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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부부라는 인연

한 사람이 평생 동안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될까요? 누군가 정확히 셈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셀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중 대부분은 마치 바람이 스쳐가듯, 별다른 흔적 없이 지나가는 만남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때로는 단 하나의 만남이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기도 하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부부’라는 인연입니다. 예전에는 부부를 평생의 동반자로 여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마저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듯합니다. 안타깝게도, 요즘 방송에서는 불륜이나 폭력, 유기와 같은 뚜렷한 이유가 아닌, ‘서로의 행복’과 ‘자아 실현’을 위해 이혼을 선택하는 것이 미덕인 양 그려지곤 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믿음을 가진 부부들에게조차 예외가 아닙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이혼율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하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가복음 10:9) 하신 말씀을 다시 마음에 새기며, 이처럼 소중한 결혼이라는 만남이 왜 오늘날 이토록 가볍게 여겨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이 귀한 은혜를 어떻게 지켜나갈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2. 이혼과 인간의 완악함

성경은 우리 인생의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며, 그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가르칩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어지는 2장에서는,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여자인 하와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인도하십니다(창세기 2:22).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라는 두 존재를 의도적으로 빚으시고, 그들의 만남을 친히 주선하신 ‘중매자’로서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둘이 만나는 순간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고 세상에 선포하셨습니다. 마치 결혼식에서 주례 목사님이 신랑과 신부의 사이에서 혼인을 선언하듯, 하나님께서 직접 그 사랑의 증인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창조의 순간을 언급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가복음 10:9). 이는 결혼이 단순히 두 사람 사이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세 존재가 함께 맺는 언약임을 보여줍니다. 결혼은 남편과 아내의 의지로만 쉽게 깨질 수 있는 계약이 아니라, 신성한 하나님의 뜻이 스며든 거룩한 약속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창조로부터 인간의 만남을 위한 계획을 가지셨고, 그 계획대로 사람의 발걸음을 인도해서 만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다 보면, 어딘가 낯설고도 이상한 구절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31절에 나오는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써 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얼핏 보기엔 일정한 조건만 갖추면 이혼이 허용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신명기 24장 1절을 인용하신 것으로, 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마가복음 10장의 맥락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마가복음 10:4~5) 이어지는 9절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에게, 이혼을 허용하는 율법을 주셨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그 이유를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이 ‘완악함’—헬라어로σκληροκαρδία(sklerokardia)—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단 네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 매우 특별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혼을 언급하실 때 두 번(마태복음 19:8, 마가복음 10:5), 부활하신 주님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던 제자들의 굳은 마음을 지적하실 때 한 번(마가복음 16:14),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개를 거부하고 끝까지 자기 고집을 부리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며 한 번(로마서 2:5) 쓰이죠.

이렇듯 ‘완악함’이란 단어는 단순히 고집이나 오해 수준을 넘어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없이는 결코 바뀔 수 없는, 인간의 근본적인 죄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혼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율법은 진정한 허락이 아니라, 더 큰 죄를 막기 위한 임시적인 방편이었던 셈입니다. 인간의 완악함이 자칫 더 깊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낳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을 위한 보호의 장치였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면서 막고자 하신 ‘더 큰 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3. 하나님의 자비와 이혼

고대 사회에서 이혼에 관한 모든 권한은 오직 남성에게 있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내쫓는 일은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니었고,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성이 그렇게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이혼 증서를 받지 못하면, 여전히 법적으로는 남편의 소유로 남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여인에게 두 번의 고통을 안기는 일이었습니다. 삶의 터전에서 내몰린 것도 모자라, 다시금 가정을 이루지도 못한 채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말씀을 통해 이혼 증서를 써주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이혼을 조장하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즉 신명기의 초점은 ‘이혼’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해 고통받을 수 있는 약자에 대한 보호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권장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현실을 감안해, 한시적이고 조건부로 허용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심각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이혼은 절대 안 된다, 이혼은 곧 죽음이다”라는 식으로 율법이 작동했다면, 그 고통 속에 놓인 여성은 도망칠 길마저 차단당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며, 한 몸을 이루는 거룩한 동행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과 죄성으로 인해, 더 이상 사랑도 존중도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자비로이 탈출구를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누구보다 행복한 결혼을 꿈꾸었고, 그 가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자신과 자녀를 지키기 위해 이혼을 선택해야 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선택 앞에서 끝없이 괴로워하는 이들 말입니다. 우리는 이혼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삶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던지는 말 한 마디는, 이미 상처 입은 영혼을 다시 찢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아픔을 함께 느끼고, 깊은 동정심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지혜롭게 도우며, 섬기며,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혼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과 그 자녀들에게, 교회는 더 큰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 안에서 다시 삶을 일으킬 수 있도록 돕는 따뜻한 품이어야 합니다. 누구도 죄책감에 짓눌려 자신의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너진 자리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4. 율법을 악용하는 완악한 사람들

하지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이 예외 조항마저도 자기 멋대로 해석하며, 가정을 가볍게 깨뜨리는 일이 흔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수치’라는 표현의 남용입니다. 신명기에서 말한 ‘수치되는 일’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밝히셨듯 ‘음행’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부부가 서로의 정절을 저버리고 성적인 탈선을 저질렀을 때에만 이혼이 허용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는 이 ‘수치’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여, 남편이 아내를 내쫓는 일이 너무나도 흔했습니다. 유대인의 문헌인 미슈나(Mishnah,Gittin 9:10)를 보면, 음식이 짜거나, 밥을 태웠다는 이유로, 혹은 남편의 눈에 더 아름다운 여인이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는 아내가 ‘남편을 위해 자신을 가꾸지 않은 수치’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편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마치 선심을 쓰듯 이혼 증서를 내밀며 아내를 내쫓았습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척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긍휼을 조롱하는 행위였으며,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는 말씀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혼율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며, 이제는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경우, 2024년 한 해 동안 222,000쌍이 결혼한 반면, 91,000쌍이 이혼을 선택했습니다. 결혼 대비 이혼율이 무려 41%에 달하는 셈입니다. 물론 그해 결혼한 이들이 그해에 곧바로 이혼한 것은 아니지만, 이혼한 부부 중 약 20%는 결혼 5~9년 사이에 갈라섰습니다. 이처럼 가정 해체 현상은 문화나 종교를 초월하여 점점 더 가속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1]

믿는 우리도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 또한 세상의 분위기에 휩쓸려 이혼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물론 때로는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임에도, 그 어려움을 감당하기 싫어서 손쉽게 등을 돌리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태도와 결단을 다시금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5. 개인의 행복을 위해  이혼을 선택하는 사람들

그렇다면 오늘날 이혼율이 이토록 급격히 증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인이 있겠지만, 그 근본에는 결혼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변화, 특히 개인주의의 발달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행복’과 ‘자아실현’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고, 결혼조차도 이제는 그 기준에 맞추어 선택되고 평가됩니다. 만약 결혼이 내 행복을 방해한다고 느껴지면 결혼을 미루거나 아예 하지 않기도 하고, 결혼을 했더라도 자녀를 낳지 않거나, 더 나아가 이혼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이제 결혼은 서로를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상호 헌신의 여정이라기보다는, 자아실현과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사실 이러한 흐름은 이미 수십년 전에 서구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1979년 결혼과 이혼 상담가였던 존 아담과 낸시 윌리엄슨은 『이혼: 어떻게 그리고 언제 놓아야 하는가』라는 책에서 이혼을 부정적인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오늘날의 다면적인 사회에서 두 사람이 헤어지는 것이 특히 쉽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의 결혼을 해방시키는 것-그것이 더 이상 당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은 당신이 이제까지 한 일 중 가장 성공적인 일이 될 수 있다. 이혼은 긍정적이고 문제를 해결하며 성장 지향적인 단계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승리가 될 수 있다.” [2]

이러한 주장들이 퍼진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도 ‘더 이상 내게 유익하지 않다면 이혼은 당연한 선택’이라는 사고방식이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영화 제목처럼, 결혼은 미친 짓이이며 혼자가 더 행복하다는 생각이 퍼져가고 있습니다. 결혼하더라도 경제는 각자 관리하고, 서로의 생활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양가 부모님과 가족 행사는 따로 챙기며, 각자의 가족의 연락처는 공유하지 않는 그런 삶, 같이 살지만 실제로는 남남과 다름없는 결혼이 과연 행복이라고 할 있을까요?

 

6. 결혼이 주는 선물: 행복과 성숙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세기 2:1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결혼이 단순히 제도적 장치가 아니라,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도록 주신 하나님의 깊은 배려라는 뜻입니다. 부부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때로는 기대고, 함께 인생의 짐을 나누는 존재입니다. 그런 점에서 결혼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따라서 결혼을 통해 행복해지려는 마음 자체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결혼이 ‘행복’만이 아니라 ‘성숙’을 위한 하나님의 훈련의 장임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세기 2:24). 결혼은 서로가 하나 되어가는 여정이며, 이 여정은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던 자기중심적인 본성을 깨뜨리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부부는 단순히 서로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를 하나님 앞에서 더욱 성숙한 사람으로 빚어가는 존재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가 되어, 상대방을 아름답게 빚어가는 길을 걷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타락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결혼의 아름다움은 종종 훼손되곤 합니다. 행복을 꿈꾸며 시작한 결혼이지만, 그 행복에 도달하는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한때 악명 높은 노예상이었으나 회심 후 노예 해방 운동에 앞장섰던 존 뉴턴 목사님, 그의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결혼을 앞둔 토마스 링(Mr & Mrs Thomas Ring) 부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짝을 만났으니, 이제 그대들의 가장 큰 위험은 너무 행복해지는 데 있습니다.”[3] 이 말은 결혼이란 예수님을 향한 사랑 없이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단순히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함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결혼의 참된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2020년 JTBC에서 방영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던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불륜을 저지른 뒤 아내에게 들키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에 빠진 것이 죄는 아니잖아.” 그는 진심으로 다른 여자를 사랑했다며, 그것이 왜 잘못이냐고 항변합니다. 이 장면은 수많은 시청자의 공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사랑이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헌신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이란 내 감정의 충만함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감정을 넘어 서로를 품고, 인내하고,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헌신이 쌓일 때, 비로소 사랑의 열매가 맺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진정한 행복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7. 위기의 부부들을 위한 실천적 조언들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며, 더 큰 비극과 불행을 막기 위해 우리가 꼭 나누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깊은 고통 끝에 이혼을 고민하고 있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반대로 세상의 문화에 이끌려 ‘개인의 행복’이라는 이유 아래 너무 쉽게 이혼을 생각하고 계신 분들도 계실지 모릅니다. 그런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실질적인 조언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소한 순간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부 관계는 어느 날 갑자기 나빠지지 않습니다. 한순간의 큰 사건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작고 날카로운 상처들이 쌓여 어느덧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관계는 점진적으로 회복될 수도 있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무심히 건네는 커피 한 잔, 함께 걷는 저녁 산책… 이런 작고 평범한 일상이 쌓일 때, 결혼은 다시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행복한 결혼생활은 특별한 비결이 아니라, 날마다 이어지는 작고 정직한 선택에서 비롯됩니다.

두 번째는, 서로를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 완벽한 배우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런 두 사람이 만나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것이 결혼입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부족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함을 함께 품고 걸어가는 것이 결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 가시듯, 우리도 배우자를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며 함께 성숙해 가야 합니다.

20세기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아내 루스는 처음 빌리 그래함을 만났을 때, 자신이 기도해왔던 이상적인 배우자의 모습과 거의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받아들였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결혼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완벽함이 아니라, 수용과 은혜가 결혼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서로의 언어를 배우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R. C. 스프로울 목사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그는 생일 선물로 새 골프채를 기대했지만, 실용적인 그의 아내는 흰 셔츠 여섯 벌을 준비했습니다. 반대로 그는 아내에게 멋진 코트를 선물했지만, 아내가 원했던 것은 세탁기였습니다. 둘 다 상대방을 위한 마음은 있었지만, 각자의 언어로만 말했기에 엇갈린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배우자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할 때 사랑은 깊어집니다.

네 번째는,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이 성장하는 유일한 길은, 고백과 용서입니다. 한 번의 큰 잘못보다 더 위험한 것은 매일의 사소한 오해와 상처들이 쌓이는 것입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에베소서 4:26)는 말씀처럼, 쌓아두지 말고 그날의 감정을 그날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담아만 두면 서로가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말해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루에 14,000~20,000번 정도 눈을 깜빡인다고 합니다. 이렇게 눈을 깜빡임으로 각막을 촉촉하게 만들어 건조를 막고 이물질을 제거하고 눈을 보호한다고 합니다. 용서는 눈 깜빡임과 같습니다. 용서를 통해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이 새로워지고, 감사와 애정의 렌즈로 서로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용서야말로 복음의 핵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를 수용하고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서로를 용서함으로 행복의 울타리는 세워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8. 나가며: 결혼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혼은 포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선택하고 지켜나가야 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세상의 문화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으면 떠나도 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비록 불완전해도 함께 걸어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이 말씀이,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회복의 불씨가 되기를, 그 불씨가 가정의 따뜻한 등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결혼과 가정을 붙드시고, 날마다 은혜로 새롭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각주

  1. 2025년 3월 20일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https://www.korea.kr/briefing/policyBriefingView.do?newsId=156679907
  2. John Adam & Nancy Williamson, Divorce: How and When to Let Go (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1979), 4~5.
  3.  John Newton, The Works of the Rev. John Newton, vol. 2 (London: Hamilton, Adams & Co., 1820),  318-319.

양승언 목사는 고려대와 총신 신대원을 졸업하고 사랑의교회 국제제자훈련원에서 13년간 사역한 후, 제자훈련과 선교적 교회의 비전을 가지고 서울 강남에서 다움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선교적 교회 개척 경험을 담은 『도서관교회 이야기』(세움북스), 『영적 성장의 길』, 『영적 성장의 첫걸음』(공저, 이상 디모데), 『믿으라고? 뭘?』(넥서스CROSS)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