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가 사라진 운동장
2026년 들어 각급 학교에 충격적인 민원들이 접수되고 있다. 이른바 ‘상대적 박탈감’에 관한 민원이다. 한 예를 들자면 축구를 잘하지 못하는 아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는 이유로 학부모가 민원을 제기하였고, 민원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학교는 전교생에게 축구를 금지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것이 한두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현재 부산 지역에는 무려 3분의 1의 초등학교에서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에 축구가 금지되어 있다.1) 축구뿐만 아니라 상을 못 받는 아이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는 이유로 학교 안에서 각종 시상식이 없어지고, 상 받는 아이들이 혼자 교무실에 가서 조용히 상을 ‘수령’하는 일도 빈번하다고 한다.
자기 아이의 마음이 상할까 염려하는 부모의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 염려가 지나쳐 공동체 전체의 활동을 중단시키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진지한 물음이 필요하다. 나아가 그런 민원 제기가 자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자녀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지도 고민해 보아야 한다.
상대적 박탈감이란
‘상대적 박탈감'(relative deprivation)이라는 개념은 1949년 새뮤얼 스타우퍼(Samuel A. Stouffer)와 그의 동료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 병사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대규모 조사 보고서 『미국 병사』(The American Soldier)에서 처음 학문적으로 제시되었다. 연구진이 발견한 역설은 흥미로웠다. 진급이 비교적 빠른 항공부대와 진급이 잘 안 되는 헌병대를 비교하였는데 진급 기회가 더 많았던 항공부대의 병사들이 오히려 진급에 대한 불만이 컸던 것이다. 항공부대원들은 자신보다 진급이 빨리 되는 병사들이 많기에 그들을 보며 ‘상대적으로’ 불만을 느꼈지만 원래 진급이 더딘 헌병대에서는 대부분의 병사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으므로 오히려 불만이 적었다. 불만의 크기는 ‘객관적’ 상황이 아니라 자신이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대상인 준거집단(reference group)과의 격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2)
왜 유독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가
한국인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평등 의식이 강한 민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강렬한 평등 의식이 긍정적으로 작동했을 때 그것은 민주화에 대한 뜨거운 열망으로 분출되었고, 한국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속도로 민주화를 이루어 냈다. 신분과 특권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과 평등 의식은 분명 한국 사회의 위대한 자산이다.
그러나 모든 강점은 그늘을 동반한다. 평등 의식이 부정적으로 작동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조금도 뒤처지기 싫다’는 태도로 변질된다. 평등 의식이 타인과의 ‘비교 의식’으로 전환되는 순간 한국인은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상대적 박탈감’에 민감한 존재가 된다. 신분 사회에서는 귀족의 소유를 보고도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애초에 ‘내 몫’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평등하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타인의 모든 소유가 잠재적으로 ‘내가 가졌어야 할 것’이 된다.3) 까지 비교의 목록은 끝이 없고 박탈감의 목록도 그만큼 길어진다.
문제는 이 감정이 ‘사적 심리’의 영역을 넘어 ‘공적 요구’의 언어가 되었다는 데 있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는 호소는 그 자체로 권리처럼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상대적 박탈감의 호소는 언제 정당하며 언제 부당한가? 놀랍게도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하여 상반된 두 유형의 사례를 모두 제공하고 있다.

가인과 아벨: 절대의 문제를 상대의 문제로 오독한 비극
창세기 4장의 가인 이야기는 부당한 박탈감의 대표적 사례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가인 자신이 예배자로서 합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인 자신에게 있었고 그것은 아벨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나님은 ‘두 형제 중 한 명의 제사만 받겠다’고 상대 평가를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 앞에서 가인의 예배가 미달했기 때문에 받지 않으신 것뿐이다.
그런데 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절대적 신앙의 문제를 ‘상대적 박탈감’의 문제로 오해하였다. 그의 시선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아니라 아벨에게로 옮겨 가는 순간 회개해야 할 자리에서 미움이 자라났다. 절대적 문제를 상대적 문제로 변환시킬 때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엄청난 비극이 발생한 첫 번째 사건이 된 것이다.
돌아온 탕자의 형: 절대적 충분함을 잊은 일시적 불평등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에 등장하는 맏아들 역시 부당한 ‘상대적 박탈감 호소’의 사례이다. 객관적으로 맏아들에게는 불평할 이유가 없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 15:31)라는 아버지의 대답이 그것을 증명한다. 아버지의 남은 모든 재산은 법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맏아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맏아들의 감정은 자신이 누리는 ‘절대적 충분함’이 아니라 잠깐의 사건 곧 방탕하다 돌아온 동생을 위한 ‘일시적’ 환영 파티에 집중되었다. 냉정하게 계산하면 그가 실제로 박탈당한 것은 기껏해야 송아지 한 마리 값 정도이다(27절).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전체를 박탈당한 자’의 위치에 놓았다. 그는 가인과 마찬가지로 절대와 상대를 혼동하였다.
헬라파 과부들: 정당하게 제기된 박탈감
그렇다면 성경은 상대적 박탈감의 호소를 언제나 부당한 것으로 규정하는가? 그렇지 않다. 사도행전 6장 1-7절은 초대교회 안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민원’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행 6:1)
개역성경의 ‘빠지므로’라는 번역은 마치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아예 제외된 것처럼 읽히게 한다. 만일 그랬다면 이것은 상대적 박탈감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 빈곤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이 사용하는 동사 παραθεωρέω(파라데오레오)는 완전한 배제가 아니라 ‘소홀히 여기다, 간과하다’라는 뜻으로 그 어원에는 ‘곁에 두고 보다’ 곧 비교하여 본다는 함의가 담겨 있다. 즉 헬라파 과부들은 구제를 아예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파 과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한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도들의 반응이다. 사도들은 이 문제를 감정적 불평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심각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즉각적이고 구조적으로 대응하였다. 교회의 조직을 개편할 정도로 적극 대처한 것이다. 헬라파 과부들의 ‘상대적 박탈감’에 이토록 강하게 대응한 이유는 그녀들이 당시 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최약자 그룹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적 최약자의 박탈감 호소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준 사건이다.

비교의 저울을 버리고 절대적 충분함으로
이제 서두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상대적 박탈감’을 이유로 학교의 축구를 금지시킨 학부모의 민원은 어느 유형에 속하는가? 이것은 헬라파 과부들의 절규 어린 호소가 아니라 가인과 맏아들의 오독에 가깝다. 그리고 이러한 민원은 공동체 모두에게 큰 손해를 끼친다.
첫째,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야 할 모든 아이들에게서 그 건강한 성장의 기회를 빼앗는다.
둘째, 그들의 민원은 무엇보다 자기 자녀의 미래를 가장 많이 망친다. ‘남들보다 축구를 못해서 마음이 상할까’ 부모가 걱정해 주던 바로 그 ‘귀한’ 아이는 어린 학창 시절에 ‘박탈감을 극복하는 법’을 배울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당한 채 자라게 된다. 그 아이가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에 나가면 학교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박탈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그 조그만 박탈감조차 넘어서 보지 않은 채 험한 세상에 나간다면 그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이 세상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상대적 박탈감을 부당하게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리석은 일이며 공동체와 자신을 모두 망하게 하는 길이다. 가인이 하나님과의 절대적 관계에 주목하지 못하고 아벨과 자신을 비교했을 때 모두가 불행해진 것처럼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이 아닌 옆 사람에게 둘 때 신앙은 병들기 시작한다. 이 비교의 저울을 부수는 유일한 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절대적 충분함’을 발견하는 데서 온다. 세상의 저울로는 부족해 보일지라도 탕자의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건넨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는 선언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미 온전히 인정받고 모든 것을 누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절대적 충분함을 살아 내는 법
부모는 이 충분함을 일상에서 자녀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가정예배의 자리를 지키며 남과의 비교가 아닌 고유한 달란트에 감사하는 법을 가르치고 일상의 대화 속에서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신앙의 뿌리를 내려 주어야 한다. 자녀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 충분함을 먼저 경험할 때 비로소 세상의 거친 박탈감을 넉넉히 넘어서는 아이로 자라날 수 있다.
동시에 이 충분함은 우리를 자기만족에 가두지 않고 타인에게로 향하게 한다. 하나님 앞에서 이미 충분한 사람은 옆 사람의 접시를 곁눈질할 필요가 없기에 도리어 그 접시가 빈 이웃을 살필 여유를 얻는다. 사도들이 헬라파 과부들의 호소에 응답했듯이 신앙 공동체는 사회적 최약자의 박탈감에 민감해야 한다. 그 박탈감이 상대적이든 절대적이든 공동체가 함께 문제 해결에 힘쓸 때 각 구성원은 주님과의 절대적 관계를 회복한다. 최약자를 돌보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절대적’ 명령이기 때문이다. (*)
주)
- https://m.segye.com/view/20260419500171 (2026년 4월 19일 신문기사). 축구를 금지한 학교 중에는 안전 문제로 금지한 학교도 포함되어 있다.
- Samuel A. Stouffer et al., The American Soldier: Adjustment During Army Life, vol. 1 of Studies in Social Psychology in World War II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49), 250–258.
- G. Runciman, Relative Deprivation and Social Justice: A Study of Attitudes to Social Inequality in Twentieth-Century England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6), 10. 런시먼은 상대적 박탈의 성립 조건으로 (i) 대상 X의 부재, (ii) 타인의 X 소유에 대한 인식, (iii) X에 대한 욕구, (iv) X 획득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제시하였다.
유익희 목사는 포항공대에서 물리학 석사를 마치고 삼성종합기술원에서 반도체 표면분석 연구를 하였다. 아모스 5장 말씀을 묵상하던 중, ‘하나님의 정의’를 노래하기 위해서 사표를 쓰고 92년 극동방송복음성가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와 침례신학대학에서 공부했으며, 현재는 (대전/서울) 헤세드 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