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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8-14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 

지난 해 말, 우크라이나 특수 작전군이 전사한 적군의 신분증을 공개했다. 

총알이 뚫고 나간듯, 신분증엔 구멍이 나 있었는데, 

러시아어로 된 신분증 서명란에 쓰인 글자는 우리도 알아 볼 수 있었다. 

“리대혁”, “조철호”, “반국진” 

당시 우크라이나가 공개한 드론 카메라에는 러시아 부대의 군인 얼굴도 잡혔다. 

방탄 헬멧도 착용하지 않은 군인의 피부색과 얼굴이 우리에게 많이 익숙했다. 

북한이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전쟁 참전을 약속하고 특수 부대원을 대거 파견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무력하게 죽었다는 언론 보도를 접한 지가 벌써 몇 달 전이다. 

2022년 2월 시작해 3년 반이 지나는 동안 

수십 만의 사상자를 낸 이 전쟁이 대체 언제 끝날까?

현재 미국 주도로 종전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에 또 희망을 걸어보는 거다. 

 

2. 

전쟁은 저 북방 이야기만이 아니다. 

서쪽으로 곧장 가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에서도 전쟁이 있었다. 

2023년 10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전쟁이, 

한동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다가, 미국의 중재로 이제사 비로소 1단계 휴전 합의까지 갔다. 

  

3. 

한번은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하셨다. 

왜 이스라엘 땅에는 전쟁이 그치지 않는가? 

이런 이야기인거다. 

성지인데, 예수님이 태어난 땅인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거룩한 땅인데, 

그러니 가장 평화로워야 할 땅인데, 왜 거기에는 평화가 없는가? 

또 있다. 

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크리스찬들이 많은데. 

정말 그렇다. 러시아는 인구의 70%가 러시아 정교회다. 

우크라이나도 인구의 72%가 우크라이나 정교회. 85%가 기독교인. 

러시아도, 우크라이나도 상당수 국민들이 정교회 교인이다. 

정교회는 일찌감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11세기 로마교회로부터 분리된 교회.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성경을 정경으로 삼는 기독교의 한 종파. 푸틴도 러시아 정교회 교인이다. 

지금 총을 들고 싸우고 있는 러시아 사람도, 우크라이나 사람도, 

상당수가 크리스찬이라고 소개한다.  

근데, 이들이 왜 끔찍한 살상이 일어나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가? 

그분은 제게 이런 말씀까지 하셨다. 

“이스라엘과 러시아를 보면, 혹시 우리 예수님께 실패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평화를 만드시는 데 실패하신게 아닌가?” 

 

 

4.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태어난 땅에 평화가 없고,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이들에게도 평화가 없다. 

우리 주님은 이 세계를 평화의 땅으로 만드는 데 실패하신 것인가? 

 

5. 

전 그 때, 그분께 짧게 이렇게 말씀을 드셨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났던 땅에도 지금 예수님이 필요하고, 

예수님을 섬기는 이들에게도 지금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6. 

예수님이 태어난 땅이라고 해서 예수님이 계신 게 아니다. 

베들레헴, 예수님의 탯줄을 끊었던 땅.  

갈릴리,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먹이셨던 땅.  

예루살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땅이라고 해서 지금 예수님이 계신 게 아니다.  

몇 년 전,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묘지가 있었다는, 지금의 성묘교회를 들렀을 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시신을 뉘었던 장소라 하며 바닥에 판판한 돌이 깔려 있었다. 

근데. 그 평평한 땅바닥은 맨질맨질 했고, 사람들이 하도 손을 대서 반짝 반짝 광이 나고 있었는데. 

제 앞에 있던 어떤 여성은 그 바닥에 엎드려 자기 얼굴을, 자기 볼을 그 윤이 나는 바닥에 댔는데.  

그 모습은 무척 숙연했고, 인간적으로 애틋해 보이기도 했다. 

그럼, 거기서 그녀는 주님을 만났을까? 

평화의 왕을 만나, 그녀에게 평화가 깃들었을까? 

사람과 하나님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 달려 돌아가시고, 

그 다음 내려진 자리. 

그 땅에 엎드려 내 얼굴을 댔다고 해서, 예수님의 향취를 맡았을까? 그분을 느꼈을까? 

그 땅이 그녀에게 평강을 주었을까? 

 

7. 

그렇다면, 우리 주님을 구주로 부르는 이들에겐 예수님이 계실까?

“당신 종교가 뭡니까?” “예, 저는 기독교입니다.” 

이렇게 내 종교가 기독교라고 밝히는 이들이라면,  

또 매주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이들이라면, 그들에게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하실까?

예수께서 그들 곁에 평화의 왕으로 계셔서, 그들이 세상에서  평화의 사람이 되는가? 

그 자신이라도 마음의 평안을 느끼는가? 

 

8. 

중요한 건, 바로 지금 그들에게 예수님이 계신가이다.

바로 거기 사람이 죽고 다치는 전장, 그 처참한 땅에, 지금 예수님이 계신가이다.  

아니다. 이미 예수님은 계신다. 

그들에 곁에도, 또 포연이 가득한 그 땅에도 예수님이 계신다. 

그 땅이 예루살렘, 성지여서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 

거기 세례 받은 군인들이 많아서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  

그곳이 고통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울부짖고, 절규하고, 죽고, 다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대체 여기에 희망이 있는가, 물으며 체념하는 곳이기에, 예수님께서 계신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그런 곳에 계셨고, 

마태복음 25장 양과 염소의 비유 같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도 그들과 함께 계신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저 유대 땅,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이 일어나는 땅에도, 

저 북방,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맞붙은 곳에도, 이미 우리 주님께서 계셨던 거다.  

저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는, 

세계의 고통 속에, 불의와 폭력이 자행되는 곳을, 

당신의 형상들이 울부짖는 곳을 외면하실 수가 없으셨던 거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거기에 계셨다. 

 

9. 

그러나 더 중요한 게 있다. 

주님이 계신가 아니라, 그 땅이, 또 거기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들이 그분을 필요로 하는가다. 

주께서 거기 계시는데. 저 성지 이스라엘에 있는 이들이 진정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가?

또 주일이면 예배당에 출입하다가 전쟁터로 불려진 이들이 

거기 계신 주님을 필요로 하는가? 그러니까 지금 그들이 진정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가?

실은 이 말은 틀렸다. 

제가 그날 그분에게 해드렸던 말, 

“그래서 거기에도, 그들에게도 지금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틀린 말이다. 

제가 단어를 잘못 골랐다. 필요하다니. 예수님이 필요하다니?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하면,  

전쟁을 하기 위해서 무기가 필요하듯, 용병이 필요하듯, 

전쟁을 위해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 같다.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예수님이 어떤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 도구 같아 보인다. 

아군의 사기를 진작하고, 전쟁의 공포를 없애고, 승리를 보장받기 위해서 

그러니까 그들이 진정 바라고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의 안녕을 위해, 그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저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중요한 건, 그 땅이, 그들이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가입니다.” 

거기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바라볼 뿐 아니라, 거기 계신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분으로 섬기며, 

그분을 따라갈 수 있는가 이다. 

전쟁을 왜 해야 하고, 승리를 위한 전술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지만, 

‘여기서 이기는가, 패하는가’에 따라 경제적인 이익과 손실이 어느 정도인가 헤아리고,  

사람들을 포섭하고, 시민과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정치적인 셈법도 필요하지만.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 

우리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 

짚어보고, 따져보고, 셈해보는 게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시급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우리의 왕, 우리가 청종해야 할 분으로 모시는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다른 소리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말씀,

그 말씀을 판단의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가? 그 말씀에 나를 치고 복종시킬 수 있는가 하는 거다. 

‘주님은 우리 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 편이 되는 것.’  

‘주님더러 우리를 따르셔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 

주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왕되신 그분을 따르는가다.  

중요한 건, 지금 그들이, 지금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가다.  

 

10.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 예수님은 실패하신 적이 없다. 

우리 예수님은 한 번도 실패하신 적이 없다.  

지금껏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평강을 주셨으며,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통해, 또 그 공동체를 통해서 평화를 이루셨다.  

사람의 뜻대로가 아니라 그분의 뜻대로, 

사람의 속도대로가 아니라 그분의 속도대로 평화가 오게 하셨다. 

 

11. 

벌써 몇 해 전, ‘한반도평화연구원’이라는 한국교회 싱크탱크에서 “반평화”

그러니까, 평화의 반대. 평화를 위협하는 반평화를 주제로, 포럼을 한적이 있었다. 

제가 거기서 매우 인상깊은 발제를 들었다. 

당시 모대학 법대 교수로 계신 분께서, 평화를 위협하는, 반평화로 ‘쉬운 평화’를 들었다. 

평화가 쉬운 것처럼, 평화가 금방 속히 도래할 것처럼 여기는 것이 오히려 평화를 저해한다고. 

이분이 이야기 한 건, 어려운 평화였다. 평화는 쉽지 않다. 

언제 어떻게 올지 헤아리지 못한다. 그게 맞지 않는가?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함께 기도했다. 

부르짖어 기도했다. 부르짖어 기도하다보니, 금방이라도 전쟁이 끝날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저 세계가 저렇게 통곡하고 아파해도, 역사는 우리 생각처럼 가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분께서 역사를 이끌고 가신다는 거다. 

근데 그분이 역사를 어디로 향하게 하신다는 거다. 어디로? 평화로!  

평화의 왕께서는 평화의 왕을 따르는 자를 통해서, 

좀 더딜 지 모르지만, 당신의 평화를, 당신의 계획대로 이루어가시는 거다. 

 

 

12.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바로 그 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그 밤, 

저 들 밖에서 양 떼를 치는 목동들이 들은  앞에 천군 천사의 노랫소리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있다. 

근데, 평화가 누구에게나 다 있다고 하지 않는다. 평화가 누구에게 있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13. 

그럼 묻자. 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인가? 

누가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인가?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하신 사람이 있다. 

누구?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며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내려올 때, 소리가 들렸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우리 하나님께서 누구를 기뻐하시는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왜 기뻐하시는가? 아들이니까. 맞다. 아들이니까. 

존재 자체로 기뻐하시는 게 맞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요한복음을 보면,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늘 아버지와 함께하길 원하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함께 하셨다. 아버지께서 기뻐하셨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14.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하길 원하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 

바로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평화가 되신다는 거다. 

그는 다른 어떤 일보다 예수님께 먼저 기도한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묵상하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묻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방식대로, 사랑으로, 평화를 추구하며 나간다. 

내 자신의 뜻과 야망, 다른 사람을 위한 명분을 생각할 때도 있겠지만,   

예수님이 평화이시고, 평화의 왕 되심을 믿기에, 

우리 주님을 뜻을 먼저 묻고, 그분의 뜻이라면 용기있게, 대담하게 발걸음을 떼는 거다.  

 

15. 

물론 어렵다. 

세상을 보면 어렵고, 적들을 보면 어렵다.  

특별히 국가의 부르심을 받아 전쟁에 참여해, 

나의 생존과 가족들의 안위와 국가의 존폐를 위해서 

적군에게 총구를 겨누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런 땐, 내 안의 평화라면 모를까, 

양 진영에, 이 땅의 평화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 일런지 모른다. 

이런 신앙적, 윤리적 딜레마 상황에 직면할 때가 오기도 한다. 

그러나 저는 믿는다. 

바로 거기서도, 적들 앞에 서야 하는 전장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들. 예수님의 가르침을 묵상하는 이들이 있다고.   

 

16. 

우크라이나 선교사님을 비롯해 여기저기서 전해오는 소식들을 들어가며, 

이런 장면을 떠올린다.  

전장에 간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교회에 모였는데. 

이들의 기도의 지경이 커지는 거다. 

내 가족의 안전도 안전이고, 내 편의 승리도 승리지만,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 말씀을 펴들고 그분의 뜻을 묵상하고, 세계에 평화를 구하는 모습을.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도, 이스라엘 전쟁도, 이 세계의 모든 대립과 갈등도,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왕으로 바라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을 오늘도 묵상하고,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나를 내려 놓는 이들로 인해 끝나게 될 거다. 

이 땅의 평화가 임하기를 바라며, 

우리 가족과 아군들 뿐 아니라 저 상대편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들로 인하여,  

바로 이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로 인하여, 우리 하나님께서 결국은 선하게 매듭지으실 거다. 

 

17. 

전쟁이 그치지 않는 저 북방과 서방 뿐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혼란에 직면한 그 어떤 땅에서라도, 

지금 예수님이 필요하다. 아니,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필요하다. 

혼란을 가중시키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예수님이 땅에 평화를 주시는 분임을 믿기에, 

매일 매일 먼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부터 바라보는 이들!

아군의 전략과 적들의 전술을 청취하기에 앞서, 

지금 여기 계신 예수님을 예배하며, 

오늘 우리를 향한 뜻, 평화의 왕되신 예수님의 뜻부터 묻는 이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맞게, 적어도 오늘 하루 사랑으로 가기로 결정한 이들. 

이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통해, 평화의 주님이 일하실 거다. 

결국 그들로 인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평강이 임할 것이다. 

 

18. 

전 서울 대학로에 있는 가톨릭 재단이 세운 중학교를 다녔다.  

제가 이 학교에 입학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강제로 외운 게 있다. 

졸업할 때까지, 학교의 거의 모든 행사때마다 빠지지 않고, 전교생이 함께 외웠던 것. 

그렇게 수백번을 해서, 당시 그 학교 졸업생이라면 죽을 때까지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 

사회를 맡은 선생님은 늘 이렇게 순서를 알렸다. “기도” 

그리고 먼저 선창을 하시는데. 이렇게.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그러면 우리는 한목소리로 이렇게 암송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이렇게 이어지는 기도. 

아직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12세기,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이다.

 

19. 

우리 주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누구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바로 우리에게. 

먼저 우리 주님께서 이 자리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축복한다.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시어, 

주님의 평화에 동참할 수 있기를 축복한다. 

평화의 왕 예수님께서는 결코 실패하시지 않는다. 

 

(기도)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고 찬양합니다. 

이 세계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일어나게 하시어, 

그들로 이 세계에 평화를 이루시는 우리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하옵소서. 

나아가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한기윤의 연구위원인 강영롱 목사는 고려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와 문화”로 박사 학위를 하였다. 소망교회에서 부목사로 지내며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출강하다가 2021년 4월부터는 대구에 있는 삼덕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