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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며: 리더십이 문제다.

다양한 크고 작은 공동체와 조직에서 그에 걸맞은 리더를 세우는 일은, 회사나 조직과 공동체를 개척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복잡한 과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과정부터, 부임한 목사의 리더십이 공동체에 자연스럽게 수용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진통이 따른다. 그 과정에서 구성원이 이탈하기도 하며, 심한 경우 공동체가 둘로 갈라지거나 무너지기도 한다. 이처럼 리더를 세우는 일은 그 공동체의 생존을 좌우할 만큼 중대한 문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 글에서는 오늘날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리더십과 교회에 필요한 성경적 리더십이 무엇인지 천천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먼저,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경영학자들이 말하는 ‘진정한 리더십’의 조건들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성경이 말하는 리더십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하며 마지막으로 성경적 리더십과 오늘날 세상이 요구하는 리더십 사이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분석함으로써, 지금 대한민국 교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리더십의 방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Ⅱ. 현대 사회는 어떤 리더십을 원하는가?

A. 현대 리더십의 본질

오늘날 기업이든 정부든, 조직의 성패가 리더십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이 조직에 어울리는 리더십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조직마다 처한 환경과 구성원의 기질이 다르기에, 리더십의 유형을 하나의 틀로 정형화하기란 애초에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리더십 담론은 단순히 실천적 기술이나 행동 요령을 넘어서 보다 근본적인 차원으로 시선을 옮기고 있다.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처럼 구체적인 실천 항목을 제시하는 방식이 아닌 리더십의 내면, 곧 리더의 존재와 태도에서 출발하는 리더십이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 경역학의 대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는 리더십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리더십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인간성’이 아니다—그런 것은 유창한 말솜씨에 불과할 수도 있다. 리더십은 ‘사람들과 친해지고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아첨이다. 리더십이란 한 사람의 시야를 더 높은 목표로 끌어올리고, 그 사람의 성과 수준을 더 높은 기준으로 끌어올리며, 평범한 한계를 넘어서는 인격을 세우는 일이다.[1]

드러커가 말하는 리더십은 결코 리더만을 홀로 중심에 두지 않는다. 오히려 참된 리더는 무대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팀원과 평범한 구성원들이 빛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준다. 스포트라이트는 리더 자신이 아닌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하며, 그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넘는 경험을 하도록 격려하고 지지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드러커는 ‘성과’란 단순히 숫자로 드러나는 수익이나 결과가 아니라 일의 과정 속에서 구성원이 겪는 성장과 변화, 인격의 확장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라고 주장한. 이러한 성장의 경험은, 이후 구성원이 새로운 일에 자발적으로 몰입하도록 만드는 내적 동기로 작용하며, 결국 더 큰 성과로 이어지는 기반이 된다.

오늘날 경영자들의 교과서로 불리는 짐 콜린스(Jim Collins)의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서도 이와 유사한 통찰이 등장한다. 콜린스는 탁월한 성과를 이룬 수많은 기업의 리더들을 면밀히 분석한 끝에 위대한 리더일수록 구성원들에게 억지로 동기를 주입하려 애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들은 오히려 구성원들이 스스로 내면의 동기를 자각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그 안에서 각자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조용히 격려하는 역할을 감당했다.[2] 이러한 리더 아래에서 조직은 비로소 자율적이 헌신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3] 

현대 경영자들의 멘토로 불리는 두 사람의 말에서 공통으로 읽히는 것은, 과거의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적 리더상, 권력과 성과 중심의 강압적인 리더십에 대한 경계라 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인격과 성품, 윤리와 협동 같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가치들을 사람을 중요시 여기고 관계를 맺는 것을 리더의 본질적 조건으로 꼽는다. 비록 그들이 이러한 리더십을 통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이 기업의 성과라 하여도, 극단적으로 개인화되고 기계화된 물질주의적 문화 속에서 ‘인간다움’이라는 본질적 요소를 경영의 핵심으로 제시한다는 점은 그 자체로 깊은 의미와 통찰을 품고 있다. 그러면 이들이 말하는 현대 사회에서 성공하는 위대한 리더십의 정의는 무엇인지, 또 그 유형은 어떠한지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B.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리더십

과거 리더십을 말할 때 사람들은 흔히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떠올리곤 했다. 그리스어χάρισμα, 라틴어charisma에서 유래한 이 말은 본래 ‘은혜’나 ‘선물’을 뜻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은사 혹은 구원의 은총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이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카리스마를 “개인의 비일상적인 천부적 자질에서 비롯된 권위”로 정의하며, 주로 정치 지도자나 대중을 이끄는 강력한 인물에게 나타나는 특징으로 보았다.[4] 현대에 이르러 카리스마는 강한 추진력과 뛰어난 언변, 그리고 대중을 매료시키는 장악력으로 이해된다. 이런 카리스마형 리더는 구성원에게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한다. 마치 19, 20세기 미국의 남북 전쟁이나 1차 세계대전 전장에서, 지휘관이 병사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며 앞장서 고지를 향해 돌진하던 모습처럼 말이다. 이런 이유로 카리스마형 리더는 종종 자신과 가족의 희생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영웅적이고도 순교자적인 인물로 그려지곤 한다.

그러나 드러커와 콜린스는 카리스마를 건전한 리더의 덕목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진정한 리더십이란 사람을 따르게 하는 힘이며, 그것은 일시적인 열광이나 감정적인 충성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신뢰와 헌신으로 이어지는 힘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드러커는 역사상 위대한 리더로 평가받는 인물들—처칠, 링컨 같은 정치 지도자나, 세계적 기업의 CEO들—대다수가 오히려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대중 앞에 서는 것을 꺼려했고, 화려한 언변이나 강한 존재감보다 조용한 결단력과 책임감으로 리더십을 발휘했다. 두 사람은 또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하변서, 그 대표적 예로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등을 언급하며, 이들의 리더십은 겉으로는 대중을 휘어잡는 강력한 에너지를 보여주었지만, 도덕적 방향성과 절차의 부재로 인해 결국 공동체를 파국으로 이끌었다고 분석한다. 단기적인 성과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공동체를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드러커는 리더십을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배워야할 하나의 “일(work)”이라고 정의한다.[5] 리더십이란 선천적인 성품이나 카리스마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과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성숙의 결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리더는 만들어지는 존재이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어서 드러커는 진정한 리더십이 ‘일’이라면, 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을 제시한다. 첫째, 리더는 조직의 사명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분명한 판단과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이것을 선명한 목소리로 구성원들에게 전달하는 ‘나팔수’가 되어야 한다. 둘째, 리더는 리더십을 지위나 특권이 아닌 책임으로 여겨야 한다. 성과의 공로는 구성원들에게 돌리고 실패의 책임은 스스로 감당하는 윤리적 리더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것이 리더의 책임 윤리인 것이다. 셋째, 리더는 동료나 부하의 강점과 성공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동료와 부하들의 실패를 책임지려 한다면, 그들의 성공 앞에서도 함께 기뻐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바울이 로마 교회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권면 처럼, 동료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고 하는 이가, 정작 그들의 즐거움 앞에서는 진심으로 함께 웃을 수 없다면, 그 리더십은 위선이다. 그리고 위선적인 리더를 믿고 따를 추종자는 없다.

결론적으로 리더는 인격적으로 겸손(humility)하고 직업적인 의지(professional will)를 겸비한 사람이다. 이들은 외부의 주목을 원치 않는다. 성과의 공은 팀과 조직,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돌리고 책임은 온전히 자신이 짊어진다. 성과와 성공을 리더 개인의 능력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성공의 경험과 노하우가 조직 내부에 뿌리내리기를 진심으로 원한다.[6] 진정한 리더는 ‘나’가 아니라 ‘사명’을 말하고, ‘권력’이 아니라 ‘책임’을 생각한다[7]

 

Ⅲ. 성경적 리더십의 본질은 무엇인가?

A. 성경적 리더십의 본질: 성경적 리더의 소명과 카리스마

일반적으로 사회는 리더십의 문제를 논할 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조직 안에서 자연스럽게 내적인 소양이 길러진다고 믿는다. 리더십은 하나의 역할이며, 노력 여하에 따라 누구든지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그 중심을 이룬다. 과거 리더십 담론은 주로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대해서 다루었지만, 이는 자칫 독단적이고 도덕적으로 위험한 길로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왔다. 그러한 이유로, 오늘날에는 타고난 스타성보다는 조용하고 겸손하며, 공동체의 이익을 앞세우는 인물이 진정한 리더로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리더는 공동체에 의해 추대되거나 선출되는 외적 과정 못지않게, 개인의 내적인 소명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리더의 권위는 바로 하나님의 신적인 부르심, 곧 ‘소명’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리스마를 단순히 개인적 매력이나 영향력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본래 그 의미인 하나님의 은사와 선물로 본다면, 성경적 리더는 필연적으로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가 지적했듯, 카리스마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개인의 타고난 능력과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본래 카리스마는 인간의 공로나 능력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선택받는다는 구원의 교리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은혜의 신학적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는 ‘전적 타락’의 교리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지혜의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판단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했다. 그것은 곧 피조물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이 정하신 선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기준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창조주의 뜻에서 벗어난 삶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그 의도는 본질적으로 악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결과 역시 악으로 흘러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자격은,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선을 행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를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로 선택하고 부르셨다는 ‘소명(calling)’의 전제가 있어야 한다. 이어서 리더는 두 번째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이를 ‘2차 소명’이라 불렀다. 이는 공동체를 이끄는 구체적인 사명, 곧 리더의 역할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사실, 일반적인 조직에서는 리더가 되는 것을 ‘소명’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전가지 카리스마형 리더들의 문제점들 때문에 오늘날에는 오히려 ‘책임 윤리’라는 표현을 통해 후천적인 인간의 능력과 자질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적 리더에게 ‘소명’이 요구된다는 의미는 신적인 능력을 과시하고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리더 자신이 무능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의 의미이다.

때로는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리더의 소명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는 ‘깨끗한 통로’인 양 착각하여,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 강요하고, 구성원들을 은밀하게 조종하거나 압박하는 악한 리더가 있다. 그러나 참된 성경적 리더는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전달될 때조차, 자신의 욕망이나 판단이 그것을 왜곡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떤다. 그는 늘 기도하고, 신중하며, 공동체의 검증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지혜를 잃지 않으려 애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경적 리더는 본질적으로 카리스마, 곧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를 통해 세워지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능력주의에 물든 리더십과 달리 인간의 무능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내면의 태도에서 비롯된 리더십이다. 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이러한 성경적 리더십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있다. 영적인 침체에 빠졌던 12~13세기 유럽에 새로운 영적 부흥의 불씨를 피워올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Franciscus Assisiensis)가 바로 그러한 리더이다. 다음은 그가 마세오(Masseo)와 나누었던 한 대화의 내용이다.

프란치스코와 함께 수도 생활을 하던 마세오 형제가 프란치스코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왜 그럴까? 당신은 왜 그럴까?” 그는 마치 놀리는 것처럼 그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였다. “당신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거요?” 하고 프란치스코는 그만 장난치라는 듯 크게 말하였다. 마세오가 답하였다. “나는 당신의 용모가 뛰어나지도 않고, 학식도 없으며, 귀족의 혈통이 아닌데도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며, 당신 보기를 바라며, 당신에게서 듣기를 바라고, 당신에게 순종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오. 어째서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려고 애쓰는 것일까요?”[8] 프란치스코가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기쁨으로 충만하여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오랫동안 묵상에 잠긴 후, 무릎을 꿇고 열정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브라더 마세오에게 말했다. “그대는 그 이유를 알고 싶소? 그 이유는 가장 높이 계신 분의 시선이 그런 일을 하시고자 뜻하셨기 때문이오. …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 나를 택하셨다오. 그분은 나보다 더 천한 인간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를 택하셨고, 그는 이 세상의 고귀한 신분과 위엄, 강함, 미모, 그리고 학식을 깨뜨리기 위해 이렇게 미천한 나를 택하셨던 것이오.”[9]

『영적 지도력』의 저자 오스왈드 샌더스는 프란치스코의 일화를 소개하며 영적 리더십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영적 지도자의 자격과 권위가 단지 타고난 능력이라고 말할 수 없음은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의 삶에서 현저하게 증명되고 있다.”[10] 결국 성경적 리더십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자신의 무능함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고백하고, 그분을 삶의 주인으로 섬기며 따르는 ‘종의 태도’다. 이 태도는 세상의 리더십이 요구하는 능력이나 카리스마와는 본질부터 다르다. 그것은 지배하거나 이끄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낮아지고 섬기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드리는 자세다. 이것이 성경적 카리스마의 본질이며, 성경적 리더십의 핵심 원리이다.

B. 성경적 리더의 목표와 방향

오스 기니스는 The Call(소명)이라는 책에서, 지난 삼천 년 동안 서구 사회가 추구해 온 사랑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을 소개한다. 그것은 바로 ‘아가페’와 ‘에로스’라는, 서로 방향이 다른 두 종류의 사랑이다. 기니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을 빌려, 사랑을 일종의 ‘중력’처럼 끌어당기는 힘, 혹은 ‘갈망’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 사랑의 본질을, 사랑의 중력이 향하는 방향성에 따라 구분지었다. 그는 먼저 ‘에로스’를 “위대한 상승(the great ascent)”[11]이라 부른다. 이 ‘상승’이 아무리 고귀한 것을 목표로 삼는다 해도—진리, 사랑, 아름다움, 혹은 하나님이라 하더라도—그 궁극적인 방향은 결국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향한다. 겉으로는 고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중심에는 여전히 ‘나’라는 자아와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 사랑이 에로스다.

이에 반해 오스 기니스는 ‘아가페’를 “위대한 하강(the great descent)”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하강은 인간이 스스로 낮아지는 도덕적 겸손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낮아지신 사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신비를 가리킨다. 이 위대한 하강이 우리에게 던지는 첫 번째 메시지는 인간은 사랑의 주체가 아니라, 그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에로스는 인간 스스로를 주체로 삼아,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르려는 사랑이다. 그러나 아가페는 그 반대 방향, 즉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 위대한 하강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며 그 방향과 목적은 인간이다.

이는 성경적 리더십의 본질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뚜렷이 보여준다. 바로 주인이신 예수님의 ‘위대한 하강’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공동체가 리더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리더의 손끝이 가리키는 ‘위대한 하강’—곧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성경적 리더십의 목표와 방향성이라는 의미이다.

루이스는 이러한 삶을, ‘행복(Happy)’이 아닌 ‘기쁨(Joy)’을 추구하는 삶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의 회심 과정을 다룬 자서전 『기쁨에 사로잡혀(Surprised by Joy)』에서,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도 일상 속에서 예기치 않게 솟아오르던 어떤 기억과 감각, 그리고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갈망의 순간들을 회고한다. 그는 그것을 “다른 어떤 만족보다도 더 바람직하지만,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이엇다고 고백했다. 루이스는 이 감각을 “우리가 무언가를 찾고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우리가 찾아졌음을 깨닫는 순간”이라고 표현하였다.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하강이 자신에게 다가왔음을 비로소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감각을 ‘기쁨(joy)’라고 표현하였다.

성경적 리더십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표는 자명하다. 그것은 공동체가 리더를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리더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인간을 부르시는 그 음성, 그 인도하심에 귀 기울이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참된 리더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분을 더욱 또렷이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리더의 역할은, 하나님으로부터 ‘찾아졌음’을 구성원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돕는 일이다. 그 은밀한 자각, 그 기쁨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도록, 공동체 안의 영적 감각을 섬세하게 일깨우고 훈련시키는 것—바로 그것이 성경적 리더십의 목표와 방향성이다.

C. 종으로서의 리더십: ‘섬김’과 ‘권위’

앞서 성경적 리더십의 본질이 리더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종’이라는 의식, 곧 ‘종 의식’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리더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끝이 되어야 하며, 공동체가 그분을 바라보도록 이끄는 사람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종’이라는 개념이 때로는 ‘권위’라는 또 다른 핵심 개념과 충돌하면서, 성경적 리더십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종(Servant, διακονία)’이라는 용어는 성경적 리더십의 핵심 어휘로 자리 잡았지만, 오늘날 이 개념은 로버트 그린리프(Robert K. Greenleaf)가 1977년에 출간한 Servant Leadership: A Journey into the Nature of Legitimate Power and Greatness를 통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서번트 리더십’은 전통적인 권위 개념과는 대조되는 방식으로 유행처럼 확산되었고, 그 결과 성경적 리더십이란 마치 사람들이 꺼리는 일을 도맡아 하고, 무조건적인 희생을 감내하는 역할로 오해되기도 했다. 더 나아가 ‘권위’ 자체가 성경적 리더십과 상충되는 요소로 여겨지는 왜곡된 인식도 생겨났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신학자 앤드류 클라크(Andrew D. Clarke)는 ‘섬김-리더십(servant-leadership)’, 곧 ‘섬김이 곧 리더십’이라는 은유는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적용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밝혀 내었다.

클라크의 연구에 따르면, 기독교 사역과 관련해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들 중, ‘δοῦλος(doulos)’—즉 ‘노예’나 ‘종’이라는 표현은 의외로 자주 쓰이지 않는다. 오히려 훨씬 더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διάκονος(diakonia)’, 곧 ‘집사’ 혹은 ‘시종’이라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 단어 또한 항상 하인이나 비천한 존재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섬기는 사람’ 혹은 ‘사역자’라는 의미에 더 가까우며, 단순히 권위를 내려놓는 것을 뜻하기보다, 주어진 권위를 어떻게 책임 있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내포하고 있다. 클라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종’과 ‘리더’라는 개념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깊은 이유를 짚어낸다. 그는 이 충돌을 “지위 불일치(status inconsistency)”라는 “은유의 혼합”을 통해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 사역의 섬김의 본질은 위계, 복종, 순종을 요구하는 구조 속에서 작동하며-이 두 요소는 모두 바울의 리더십 신학에 본질적이다. 바울이 그린 기독교 지도자는 가정의 가장(head)이자 가정 노예들의 주인이며, 그의 가정 교회에는 다른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종됨’(servanthood)의 메시지는 가정의 통상적 위계를 뒤집는 철저한 종됨이 아니라, 가정의 가장이 여전히 지도자로 남아 있으면서 겸손, 취약함, 섬김이 권위 행사의 맥락을 마련한다는 뜻이다. 이는 권위를 지니면서도 권위주의를 거부하신 복음서의 예수 모습과도 일치한다.[12]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로, 콜린스의 διακονία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그는 헬레니즘 시대의 용례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비기독교 그리스 문헌과 비문(碑文) 자료를 폭넓게 조사했다. 그 결과, διακονία와 그와 관련된 동족어의 약 3분의 1은 ‘메시지 전달’ 혹은 ‘심부름’과 직결되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했다. 이에는 하나님의 대변자 혹은 메신저로서의 역할도 포함되어 있었다.[13] 또 다른 용례는 ‘행위 수행’으로, 비록 빈도는 낮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집행하는 특정한 사역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14] 콜린스는 이 단어의 핵심 의미가 ‘비천함’이 아니라, 오히려 ‘중간자(대표자)’의 개념에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διάκονος가 무역상, 상인을 의미하며, 이는 단순히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국가 간 교역을 담당하는 필수적 매개자로서 상업 계급에 속한 인물이었다. 즉, 그는 ‘필수적인 중간자’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5] 

이러한 분석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식탁을 섬기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종’으로 묘사하신 장면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요13). 그것은 결코 권위의 부재나 무력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음으로써 ‘위대한 하강’의 본질을 몸소 보여주신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행동을 통해 참된 권위란 지배가 아니라 섬김에서 비롯된다는 진리를 삶으로 증언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한복음 13장 13–15절)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기를 바라셨다. 곧 다가올 부활과 승천 이후, 제자들은 초대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끌어야 할 리더였다. 이들은 후에 ‘교회의 기둥’이라 불리며, 공식적으로 사도의 직분을 맡아,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성도들을 두려움에서 보호하고 믿음 안에 머물도록 격려해야 할 책임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으로 남기신 부탁이 바로 요한복음 13장의 말씀이었다. 주님은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고 종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참된 리더십의 본을 몸소 보이셨다. 이것이 ‘위대한 하강’의 모습이었다.

결론적으로, 성경적 리더십은 ‘위대한 하강’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의 부르심, 곧 신적인 소명을 바탕으로 한 카리스마적 권위에 기초한다. 하지만 그는 카리스마의 능력을 자신의 성공과 만족이라는 ‘위대한 상승’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권위를 낮은 자리로 향하는 하강의 힘으로 전환시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종의 일을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님처럼 내려간다. 성경적 리더십은 높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려는 능력이다. 그 내려감 속에서만 하나님의 뜻은 비로소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어, 과거 실패와 좌절의 굴레에서 그들을 해방시키고, 마침내 구원과 성화라는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내기 때문이다.

 

Ⅳ. 나가며: 오늘 한국 사회와 교회에 필요한 리더십

지금까지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위대한 조직’을 만들기 위한 리더십의 원리와, 성경이 말하는 리더십의 본질을 함께 살펴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 그리고 각각의 장단점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리더십이 무엇인지 숙고해보고자 한다.

앞서 논의한 대로, 현대 사회의 리더십은—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스 기니스의 표현을 빌려—‘위대한 상승’을 이룩한 인물에게 위대한 리더십이라는 이름을 부여해왔다. 남들이 감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성과를 이루어낸 탁월한 리더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윤리성과 책임감을 갖춘, 지속 가능하면서도 안정적인 리더십에 대한 요구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성과 중심의 독무대가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관계와 가치를 중시하며 개인의 성공보다 공동의 선을 우선시하는 겸손한 리더상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요구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사회에서 가장 결핍된 덕목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결국, 오늘의 시대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리더란, 공동체와 개인이 놓치고 있는 결핍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그 빈틈을 은연중에 채워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감과 효능감을 공동체 안에서 되찾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이런 리더십은 개인의 내적 동기와 자발적인 헌신을 자극하고,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위대한 조직’으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물어야 한다. 과연 ‘지속적인 성과’와 ‘압도적인 성공’ 자체가 우리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꿈과 위로를 다시 건넬 수 있는 방식인가? 눈부신 상승의 뒤편에는 늘, 보이지 않게 낙오되고 추락한 자들의 자리가 남는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동화가 말하듯, 우리는 모두 날개 달린 멋진 나비의 꿈을 좇지만, 그 하늘 아래에는 조용히 땅으로 떨어지는 애벌레들이 있다. 그 추락을 볼 수 있는 눈, 곧 땅 위에 발을 딛고 위를 바라보는 시선이야 말로 우리 시대의 결핍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누군가는 반드시 ‘위대한 하강’을 감행해야 한다.

현대의 경영 이론과 리더십 이론은 실로 정교하고 구체적이다. 조직을 세우고 운영하는 데 있어 탁월한 지침을 제공한다. 이를 교회의 조직 운영에 적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기독교 윤리적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리더십은 ‘방법’보다 ‘방향’에 무게를 둔다. 지금까지 시도된 많은 이른바 ‘성경적 리더십’ 이론들은 본질보다는 드러커나 짐 콜린스 같은 세속의 리더십 전문가들이 제시한 방법론에 성경적 언어를 덧입힌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하는 이러한 리더십 방법론들이 절대적 진리를 담고 있는 성경의 외피를 입는 순간, 강요와 지배의 도구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리더십의 기술이 아니다. 그 목적과 방향이다. 성경이 말하는 ‘위대한 하강’의 리더십은 사람들로 하여금 리더 개인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이 나를 찾으셨다”는 말로밖에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지속적이고도 깊은 기쁨으로 이끌어준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신앙의 영웅들에게서 우리는 이 깊고 놀라운 내적 동기와 추진력을 본다. 그것은 어떤 전략이나 기술보다도 더 큰 감동과 헌신을 낳았다.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성경적 리더십의 참된 힘일 것이다.

 


각주

  1.  Peter F. Drucker & Joseph A. Maciariello, Management: Revised Edition(New York: Collins, 2008), 288.
  2. Jim Collins,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이무열 옮김 (파주: 김영사, 2002), 127-128.
  3. https://www.jimcollins.com/concepts/level-five-leadership.html
  4. Max Weber, 『직업으로서의 정치』, 이상률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2017), 3-5.
  5. Peter F. Drucker & Joseph A. Maciariello, Management: Revised Edition, 289-290.
  6. Jim Collins,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이무열 옮김 (파주: 김영사, 2002), 71.
  7. Peter F. Drucker & Joseph A. Maciariello, Management: Revised Edition, 290. 콜린스가 제시한 이상적인 리더, 이른바 ‘레벨 5 리더십’의 핵심적 특징 하나를 덧붙이고자 한다. 그것은 ‘변화를 주도하는 리더’보다 ‘변화에 모두를 몰입시키는 리더’가 더 이상적이라는 점이다. 콜린스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플라이휠 효과(Flywheel Effect)’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무거운 바퀴를 처음 돌릴 때는 큰 힘이 들지만, 일정한 방향으로 작은 힘을 계속 가하면 점차 속도가 붙고, 결국 가볍게 밀어도 스스로 돌아가게 되는 것처럼, 조직이나 사업도 일회성의 ‘빅 이벤트’보다는 작지만 일관된 노력과 규율, 그리고 꾸준한 개선이 쌓일 때 비로소 큰 성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위대한 변화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일관된 행동의 축적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점에 대해 콜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좋은 회사에서 위대한 회사로의 도약은 단계마다, 행동 하나하나마다, 결정 하나하나마다, 플라이휠을 한 바퀴 한 바퀴 돌릴 때마다 눈부신 성과를 지속적으로 쌓아 나가는 축적 과정을 통해 달성된다.”(Jim Collins,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266-267.) 이는 곧 리더가 단독으로 변화를 ‘주도’하려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진정한 변화는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변화의 주체로 몰입할 때 비로소 일어난다. 바로 이러한, 모두가 함께 변화를 일으키는 리더십이야말로 진짜 리더가 지녀야 할 참된 리더십의 자질인 것이다. 드러커와 콜린스가 연구하고 분석한 현대적 리더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성과를 중시하되 장기적 지속성을 고려하는 리더십 ② 겸손하면서도 강한 의지를 지닌 리더십 ③ 사람과 문화를 우선하는 리더십 ④ 단기 유행보다 가치를 축적하는 리더십 ⑤ 윤리적인 시스템과 문화를 통해 조직을 성장시키는 리더십.
  8. James Burns, Revivals: Their Laws and Leaders(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09), 95.
  9. James Burns, Revivals, 96.
  10. J. 오스왈드 샌더스, 『영적 지도력』, 이동원 역 (서울: 요단출판사, 1982), 40.
  11. Os Guinness, The Call: Finding and Fulfilling the Central Purpose of Your Life(Nashville: W Publishing Group, 1998), 12-13.
  12. Andrew D. Clarke, A Pauline Theology of Church Leadership, ed. Mark Goodacre, vol. 362, Library of New Testament Studies (London; New Delhi; New York; Sydney: Bloomsbury, 2012), 102.
  13. John N. Collins, Diakonia: Re-Interpreting the Ancient Sources(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1990), 96-132.
  14. Collins, Diakonia, 133-149.
  15. Collins, Diakonia, 78-79.

한기윤 선임 연구위원인 이춘성 박사는 대학에서 고분자 공학을 전공한 후에  20세기 기독교 변증을 대표하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세운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에서 10년 넘게 사역자로 일하면서 C. S. 루이스와 쉐퍼 등의 기독교 변증가와 기독교 철학을 공부하였다. 또한 한국과 영국 라브리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환대 사역과 기독교 변증과 세계관을 가르쳤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석사(M. Div.)를 하였으며,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신칼빈주의 직업 윤리”로 신학 석사(Th. M.), 고신대 일반대학원에서 신원하 교수의 지도 아래 “포스트모던 환대 윤리 사상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기독교 환대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연구”로 박사(Ph.D.)를 하였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 목사,  한기윤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 공저로 “그리스도 중심 성경읽기 1, 2, 3권(ivp)”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