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의 자살 1위, 대한민국은 자살 공화국이다.
한국 사회에서 자살의 위험은 이미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왔다. 특히 유명인의 자살이 나타나면 사회는 도가니처럼 들끓었지만, 항상 그렇듯 때가 지나면 조용히 지나가곤 했다. 그 결과는 다음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조용히 있다가 다시 들끓어 오르는 것이다. 아직도 자살예방에 있어서는 부족한 면이 많고, 국가적 개입도 상당히 소극적이다. 정책적인 면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다른 나라들에 비해 보면 허술한 부분이 많다.
한국사회에서 자살예방에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하면 2011년에 제정된 ‘자살예방과 생명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의 실행이었다. 정부는 이 법률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공식적으로 자살예방에 나섰다. 예산도 편성을 했고, 시도별로 자살예방센터와 시군구별로 정신건강복지센터 등을 세워서 자살예방에 앞장섰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정부가 나서자 자살자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2011년 15,906명이던 자살 사망자는 2017년 12,463명으로 6년 만에 연 자살 사망자가 3,443명이 줄어들어 약 20%의 감소성과를 보였다. 실은 우리나라에서 자살 사망자가 1998년 이후 급속히 늘어난 것도 기록적이지만 이렇게 빠르게 줄어든 것도 대단한 것이다.
이런 상황을 보면 두 가지 생각이 든다. 첫째는 자살예방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나서서 활동을 하자 이렇게 빠르게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정책과 활동 여부에 따라서 자살은 줄어들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장기적인 계획에 따라서 점차적인 활동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법률이 정해지고 정부가 활동을 하자마자 이렇게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 동안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둘째는 정부의 태도가 야속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에서 자살률로 1위 한 것이 2003년이다. 이때 이후 잠시 물러난 적이 있지만 20년 동안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2011년 이전 이 나라는 자살예방에 공식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자살은 개인적인 문제라고 치부하면서 공적인 영역에서 자살예방에 나서는 것은 극히 적었다. 매년 국민 1만 4-5천 명이 자살로 인해서 죽고 있는데 정부가 나서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그걸 대한민국에서 했다. 한국이 OECD 국가 중에 자살률 1위를 하기 전에는 일본이 그 자리에 있었고, 그 이전에는 핀란드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이런 나라들은 1위에 오르는 순간 경각심을 가지고 국가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여 이제는 핀란드가 9위, 일본이 4위로 내려왔다. 핀란드는 자살자 전원에 대한 심리부검을 실시하여, 그에 근거한 세심한 대책을 마련해서 자살률을 내린 성공사례를 가지고 있다. 일본은 민간단체들과 연계하여 범국가적 대책으로 대응했고, 역시 성공하였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20년 동안 1위 자리를 가지고 있고, 정부는 상당히 소극적인 대응을 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자살은 2017년 저점을 찍고는 다시 상승하고 있다. 가장 최근 통계인 2023년에는 13,978명이 자살로 인해서 사망했다. 즉 2017년 이후 6년 만에 1,515명이 증가했다. 이는 정부의 특단의 조치와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자살공화국에서 교회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교회 역시 이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꽤 긴 시간 우리는 자살자에 대한 정죄로 예방(豫防)이 아니라 방지(防止)를 해왔다. 즉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말로 겁을 주어서 방지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살에 대한 논의는 교회에서 하기 어려워졌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나 시도자, 자살유족들의 입장에서는 치유가 아니라 상처만 가져오는 상황을 가져왔다. 그리고 ‘자살’이라는 이 단어는 교회에서 꺼내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일로 여겨져, 이에 대한 논의는 발전되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본 글에서는 한국사회의 자살의 현황과 경향을 먼저 서술하고, 그 원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
자살은 대한민국의 오래된 재난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2023년 우리나라의 자살사망자는 13,978명이다. 인구 10만 명 당 한 해에 자살한 숫자를 나타내는 자살률은 27.3명이다. 하루에 38명이 자살로 인해서 사망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사망원인별로 보면 자살은 5위에 있다. 1위가 암이고, 2위가 심장질환, 3위가 폐렴, 4위가 뇌혈관질환이다. 이후 자살이 나오는 것이다. 이후로 알츠하이머병, 당뇨병, 고혈압성 질환, 폐혈증, 코로나19 등이 나오고 있다. 우리 가운데 흔한 질병인 당뇨병 사망률이 21.6명이니 자살과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자살은 이미 오래전부터 대한민국의 재난이었다.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자살은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재난이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20여 년을 위기라고 하면서 그냥 지났다. 그래서 매년 1만 4천여 명의 생명이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재난은 일시적인 것이어야 한다. 올해 홍수로 문제가 있었다면 그 다음 해에는 막아야 한다. 올해도 홍수로 인해 사람이 죽고, 그 장소에서 그 다음 해에 또 사람이 죽는다면 재난이 아니라 인재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자살은 매년 반복된다. 그것도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로 자리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 사망원인 중 5위로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걸 못 막는다면 이 사회는, 더 나아가 대한민국은 문제가 있다.
2023년 10대와 20대, 그리고 30대에서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다. 그리고 40대와 50대에 사망원인 2위가 자살이다.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더 놀라운 일이 있다. 20대 사망자 중에 자살로 인해 죽은 사람의 비율은 52.7%이다. 즉 절반 이상이 자살로 인해서 죽는다. 이걸 처음 본 순간 너무 놀랐다. 20대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라니 이건 정상이 아니다. 10대의 경우도 46.1%로 거의 절반에 이르고, 30대는 40.2%에 이른다.
그런데 이 연령대에서는 사망자의 숫자가 많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직접 장례를 접하게 되는 40대에서는 23.4%이고 50대에서는 11.1%이다. 즉 40대 장례 5건 중에 하나는 그 원인이 자살이다. 그리고 50대에서는 10건의 장례 중에 하나는 자살이다. 50대 사망자의 장례는 우리가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런데 그 중에 1/10이 자살로 인한 장례라니 너무 충격적이다. 이렇게 보면 자살은 우리 가운데 흔한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도 그 죽음의 원인을 숨기려 하고, 장례에 참여하는 이들도 굳이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살에 대한 오해 중에 하나는 10대와 20대의 자살이 많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10대에는 성적과 왕따 문제로 인해서 자살이 많을 것으로 생각을 하고, 20대에는 취직과 실연 등으로 자살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자살이 가장 많은 연령대는 50대이다. 2022년 한 해 50대에서 2,479명이 자살로 인해 사망했다. 이후 40대와 60대가 나타난다. 또한 자살률이 높은 연령대는 80대 이후이다. 이 연령대의 자살률은 60.6명으로 평균 27.3명에 비해 2배 이상 높다.
남자와 여자로 비교를 해 본다면 남자의 자살률이 여자의 2.5배 가량 된다. 그런데 자살을 많이 하는 연령대인 40대와 50대에 이르면 3배가 넘어간다. 즉 대한민국의 자살은 40대와 50대 남자들이 이끌어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연령대의 남자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 앞뒤 안 가리고 달려만 왔다. 그런데 이때 쯤이면 직장을 그만두고 자영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대부분 실패한다. 그러면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생각이 든다. 이 연령대의 한국인들은 젊을 때 ‘자기계발서’를 읽으면 성장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책들이다. 이러한 책을 읽으면서 성공만을 위해 일해 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경제적인 성공, 부자가 되려고 달려왔다. 그런데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지를 못했다. 비행기로 비유한다면 이륙하는 법은 배웠는데 착륙하는 법을 못 배운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 파산에 이르면 삶의 이유를 못 찾는다.
어르신들은 삶의 고난이 가장 큰 이유이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신체적 질병도 버겁다. 거기에 자녀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지며 고립된다. 결국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평균수명은 최근 빠르게 증가했다. 한국에서 가장 안 맞는 통계가 노인인구 통계이다. 가장 최근에도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넘긴다는 초고령사회에 대한 예측이 틀렸다. 정부에서는 작년에만 해도 초고령사회로의 진입이 2025년이라고 예측했다. 그런데 2025년을 며칠 앞둔 2024년 12월 한국은 초고령사회로 진입했다. 이렇게 예측이 안 될 정도로 한국사회는 빠르게 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가 되었다. 이 말은 고령인구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요즘 어르신들을 만나면 예상하지 못했던 장수로 인해서 고생하신다는 이야기를 한다. 70세, 80세를 예상하고 살았는데 100세를 살아야 한다는 것은 축복이라고만 할 수 없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 죽음을 선택하는 노인들이 많다.
청소년들도 여건이 쉽지 않다. 2014년 한 언론사와 함께 중,고생 의식조사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중고생들에게 지난 1년 동안 자살충동을 느낀 적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29.1%가 그렇다고 응답을 했다. 이에 그 학생들에게 그러면 몇 번 그런 충동을 느꼈지를 물었는데 대답이 평균 4번 그렇다는 것이다. 즉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지난 1년 동안 30%의 학생들이 4번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있다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이 자살을 안 하는 것은 자살의 이유나 충동이 없어서는 아니다. 그러한 생각이 들 때 그것을 막아줄 윤리적 담이 있기 때문이다. 즉 사회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 있다.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는 것,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님을 생각해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그렇게 내어놓을 수는 없다는 것 등의 윤리적 담이 있다. 그러한 담이 죽음의 생각이 실행으로 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고생들은 매년 30% 정도가 그러한 담을 1년에 4번씩 넘어 갔다 오는 것이다. 즉 그 담이 의미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평생에 걸쳐서 죽음의 유혹을 함께 지고 살아가게 할 것이다.
전라남도 청소년미래재단에서 2022년에 전라남도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한 적이 있다. 이에 따르면 우울 상태에 있는 청소년이 19.0%였다. 전년도에 9.9%였던 것과 비교해 보면 코로나 시기 청소년들의 우울상태가 심각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해를 경험한 청소년은 20%가 되었다. 즉 5명 중 한 명은 자해를 경험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살 관련된 결과도 있었다. 한 번 이상 자살 생각을 한 사람은 22%였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자살을 계획해 본 사람은 7.3%였다. 그리고 실제로 시도를 해 본 청소년은 3.5%였고, 현재 고위험군에 속하는 청소년은 2.5%였다. 전라남도의 청소년들이 다른 시도에 비해서 자살위험이 높을 거라고 예상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낮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사를 보면 아이들은 심각한 위험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실의 상황에서 생명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궁금할 뿐이다.
대한민국에서 자살의 문제는 어느 연령대나, 또는 어떤 상황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없다. 모든 연령대의 국민들이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죽음의 위험을 함께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누군가의 죽음은 곧 남은 가족의 위험으로 이어진다. 이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총력으로 나서야 할 때다. 국민이 이렇게 죽어가는데 국가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한국에는 죽음의 문화가 있다.
한국사회에 자살이 많은 이유를 묻는다면, 한국에는 죽음의 문화가 있다고 대답한다. 우리는 죽음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인생에 실패를 경험하면 곧 죽음을 연상한다.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 그렇다. 대한민국이 원래 자살이 많은 나라가 아니었다. 1997년 IMF 사태가 오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자살율은 10명을 밑돌았다. OECD 국가의 평균 자살률이 12명인데, 그 보다도 낮았다. 그런데 1998년 자살율은 18.4명이 되어 거의 2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안정세를 찾은 듯 했는데 2002년을 기점으로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하여 2011년에 32명까지 치솟았다. 즉 1997년 이후 14년 만에 대한민국의 자살율은 3배가 넘게 증가했다. 정말 사상 유례가 없을 것 같은 기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IMF 사태 이후 무엇이 변해서 이렇게 되었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었다. 돈이 가장 중요한 삶의 이유가 되었다.
우리 생의 절대적 가치가 있다면 생명이다. 그리고 돈은 상대적 가치다. 돈은 목적이 될 수 없고 인생의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돈은 절대적 가치가 되었다. 이에 생명은 상대적 가치로 떨어졌다. 그래서 돈이 없으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죽음으로 가고 있다. 본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족마저 죽이고 자살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돈이 없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도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죽음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바로 이런 것이 모여서 문화가 되었다.
특히 청년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요즘 청년들을 향해서 N포 세대라고 한다. 처음 시작할 때는 3포라고 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 그런데 곧 5포라 하여 3포에 더해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마저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7포라고 해서 꿈과 희망마저 포기했다. 이제는 세는 것도 포기하고 N포 세대라고 한다. 이러한 청년들은 인생에 패자부활전이 없다고 한다. 즉 한 번의 실패에 다시 역전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는 의미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그 유명한 문구가 청년들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청년들이 미래를 포기하고 그 푸른 시절에 인생을 포기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70년, 80년을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청년들에게는 이제 죽는 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는 게 무섭다.
청년들만 그렇겠는가. 청소년들 역시 그렇다. 소위 이야기하는 중2병이 있다. 중학교 2학년들이 사고도 많이 치고, 자해나 자살도 많이 한다. 정말 폭풍과도 같은 시기이다. 이들은 왜 그러는가. 이때 인생의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황을 볼 때 자신이 어떻게 될지 그림이 그려진다. 그런데 그 그림이 긍정적이지 않다. 그래서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한 포기에서 나오는 자포자기의 불안한 심리가 나타난다. 그게 중학교 2학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초4병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나가오 가츠히로의 ‘남자의 고독사’라는 책에 보면 80세, 90세가 되어도 노후를 걱정하며 산다고 한다. 그 나이가 되면 걱정을 내려 놓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단다. 80세가 되어도 아직 20년을 더 살아야 하고, 90세가 되어도 10년을 더 살아야 한다. 그렇게 보면 그 나이가 되어도 결국 노후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 이게 일본만 그렇겠는가. 이제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이렇게 보면 사는 게 쉬운 사람은 없다. 10대의 아이들도, 90세의 어르신도 삶이 버겁다. 더군다나 그 버거운 삶이 쉽게 끝나질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 끝을 맺으려 한다. 죽음이 두렵지만 남은 삶이 더 무섭기 때문이다.
이러한 죽음의 문화를 이기는 것은 생명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즉 생명의 가치관을 만들어야 한다. 경제적 가치로 생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자체를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마음이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 자체가 목표이고 의미여야 한다. 서로가 경쟁을 하고,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면서 사는 삶이 아니라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생명문화를 만드는 길이다. 이것이 또 가장 강력한 자살예방이다.
교회는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교회처럼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곳은 없다. 교회에서는 설교나 강의, 또 소그룹 등을 통해서 정기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교육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교육의 효과를 통해서 교회는 항상 시대의 등불 역할을 하며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왔다. 구한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유교의 가치관을 대체한 것은 기독교였다. 이후에 애국심을 심으며 암흑의 일제 강점기를 건너왔고 조국의 광복에 큰 역할을 했다. 이후 민주주의의 과정에서 민주정신을 만들었다. 또 산업화 시기에는 교회가 대체가족과 준거집단의 역할을 감당하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큰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제 경쟁사회를 벗어나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한 의식의 전환도 교회가 감당해야 한다. 특히 생명문화를 만드는 일은 교회가 해야 할 일이고, 교회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생명이 절대적 가치라는 것은 교회가 가장 잘 아는 바이다. 예수님께서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것은 결코 놓칠 수 없는 기독교의 절대적인 가르침이다. 구약의 약자보호법에서 보는 것은 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존귀한 존재라고 하는 생명가치의 실현이다. 안식일의 법에서, 희년의 법에서, 종에 대한 가르침에서 약자들을 세워 더불어 살고자 했던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의식은 구약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명문화를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다. 교회는 이걸 가르쳐야 한다. 교회 안에서 기회가 되는 대로 가르치고, 이러한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각각의 사회에서 이 가르침을 나누어야 한다. 이게 교회가 이 자살공화국 대한민국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또한 이러한 역할은 사회에서 교회에 기대하는 바이다. 공적 영역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심지어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졌던 복지영역에서도 기독교의 영역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일인 자살예방에서는 종교, 특히 기독교에 기대하는 바가 있다. 2023년 정부에서 발표한 ‘제5차 자살예방기본계획 (2023-2027)’에 따르면 민관협력활성화를 위해 생명존중민관협의회를 두게 되어 있는데 여기에 핵심은 종교계이다. 또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해서도 종교계가 역할을 해주기를 당부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교회가 찾아가서 해야 할 일인데, 오히려 정부와 사회가 교회에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기대가 있다면 교회가 당연히 생명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면 교회로서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여기서 필자가 대표로 있는 라이프호프 기독교자살예방센터의 활동을 소개하며 교회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1)생명보듬주일
9월 10일은 세계자살예방의 날이다. 이에 라이프호프에서는 한국교회 대표적인 단체들과 함께 9월 2번째 주일을 생명보듬주일로 지정하여 지키고 있다. 이때에는 라이프호프에서 생명을 주제로 하여 장년 설교와 청소년 설교와 공과, 자료 등을 준비해서 나누고 있다. 1년에 한 번이라도 자살예방을 주제로 하여 전 교회가 함께 말씀을 나누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2023년에 실시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개신교인들 중 18.7%는 자살충동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우리 교인 중 거의 5명 중 한 명은 죽음의 충동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뾰족한 수는 없다. 그들만을 따로 모아서 교육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모두가 함께 하는 예배 시간이라면 가능하다. 1년에 한 번이라고 자살예방에 대한 설교를 한다면 이들에게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줄 수 있다.
2) 자살유족 돌봄
보통 한 명이 자살하면 10명의 유족이 생긴다고 한다. 한 해에 1만 4천 명이 자살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 해에 14만 명의 자살유족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조사에 보면 한국인들의 20%는 자살유족이라고 한다. 라이호프는 매 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 유족들을 위한 예배를 드리고, 2번째 주 토요일은 예배를 포함하는 모임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리에서 이들을 만나 보면 교회에 대한 상처가 크다. 가장 큰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교회는 장례를 둘러싸고 큰 상처를 준다. 구원과 천국을 논하며 장례를 거부하거나, 부정한다. 이렇게 교회는 포용과 위로의 공동체가 아니라 배제와 낙인의 공동체가 되고 만다. 이러한 경험을 한 유족들은 교회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실은 교회가 자살예방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가장 먼저 자살자가 생기면 장례를 잘 치러주라고 한다.
자살유족은 일반의 사람들에 비해서 자살위험이 8배가 넘는다고 한다. 이러한 생명의 갈림길에 있는 이들에게 고인이 구원을 못 받았다고, 천국이 아니라 지옥을 갔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마저 죽기를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장례를 잘 치러주고, 유족들을 품어야 한다. 이것이 자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라이프호프에서는 또 한국자살유족협회와 같은 단체들을 지원한다. 자살유족들이 당당하게 당사자로서 자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깨고, 자살예방에 함께 하자고 호소하고자 한다. 사회가 유족들을 낙인 찍고, 당사자들은 죄의식과 부끄러움으로 피해 다녀서는 결코 자살예방이 적극적으로 변할 수 있다. 이것을 수면 위로 올리고 사회가 함께 대책을 강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가장 핵심적인 자살예방정책인 될 것이다. 이에 교회가 이들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길 바란다.
3) 생명네트워크
라이프호프에서는 캠페인의 하나로 ‘생명보듬 걷기대회’를 한다. 이 자리에는 지역사회 가운데 있는 자살예방단체나 기관, 그리고 관련 단체들, 청소년단체, 학교나 부대 등이 함께 한다. 각 단체들은 부스를 차려 기관 소개도 하고,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자살예방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또 사람이 모이면 지역의 정치인과 단체장들이 모인다. 이렇게 모이면 하나의 생명네트워크가 형성된다. 지역에서 같은 뜻으로 활동하는 단체들이 교류하게 되고, 지역의 리더들이 서로 자살예방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논하게 된다. 이렇게 지역의 생명네트워크가 형성되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특히 교회는 여기서 생명가치를 가지고 지역 리더십을 가지게 된다.
4) 학교 연계 교육
중, 고등학교에서는 1년 2번 자살예방교육을 받게 되어 있다. 라이프호프에서는 ‘생명보듬이 기초교육’이라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보건복지부 인증 프로그램으로 45분 수업 2강좌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 1년에 일반 학교에서 2만 여 명을 교육한다. 그런데 학교들이 열악하여 강사비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안일하게 생각하여 인터넷 영상으로 대처하기도 한다. 바라기는 지역교회가 관내에 있는 학교와 연계하여 교육비를 지원하여 이러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요즘과 같이 저출산 시대에 아이가 한 명 태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태어난 생명이 죽지 않고 사는 것도 중요하다. 출산장려를 위해 쓰는 마음의 1/10이라도 자살예방을 위해 써주면 좋겠다.
5) 소공동체 리더 교육
교회 전체가 교육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구역과 같은 소공동체의 리더들이 좀 더 깊이 있는 교육을 받고, 자신에게 속해 있는 구성원들을 돌볼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자살의 위험 가운데 있는 구성원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그러한 경우 어디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만 알아도 위기를 넘길 수 있다.
나가며..
자살은 예방할 수 있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다양한 자살예방 정책이 효과를 보고 있다. 특히 생명가치에 대한 교육은 교회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또 각 교회가 처한 지역에서 행할 수 있는 일들이 있고, 무엇보다 생명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그래서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죽음의 문화를 이기고 생명문화를 만들어 내는데 교회가 그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대한다.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죽음의 문화를 이기고 생명문화를 만들어 내는데 교회가 그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대한다.

조성돈은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사회학 교수이며 목회사회학연구소 소장이다. 자살에 연구를 이어오다 2012년 ‘라이프호프. 기독교자살예방센터’의 대표를 맡고 있고, 한국자살예방협회 이사와 한국자살유족협회 감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