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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부활절 직후, 미국과 영국의 최고 법원은 교육과 성별 문제를 둘러싼 중대한 결정을 내렸거나, 결정을 앞두고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미국 대법원은 무슬림, 정통 유대교, 복음주의 신자들이 자녀를 동성애(LGBTQ+) 관련 동화책 수업에서 제외시켜 달라고 요청한 사건에서, 기존 2심 판결과는 달리 보다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최종 판결은 오는 6월에 내려질 예정이다. 한편, 영국 대법원은 ‘여성’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생물학적 성에 기반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젠더 정체성이 아니라 염색체에 기준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판결을 보면 하나는 시민의 교육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공적 권위를 강화하는 듯하지만, 실은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다원적 사회에서 PC(정치적 올바름)주의자들처럼 국가가 나서서 도덕적 지침을 강요할 때, 오히려 사회의 기반은 더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경고이다.

국가의 강요가 개인의 신념의 자유를 짓누를 때

미국 메릴랜드주의 몽고메리 카운티에서는 2022년부터 동성애 관련 그림책을 초등학교 교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국어(영어)와 사회 과목은 물론, 방과 후 독서 활동에서도 이 책들이 사용되었다. 학교 당국은 처음엔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자녀를 수업에서 제외시키고자 하는 학부모의 선택권(opt-out)을 인정했지만, 불과 한 학기 만에 그 조치를 철회했다. 교육청은 “가시성이 존중을 낳는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모든 학생의 수업 참여를 의무화했다. 이에 반발한 학부모들은, 예컨대 삼촌의 결혼으로 ‘삼촌’이 한 명 더 생긴다며 기뻐하는 소녀의 이야기나, 동성 친구에게 마음이 끌리는 소녀의 이야기 같은 그림책이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특정 가치를 주입하는 일종의 강요된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그러한 책을 학교에서 전면 금지하라는 것이 아니다. 남녀의 구분을 중시하는 성경적 세계관과, 이를 달리 해석하는 젠더 이데올로기의 관점이 교실 안에서 나란히 숨 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다양성의 진정한 의미가 서로 다른 신념과의 불편한 공존에 있다면, 그 불편함은 오히려 건강한 다원성의 징표일 것이다.

이 사안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최종 판결은 6월 말에 내려질 예정이다. 이 판결은 향후 ‘동성애 전환 치료(conversion therapy)’를 금지하는 콜로라도주의 현행 법률이 위헌인지 여부를 가리는 또 다른 대법원 판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젠더가 아닌 생물학적 ‘성’

영국 대법원의 판단은 보다 분명하고 단호했다. 평등법에 명시된 ‘성별’의 개념은 개인의 취향과 자기 인식이 아닌, 생물학적 성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판시한 것이다. 이는 트랜스젠더 시민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개인의 취향이나 주관적 선택이 법적 정의를 바꾸는 권한까지는 지니지 않는다는 경계를 명확히 한 판단이었다.

영국 대법원은 이 판결이 단순히 과거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회귀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그것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다른 요구와 신념이 충돌하지 않도록, 각자의 자유가 지켜질 수 있는 최소한의 경계를 나누는 시도라는 것이다.

 

조용한 침투, 한국의 현실

한국의 상황은 달라 보이지만, 그 본질은 유사하다. 동성 결혼은 여전히 불법이며, 여론도 비교적 보수적이다. 그러나 문화는 법보다 빠르게 스며들고 있으며, 차별금지법과 같은 동성애 친화적인 법을 입법하고자하는 시도가 지속되고 있다. 2018년에는 남학생이 같은 성 친구에게 반한 이야기를 담은 4~6세 영아를 위한 슬로베니아 그림책 『첫사랑』이 ‘세종도서’로 선정돼 전국 학교와 공공 도서관에 배포되었다. 당시 큰 반발이 없었던 것은, 많은 부모들이 그 존재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다양성’ 교육이라는 목적 아래 교육의 주체인 학보모와 학생에게 아무런 통보 없이 교실과 독서 공간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은밀한 방식이 공교육에 대한 불신을 낳고 있는 이유이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산다는 것

성경적 성 윤리는 세속화된 사회에서 종종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기독교인이 견지하는 두 가지 확고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인간은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되었고, 서로 다르되 동등한 존재라는 점이다(창세기 1:27). 다른 하나는, 자녀의 도덕적 성장은 국가가 아닌 부모와 가정의 책임이라는 점이다(에베소서 6:1~4). 이로부터 파생되는 권리는 단순히 동의하지 않을 자유를 넘어, 그 ‘동의하지 않음’을 사회 속에서 분명히 드러낼 수 있는 거부의 자유까지 포함한다.

다원성과 관용, 인권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가 이러한 불편한 신념을 배제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들이 지향하는 가치와 공동체를 스스로 훼손하고, 내부로부터 분열시키는 원인이 될 것이다. 이번 Mahmoud v. Taylor 사건, 즉 메릴랜드 몽고메리 카운티의 LGBTQ+ 그림책 논란에서 무슬림, 정교회, 기독교계 학부모들은 정부나 교육청에 성소수자 이야기를 금지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단 하나, 가르침의 내용과 방식에 있어 최소한의 투명성과 합의, 가족의 믿음과 신념을 지킬 수 있는 선택의 자유였다. 이러한 자유를 인정하는 일은 포용을 결코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포용의 출발점이다.

 

한국 교회가 준비해야 할 태도와 정책

실제적인 면에서 한국 교회는 미국과 영국의 사례를 통해, 앞으로 우리 사회가 교육 현장에서 마주하게 될 갈등에 대비해 태도와 정책에 있어서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성적 지향이나 젠더 정체성과 같은 민감한 주제를 다루는 수업에서는, 반드시 사전 통보 제도가 도입되도록 요구할 필요가 있다. 학부모와 학생에게 미리 알리고 동의를 구하는 절차는 교육의 신뢰를 지키는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둘째, 화장실이나 탈의실처럼 성별 분리가 중요한 공간에서는 생물학적 성을 기준으로 운영하되, 불가피한 경우 제3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유연성이 필요하다. 셋째, 교육자와 종교계, 인권 단체가 함께 교재를 검토하고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협의체를 구성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감춰진 교실이 아니라, 열린 공론장에서 교육의 방향을 함께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와 요구는 어떤 사상이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이 공존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각자의 신념과 믿음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같은 옷을 입히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끝으로 현대 사회가 지향하는 자유주의란, 모든 이가 같은 신조를 외우게 하는 체제가 아니다. 복음주의자와 보수적 기독교 신앙을 지닌 이들은 공론장의 토론을 회피하지 않는다.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토론이 아니라, 강요다. 다양성이 진정한 가치를 지니려면, 시대정신에 반대할 자유 또한 보장되어야 한다. 시대의 흐름과 다른 목소리를 공론장에서 배제한 뒤, 그것을 미신이나 광신으로 몰아붙이는 행태는, 결국 그들이 비판하던 전체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되묻게 한다. 만약 그런 자유가 없다면, 현대 세속사회가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관용’, ‘환대’, ‘포용’이라는 이름은 또 하나의 전체주의적 제복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제복이 인간의 영혼을 아름답게 만든 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한기윤 선임 연구위원인 이춘성 박사는 대학에서 고분자 공학을 전공한 후에  20세기 기독교 변증을 대표하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세운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에서 10년 넘게 사역자로 일하면서 C. S. 루이스와 쉐퍼 등의 기독교 변증가와 기독교 철학을 공부하였다. 또한 한국과 영국 라브리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환대 사역과 기독교 변증과 세계관을 가르쳤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석사(M. Div.)를 하였으며,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신칼빈주의 직업 윤리”로 신학 석사(Th. M.), 고신대 일반대학원에서 신원하 교수의 지도 아래 “포스트모던 환대 윤리 사상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기독교 환대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연구”로 박사(Ph.D.)를 하였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 목사,  한기윤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 공저로 “그리스도 중심 성경읽기 1, 2, 3권(ivp)”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