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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기술 혁신

약 13년 전인 2011년 2월,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지 표지에는 기이한 일러스트 사진이 실렸습니다. 표지에는 머리카락이 없어 성별을 알 수 없는 사람의 뒷목에 전기 코드 같은 것이 연결된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목에는 “2045년이 되면 인간은 불멸의 존재가 된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 특집호에서는 커즈와일(Raymond Kurzweil)이라는 공학자를 소개했습니다. 그는 17살에 TV 쇼에 나와 컴퓨터를 이용해 작곡을 선보였던 인물로, 46년이 지난 2011년에는 컴퓨터가 지능을 가질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또한 35년 후인 2045년에는 인간의 문명이 종말을 맞고, 인간보다 탁월한 컴퓨터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특이점(singularity)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1)

특이점의 시대에는 인간의 뇌에 있는 모든 기억과 지능이 컴퓨터 하드(HDD)에 백업되고, 그 정보들이 데이터 처리 장치(CPU)를 통해 처리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몸은 로봇으로 대체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남게 되고, 자동차의 부속품을 교체하듯 인간의 몸도 새로운 버전의 로봇이나 기계 부품으로 교체하거나 수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윈도우나 맥의 운영체제를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하듯, 인간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2011년 커즈웨일의 특이점 주장이 타임지를 통해 소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공상과학 소설 속 이야기처럼 느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인공지능 연구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이 우세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이나 로봇 기술은 대부분 과학자나 공학자들의 꿈이었지만, 실제로 이를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습니다. 1970~80년 냉전 시대에 막대한 국방비를 들여 전략적 무기로 사용할 인공지능 기술 개발을 지원했지만, 매우 초보적인 수준의 인공지능 외에는 만들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인공지능 기술은 영화 속의 공상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2022년 12월, 챗GPT라는 혁신적인 인공지능 기술이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바로 다음 해 2월에는 이를 상용화하여 대중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인공지능은 기본적인 대화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지식을 적절한 수준에서 토론하고 사람처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상용화 이후, 이를 사용한 대중의 충격은 모든 분야에 미쳤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로하여금 미래에 대한 공황 상태를 불러왔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대화형 인공지능이 초기 버전이 발표된 후 1년이 안 되어 여러 번의 업그레이드를 통해 최신 버전인 GPT-4o를 공개했다는 점입니다. 이 최신 버전은 그림이나 사진을 생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음성으로 실시간 대화도 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혁신적인 기술인 인공지능이 널리 사용되면서, 사람들은 13년 전 특이점 이론을 주장한 커즈와일의 주장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2045년에 인간 문명이 종말하고 새로운 인류, 즉 포스트 휴먼이 탄생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이 결코 터무니 없는 공상과학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 터미네이터 속 세상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탑과 기술 혁신

오늘 우리는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바벨탑 사건을 읽었습니다. 본문의 바벨탑 건축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오늘 날 세계를 놀라게하고 있는 인공지능 기술과 같은 혁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 바벨탑 건축은 세상을 바꾸는 혁신적인 기술이 최초로 적용된 인간의 작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혁신이, 바로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드는 기술과 역청이라고 불리는 아스팔트를 건축에 사용한 신소재의 발견입니다. 성경은 당시 기술 혁신에 대해 3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3절) 그러면 이것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첫째는 진흙을 틀에 넣고, 가마에서 높은 열로 구워 벽돌을 만드는 기술의 개발입니다. 이 기술은 단순히 흙집을 만들 때, 진흙을 섞어 사각 틀에 넣어 햇볕에 말리는 흙벽돌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선 벽돌을 구울 가마를 만들어야 했고, 가마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조절할 수 있는 기술도 필요했습니다. 또한 고열과 높은 압력에도 직육면체의 벽돌 모양을 일정하게 유지하기위해서 진흙에 첨가하는 첨가제의 배합 비율도 알아야 했습니다. 벽돌을 만드는 기술은 그저 주변에 있던 돌을 줍고 쌓아서 집을 지었던 이전의 방식과는 차원이 다른 혁신적인 기술이었습니다.

둘째는 역청이라는 신소재의 발견입니다. 역청은 석유의 부산물로 나오는 아스팔트를 말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아스팔트가 흔했습니다. 흔한 재료였지만, 그 사용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역청을 쓰레기처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벽돌을 구워내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새로운 재료가 필요해졌습니다. 돌을 쌓아 건물을 지었을 때는, 아무리 촘촘히 쌓아도 돌과 돌 사이에는 틈이 많아서 이 틈 사이로 벌레나 바람이 들어왔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돌 사이에 진흙을 발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균일한 크기의 벽돌이 만들어지면서 이전의 눈에 보이는 틈은 사라졌습니다. 또한 규격화된 벽돌로 건축물을 지으니 더 높고 튼튼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 주목받은 재료가 바로 역청(아스팔트)이었던 것입니다. 아스팔트는 기름 덩어리라서 벽돌 사이에 들어가 틈을 메워주고, 벽돌을 코팅해 습기와 추위, 비바람에도 강하게 만들어 오랫동안 건축물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2) 결과적으로 이 두 가지 혁신은 바벨탑이 들어서는 시날 평지에 모인 사람들에게 새로운 도전과 혁신을 결심하게 만들었습니다.

 

 

혁신, 그 위험성

본문의 2절을 읽어보면, 노아의 홍수 이후에 살아남은 노아의 자손들이 동쪽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결국 걸프(gulf) 만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지금의 이라크와 이란의 국경이 있는 시날 평지로 이동합니다. 현재 이라크 동쪽에 위치한 시날 평지의 끝에는 이란과의 국경 역할을 하는 자그로스산맥이 동서로 뻗어 있습니다. 자그로스산맥은 총 길이가 1,500km가 넘고, 해발 4,000m가 넘는 산들이 있는 매우 험준한 산맥입니다. 만약 시날 평지에서 현재의 이란을 지나 인도로 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그로스산맥을 넘어야 했습니다. 걸프 만을 통해 가려면 배가 필요했지요. 그러니 이들에게는 이 두 길 모두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이들은 동쪽으로 이동했고, 이제는 막다른 길과 마주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시날 평지에 정착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기로 합니다. 이들의 결정을 본문 4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 11:4)

그러면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이들의 새로운 도전과 혁신이었을까요?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의 두 아들 중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에녹이라는 성을 짓습니다. 이 에녹 성이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도시입니다(창 4:17). 즉, 도시 건설은 이미 있던 것이었습니다. 도시 건설은 새로운 혁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바벨이란 도시를 특별하게 만든 혁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벨이라는 성읍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었습니다. 바벨의 도심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탑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탑을 자기 도시의 상징으로 만들길 원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계의 메가시티에는 그 도시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있습니다. 이러한 건축물은 도시 어디에서나 보여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 탑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현대에는 고층 빌딩이 이 역할을 대신하고 있지요. 또한 탑이나 건축물의 높이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높이는 그 도시의 부와 군사력, 기술 발전을 상징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높은 건물이 있다는 것은 군사력을 측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높은 건물은 일종의 레이더 역할을 하여 적의 위치와 규모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군대는 이를 바탕으로 방어와 공격 계획을 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날 평지에 건설된 바벨이라는 도시의 새로운 기술과 혁신은 바로 이 거대한 탑의 높이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기로 계획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력과 부, 군사력을 주변에 과시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로 결정합니다. 더하여서 이 과시에는 본질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4절을 읽어보면, 그들은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말합니다(4절). 이는 단순히 한 장소에 모이고 협동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이렇게 한 것은 외부의 공격으로 인해 사분오열 되어 흩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이들의 궁극적인 두려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고대 전쟁과 전투에서 흩어지면 결국 패배하고 멸망하게 되는 상황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미그달(מִגְדָּל)은 요새화된 망대나 탑을 의미합니다.3) 이 거대한 망대는 평지에서 도시를 지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구조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한 건축물에 모든 혁신과 새로운 기술을 적용합니다. 이는 그들이 말한 “하늘에 닿게 하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성경에서 인간의 교만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가나안을 정탐한 자들이 돌아와 모세에게 가나안을 묘사하면서 같은 표현을 씁니다(신 1:28). 또한 하나님도 가나안을 동일하게 묘사합니다(신 9:1). 따라서 이 표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없이 하나님처럼 살려는 인간 사회를 묘사하는 표현입니다.4) 시날 평지에 도착한 노아의 후손들은 노아가 보여준 방주 신앙에서 떠났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건축하라고 명령하신 방주 건설이 전세계를 멸망시킨 홍수에서 인간을 보호하고 구원해 주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믿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건축물 설계하고 지어서 스스로 구원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 가능하게 해 준 것이, 벽돌과 역청이라는 혁신적인 기술과 신소재였던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혁신적인 기술을 통해 안전을 확보하고,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날릴 기회를 맞이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들의 능력으로 안전하고 부럽지 않게 세상에서 살 수 있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이러한 바벨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잘 이해하려면, 창세기 11장 3절에서 히브리어로 “레(לְ)”라고 발음하는 ‘~대신’이라는 뚯의 전치사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이 전치사는 3절에서 두 번 사용됩니다. 이는 이전 기술을 대체하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을 알리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4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우리 이름을 내고”라는 표현에서 사용됩니다. 이를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우리를 위해 이름을 내고(let us make a name for ourselves)’입니다. 바벨탑 건설의 목적은 바로 ‘우리’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혁신과 새로운 기술의 목적은 ‘우리’였고, 바벨이란 도시에서 하나님은 완전히 제거된 것입니다.

 

대신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건축물 설계하고 지어서 스스로 구원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 가능하게 해 준 것이, 벽돌과 역청이라는 혁신적인 기술과 신소재였던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혁신적인 기술을 통해 안전을 확보하고,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날릴 기회를 맞이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내려오신 하나님

본문 5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들이 지은 도시와 탑을 보시기 위해 내려오십니다. 흥미로운 점은 “내려오셨더라”는 표현입니다. 만약 4절에서 탑의 꼭대기가 하늘에 있다면, 하나님이 내려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5) 하지만 이러한 아이러니하고 유머러스한 표현을 통해 성경은 인간의 업적과 혁신, 신기술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대단한 업적이며 혁신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이 하나님과 같아지거나, 하나님을 뛰어넘어 하나님도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었다고 자랑하지만, 이는 모두 허세와 허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이 바벨탑을 건설하는 것을 중단하도록 결정하십니다. 그리고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막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말씀을 하십니다.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창 11:6)

하나님은 하나님도 막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 바벨탑 건설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심을 하시고, 하나님은 7절에서 다시 내려가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게 만들고, 이들이 자연스럽게 분열하여 흩어지게 만듭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탑을 건설하는 혁신적인 기술이 결국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할 것이며,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듯이, 인간의 기술이란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와야만 겨우 볼 수 있는 하찮은 수준입니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처럼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인간의 기술을 막아서십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보이는 기술 혁신과 거대하고 높은 탑보다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 짓는 바벨탑, 즉 교만의 높은 탑을 더 심각하게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벨이란 도시에 모인 사람들이 지은 탑은 현대의 기준으로 보아도 한참 못 미치는 기술과 재료입니다. 하지만 하늘을 넘어서는 높은 건축물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바벨탑 이후로 한 번도 낮아진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처럼 높아지는 것, 아니 하나님을 넘어서는 것, 이것이 인간의 높아진 마음의 바벨탑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신 이유는 이러한 인간의 보이지 않는 교만의 고층 빌딩과 기술 혁신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 거짓 신앙을 무너뜨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야만 이들이 하나님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흩으시는 하나님

다시 내려오신 하나님은 인간을 흩으십니다. 인간이 바벨탑을 지은 이유는 4절에 나옵니다.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는 말에서, 흩어지지 않는 강력한 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흩으십니다(8,9).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가 되게 만드십니다. 결국 이 흩어진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위대한 구원의 꿈을 펼치시지요. 그가 바로 이스라엘의 조상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의 조상인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입니다.

덴마크의 목사였던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을 한 인간이 절망하여 죽음 앞에 설 때와 같다고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말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는 우화를 하나 들려 드리려 합니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어느 토끼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사냥꾼이 사냥개를 데리고 토끼 사냥을 나왔습니다. 사냥꾼은 토끼를 발견하고 사냥개를 풀어 토끼를 추격하게 했지요. 토끼는 자신이 사냥개보다 더 빠르기 때문에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토끼는 막다른 길에 몰려 사냥개에게 목덜미를 물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냥개가 물기 직전 사냥꾼이 등장해 사냥개의 입에 덮개를 씌워 떠났습니다. 다음 날 사냥꾼은 다시 토끼 사냥을 시작했습니다. 토끼는 전날의 치욕을 다시는 당하지 않으리라 확신했지만, 다시 막다른 길에 몰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냥꾼은 또다시 사냥개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몇 일이 지나자, 사냥꾼이 사냥개를 풀어 토끼 사냥을 시작했지만, 토끼는 도망치지 않고 이제 지쳤으니 빨리 목을 물어뜯으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사냥꾼은 하나님이며, 사냥개는 하나님의 말씀, 혹은 복음이라고 생각해보지요. 또한 토끼는 자만한 인간이라고 생각합시다. 이야기 속, 토기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서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스피드와 능력을 의지합니다. 몇 번의 실패와 절망을 겪지만, 이는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패와 절망이 거듭될수록 인간은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무능력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앞에 항복합니다. 이 항복 없이는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기독교 신앙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야기 속, 토기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서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스피드와 능력을 의지합니다. 몇 번의 실패와 절망을 겪지만, 이는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패와 절망이 거듭될수록 인간은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무능력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앞에 항복합니다. 이 항복 없이는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기독교 신앙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의 바벨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 11:9)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바벨탑이라고 불러온 탑과 도시는 이 사건이 일어난 후 하나님이 지으신 이름입니다. 바벨이란 이름은 바벨론 제국, 바벨론 등의 고유명사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성경은 바벨이란 이름에 원래의 뜻이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벨의 원래 뜻은 ‘혼동’, ‘혼란’입니다. 이는 이들이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다가 언어가 달라지면서 겪게 된 혼란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들이 추구했던 인위적인 안전과 구원의 허구를 고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위대한 신기술과 혁신을 통해 이룩하여 추구했던 흩어지지 않으려는 목표는 결국 의사소통의 문제로 허물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시 바벨 탑을 건설했던 노아의 후손들과 지금 이 사건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이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안전하고 튼튼한 건축물과 현대 기술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인 혼돈과 공허, 혼란 속에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인간의 혼돈과 혼란, 공허, 고통, 불안은 모두 하나님 계시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냥꾼과 토끼의 우화처럼, 차라리 철저히 실패하고 절망하여 무능력한 상태에 있는 것, 이것이 하나님 없이 사는 것보다 더 낮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실패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을 만난다면, 이 사람들에게 실패와 무능력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건축해서 그 꼭대기를 하늘에 두고, 자신들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자 한 노아의 자손들의 언어를 혼돈에 빠뜨리고 이들을 흩은 것은 저주인가요? 아니면 축복인가요? 예, 맞습니다. 그것은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하나님 없는 안락한 도시가 아닌, 혼란스러운 광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날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은 지금 인공지능이라는 기술 혁신으로 인해 기계와 전자 기술, 컴퓨터 기술이 인간 삶을 완전히 뒤바꿀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두려움 속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기술이 새로운 인간을 창조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러한 기술은 바벨탑이 그러했듯이 결코 하나님의 능력을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러한 혁신적인 기술을 주의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벨탑을 지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높아지고, 그 마음의 바벨탑의 꼭대기를 하늘 위에 두고 마치 인간이 하나님인 듯 행세하게 만들었던, 그 높아지고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결론: 교만한 마음 내려놓기

기술 혁신은 우리 삶을 편리하게 하고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마음을 교만하게 만들어 하나님을 잊게 한다면, 그것은 재앙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 하나님을 배제한 기술의 발전은 결국 인간의 교만을 키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며,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인공지능과 같은 혁신적인 기술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로 활용할 때 진정한 유익을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공지능이든, 어떤 혁신이든 그것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기술의 발전은 결국 허무함과 혼란을 불러올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기술의 발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삶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질 때,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우리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흩으시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를 벌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다시 찾고, 하나님께 의지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정한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교만을 꺾고,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리기 위해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술 혁신과 발전 속에서도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정한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질 때,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우리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흩으시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를 벌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다시 찾고, 하나님께 의지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정한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교만을 꺾고,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리기 위해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각주

  1. https://time.com/archive/6595274/2045-the-year-man-becomes-immortal/
  2.  Isidore Singer, ed., The Jewish Encyclopedia: A Descriptive Record of the History, Religion, Literature, and Customs of the Jewish People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Present Day, 12 Volumes (New York; London: Funk & Wagnalls, 1901-1906), 232.
  3.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0), 352-353.
  4. Ibid.
  5.  U. Cassuto, A Commentary on the Book of Genesis (Part II): from Noah to Abraham(Jerusalem: The Magness Press, 1964), 244-245.

이춘성 목사는 20-30대 대부분을 한국 라브리(L’Abri) 간사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환대 사역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 목사,  한기윤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