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거부할 수 없는 스포츠의 힘
현재 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과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있다. 지난 6월 24일 갑작스럽게 발생한 베네수엘라 강진은 사망자와 실종자가 7만 명에 이를 정도로 피해 규모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지구 한편에서는 4년마다 열리는 전 세계인의 축구 축제, 2026 북중미 월드컵의 열기가 이어지고 있다.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의 축구에 대한 관심은 예전만 못한 듯했다. 그러나 한국이 첫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자 분위기는 빠르게 달라졌다. 하지만 지난 6월 25일 한국은 연이어 두 경기에서 패배했고, 결국 6월 28일 최종 32강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한국 대표팀은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성적이라는 오명 속에 귀국길에 올랐고, 사람들은 첫 승리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비난과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이처럼 스포츠는 평소 우리 삶과 거리가 있는 듯 보이지만, 승리와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면 사람들을 순식간에 하나의 감정 공동체로 묶어 낸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스포츠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어떤 차이를 가져야 할까? 이 글은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먼저 교회와 스포츠가 역사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 살펴본다. 이어서 스포츠가 지닌 성경적·신학적 의미를 검토하고, 현대 프로 스포츠와 팬덤 문화가 제기하는 윤리적 문제를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교회가 스포츠를 어떻게 가르치고 활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성도들이 이를 신앙 안에서 바르게 이해하고 삶으로 살아내도록 하기 위해 교회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제안하고자 한다.
기독교회와 스포츠의 역사적 관계
고대 스포츠: 종교 의례로서의 경기
스포츠와 종교의 관계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스포츠를 세속적 오락이나 산업으로 이해하지만 고대 사회에서 스포츠는 종교와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고대 남아메리카와 메소아메리카의 원주민 문화에서 공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 질서, 태양의 운행, 생명과 죽음, 풍요와 희생을 상징하는 제의적 행위였다. 경기장은 승패를 가르는 공간이 아니라 하늘과 땅, 신과 인간, 삶과 죽음이 만나는 상징적 장소였다. 어떤 경우에는 경기와 제사가 연결되어 인간 희생의 의미까지 동반했다. 여기서 스포츠는 오락이 아니라 종교 의례였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올림픽은 평화와 인류 화합의 상징처럼 말해지지만 고대 올림픽은 제우스에게 바쳐진 종교 축제였다. 운동 경기는 신에게 바치는 봉헌이었고 승리는 개인의 영광이자 도시국가의 명예였으며 신의 호의를 확인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로마의 경기 문화와 초기 기독교의 비판
로마 사회의 경기 역시 종교적·정치적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로마의 경기 문화는 점차 잔혹한 구경거리이자 권력의 장치로 변해갔다. 검투 경기, 맹수와 인간의 싸움, 대규모 전차 경주는 대중을 열광시켰지만 동시에 폭력과 죽음을 오락으로 소비하게 만들었다. 권력자는 “빵과 서커스”로 대중의 불만을 달랬고 스포츠는 통치의 도구가 되었다. 사람들은 경기장의 열광 속에서 제국의 질서에 길들여졌다.
이런 이유로 초기 기독교는 로마의 경기 문화를 강하게 비판했다. 교부들이 문제 삼은 것은 경기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우상숭배, 폭력, 음란, 도박, 잔혹함, 대중의 광기였다. 터툴리안은 로마의 구경거리가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훼손한다고 보았다. 경기장은 우상에게 바쳐진 장소였고 피와 욕망과 허영이 뒤엉킨 세계였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께 속한 초기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죽음을 오락으로 소비하는 문화에 참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중세·종교개혁·청교도: 분별의 기준
중세 가톨릭 사회에서도 스포츠와 놀이는 완전히 배제되지 않았지만 늘 긴장 속에 있었다. 축일과 마을 축제에는 다양한 놀이와 경기가 있었고, 기사 문화 속에서는 무술 경기와 토너먼트가 행해졌다. 그러나 교회는 지나친 폭력, 도박, 음주, 성적 방종, 주일과 절기의 훼손을 경계했다. 놀이와 스포츠는 허용될 수 있었지만 영혼의 질서를 무너뜨릴 때에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1)
종교개혁자들의 태도는 단순히 반스포츠적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루터는 인간의 몸과 일상을 긍정했고 지나친 금욕주의를 경계했다. 그는 케겔스(kegels)라 불리는 독일의 오래된 볼링 놀이를 즐겼으며, 볼링 핀이 쓰러질 때마다 그리스도인이 마귀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유머를 곁들이곤 했다.2) 칼뱅 역시 케겔스를 즐겼고 말굽 던지기와 비슷한 중세의 쿼이츠(quoits) 놀이도 좋아했다. 그도 놀이와 휴식 자체를 악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절제와 질서 안에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에 루터보다는 스포츠에 비판적이었다.3) 이처럼 개혁자들에게 분별의 기준은 스포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끄는지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여 방종과 죄로 빠뜨리는지였다.
청교도들은 더 엄격했다. 그들은 특히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문제와 관련하여 스포츠와 놀이를 경계했다. 주일에 벌어지는 경기, 도박, 음주, 무질서한 축제는 신앙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청교도 전통은 흔히 반스포츠적 전통으로 이해되지만, 이것도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반대한 것은 몸의 활동 자체가 아니라 스포츠가 예배와 말씀과 공동체의 질서를 침식하는 방식이었다. 청교도들은 스포츠가 인간을 방탕하게 만들고 시간을 허비하게 하며 거룩한 날을 세속적 욕망의 날로 바꾸는 것을 두려워했다.4)
근대 스포츠의 형성과 교회의 역설적 기여
그런데 역사는 흥미로운 방향으로 흘러갔다. 교회가 오랫동안 스포츠를 경계했음에도 스포츠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근대로 갈수록 더 강력해졌다. 영국의 학교와 교회, YMCA, 근육적 기독교 운동은 스포츠를 도덕 교육과 신앙 훈련의 도구로 받아들였다. 축구, 농구, 야구, 럭비 같은 근대 스포츠는 규칙과 팀워크, 절제와 용기, 남성성의 훈련, 공동체 의식과 맞물려 발전했다. 특히 영국에서는 교회와 학교가 근대 축구 문화 형성에 깊이 관여했다. 오늘날 유명한 축구 클럽 상당수는 교회와 주일학교, 청년회, 노동자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에서도 농구는 YMCA의 교육적·선교적 맥락에서 탄생했고, 야구는 시민종교와 개신교 문화 속에서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5)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역설을 발견한다. 기독교는 스포츠를 경계했지만 동시에 근대 스포츠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교회는 스포츠가 우상숭배와 방탕으로 흐를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절제와 공동체와 인격 형성의 장이 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스포츠와 교회의 관계는 단순한 적대의 역사가 아니라 거부와 수용, 비판과 활용, 경계와 참여가 반복된 복합적 역사다.
스포츠의 성경적·신학적 의미
성경적 입장: 몸과 놀이를 긍정
성경은 현대적 의미의 스포츠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몸, 놀이, 기쁨, 훈련, 경주, 절제, 안식, 공동체적 축제에 대해 풍부하게 말한다. 구약에서 인간의 몸은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신 창조의 선물이다. 인간은 영혼만이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선다. 이스라엘의 절기와 축제에는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몸의 기쁨이 담겨 있었다. 다윗은 언약궤 앞에서 춤추었고(삼하6:14-16) 시편은 손을 들고 무릎 꿇고 엎드리고 노래하고 외치는 몸의 예배를 보여준다. 성경의 신앙은 머리와 마음만의 신앙이 아니라 몸 전체의 신앙이다.
놀이와 기쁨도 성경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잠언은 지혜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며 창조 세계 가운데서 기뻐하는 장면을 그린다(잠8:30-31). 스가랴는 회복된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구원의 표징으로 묘사한다(슥8:5). 안식일은 단지 일을 멈추는 날이 아니라 인간이 생산성과 성취의 압박에서 벗어나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날이다. 이처럼 놀이는 성경적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놀이는 인간이 자신을 생산 도구로만 이해하지 않도록 지켜준다. 인간은 일하기 위해서만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과 교제하며 창조 세계 안에서 기뻐하도록 지음받은 존재다.
신약의 경기 메타포와 그 한계
신약성경은 운동 경기의 이미지를 여러 차례 사용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에서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을 언급하며 상을 얻기 위해 절제하는 운동선수의 태도를 신앙의 비유로 사용한다. 빌립보서에서는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말하고(빌3:13-14) 디모데후서에서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고백한다(딤후4:7-8). 히브리서 12장 1-2절은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자”고 권면한다. 신약은 스포츠 자체를 신앙의 본질로 만들지는 않지만 운동선수의 절제, 훈련, 인내, 목표 지향성을 신앙생활의 비유로 사용한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경주는 자기 영광을 위한 경쟁이 아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이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걷는 삶이다. 세상의 스포츠는 승자와 패자를 나누지만 복음은 패배처럼 보이는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참 승리를 드러낸다. 세상의 경기장은 강한 자에게 박수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약한 자,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복되다고 말한다(마5:3-12). 그러므로 성경의 스포츠 메타포는 스포츠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절제와 인내를 설명하는 도구다.
호모 루덴스에서 은혜의 놀이까지: 하위징가와 몰트만
신학적으로 스포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현대적 출발점은 요한 하위징가(Johan Huizinga)의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루덴스』이다. 하위징가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나 일하는 존재로만 보지 않고 놀이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는 놀이가 문화보다 오래되었으며 문화는 놀이적 요소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하위징가에게 놀이는 인간이 무엇을 성취했고 어떤 능력을 가졌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된다는 근대적 인간관에 맞서 인간 존재 자체의 의미와 자유를 드러내는 원초적이고 궁극적인 활동이다.6)
이를 바탕으로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놀이의 개념을 신학적으로 확장했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놀이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신앙은 엄숙함만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 은혜 안에서의 기쁨, 종말론적 소망 같은 주제들도 놀이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통찰은 구원받은 인간이 더 이상 자기 의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가지 않으며 은혜 안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7)
링컨 하비: 창조 신학으로 본 스포츠
이어서 링컨 하비(Lincoln Harvey)는 스포츠의 신학적 의미를 아우구스티누스의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와 연결한다. 하비는 인간 존재를 “불필요하지만 의미 있는 존재”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해야만 했던 것도 아니고 부족해서 인간을 만드신 것도 아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우주적 목적이나 필요성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 안에서 존재하게 된 피조물이다. 스포츠도 이와 비슷하다. 스포츠는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 아니다. 축구공을 골대에 넣는 일, 야구공을 치고 1루로 달려가는 일, 농구공을 링 안에 넣는 일은 생물학적으로 필수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불필요한 활동 안에서 인간은 놀라운 의미와 기쁨을 경험한다. 스포츠는 인간 존재의 피조성을 드러낸다. 우리는 꼭 필요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 안에서 의미 있게 존재한다.8)
이 지점에서 스포츠는 창조 신학의 한 표지가 될 수 있다. 스포츠는 인간이 생산하고 소비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다. 아이가 공을 차며 웃는 모습, 노인이 게이트볼을 하며 이웃과 교제하는 모습, 청년들이 농구 코트에서 땀 흘리며 협력하는 모습은 모두 창조 세계의 선함을 드러낸다. 스포츠는 몸의 기쁨, 규칙의 아름다움, 경쟁의 긴장, 협력의 즐거움, 우연성과 한계의 신비를 경험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가 효율과 성취만으로 설명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스포츠의 종교화
축구와 야구: 현대의 성소이자 시간의 종교
그러나 스포츠는 동시에 우상이 될 수 있다. 축구와 야구의 역사를 보면 스포츠가 얼마나 쉽게 종교적 성격을 띠는지 알 수 있다. 축구장은 현대의 성소처럼 작동한다. 팬들은 정해진 시간에 모이고 유니폼이라는 예복을 입고 응원가라는 찬가를 부르며 팀의 상징과 색깔에 충성을 바친다. 경기장은 거대한 의례 공간이 되고 선수는 영웅이 되며 승리는 구원처럼 패배는 공동체의 애도처럼 경험된다. 축구는 사람들에게 소속감과 초월감을 준다. 그러나 그 초월감이 하나님 없는 열광으로 변할 때 축구는 우상이 된다.9)
야구 역시 종교적 성격을 지닌다. 매일 반복되는 긴 시즌, 기록과 통계, 구장 방문의 의례, 가족 간 전승되는 팀 충성심, 영웅과 전설의 서사를 통해 팬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어떤 사람에게 야구장은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이고 어떤 사람에게 특정 팀은 자신의 도시와 삶의 일부다. 야구는 시간의 종교와도 같다. 봄에 시작해 가을에 절정에 이르는 리듬, 매일 반복되는 경기, 실패 속에서도 다시 타석에 서는 구조는 인생의 은유가 된다. 그래서 야구 팬덤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의 서사가 된다.10)
예배를 대체하는 스포츠와 분별의 기준
문제는 스포츠가 참된 예배와 교회를 대체하려 할 때이다. 스포츠는 공동체, 의례, 감정, 정체성, 초월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예배와 닮아 있고 때로는 예배보다 더 강렬한 감정과 즉각적인 기쁨, 분명한 소속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스포츠가 우상이 될 수 있다고 해서 그 자체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 음식이 탐식의 우상이 될 수 있어도 식사를 폐기하지 않듯이 스포츠 역시 하나님 아래 질서 있게 자리할 때 창조의 선물이 될 수 있다. 스포츠가 예배와 교회를 대신하지 않고 몸의 기쁨과 공동체의 교제, 절제와 인내, 공정함을 가르치며 승리와 패배 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한다면 얼마든지 교회 안에서 장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스포츠가 하나님보다 더 큰 사랑의 대상이 되고, 주일과 예배의 리듬을 무너뜨리며, 가족과 이웃을 소외시키고, 돈과 성공과 승리만을 절대화하는 세계관을 성도들 특별히 젊은 세대에게 심어 준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니라 우상이 된다.
현대 스포츠 산업과 기독교 윤리
플랫폼 산업이 된 스포츠
현대 스포츠는 고대의 제의적 스포츠나 근대의 교육적 스포츠와 다른 단계에 들어섰다. 오늘날 스포츠는 거대한 산업이다. 방송권, 광고, 스폰서십, 유니폼과 굿즈, 온라인 중계, 스포츠 도박, 데이터 분석, 게임 산업, 선수 이적 시장, 글로벌 브랜드가 하나의 생태계를 이룬다. 월드컵과 올림픽은 국가와 도시의 이미지를 판매하는 거대한 미디어 이벤트이고 프로 스포츠 리그는 팬의 시간을 점유하는 플랫폼 산업이 되었다. 스포츠는 더 이상 경기장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경기 전후의 분석 콘텐츠, 선수의 사생활, 이적설, 하이라이트 영상, 팬 커뮤니티, 판타지 리그, 숏폼 클립까지 모두 스포츠 산업의 일부가 되었다.
휘튼 대학의 사회학자 제임스 매티슨(James A. Mathisen)은 스포츠가 종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현대에 이르러 그 종교적 성격이 경제적 힘에 점령당했다고 말한다.11) 스포츠는 여전히 의례와 소속감과 초월감을 제공하지만 그 모든 것이 시장의 논리에 포획된다. 팬의 충성심은 티켓 판매와 굿즈 구매와 중계권료로 환산되고 선수의 탁월함은 연봉과 광고 가치로 계산된다. 팀의 역사와 지역 정체성은 브랜드 자산이 된다. 감동은 콘텐츠가 되고 눈물은 조회수가 되며 승리는 주가와 수익률에 영향을 미친다.
관계성의 왜곡과 중독이 된 팬덤
이때 스포츠가 가진 신학적 순기능은 왜곡된다. 스포츠는 원래 인간이 피조물로서 자신의 한계와 기쁨을 경험하는 장이 될 수 있었다. 창조의 선함, 몸의 아름다움, 공동체의 즐거움, 불필요하지만 의미 있는 놀이의 자유를 보여줄 수 있었다. 삼위일체 신학의 관점에서도 관계적 존재로 지음받은 인간은 성부, 성자, 성령이 완전한 한몸의 관계 안에 계시듯 스포츠를 통해 협력과 상호성을 드러낼 수 있다. 팀 스포츠에서는 선수 홀로 플레이할 수 없다. 패스와 희생, 위치 선정, 신뢰, 리듬, 호흡이 필요하다. 이는 인간이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피조물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대 스포츠 산업은 이 선한 의미를 승리와 돈, 스타성, 브랜드 가치로 축소한다.
프로 스포츠의 팬덤 문화는 이런 점에서 윤리적·영적 질문을 던진다. 팬의 응원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사랑하는 팀이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 선수의 노력을 존중하는 마음, 가족과 친구가 함께 경기를 보며 기뻐하는 경험은 선한 것이다. 문제는 팬덤이 팬 자신의 정체성 전체를 삼켜버릴 때이다. 어떤 팬은 팀의 패배를 자기 존재의 실패처럼 느끼고 어떤 팬은 상대 팀과 팬을 혐오하며 상대 선수에게 비인격적 욕설을 퍼붓는다. 어떤 팬은 스포츠 도박에 빠져 경기의 기쁨을 돈의 욕망으로 바꾼다. 일부 기독교인 팬은 주일 예배와 가족의 시간과 직업적 책임을 거듭 희생하면서 스포츠를 따르기도 한다. 이때 팬덤은 즐거움이 아니라 중독이며 죄가 된다.

정의의 문제: 선수 보상은 정당한가
현대 스포츠의 가장 어려운 윤리적 질문 가운데 하나는 선수들의 천문학적 보상 문제다. 어떤 선수는 한 해에 수천만 달러, 심지어 수억 달러를 번다. 축구 스타와 야구 스타의 계약 규모는 일반 노동자의 평생 소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렇다면 이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가? 이 질문에 “많이 받으니 나쁘다”고 단순히 답할 수는 없다. 기독교 윤리는 노동의 가치를 인정한다. 선수는 자신의 몸과 시간을 극한으로 훈련하며 짧은 선수 생명 동안 부상과 실패의 위험을 감수한다. 또한 시장경제 안에서 선수의 보상은 그가 창출하는 수익과 연결된다. 수많은 팬이 경기를 보고 기업이 광고비를 지불하며 방송사가 중계권료를 내고 구단이 막대한 수익을 얻는다면 그 수익을 만들어내는 선수에게 상당한 보상이 돌아가는 것이 불공정하다고만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선수가 창출한 수익을 구단주와 기업만 가져가는 것이 더 부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정당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그 보상은 착취 구조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 둘째, 리그와 구단은 하위 선수, 유소년, 여성 선수, 장애인 스포츠, 지역 스포츠 생태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셋째, 선수 자신도 자신의 부와 영향력을 공공선과 이웃 사랑을 위해 사용할 책임이 있다. 넷째, 팬과 사회는 스타의 부를 숭배하지 말고 인간의 가치를 돈과 성과로만 평가하는 문화를 비판해야 한다.
나가며: 스포츠와 교회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볼 때 스포츠는 교회 안에서 때로는 전도의 도구가 되었고 때로는 예배의 경쟁자가 되었으며 때로는 아무런 신학적 설명 없이 성도의 개인 취미로 방치되어 왔다. 그러나 스포츠는 교회가 그 신학적 의미를 바르게 가르치고 성도들이 신앙 안에서 질서 있게 실천하도록 도와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아래에서는 스포츠에 관해 가르쳐야 할 몇 가지 내용을 제안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 교회는 몸의 신학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성도는 몸을 부끄러워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몸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성령의 전이다. 운동과 놀이와 쉼은 신앙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몸을 바르게 사용하는 삶의 일부다. 교회는 성도에게 몸을 돌보는 법, 건강하게 경쟁하는 법, 놀이 속에서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둘째, 교회는 건강하게 스포츠를 즐기는 법과 건전한 팬덤 문화를 가르쳐야 한다. 팬덤은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보여준다. 그러므로 스포츠는 자기 성찰의 거울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경기장에서조차 이웃 사랑과 절제와 공정함과 겸손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교회는 스포츠를 전도의 미끼가 아니라 환대의 장으로 사용해야 함을 가르쳐야 한다. 지역 주민을 초청해 함께 경기를 보는 것은 좋은 일이고 청소년에게 운동할 공간을 제공하는 것도 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 목적이 “사람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에 머문다면 스포츠는 또 하나의 도구가 된다. 교회는 스포츠를 통해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환대해야 한다. 함께 뛰고 함께 웃고 함께 먹고 함께 쉬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보여주어야 한다.

복음으로 회복된 스포츠
그리스도인에게 스포츠는 하나님께서 창조와 함께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스포츠 또한 죄로 인해 타락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스포츠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해야 한다. 감사함으로 즐기고 절제함으로 참여하며 사랑으로 응원하고 정의롭게 비판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른 질서 아래 두어야 한다. 스포츠가 하나님을 대신할 때 그것은 우상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래 있을 때 스포츠는 창조의 선물이고 몸의 기쁨이며 공동체의 축제이고 하나님 나라의 자유를 희미하게나마 맛보게 하는 놀이가 된다. 복음으로 회복된 스포츠는 우리에게 말한다. “너의 정체성은 팀의 승패에 달려 있지 않다. 너의 가치는 성과와 기록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너는 이겨야만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다. 너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사랑받는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자유롭게 뛸 수 있고 자유롭게 응원할 수 있으며 자유롭게 기뻐할 수 있다. 그리고 자유롭게 멈출 수도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스포츠를 대하는 방식이다. 스포츠는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선물이다. (*)
주)
- Lincoln Harvey, A Brief Theology of Sport(Eugene, OR: Cascade Books, 2014) 3-36.
- Deobold B. van Dalen and Bruce L. Bennett, A World History of Physical Education: Cultural, Philosophical, Comparative (Englewood Cliffs, NJ: Prentice Hall, 1971), 145.
- William J. Baker, Playing with God: Religion and Modern Sport(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7),15-16.
- Hugh McLeod, Religion and the Rise of Sport in England(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22), 28-48.
- David Yamane, ed., Handbook of Religion and Society(Cham: Springer International Publishing Switzerland, 2016), 73.
-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 이종인 옮김 (고양: 연암서가, 2010), 29-51.
- Jürgen Moltmann, Theology of Play, trans. Reinhard Ulrich (New York: Harper & Row, 1972).
- Lincoln Harvey, A Brief Theology of Sport(Eugene, OR: Cascade Books, 2014), 76-87.
- Hugh McLeod, Religion and the Rise of Sport in England, chapter 8.
- Joseph L. Price, Rounding the Bases: Baseball and Religion in America(Macon, GA: Mercer University Press, 2006), chapter 6.
- James A. Mathisen, “Sport,” in Handbook of Religion and Social Institutions, ed. Helen Rose Ebaugh (New York: Springer, 2006), 288.
이춘성 목사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세운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에서 사역하였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석사(M. Div.), 고신대에서 기독교 윤리학 박사(Ph.D.)를 하였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 목사, 한기윤 선임연구위원으로 섬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