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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베드로전서 2:9–17
참고 본문: 로마서 13:1-7; 요한계시록 13:1-8; 예레미야 29:4-7

들어가며: 광장의 정치와 복음의 위기

교회 안으로 들어온 광장의 언어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우리 사회에서 정치 이야기는 참 어렵습니다. 명절에 가족끼리도 정치 이야기를 하다가 마음이 상하고 좋은 관계가 정치 때문에 멀어지기도 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 갈등이 교회 안까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도심의 광장에서는 십자가와 태극기, 때로는 성조기까지 나부끼고 신앙의 구호와 정치적 주장이 뒤섞입니다. 광장에서 서로를 향해 퍼붓던 비난과 적대의 언어가 교회로 들어오고 때로는 복음이 선포되어야 할 강단에서조차 정치의 언어가 더 크게 들리기도 합니다. 저마다 나라를 사랑하고 미래를 염려한다며 각을 세우지만 깊은 불신과 갈등으로 사회도 교회도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물론 그 광장에는 나라를 사랑하고 교회의 앞날을 염려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들 역시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소중한 지체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 특정 정치 이념을 복음과 동일시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절대화할 때 우리는 이른바 ‘기독교 민족주의’의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가 정치의 확성기가 되지 말아야 한다면 교회는 정치에 대해 침묵해야 할까요? 아니면 세상보다 더 강하게 싸워야 할까요? 신자는 어떻게 정치에 참여하고 어떻게 국가를 사랑해야 할까요? 또 신앙과 양심을 위협하는 위정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보고 우리 삶에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정치적 행동 지침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에 세 가지 정체성을 말합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둘째,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위정자를 존중하는 이중 시민권자입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벧전 2:9)

9절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베드로는 지금 로마제국의 박해로 흩어진 교회들에게 말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보잘것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름을 주십니다. 정체성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여러분 구약에 이와 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어디일까요?

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시며 언약 백성으로 삼으실 때 주신 말씀이에요.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한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오는 이름이 있습니다. 한 번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따라 해 주시겠습니다. “나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나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신 근본적인 정체성입니다. 순서가 바뀌면 위험합니다. 내 정치적 성향이 신앙적 정체성보다 커지면 우리는 성경으로 정치를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로 성경을 읽게 됩니다. 우리 편 사람이 잘못하면 “그럴 수도 있지”하다가 반대편 사람이 똑같이 잘못하면 “저것 봐라” 분노합니다. 내로남불입니다. 내 눈의 들보를 빼달라고 은혜를 구하기보다 상대의 티를 빼려고 칼을 듭니다. 정치가 신앙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에 대한 오해와 진실

많은 목회자나 신자들이 정치적 발언을 할 때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을 인용하곤 합니다. 영역 주권론이란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라는 귀한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카이퍼의 가르침과 다르게 오남용되는 것을 봅니다. 어떤 분들은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야 한다며 정치적 발언을 서슴지 않습니다. 물론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 사석에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단에서 진영의 목소리를 옮기고 특정 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하고 심지어 인원을 규합해서 광장의 정치로 이끄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것은 카이퍼가 말하려는 것과 오히려 반대입니다. 카이퍼가 강조한 핵심은 각각의 영역에는 하나님이 주신 ‘고유한 책임과 통치 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1) 가정에는 가정의 책임이, 교회에는 교회의 책임이, 국가에는 국가의 책임이, 학문에는 학문의 책임이 있습니다. 카이퍼가 영역주권을 주장한 배경은 국가의 지배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후 이것은 사회 전체의 원리로 확대되었습니다. 각 영역은 서로를 향해 독립적이지만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는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국가가 교회를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교회가 국가를 대신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정치의 확성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정치와 사회 문제에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에는 훨씬 중요한 책임이 있습니다.

말씀으로 가르치고 삶으로 주님의 덕을 선포하라

정치에 하나님의 말씀을 비추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정의가 무엇이고 공공선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고 생명이 왜 소중한지,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어떻게 환대할지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는 말씀의 강설을 통해 성도에게 성경적 가치와 세상을 분별하는 기준을 가르쳐 ‘참된 신자’와 ‘성숙한 시민’을 배출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국가에 대한 바른 역할입니다. 9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어느 정치인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덕을 선포합니까? 10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긍휼을 얻지 못한 자였습니다(엡 2:12). 그러나 주의 은혜로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은 은혜와 긍휼을 발산해야 합니다. 비난과 정죄가 아니라 긍휼과 용서로 주님의 덕을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 위에 국기를 얹지 마십시오. 국기를 버리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국기를 제자리에 두자는 것입니다. 국가도 십자가 아래 있습니다. 민족도, 정당도, 보수도, 진보도 십자가 아래 있습니다. 내 정치적 신념도 십자가 아래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진영의 소유된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멘이십니까?

2.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입니다 (벧전 2:11)

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둘째로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베드로는 1장 1절에서도 성도들을 “흩어진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의 조상들을 나그네로 그립니다(히 11:13). 자, 그렇다면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현실에 무관심하라는 뜻일까요? “어차피 천국 갈 테니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까요?” “정치가 사회가 어떻게 되든 우리는 복음만 전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에 대한 답을 예레미야 29장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거류민으로 살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는 집을 짓고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렘 29:5)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그 땅을 위해 기도하라. 왜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이라(렘 29:6-7). 놀랍지 않습니까?

“바벨론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나라니 관심을 끊어라.”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바벨론은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바벨론의 평안을 구하지만 바벨론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삶의 긴장이 있어요. 나그네이기에 도망가지 않지만 나그네이기에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데이비드 반 드루넨: ‘나그네’가 피해야 할 두 극단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조직신학자 데이비드 반 드루넨은 베드로전서 2장 11절의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정치적 삶과 연결하며 그리스도인이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quietism, 무관심입니다. 정치는 더러우니 상관 말자. 다른 하나는 triumphalism, 승리주의입니다. 정치 문제를 기독교 생활의 중심에 두고서 세상을 문화 전쟁의 렌즈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반 드루넨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이번 생에서 승리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내세에서 승리하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이 다른 이를 지배하지 말고 섬기라고 부르십니다(막 10:42-45). 이 세상 성공을 추구하기보다는 고통과 박해를 대비해야 합니다. 신자의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니는 삶입니다(마 16:24-26). 신자는 이 땅에서 시민권을 누릴 수 있지만 그들의 참된 정체성은 천국의 시민권입니다(빌 3:20). 그들은 정치 사회에서 떠난 거류민이자 망명자입니다(벧전 2:11). …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정치적 행동에 동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행사하기 위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마 16:18-19).” 2)

재림의 소망의 빛 아래서 현재의 고난을 조망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적 종말론은 나그네에게 “어차피 주께서 재림하시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께서 다시 오셔서 공의로 심판하시고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줄 믿습니까? 아멘! 그 재림의 소망을 품고 사시나요? 아멘! 성경적 종말론은 재림의 소망을 오늘로 앞당겨 그 빛 아래서 현재의 고난을 조망하는 것입니다. 종말의 결산 날이 다가올 것을 알기에 매일 청지기의 사명을 다합니다. 마지막에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심을 믿기에 오늘의 눈물을 삼키고 고난을 견디는 것. 이것이 종말론적 삶이요 복음의 능력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나그네로서 우리는 현실을 회피하지도 대충 살지도 않습니다. 재림의 소망을 ‘지금’ 부둥켜안고 보내신 자리에서 천국을 연습합니다. 주께서 그날에 눈물을 닦아 주실 테니 오늘 우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 줍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전한 평화를 믿기에 오늘 화해의 악수를 내밀고 작은 친절을 베풀고 용서를 실천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11절 하반절입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예배, 육체의 욕망이 하나님을 향해 빚어지는 현장

천국에 소망을 둔 나그네는 상대를 제어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기 육체의 정욕을 제어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려워요 쉬워요? 어렵지요. 왜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합니까? 왜 상대를 미워하고 이기려고 거짓을 퍼 나릅니까? 이것이 육체의 정욕입니다. 제임스 스미스는 인간은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욕망하는 존재’라며 이 욕망이 제어되는 현장이 예배라고 합니다. 3) 제자도는 정보(information)만 집어넣는다고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깊은 욕망이 변혁(transformation)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이 거친 욕망이 빚어지는 현장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돈, 섹스, 권력, 자아를 추구하는 욕망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탁월하심을 향한 욕망으로 변혁됩니다. 성도의 교제 곧 공동체와 습관의 훈련을 통해 빚어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런 열매를 보게 될 것입니다. 12절입니다.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저는 여러분이 불신 가족, 직장 동료, 심지어 대적자까지 여러분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나그네 되시길 축원합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왕을 존대하는 이중 시민권자입니다 (벧전 2:17)

13절입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여러분, 펜을 가지고 이 구절에 동그라미를 친다면 어디에 치고 싶으세요? 네, “주를 위하여” 국가가 절대적이라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주께서 세상 국가도 세우셨기에 순종합니다. 아멘입니까? 그것이 루터와 칼빈이 가르친 두 왕국, 두 통치 이론입니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은 특별은총인 교회와 일반은총인 국가를 통해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주를 위하여”는 우리의 순종과 경배의 궁극적 대상이 누구인지 일깨웁니다.

신자의 저항권: 비폭력적 불복종과 합법적 저항

14절에 총독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있다고 합니다. 국가의 존재 목적입니다. 악을 억제하고 선을 장려하여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와 위정자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은 로마의 박해 아래 있습니다. 의로운 정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조건 복종하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사도행전 5장 29절에서 베드로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칼빈과 카이퍼의 저항권을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국가가 신자의 양심을 억압할 때 개별 신자는 순종을 거부할 수 있다. 이때 저항은 수동적 저항, 즉 불복종에 머물러야지 폭력적 반란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둘째, 하급 행정관을 통해 저항하는 합법적이고 제도적인 저항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15절은 신자의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이는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지한 말을 막으려 하심이라.” 1세기 비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을 오해하고 의심했습니다. 위험한 집단이다, 사회를 어지럽힌다! 베드로는 어떻게 대응하라고 합니까? 더 크게 맞서 싸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선행으로 입을 막으라고 합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전염병이 돌 때 가족마저 버린 비신자들을 간호했는데 이것이 초대교회 부흥의 주요 요인 중 하나라고 역사학자는 말합니다. 5)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를 향한 불신과 비난을 어떻게 해소합니까? 귀를 닫고 ‘우리 교회만 성장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선한 삶으로 불신과 비난을 불식시키고 있습니까?

왕은 존대의 대상, 하나님은 경외의 대상

17절은 본문 전체를 요약하는 네 개의 짧은 명령입니다. “모든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왕을 존대하라.” 순서를 보십시오. 첫째, 모든 사람입니다. 나와 같은 편만이 아닙니다. 상대편 지지자도, 내가 반대하는 정치인도 ‘모든 사람’ 안에 있습니다. 둘째, 형제를 사랑합니다. 정치 견해가 다르다고 한 성찬을 받는 형제를 원수로 만들 수는 없지요. 셋째,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넷째, 왕을 존대합니다. 여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공경하라’와 왕을 ‘존대하라’는 같은 동사 티마오(τιμάω)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다른 동사(포베오마이, φοβέομαι)를 사용합니다. 왕도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존중해야 하지만 경외와 예배의 궁극적인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왕을 존대하되 하나님처럼 섬겨서는 안 됩니다.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되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워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이것이 이중 시민권자의 균형이요 우선순위입니다. 하늘 시민권을 가졌기에 땅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 시민권을 가졌기에 땅의 권세를 존중합니다.

현대의 우상: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네덜란드의 철저한 개혁파 정치인으로서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과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비판한 하웃즈바르트는 민족주의와 이데올로기가 강력한 우상이 될 수 있다며 이렇게 경고합니다. “만일 국기(國旗)가 인생에 궁극적인 의의를 제공하는 상징으로 떠받들여진다면 국기는 우상숭배의 상징으로 전락될 수 있다.” 6) 로마서 13장이 국가 권위에 대한 존중을 명한다면(롬 13:1-7) 계시록 13장은 절대 충성과 경배를 강요하는 국가를 ‘짐승’으로 고발합니다(계 13:1-8). 신자는 로마서 13장을 따라 국가를 존중하되 계시록 13장을 경계 삼아 국가를 절대화하는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국가는 하나님의 선한 종이 될 수도 있지만 언제든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는 우상이요 짐승이 될 수 있습니다.

광장에서 복음으로 살아가기: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공적 신앙 │황경철 목사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전국졸업생사역 책임)

나가며: 일상에서 실천하는 공적 신앙

삶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꾸는 세 가지 걸음

세 가지 적용점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첫째, 경청하십시오. 야고보서 1장 19절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모든 사람을 공경하라”는 명령의 첫걸음은 듣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라온 배경이 다르고 관점과 가치, 취향도 다릅니다. 여러분이 진리를 믿듯이 상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추구할 뿐 진리 자체가 아닙니다. 예수님만 길이요 진리입니다. 따라 해 볼까요? “나도 틀릴 수 있습니다.” “잘 듣겠습니다.” 잘 듣는 것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우리 사고의 지평을 넓혀줍니다. 또 상대를 정죄의 대상이 아닌 사랑할 이웃으로 보게 합니다. 상대의 불안과 상처, 삶의 여정을 듣게 되면 그가 ‘저쪽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둘째, 팩트 체크하십시오. 휴대전화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영상과 메시지가 날아옵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퍼 나르는 것은 이웃에 대한 거짓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출 20:16). 그때 멈추어 살피면 좋겠습니다. 출처가 어디인가? 사실인가? 반대편의 입장이나 다른 보도도 살펴보았는가? 확인되지 않았다면 전달하지 않는 것이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진리되신 주님(요 14:6)을 따르는 우리가 진실에 가장 민감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확한 사실로 말하는 것, 그것이 15절이 말하는 “선행으로 무지한 말을 막는” 길입니다.

셋째, 신실하게 함께하십시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는 2천 년의 기독교 역사를 추적하며 기독교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켰는지 결론적 핵심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신실한 함께함(faithful presence)’입니다. 7)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신실하게 함께하셨듯이 하나님이 나를 두신 자리, 가정과 일터, 학교와 이웃, 모든 관계에서 신실하게 함께하십시오.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정직하게 일하고 작은 친절을 베풀고 약자를 환대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입니다. 교회를 잘 모르는 이웃이 “저 사람 곁에 있으면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광장에 선 성도도 그 광장을 염려하는 성도도 주 안에서 한 몸입니다. 그도 나도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도 나도 주의 은혜가 절박한 비참한 죄인입니다. 서로의 정치적 입장은 다를지라도 우리는 십자가 아래서 서로를 사랑하며 함께 복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교회의 충만과 영광을 선포합니다. 진영을 넘어 ‘십자가 아래서’ 함께 말씀의 다스림을 받을 때, 나는 품을 수 없지만 ‘십자가 안에서’ 서로를 받을 때 교회의 영광은 드러나고 복음의 능력은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이기는 교회가 아니라 곁에 있는 교회, 소리치는 교회가 아니라 섬기는 교회로 주님의 본을 따라 세상을 조용히 변화시키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주)

  1. Abraham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MI: Eerdmans, 1931), 99, 104; Abraham Kuyper, “Sphere Sovereignty,” in Abraham Kuyper: A Centennial Reader, ed. James D. Bratt (Grand Rapids, MI: Eerdmans, 1998), 461–490, 특히 466–468. 카이퍼의 요지는 각각의 사회영역이 독립적인 절대주권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 각 영역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고유한 책임과 제한된 권위를 가진다는 것이다. 최용준도 영역주권의 원칙에 따라 카이퍼는 우리 삶의 각 영역은 하나님이 정하신 고유한 주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영역을 존중해야 하며 자신의 힘과 권위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최용준,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 사상이 주는 사회 윤리적 함의에 관한 고찰,” 「신앙과 학문」 27/3 (2022): 187–205.
  2. David Van Drunen, “Neither Quietism nor Triumphalism: How Two-Kingdoms Doctrine Helps Political Discourse,” 2022,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article/neither-quietism-triumphalism/, 2026년 10월 3일 접속.
  3. James K. A. Smith, Desiring the Kingdom, 박세혁 역,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서울: IVP, 2019), 35–36; You Are What You Love, 박세혁 역, 『습관이 영성이다』 (파주: 비아토르, 2018), 125–127.
  4. Abraham Kuyper, Antirevolutionaire Staatkunde met Nadere Toelichting op Ons Program, 최용준·임경근 공역, 『반혁명 국가학 1』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23), 706.
  5. Rodney Stark, The Rise of Christianity: A Sociologist Reconsiders History, 손현선 역, 『초대교회의 발흥』 (서울: 좋은씨앗, 2016), 92–101.
  6. Bob Goudzwaard, Idols of Our Time, 김재영 역, 『현대 우상 이데올로기』 (서울: IVP, 1984).
  7. James D. Hunter, To Change the World: The Irony, Tragedy, and Possibility of Christianity in the Late Modern World, 배덕만 역,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422.

[2026년 10월 이슈설교 | 설교 작성을 위한 가이드]

제목: 광장에서 복음으로 살아가기: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공적 신앙

성경본문: 베드로전서 2:9-17 

참고본문: 로마서 13:1-7; 요한계시록 13:1-8; 예레미야 29:4-7

  • 현상 진단: 정치적 양극화와 진영 논리가 일상과 교회의 거룩한 강단까지 파고든 현실. 도심 광장에서 십자가와 국가 상징이 뒤섞이며 복음의 자리를 특정 이념이 대신함.
  • 문제 제기: 신앙과 국가 또는 특정 정치 이념을 동일시하는 기독교 민족주의의 유혹. 성경으로 정치를 분별하기보다 정치적 신념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전도 현상이 심화됨.
  • 설교 방향: 베드로전서의 세 가지 정체성(하나님 나라 백성, 나그네, 이중 시민권자)을 회복함. 십자가 아래서 국가와 이념을 상대화하고 삶의 자리에서 경청과 환대의 공적 신앙을 실천함.

시작하며: 광장의 정치와 복음의 위기 (벧전 2:9-17)

  1. 교회 안으로 들어온 광장의 언어
  • 가족 관계를 해치고 교회 안까지 침투한 정치적 갈등의 현실. 도심 광장에서 십자가와 태극기, 성조기가 뒤섞이며 신앙의 구호와 정치적 주장이 혼재됨.
  1. 기독교 민족주의에 대한 경계
  •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귀하나 특정 정치 이념을 신앙의 이름으로 절대화할 때 우상숭배가 됨. 교회가 정치의 확성기가 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바른 공적 신앙을 지켜갈 것인지 성찰함.

본론 1.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벧전 2:9-10)

  1.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에 대한 오해와 진실
  • 각 영역의 고유한 책임을 강조한 원리임. 국가가 교회를 지배해서도 안 되지만 교회가 국가를 대신하거나 특정 정파의 확성기가 되어서도 안 됨.
  1. 말씀으로 가르치고 삶으로 주님의 덕을 선포하라
  • 교회의 역할은 특정 정치인 선전이 아닌 정의와 공공선, 생명 가치를 가르치는 것임. 국가와 이념 모두를 십자가 아래 내려놓아야 함.

본론 2.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입니다 (벧전 2:11-12)

  1. 데이비드 반드루넨: 나그네가 피해야 할 두 극단
  • 정치적 무관심(회피)과 세상을 적으로 보는 승리주의를 모두 경계함. 바벨론의 평안을 구하되 바벨론을 하나님 나라로 착각하지 않는 긴장 유지(렘 29:5-7).
  1. 재림의 소망의 빛 아래서 현재의 고난을 조망하라
  • 재림의 소망은 현실 도피가 아닌 오늘의 책임 완수임. 마지막 날의 회복을 확신하며 지금 있는 자리에서 섬김과 평화를 실천함.
  1. 예배, 육체의 욕망이 하나님을 향해 빚어지는 현장
  • 나그네는 상대를 제어하기보다 자기 육체의 정욕을 다스림. 제임스 스미스의 통찰처럼 뒤틀린 욕망은 오직 참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으로 변혁됨.

본론 3.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왕을 존대하는 이중 시민권자입니다 (벧전 2:13-17)

  1. 신자의 저항권: 비폭력적 불복종과 합법적 저항
  •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신앙과 양심을 억압할 때는 비폭력적 불복종과 합법적 절차로 저항함. 비난에 맞서기보다 선행으로 세상의 입을 막음.
  1. 왕은 존대의 대상, 하나님은 경외의 대상
  • 모든 사람과 왕을 존대(티마오)하되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포베오마이)함. 밥 하웃즈바르트의 경고처럼 국가나 이데올로기가 궁극적 상징이 될 때 우상이 되므로 절대화의 위험을 경계해야 함.
  1. 현대의 우상: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 하웃즈바르트의 경고처럼 국기나 이데올로기가 궁극적 상징이 될 때 우상이 됨. 로마서 13장으로 존중하되 계시록 13장으로 국가 우상화를 경계함.

마치며: 일상에서 실천하는 공적 신앙 (약 1:19, 벧전 2:15, 엡 1:23)

  • 일상에서 세 가지 실천(‘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경청, 가짜뉴스를 거르는 팩트체크, 환대와 친절의 ‘신실한 함께함’)으로 세상 속에서 공적 신앙을 증명함.
  • 광장의 성도와 염려하는 성도 모두 십자가 아래서 한 몸임을 기억하고, 세상을 이기려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곁에서 섬기는 교회로 주님의 길을 걸어감. (*)

황경철 목사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제임스 스미스와 데이비드 반드루넨의 공적신학 비교연구」(2022)로 조직신학 박사(Ph.D.)를 마쳤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 부천CCC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CCC 전국졸업생사역 책임을 맡아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어서 와, 공공신학은 처음이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