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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정치적 양극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은 내전을 우려할 정도로 양극화되었으며, 이는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정치인들은 상대편을 국정 운영의 파트너와 선의의 경쟁자로 생각하기보다는 악마화하여 제거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당과 정치인들의 갈등은 정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론과 학계, 종교와 지역사회 등 대한민국의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되어 시민들의 연대, 심지어 교우들과 가족 구성원 간의 연대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다.  

우선, 우리는 ‘정치적 양극화’(political polarization)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인 동시에 현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부상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최근의 연구들은 정치적 양극화가 단순히 양당제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당파적 대립이 심화된 미국이나 한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다당제를 기반으로 한 합의제 민주주의를 운영해 온 유럽 국가들에서도 점차 심화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1] 2022년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인 Pew Research Center가 실시한 국제 조사에 따르면, 정파적 갈등과 정치적 양극화가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는 국가로 한국, 미국, 이스라엘, 프랑스, 헝가리가 지목되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전체 응답자의 약 90%가 자국 내 정당 간 갈등이 심각하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이 중 절반에 가까운 49%는 그 갈등의 정도를 ‘매우 심각하다’고 평가하였다. 미국 또한 유사한 수준인 88%의 응답자가 강한 당파적 갈등이 존재한다고 응답했으나, 이를 ‘매우 심각하다’고 본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은 41%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2]

 

Ⅱ.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복합적 원인들

그렇다면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의 정치적 갈등과 양극화는 어디로부터 기인하는가? 정치적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파악하는 작업이 우선시된다. 그러나 신정섭 교수가 지적하듯,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던 정치적 양극화 연구에 있어 아쉬운 지점은 정치적 양극화의 원인에 대한 연구들이 한국적 맥락보다는 주로 미국적 맥락에서만 이루어졌다는 것에 있다. 그럼에도 미국이나 다른 국가들의 양극화 상황을 연구하여 제시된 원인들은 한국의 맥락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 있기에, 이에 대해 살펴보는 것 역시 필요하다.[3]  

미국의 유명한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가 2019년에 발간한 Democracies Divided: The Global Challenge of Political Polarization에서 여러 나라의 정치적 양극화 문제를 분석한 토마스 캐러더스(Thomas Carothers)와 앤드루 오도너휴(Andrew O’Donohue)는 양극화의 첫 번째 원인으로 ‘출생적 정체성’(Ascriptive Identity)을 지목한다. 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는 종교와 민족(또는 부족)의 정체성이라는 두 종류의 출생적 특성은 심각한 정치적 양극화의 기반을 구성하기도 한다. 특정한 종교와 민족 정체성은 그것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대중들에게 세상과 정치, 그리고 사회와 문화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특정한 해석학적 렌즈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개혁하여 도래시켜야 할 사회에 대한 전망은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 사이에 같을 수 없는 법이며, 또 종교적 신념과 가치를 공적 영역에서 완전히 배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속주의자들과도 다를 수밖에 없다. 캐러더스와 오도너휴는 정치와 사회에 대한 종교적 시각과 세속적 시각이 충돌하여 분열적 갈등을 일으키는 국가 사례로 터키와 인도, 이집트와 인도네시아, 폴란드 등을 지목하기도 한다. 터키의 경우, 공공 영역에서 종교의 역할과 젠더 이슈와 같은 사회 문제에 대한 상이한 접근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세속주의 진영과 이슬람주의 진영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인도에서도 무려 40년 동안이나 힌두 민족주의 진영과 세속주의 진영이 정치적 분열과 양극화를 양산하고 있다.[4] 

정치적 양극화의 두 번째 원인은 ‘이념적 정체성’(Ideological Identity)이다. 캐러더스와 오도너휴에 의하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념적 정체성의 차이는 종교나 민족과 같은 출생 기반의 정체성의 차이에 비해 양극화에 미치는 영향이 비교적 덜하다고 평가되는 경향이 그동안 있어왔다. 그렇게 분석해왔던 이유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이념적 쟁점은 타협이 가능하며, 또한 이념은 종교나 민족과 같이 고정된 정체성보다 더 유동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학자는 “이념적 차이가 일정 수준 이상의 지속성과 강도를 가지게 되면, ‘결국 화해할 수 없는 정체성 기반의 대립 진영’을 형성하게 된다”고 경고한다.[5]

보통 이념적 차이와 갈등은 경제적·사회문화적 쟁점에 대한 진보적·보수적 견해 차이로 발생한다. 예를 들어,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여 분배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 체제를 구축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모델을 선호할 것인가의 견해 차이가 이념적 갈등을 초래한다. 또한 성소수자(LGBT)의 권리, 낙태, 이민자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문화적 견해 차이가 이념적 대립 진영을 만들어낸다. 

두 학자는 1960년대 이후 미국 내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이념적 갈등이 단순히 정책적 견해의 차이와 갈등이 아닌, 시민들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분간하는 ‘부족주의적’(tribal) 성격을 띠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념적 갈등은 인종과 종교와 같은 고정적 성격의 정체성 요소들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6] 한국의 상황은 이러한 미국의 상황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한국 내에서 원래 심했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의 이념적 차이와 갈등은 미국과 같이 인종과 종교는 아니더라도 지역과 세대라는 정체성 요소들에 의해 심화되어 왔고, 더 이상의 타협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양극화의 지점에 도달한 듯하다.   

정치적 양극화의 세 번째 원인은 양극화를 해소하기보다는 조장하는 ‘정치 행위자’와 그들이 실행하는 ‘정치 프로그램’과 깊은 관련이 있다. Democracies Divided에 수록된 여러 사례 연구들은 지구촌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심각한 양극화의 현상이 정치 행위자, 즉 타자를 악마화하여 사회적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 실제로 얻는 정치 지도자와 정당에 기인한다는 우울한 현실을 보여준다.   

“본 보고서에 수록된 사례 연구들은 양극화의 전개 경로에서 정치 행위자(political actors)가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심각한 양극화는 종종 특정한 정치 행위자—지도자, 운동, 또는 정당—가 기존 질서에 도전하며, 특정한 정체성에 뿌리를 둔 정치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행위자들은 흔히 위협, 폭력, 반대자에 대한 악마화, 민주주의 규범의 위반 등 ‘대결적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양극화를 가속화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들의 정치적 프로그램 자체가 심각한 양극화를 낳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존의 사회정치 질서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정체성 분열의 다른 진영은 이에 대해 격렬한 저항을 보이기 때문이다.”[7]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특정 정치 지도자들이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현상은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 폴란드의 야로스와프 카친스키(Jaroslaw Kaczynski), 태국의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gan),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Hugo Chavez) 등은 모두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자신들의 정치 전략의 중심에 두었으며, 이념적·문화적 균열을 의도적으로 심화시키는 방식으로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고 정치적 이익을 취해왔다. 이들은 각국의 국가 정체성 논쟁을 둘러싼 갈등의 상징적 인물로 부상하면서, 양극화의 주요한 추진 동력으로 기능한다.[8] 

정치적 양극화의 심화에 작용하는 네 번째 주요 요인은 디지털 환경, 특히 소셜 미디어 플랫폼의 구조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 소셜 미디어 기업들은 수익 창출의 핵심 지표인 사용자 체류 시간을 늘리기 위해 고도화된 알고리즘을 통해 각 사용자에게 맞춤화된 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한다. 기업의 알고리즘 사용은 이론적으로 정보 과잉을 방지하기 위한 필터링 기제로 정당화되지만, 실제로는 사용자 개별에게 사회와 정치에 대한 ‘부분적 현실’(partial reality)만을 제공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알고리즘에 의한 정보 환경은 사실에 대한 공동의 인식 기반을 약화시키고, 동질적 신념을 공유하는 자기 확증적 공동체의 형성을 촉진함으로써 사회적 분열과 인식의 양극화를 가속화한다.[9] 

극단주의적 이념과 운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새로이 생성되고 상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확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기독교 민족주의와 음모론에 태생적 뿌리를 둔 QAnon 운동이 2017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새롭게 등장을 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선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이 운동의 리더인 Q라는 인물은 자신이 극비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미 정부 고위 인사라 주장하며 ‘Q drops’라 지칭되는 게시물들을 올리면, 다른 사용자들은 트위터, 페이스북, 틱톡 등 여러 플랫폼에 공유하는 방식으로 그의 사상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되었다. QAnon 운동은 다음과 같은 음모론적 전제와 파괴적인 내러티브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세계는 선과 악의 영적 전쟁에 휘말려 있다”, “미국 민주당의 정치인들은 사탄숭배자이자 소아성애자이며, 세계적인 아동 인신매매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유대혐오적인 민주당 정치인들은 유대인 아이들의 피를 마신다”, “악의 축인 소아성애자 엘리트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종말론적 용사이다.”[10]    

기독교 잡지 Christian Century의 기자 아루아조-호킨스(Dawn Araujo-Hawkins)에 의하면, ‘Q drops’에는 “성경 구절이나 종교적 언어가 자주 포함되며, 이러한 점이 QAnon 운동이 백인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특히 큰 지지를 받는 이유”라고 지적한다.[11] 아루아조-호킨스는 최근 몇 년 사이에 QAnon 운동이 미국의 온라인 육아 커뮤니티로 조용히 스며들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녀의 배변 훈련이나 안전 수칙 등 일상적인 육아 정보를 찾던 부모들이 유튜브나 페이스북의 알고리즘 추천을 따라가다 QAnon 콘텐츠에 노출되는 사례들이 빈번하게 보고되었다. 그 과정에서 젊은 부모들은 백신과 아동 인신매매에 대한 음모론을 받아들이게 된다. 특히, 공립학교의 ‘자유주의적 아젠다’와 교육 제도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홈스쿨링을 택한 백인 복음주의 성향의 엄마들이 QAnon의 세계관을 쉽게 수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성향이 제도에 대한 불신뿐 아니라, 외국인, 유색 인종 등 사회적 타자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과 배제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 지적한다.[12] 미국의 이러한 현상은 최근 한국의 청소년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타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정당화하는 극우적 세계관을 수용하고 확산시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13]   

 

Ⅲ. ‘만남의 문화와 장’의 형성을 통한 정체성 및 이념적 갈등의 해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치적 양극화는 ‘출생적 정체성’이나 ‘이념적 정체성’의 상이함과 갈등을 기반으로 생성되고 심화되는 경향성을 보인다. 권력의지에만 경도된 사악한 정치인들은 이러한 정체성과 그것의 갈등에 의존하는 정치적 행위와 아젠다를 서슴없이 실행에 옮겨 ‘대중 양극화’ 혹은 ‘사회 양극화’를 악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교회는 무엇보다 고정적 위치를 점하고 있고 심지어 우상화되어 있는 정체성을 재고하게 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샤이드(Scheid)가 제안하듯 사회정치적 이슈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만남의 문화와 장’을 교회 공동체 내부뿐 아니라 지역 사회 내에서 형성하는 일을 해야 한다. 상이한 부족적 정체성을 지닌 그룹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고대 교회 안에서 상호적 지체로 인정되었듯이, 교회는 갈등적 정체성과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적 배제를 기반으로 한 정치 문화를 해소하기 위해서 ‘만남의 문화와 장’을 형성해야 한다.[14] 

여기서 주의할 점은,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만남의 문화는 상이한 출생적·이념적 정체성과 사회정치적 견해를 고수하는 다양한 그룹들의 합의(consensus)를 이루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주장을 잘 경청하고 상호존중의 대화를 실행하는 것을 통해 상대방을 향해있는 두려움내지 혐오를 거부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데 있다. 즉, 서로 다른 입장과 견해가 하나의 현실로 흡수 및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상대방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다.[15] 

아만다 헨더슨(Amanda Henderson)이 말하듯, “양극화의 반대는 ‘획일성’이 아니며, 오히려 이견과 차이는 공동체 내에서 양육하고 지지해야 할 건강한 실천이다.”[16] 교회는 상대방을 향한 경멸과 혐오로 점철되어 있는 ‘고강도 갈등’(high conflict)은 지양하면서, “심각하고 강렬한 마찰을 포함하지만 상대를 비인간화하는 방식으로 전락하지 않는” ‘건강한 갈등’(healthy conflict)을 지향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인들과 시민들로 하여금 개개인은 각기 다른 신념과 경험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차이가 정치적 이념과 관점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헨더슨은 지도자인 목회자가 회중들이 이러한 불편함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돕고, 진솔하면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경청과 대화를 통해 정치적 이념과 견해의 차이를 환대하는 태도와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17]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고유의 경전과 전통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사회 문제에 대해 신앙에 입각한 실천을 하는 동시에, 상대 진영의 존재와 이념을 악마화하지 않고 그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양극화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과 기술을 함양해야 한다. 신자들이 성경의 신학적 가치관을 따라 사회참여를 하도록 목회자는 조언해야 하며, 또한 이들이 자기 성찰, 친절함, 겸손, 타인에 대한 존중 등의 기독교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덕목을 내재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과 프로그램을 궁구하여 실행에 옮겨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정체성 및 이념적 차이로 인한 무슬림에 대한 배제와 폭력을 억제하기 위해 1988년부터 ‘머스터드 시드 프로젝트’(The Mustard Seed Project)를 진행하여 효과를 보았는데, 복음주의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과 경청 및 대화를 핵심적인 과정으로 진행하였다. 종종 배제와 심지어 폭력으로 귀결되는 무슬림에 대한 미국인들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 이 프로젝트는 공동의 대화와 행사, 협력의 장을 마련하는 데 주력하였다.[18] 

 

Ⅳ. 경청과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겸손한 인식론               

우리 시대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이념적·정치적 양극화를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서 교회 공동체는 고립된 게토 공동체를 넘어, 다양한 사회정치적·이념적 이견들이 배제와 악마화에 대한 두려움 없이 나눠질 수 있는 ‘만남의 문화와 장’을 형성해야 한다. 실제로 만나서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경청하고 또 나의 이야기를 나눌 때 상대방에 대한 오해와 배제, 그리고 혐오는 ‘시나브로’ 해소될 수 있는 가능성의 전기를 맞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만남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것 중에 하나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다. 정치와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나의 멋들어진 사상과 입장을 말로 풀어내는 것은 비교적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시각에서] 상대방의 개똥철학과 견해를 듣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에 속한다. 미국의 정치신학자이자 버지니아 대학(University of Virginia)의 교수인 찰스 매튜스(Charles T. Mathewes)는 자신의 책 A Theology of Public Life에서 사회 참여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겸손’과 ‘경청’을 이야기한다. 그것도 아우구스티누스적이면서 인식론적인 겸손을 제시한다. 우리는 사회정치적 문제에 있어서 이 인식론적 겸손이 있을 때,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대화의 물꼬를 비로소 틀 수 있다. 사회와 정치에 대한 나의 전망과 견해가 완벽하지 못해 틀릴 수 있으며,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일말의 진실을 배울 수 있다는 인식론적 겸손이 있을 때, 우리는 나와 생각이 다른 이웃 시민과의 대화라는 공적인 삶에 참여할 수 있다.[19]   

그렇다면 왜 아우구스티누스적일까? 매튜스는 고대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가 인간 인식론의 핵심적 덕목으로 겸손(humilitas)을 지목한다고 주장한다. 원죄로부터 비롯된 깊은 죄성(deep sinfulness)은 인간의 인식(cognition)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우리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사회정치적 진리에 대한 온전한 실체를 파악하고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우리의 인식은 순수하게 중립적이지도 않다.[20] 한 인간의 인식은 ‘사랑’(love)과 ‘욕망’(desire)에 의해 주조된다는 점에서 인간이 ‘무엇을 아는가’는 ‘무엇을 사랑하는가’와 깊이 결부되어 있다. 즉 우리는 각자가 사랑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해석하며, 자기중심성이나 명예욕, 권력욕과 같은 왜곡된 사랑과 의지가 잘못된 인식을 낳기도 한다. 분에 넘치고 과도한 욕망을 가진 기형적 인간일수록 현실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언제나 자기중심성이라는 왜곡된 사랑과 의지에 의해 형성된 나의 인식이 중립적이지도 않고 항시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우리는 겸손히 인정해야 하며, 경청과 대화를 통해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21] 

매튜스는 이와 같이 겸손한 인식론을 토대로 한 경청과 대화를 ‘공적인 삶’(public life)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평생을 두고 실천해야 하는 ‘사랑의 훈련’(praxis)이라 주장한다. 나와 충돌하는 사회정치적 견해를 지닌 타자를 겸손한 경청과 대화를 통해 환대하는 행위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심판의 날 하나님께서 아무런 자격 없는 우리를 받아주시고 환대하시는 ‘궁극적 사건’의 선취적 사랑을 실천하고 경험하는 훈련이다. 이에 대해 매튜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자를 환대하도록 변화되는 우리의 회심(conversion)은 정의를 추구하던 존재로서가 아니라 함께 사랑하는 존재를 추구하는 존재로의 변화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이해될 때, 타자와의 만남은 임박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격 없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지고 환대받았다는 압도적인 감사와 기쁨에 의해 이끌려야 한다.”[22] 

이념적 차이와 갈등이 공존하는 사회를 위협하는 전 세계적 현실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를 통해 죄악이 덕지덕지 붙은 우리일지라도 사랑스러운 신부로 환대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타자와의 만남과 대화를 모색해야 하며, 타자를 직면하는 그 행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선취적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 마이클 반즈(Michael Barnes)의 말처럼, 우리는 감히 타자의 얼굴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고 말할 수 없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타자를 마주하고자 상처 받을 각오와 용기를 내는 순간, 바로 그 마주함의 행위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은 말할 수 있지 않을까.[23] 

 

Ⅴ. 나가는 말 

한국의 정치적 양극화는 정단 간 갈등을 넘어 대중의 정체성 기반의 분열로 퇴보하고 있다. 출생적·이념적 정체성에 뿌리를 내린 분열은 이를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치 행위자들과 알고리즘의 정보 환경 등에 의해 고착화되고 있으며, 우리 사회를 내전적 상황으로 추동하고 있다. 교회는 더 이상 회중의 분열을 우려하여 양극화 상황을 먼발치에서 관망해서는 안 되며, 능동적으로 양극화를 완화시킬 수 있는 공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회중과 시민들이 각자의 사회정치적 이념과 견해를 배제의 두려움 없이 나누고 경청할 수 있는 ‘만남의 문화와 장’을 형성해야 한다. 서로 다른 정당과 정책을 지지할지라도 입장 차이와 상대방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존중과 친절의 덕목을 신자들에게 그리고 특히 인격형성의 단계에 있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일찍부터 가르치고 함양시켜야 하며, 이를 위해 ‘건강한 토론’을 할 수 있는 문화와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교회가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신학적 자원은 인간 인식의 제한성과 자기중심성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적 성찰, 즉 ‘인식론적 겸손’이다. 이는 모든 인간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며, 사회정치적 진리에 대한 독점적 소유는 불가능하다는 통찰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인식론적 겸손을 지니게 될 때, 나와 다른 정체성과 의견을 내세우는 이웃 시민을 비인간화하거나 혐오하지 않는 ‘사랑의 훈련’을 실천할 수 있고, 화해와 공존의 첫 주춧돌인 경청과 대화로 한 발을 내딛을 수 있다. 각자 지닌 고유한 정체성과 정치적 입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각주

  1. 신정섭, “정치적 양극화 연구의 현황과 과제,” 『연구방법총론』, 제8권 제3호(2023), 35-36.
  2.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Pew Research Center의 홈페이지에 실린 조사를 참고하라:  https://www.pewresearch.org/short-reads/2022/11/16/most-across-19-countries-see-strong-partisan-conflicts-in-their-society-especially-in-south-korea-and-the-u-s/
  3. 신정섭, “정치적 양극화 연구의 현황과 과제,” 43.
  4. Thomas Carothers and Andrew O’Donohue, “Comparative Experiences and Insights,” in Democracies Divided: The Global Challenge of Political Polarization (Washington, D.C.: Brookings Institution Press, 2019), 258-59.
  5. Carothers and O’Donohue, “Comparative Experiences and Insights,” 260.
  6. Carothers and O’Donohue, “Comparative Experiences and Insights,” 260-61.
  7. Carothers and O’Donohue, “Comparative Experiences and Insights,” 263.
  8. Carothers and O’Donohue, “Comparative Experiences and Insights,” 263-64.
  9. Anna Floerke Scheid, “Social Media Algorithms, Christian Extremism, and Catholic Ethics for Faith-Based Advocacy to Build a Culture of Encounter,” Political Theology 25, no. 1 (2024), 8-9.
  10. Scheid, “Social Media Algorithms, Christian Extremism, and Catholic Ethics for Faith-Based Advocacy to Build a Culture of Encounter,” 18-19.
  11. Dawn Araujo-Hawkins, “The Making of the QAnon Conspiracy Cult,” The Christian Century, December 16, 2020.
  12. Dawn Araujo-Hawkins, “QAnon Moms,” The Christian Century, May 4, 2022.
  13. 윤지원·이재덕, “극우 세계관, 청소년들 사이에선 이미 주류,” 『주간경향』, 제1460호 (2023.10.03).
  14. Scheid, “Social Media Algorithms, Christian Extremism, and Catholic Ethics for Faith-Based Advocacy to Build a Culture of Encounter,” 21. 
  15. Ibid., 24-25.
  16. Amanda Henderson, “Political Polarization and Christian Nationalism in Our Pews,” Religions 16, no. 4 (2025), 5.
  17. Ibid., 5.
  18. Ibid., 7-8.
  19. Charles T. Mathewes, A Theology of Public Lif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120. 매튜스는 자기중심적 발화만 가득한 세상 속에서 ‘대화’(dialogue)에 대한 개념을 ‘발화’(speaking)가 아닌 ‘경청’(listening)을 중심으로 신학적 재구성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화를 발화(speaking) 중심이 아니라 경청(listening) 중심으로 조직할 때, 그 모습은 전혀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물론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세계에서 가장 절실하게 결핍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침묵이다. 그러므로 대화란 “우리”가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거나, 모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참여자가 서로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타자가 누구인지 놀라운 방식으로 새롭게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20. Ibid., 71-72.
  21. Ibid., 47-49.
  22. Ibid., 121.
  23. Michael Barnes, Theology of the Dialogue of Religion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238.    

김풍룡 교수는 수도국제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합동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스코틀랜드에 있는 아버딘 대학(University of Aberdeen)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중심으로 정치 신학을 연구했다. 박사 논문은 두 출판사(Lexington Books와 Fortress Press)의 joint monograph로 2024년에 출간되었으며, 책의 제목은 Augustine’s Apocalyptic Political Theology in the Evil Saeculu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