 대속 사역이 죽음에 미친 효과
사람이 범죄함의 결과로 사망이 이 땅에 왔고(롬 6:23; 롬 5:12), 모든 사람은 불가피하게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적 죽음을 죽으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이 된 사람들에게는 이제 죽음이란 것은 더 이상 개별적 형벌의 결과물로 임하게 되는 성격을 지니지 않게 되었다. 그 이유는 바울이 말한 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롬 8:1). 따라서 인류의 죄에 대한 형벌로서의 죽음은 예수가 오셔서 인간을 대신하여 치르셨다. 이에 대해 사도바울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라고 설명한다(갈1:4). 그러니 적어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게 되었으니 죄에 따른 개별적 형벌로서의 죽음을 더 이상 신자들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여전히 이 땅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성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 끼친 유익을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들어온 모든 악을 단번에 제거하지 않고 최후의 종말 때까지 유예하시고 예수가 다시 오실 그 때에 비로소 죽음을 포함한 모든 악과 불의를 세상에서 제거하시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은 최후의 종말 때까지 죄의 모든 효과가 제거되지 않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에 동반되는 노화도 계속될 것이다. 그에 따라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죄의 효력과 영향을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고 아울러 그것들이 자신의 몸과 삶에 끼치는 해악도 여전히 경험하게 된다.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노화를 경험하게 되고 질병에 걸리고 마침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은 죽음이 이제는 최종적인 심판이나 형벌의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불신자처럼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의식적으로 외면할 필요가 없다.
죽음과 노화는 악이지만 궁극적인 악이 아님
죽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이상 개별적 형벌의 결과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실 때 설계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은 악이지만 궁극적인 악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요 출발점이다. 그 이유는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효력으로 자기들의 죄가 속량되었고, 예수의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와 사탄의 압제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죄와 죽음에 대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효력의 성격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분명하게 선언한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 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셨느니라]”(히2:1; 4-15).
바로 이런 사실을 알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과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피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된다고 칼빈은 힘주어 말한다. 성도들에게 죽음이란 영원한 생명의 영광에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죽는 날과 마지막 부활의 날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 갖는 영광에 비해 건강과 부요 같은 이 세상의 한시적인 좋은 것들은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7) 그래서 죽음은 비록 악이지만 궁극적인 악은 아니기 때문에 성도들은 불신자처럼 죽음에 대해 과도하게 저항하고 거부하고 외면할 필요가 없다. 도리어 죽음이 다가옴을 느낄 때 성도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을 바라면서 그 소망의 힘으로 영원히 주와 함께 할 날을 기대하면서 죽음을 대면할 힘을 얻게 되고 또 얻어야 한다.
노화에의 대응과 성형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인 노화도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초래된 악임엔 틀림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육체적 기력만이 아니라 육체의 아름다움도 흉해지고 건강도 사그라지기도 한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육체적 아름다움을 경탄하거나 보기 좋은 것으로 묘사하고 노래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유지하고 도모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노화로 인해 외모가 일그러지거나 얼굴 일부에 흉한 모습이 생긴 경우 본인이 이것을 개선하려고 의료적 시술이나 수술을 선택할 경우, 즉 성형시술을 통해 그것들을 치료하고 개선하려는 행동에 대해 비판하거나 그것을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런 시술은 노화의 부정적 부산물을 의료적 도움으로 어느 정도 완화시키려는 행동인데, 이것 자체를 기독교 윤리적으로 문제삼을 만한 타당한 성경적인 근거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성형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성도가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형편에 크게 무리가 되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한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면 본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노화하면서 겪게되는 육체적 외모의 매력의 상실을 슬퍼하며 육체적 매력과 젊은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댓가와 희생도 불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좋은 것이나 보기에 좋은 것이 언제나 좋거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잠언 기자는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잠31:30)라고 말한 바 있다. 노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육체적 매력의 상실은 슬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늦출 수 있는 생활 습관이나 의료적 처방은 필요하지만, 과도한 비용과 희생을 치르면서 육체적 젊음과 매력을 유지하려는 태도는 자신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함으로 자아를 만족시키려는 행위와 다르지 않으며, 이것은 자칫 자아 만족과 외모를 숭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이 점을 깊이 경계해야 한다. 노년기 성도들은 노화 과정에서 사라져가는 육체적 아름다움을 아쉬워하고 그것을 성형을 통해 회복하려는 노력 못지않게, 그 이상으로 백발의 노년다운 원숙함에서 나오는 푸근한 향기와 우아함을 풍겨내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그런 성품을 추구하고 보유하는 삶을 더 마음을 두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노화의 유익
노화는 필연적으로 노쇠를 동반하기 때문에 노년이 되면 신체에 힘이 빠지고 약해지며 그 약함으로 인해 골절이나 낙상과 같은 사상을 더 자주 겪고 병고를 치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노화는 여전히 악이고 노년들이 이같이 악으로 초래되는 해를 더 많이 경험하여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적으로는 젊을 때보다 더 놀라운 영적인 복을 누리는기회일 수도 있다. 바울은 그가 “가시”라고 표현한 자신이 육신에 존재하는 질병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나님이 치유해 주시기를 세 번이나 간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니라”(고후12:9a)라고 응답하시자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b)
노년들은 육신이 약해지고 병고를 더 많이 치르게 되지만,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고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 안에서 온전하여 지기 때문에 더 성화의 길로 나아가기에 적합하게 될 수 있다. 실제로 노년기 신자들은 이것을 더 느끼거나 그런 자신을 보는 기쁨을 더 자주 누리게 될 수 있다. 자기와 함께 교제하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눠주게 되는 유익을 끼치고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되는 열매를 자신을 통해 맺히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노화는 육체적으로는 늙어지나 영적으로는 더 젊어지고 건강해지는 복된 계기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이 고통받는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를 표현한 것에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그의 내면이 나이가 들수록 더 새로워지고 윤택해지는 경험을 통해 바울 자신도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화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년기 그리스도인들은 노화와 노쇠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 안에 머물게 될 것을 도리어 기대하면서 육체적 약함의 기간을 영적인 강함의 기회로 만들어가는 복을 얻기 위해서 더욱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영예로운 노화와 죽음을 향해
화란의 신학자 셀더하위스(Herman Selderhuis, 1961~ )는 인생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장애물 뛰어 넘기 경기에서 장애를 뛰어 넘는 짧은 코스를 달리게 하시는 것으로 비유한 칼빈의 글을 인용하면서 인생은 정말 짧은 경주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인생에게 죽음은 매우 가까이 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칼빈의 경주론을 인용했다.9)
인생이 경주라면, 경주는 결승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결승점을 지나면 시상식이 있고 상이 주어진다. 세상의 경주에는 1, 2, 3등에게만 상을 주지만, 영적인 경주에서는 죽음이라는 결승점을 통과한 경주 참여자자들인 성도 모두에게 상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부활이라는 영원한 생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화와 죽음은 그 자체가 끝이 아니다. 기독교의 죽음과 노화는 영생과 부활의 육체를 지향하며, 이것은 예수님께서 2천년 전 죽음의 공포 가운데 떨고 있는 제자 무리에게 나타나 보여 주신 자신의 부활하신 몸이 씨앗이 되었고 바로 이것은 오늘 현재의 성도들의 노화와 죽음에서 부활로 열매 맺을 것이다(요 20:19-20). 이처럼 성도의 노화와 죽음은 성도가 구주 예수의 부활에 직접 참여하는 영광의 그림자이다.
칼빈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자신의 눈을 부릅 뜨고 제대로 바라보기만 하면 자신의 주위에 산재하고 발생하는 많은 일들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서려 있고 도사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고 했다. 성도들은 이것을 외면하지 말고 응시하고 정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성도들은 더욱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의 남은 길지 않은 삶을 떨림으로 대하게 된다. 현재 노년기에 접어든 성도나 노년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자기의 남은 날들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 인식을 하면서 자신의 노년기를 더욱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주의 영광과 주의 교회를 위해 살아 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잘 늙고 잘 죽기 위해서라도 더욱 노년기를 잘 살아가야 한다.
끝으로 현재 한국 교회는 노화와 죽음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것은 교회의 노인 비율이 일반 사회의 그것보다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가 나이들고 쇠약해진 성도들이 자신의 노년의 삶을 주 안에서 더욱 의미있고 윤택하게 보낼 수 있도록 목회적으로 돌봐야 할 때라는 것이다.
(각주)
1)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4/01/11/XCH3JRGEQ5GXPHINVNGUMTN4EU/
2) Sergey Young, The Science and Technology of Growing Young, 『역노화』 이진구 옮김 (서울: 더 퀘스트, 2023), 23-36.
3) David A. Sinclair, Lifespan: Why We Age-and Why We Don’t Age, 『노화의 종말』, 이한음 옮김 (서울: 부키, 2019), 137-40.
4) https://v.daum.net/v/20220419091519352
5) J. Todd Billings, The End of the Christian Life 『죽음이 삶에게』 홍종락 옮김 (서울: 두란노서원, 2023), 120-1.
6) 곽혜원,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20.
7) Herman Selderhuis, Death. 『우리는 항상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이승구 옮김 (서울: 합신대학원 출판부, 2019), 17.
8) Wayne Grudem, Christian Ethics: An Introduction in Biblica Moral Reasoning, 『기독교 윤리학 中』 , 전의우, 박문재 옮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20), 369.
9) Selderhuis, 『우리는 항상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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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윤(KICE) 원장인 신원하 박사는 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B.A.)을 전공했고,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석사(M. Div.)를, 미국 칼빈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와 보스턴 대학교(Boston University)에서 기독교 윤리학으로 석사(Th.M)와 박사(Ph. D.) 학위를 하였다. 이후 고려신학대학원에서 30년 동안 기독교윤리학 교수와 원장으로 재직했다. 대외적으로는 한국 복음주의 윤리학회 회장. 기독교윤리연구소(기윤실부설) 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요 출발점이다. 그 이유는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효력으로 자기들의 죄가 속량되었고, 예수의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와 사탄의 압제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원하 원장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