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마태복음 26:52, 5:9
들어가며: 칼 앞에 선 교회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공습으로 이란의 핵무기 개발 시설을 포함한 주요 군사·정부 시설들이 타격을 입었고, 최고지도자를 포함한 고위 인사들이 사망한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들과 어린아이들까지 희생되었습니다. 이에 이란이 즉각 보복에 나서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로 전쟁이 발발한 지 5주째에 접어들었습니다. 여러 보도에 따르면, 이 전쟁으로 2천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여전히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란은 ‘성스러운 보복’을 내세우며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고, 이스라엘 역시 ‘이란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할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미국 역시 이란의 에너지 시설 공격을 4월 6일까지 유예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는 한편,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맹국들에게 보다 적극적인 군사적 대응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전쟁 속에서는 ‘이제 그만 멈추자’는 외침보다 ‘더 강하게, 더 오래’라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으며, 내일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전쟁’이라는 이 비극 앞에서 우리는 어떤 시선과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 사태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고, 우리가 붙들어야 할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전쟁에 대한 성경적 이해: 죄의 결과, 그리고 최후의 수단
먼저, 전쟁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전쟁을 인간의 탐욕과 미움이 만들어낸 죄의 비극적인 결과로 이해합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이처럼 성경은 전쟁의 뿌리가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있음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평화는 소망의 대상이어야 하며, 전쟁은 오직 필요에 의해서만 수행되어야 합니다. 전쟁의 목적은 오직 그 시련을 통해 평화를 회복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1) 타락한 세상에서 전쟁은 더 큰 악을 막기 위한 고통스러운 선택일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자체로 선한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을 미화하거나 함부로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성경은 악을 억제하거나 무고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무력을 사용했던 믿음의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치른 전쟁은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창 14:13-24), 히브리서는 기드온, 바락, 다윗과 같은 인물들의 전쟁을 믿음의 행위로 언급합니다(히 11:33-34).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불의를 제어하기 위해 국가와 위정자들에게 ‘칼을 사용하는 권세’를 위임하셨다고 가르칩니다(롬 13:1-7).
이처럼 합법적인 권위를 가진 국가가 고통받는 무고한 이웃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하는 전쟁은 ‘적극적인 이웃 사랑’의 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은 반드시 잃어버린 평화를 회복하려는 정당한 원인과 바른 의도를 가져야 하며, 모든 평화적 수단이 소진된 이후에야 고려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엄격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 전쟁은 성경이 용인하는 정의로운 전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전쟁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성경적 질문들
이제 우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에 따라 오늘의 상황을 분별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앞서 언급한 성경적 원리에 근거하여 전쟁의 정당성을 엄격히 제한하는 ‘정당전쟁론’(Just War Theory)을 발전시켜 왔습니다.2) 이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오늘의 전쟁을 마주하며 반드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첫째, 이 전쟁은 참된 평화를 회복하려는 ‘바른 의도’와 ‘정당한 원인’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질문해야 합니다. 정당전쟁론은 부당한 침공에 대한 ‘방어적 전쟁’이나 무고한 이웃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인도적 개입’만을 정당한 원인으로 인정합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란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겠다”며 선제공습을 감행했습니다. 이는 미래의 불확실한 위협을 사전에 제거하겠다는 이른바 ‘예방적 전쟁’의 논리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공격 직전까지도 이란이 실제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선제공격을 정당화하려면 객관적이고 ‘임박한 위협’이 분명히 입증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확실한 근거 없이 다가오지 않은 두려움 때문에 먼저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 전쟁의 진정한 목적이 정말로 파괴된 질서를 치유하고 참된 ‘정치적 평화’를 이루려는 데 있는지 냉철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둘째, 진정 ‘최후의 수단’으로서 무력을 사용하고 있는가? 이것을 질문해야 합니다. 전쟁은 외교적 타협과 경제적 제재 등 모든 평화적 수단이 소진된 이후에야 선택되는 마지막 수단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양측은 종전을 위한 평화적인 노력보다는 최후통첩과 조건 없는 굴복을 강요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인내하며 대화하려는 노력 없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러한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이 ‘군사주의’(militarism)의 유혹에 빠진 결과는 아닌지 진지하게 묻게 합니다.
셋째, 무고한 생명을 보호하며 필요한 범위 내의 ‘비례적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가? 이것을 질문해야 합니다. 전쟁은 그 수행 방식 또한 철저히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무고한 민간인과 어린아이들은 공격의 대상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야 하며, 목적 달성에 필요한 범위를 넘는 무력 사용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 사용되는 막대한 파괴력을 지닌 현대 무기들은 전투원과 비전투원, 군사시설과 민간시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이미 수천 명의 희생자와 수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수많은 어린이들이 지금도 고통 속에 놓여 있습니다.
넷째, 이 전쟁은 참된 평화를 가져올 ‘승리의 가능성’이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닙니다. 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파괴를 감수하고서라도, 궁극적으로 질서를 회복하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뼈아픈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이 전쟁으로 생긴 깊은 상처와 적대감이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요? 파괴된 관계가 회복되고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요?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주님의 말씀입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방식은 더 깊은 원한과 보복의 악순환을 낳습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샬롬’을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참된 샬롬은 억압과 착취가 사라지고, 정의와 공생의 관계가 세워질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원수와 같은 적성국가라 할지라도 완전히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로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피의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정당한 전쟁의 기준을 살펴보고, 이 기준에 비추어 오늘의 전쟁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무거운 질문들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말씀을 준비하며 제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생각은 ‘이 땅에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그 어떤 전쟁도 성경이 요구하는 참된 정의와 샬롬을 온전히 이루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참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모두를 깊은 고통으로 몰아넣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 영향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유가가 오르고, 무역에 차질이 생기는 등 직간접적인 피해를 이미 경험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전쟁의 참혹함을 역사적으로 뼈저리게 경험한 민족입니다. 6·25 전쟁으로 단 3년 만에 약 300만 명이 목숨을 잃고, 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그 시절을 몸으로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시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세대가 함께 예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쟁은 결코 영웅의 서사가 아닙니다. 어머니의 통곡이며, 아이들의 굶주림이고, 가족의 영원한 이별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과 실천: ‘샬롬’을 일구는 화평의 사자
그리스도인이 평화를 외치는 것은 단순히 전쟁의 참상이 안타깝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평화를 뜻하는 단어인 ‘샬롬’은 약 250여 회나 등장할 만큼, 평화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 또한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5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마땅히 ‘평화의 하나님’을 따라 ‘화평의 사자’로 세워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화평의 사자’로서 우리가 당장 할 수 있고, 또 반드시 해야 하는 구체적인 일은 무엇일까요?
첫째, 고통받는 무고한 생명들을 향한 ‘긍휼의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국적과 종교, 그리고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 이 전쟁의 참혹한 포화 속에 있는 모든 이들은 천하보다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오늘의 전쟁 소식을 그저 정보 차원에서 소비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비록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영혼들이지만, 가족을 잃고 통곡하는 이들에게 하늘의 위로가 임하도록, 삶의 터전을 잃은 난민들이 하루속히 안전을 회복할 수 있도록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끌어안는 긍휼의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구하는 ‘기도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의 기도 자리에서 귀한 생명들이 더 이상 헛되이 희생되지 않도록 눈물로 중보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나라와 각국의 지도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 거대한 국제적 긴장과 압박 속에서, 각 나라의 지도자들이 국가의 이익과 힘만을 앞세우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 길을 선택하도록, 두려움과 분노에 휩쓸리지 않고 책임과 절제 속에서 판단하도록,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이 아니라 평화와 회복을 향한 길로 나아가도록 우리는 끝까지 기도의 자리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셋째, 기도를 넘어 직접 십자가의 길을 걷는 ‘평화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 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말처럼, 교회는 세상을 향해 평화를 말로만 조언하는 곳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사회윤리이자 평화를 드러내는 대안적 공동체입니다.3) 그러므로 세상이 이념과 국익을 따라 편을 가르고 증오의 칼을 갈 때, 교회는 그 갈라진 틈 사이로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생생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스스로가 먼저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그 길을 친히 걸어가셨습니다. 주님이 무기력해서 잡히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얼마든지 천사의 군대를 보내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성취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성경의 약속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기꺼이 도살당하는 어린양이 되셨습니다(사 53:7-9).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 십자가야말로 이 땅에 참된 화평을 드러내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칼을 치우라!” 이 예수님의 명령은 단순히 폭력을 멀리하라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살리는 십자가의 사역을 이 땅에 구현하라는 주님의 엄중한 부르심입니다.4)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따라 이 땅에 화평이 임하도록 십자가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증오의 칼 대신 ‘평화의 언어’를 선택하고, ‘화평하게 하는 삶’을 먼저 실천하고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세상을 향해 십자가의 평화를 분명히 선포해야 합니다. 위정자들이 압도적인 무력만을 신뢰하는 ‘군사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비록 더디더라도 인내와 외교를 통해 평화적으로 분쟁을 해결하도록 국제 사회를 향해 담대히 평화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 이토록 평안하게 예배드리는 것이 과연 당연한 일일까요? 우리가 저들보다 특별히 더 의롭거나 잘해서 이런 전쟁의 참상을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여전히 끝나지 않은 ‘휴전’ 중인 안보 현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북한의 상황이나 국제 정세에 따라 저 중동 땅의 피눈물은 언제든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평안한 일상은 우리의 당연한 권리나 무기의 힘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전쟁의 참상을 결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이 대한민국 땅에 다시는 전쟁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더 구하며, 우리나라와 세계 가운데 용서와 화해와 화평의 일들이 계속되도록 교회는 사회적 책임감을 갖고 이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나가며: 평화의 왕을 따르는 승리의 행진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힘과 보복으로 평화를 유지하려 하지만, 교회는 오직 십자가의 사랑으로 평화를 일구는 공동체입니다. 참된 평화는 힘의 승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과 사랑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가 화평의 사자로서 한 걸음씩 걸어갈 때, 평화의 주님께서 이 땅의 비극을 멈추시고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것입니다. 평화의 도구로 귀하게 쓰임 받는 모든 성도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주)
- Augustine, Letter 189, 6. 다음 책에서 재인용. Shawn A. Aghajan, Imperial Pilgrims: A Theological Account of Augustine, Empire, and the “Just War on Terror” (Eugene, OR: Pickwick Publications, 2022), ch. 2 (Logos edition).
- 정당전쟁의 8가지 요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신원하, 『전쟁과 정치: 정의와 평화를 향한 기독교 윤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140.
신원하, “‘예방적 전쟁론’에 도사리는 군사주의 경계하기: 미국의 대이란 전쟁에 대한 신학적 성찰,”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 https://koreanchristianethics.com/archive/3103. - 스탠리 하우어워스, 『평화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비폭력주의』, 홍종락 옮김 (서울: 비아토르, 2021), 215-17.
- 스탠리 하우어워스, 『마태복음』, 김성근·김유진 옮김 (서울: SFC, 2018), 430-33.
[2026년 3월 스페셜 이슈설교 | 설교 작성을 위한 가이드]
제목: 칼 앞에 선 교회, 십자가의 길을 묻다
본문: 마태복음 26:52, 5:9
A. 들어가며: 칼 앞에 선 교회
- 현상 진단: 2026년 2월 말 발생한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과 뒤이은 전쟁으로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고 있으며 동맹국들에 대한 군사적 대응 요청 등 국제적 긴장이 고조됨.
- 문제 제기: ‘더 강하게, 더 오래’를 외치는 힘의 논리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가는 생명들을 목도하며 그리스도인은 이 비극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 설교 방향: 전쟁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정당전쟁론의 기준을 통해 오늘의 사태를 분별하고 ‘화평의 사자’로서 걸어야 할 십자가의 길을 제시하고자 함.
B. 전쟁에 대한 성경적 이해: 죄의 결과와 최후의 수단
- 인간 정욕의 비극적 산물 (약 4:1)
- 성경은 전쟁을 인간의 탐욕과 미움이 만들어낸 죄의 결과로 규정함. 전쟁은 결코 그 자체로 선할 수 없으며, 미화하거나 함부로 정당화해서는 안 됨.
- 평화 회복을 위한 고통스러운 선택 (롬 13:1-7; 히 11:33-34)
- 타락한 세상에서 무고한 생명을 보호하고 악을 억제하기 위해 국가에 위임된 ‘칼의 권세’를 인정함. 그러나 이는 모든 평화적 수단이 소진된 후 고려되는 ‘최후의 수단’이어야 하며, 잃어버린 평화(샬롬)를 회복하려는 바른 의도가 전제되어야 함.
C. 오늘의 전쟁을 분별하는 성경적 질문들 (정당전쟁론)
- 바른 의도와 정당한 원인이 있는가?
- 방어적 전쟁이나 인도적 개입이 아닌 불확실한 두려움에 근거한 ‘예방적 전쟁’은 정당화되기 어려움. 참된 정치적 평화가 목적인지 냉철히 질문해야 함.
- 최후의 수단으로서 무력을 사용하는가?
- 인내와 대화 없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려는 ‘군사주의(militarism)’의 유혹을 경계해야 함.
- 비례적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가?
-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대 무기의 파괴력이 무고한 생명을 살상하는 현실은 도덕적 한계를 넘어섬.
- 참된 평화를 가져올 승리의 가능성이 있는가? (마 26:52)
- 군사적 승리가 관계의 회복과 샬롬을 보장하지 않음. 칼로 상대를 짓누르는 방식은 더 깊은 원한의 악순환을 낳을 뿐임.
D. 우리의 소망과 실천: ‘샬롬’을 일구는 화평의 사자 (마 5:9)
- 하나님의 형상을 향한 ‘긍휼의 시선’
-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 포화 속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며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안아야 함.
- 생명과 평화를 구하는 ‘기도의 자리’
- 희생 방지와 각국 지도자들이 자국 이익을 넘어 생명을 살리는 결단을 내리도록 중보하는 자리를 지켜야 함.
- 십자가의 길을 걷는 ‘평화의 실체’
- 교회는 단순히 평화를 조언하는 곳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평화를 드러내는 대안 공동체가 되어야 함. 주님의 순종을 따라 증오의 칼 대신 ‘평화의 언어’를 선택하고, 무력이 아닌 인내와 외교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도록 담대히 평화의 목소리를 내야 함.
E. 마치며: 평화의 왕을 따르는 승리의 행진
- 메시지: 세상은 힘과 보복으로 평화를 유지하려 하나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평화를 일구라 하심. 당연하게 누리는 지금의 평안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화평의 사자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함.
- 최종 권면: 삶의 자리에서 화평하게 하는 삶을 실천하며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 평화의 주님께서 이 땅의 비극을 멈추시고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것임.
오명재 목사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를, 그리고 기독교 윤리학 전공으로 신학석사(Th.M.) 학위를 받았다. 현재 김해 동서남북교회 부목사로 섬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