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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결성의 시대, 과학기술은 왜 이렇게 빠를까?

뉴욕시립대 교수이자 미래학자인 미치오 카쿠는 “오늘날 과학의 속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고 말합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널리 알린 클라우스 슈밥도 “이번 혁명은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빠르고, 더 넓게, 더 깊게 퍼질 것”이라고 했지요. 이 두 견해가 나온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하지만 그 뒤 등장한 ChatGPT와 최신 AI 기술은 전문가조차 예측하기 어려운 속도로 세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서로 떨어져 있던 학문과 기술을 AI가 다시 엮어 주며 ‘융합의 가속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원격의료, 자율주행, 스마트 팩토리처럼 사람과 사물,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얽히고 연결되는 초연결(hyperconnectivity) 사회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2024년 노벨 물리학과 화학 상 수상자들이 AI 연구자라는 사실은 인공지능이 각 영역에 얼마나 깊에 침투해 있고, 이를 연결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초연결 기술 사회는 분명 우리에게 이전보다 훨씬 많은 편리와 혜택을 안겨 줍니다. 그러나 그 편리 뒤에는 단순한 ‘적응’을 넘어 ‘저항’이라는 과제도 숨어 있습니다. 기술철학자들의 음성을 빌리지 않아도, 기술은 언제나 도구에 머무르지 않고 대가를 요구하곤 합니다. 21세기의 기술은 속도와 방향 모두가 우리의 예측을 넘어서고 사람들을 불확실과 불안의 자리로 밀어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외침처럼 하나님의 지혜와 분별을 더욱 갈망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15-16)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술을 맹목적으로 좇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기술을 풍성히 발전시키고 책임 있게 활용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

 

그리스도 만이 온전히 연결하신다

에베소서는 그 시작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모두 통일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합니다(엡 1:9–10). 기술적 초연결성이 핵심 이슈가 되는 시대를 살아야하는 교회는 이미 시대를 초월한 놀라운 초연결성에 관한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어떤 예측 불가능성의 혼란 속에서도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엡 4:14) 우리의 걸음을 붙들어줍니다. 오늘 본문(에베소서 4:13-24) 속에서 그 부르심에 대한 두 방향의 응답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보낸 에베소는 당시 로마 제국의 아시아 속주 수도로서 해상 교역, 도로망, 금융이 집약된 정치, 종교, 문화, 상업적 교류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 이상 컸던 아르테미스 신전은 고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였습니다. 또한 대극장, 경기장 등은 당대 세계 최고 기술들이 구현해낸 결과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기간의 반 이상이 되는 3년 가까운 시간을 머물렀던 에베소는 고대판 ‘초연결 도시’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연결성의 중심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우상 숭배와 바벨탑의 야망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초연결성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엡 4:17)과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함’(엡 4:19)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런 모습들이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 감각 없는 자됨의 증상들인데, 그 근본 문제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엡 4:18).

이 경고를 오늘날 우리 시대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말씀은 발전된 기술 덕분에 사람과 사람, 사물, 데이터가 놀라운 방식과 속도로 연결된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우리 존재와 삶의 질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오히려 초연결망을 통해 양산, 확산되는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지적, 정서적 성장을 저해합니다. 즉각적인 감각적 만족을 충족시켜주는 자료들에 접속할수록 감각 없는 자처럼 되어갑니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이 심화되어갑니다. 최신 기기와 기술을 통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사람은 최첨단의 초연결성 속에서도 여전히 ‘옛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편향된 알고리즘에의 반복적 노출과 증가되는 에코 챔버 효과와 필터 버블 현상은 연결을 통한 연대가 아니라, 연결을 통한 단절과 고립이 심화되는 역설적으로 사회의 극단절 분열을 심화시킵니다.  

 요즘 일어나는 기술 혁신인 인공지능(AI), 유전공학과 나노 기술이 접목된 생명 공학, 휴머노이드 로봇 기술은 인간의 지식과 지능, 신체적, 물리적 한계 너머로 인간의 역량과 생명력을 증진시켜주리라 기대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근본 정체성과 하나님의 뜻에 붙들리지 않은 인간의 욕망과 추구는, 결국 허물어지고 말 아데미 신전을 세웠던 에베소의 기술과 욕망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기술적 초연결성에 한없이 긍정적 기대가 계속되면, 결국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가 보여주듯이 인간성의 해체로까지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데이터 종교(Dataism)의 부상을 언급하며, 이 새로운 종교는 정보의 흐름을 절대가치로 삼고, 인간은 단지 이 흐름의 매개자라고 진단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그저 만물인터넷을 창조하는 도구이며, 만물인터넷은 지구에서 은하 전체, 나아가 우주 전체로까지 확장될 것이다. 이 데이터 처리 시스템은 마치 신과 같으며, 어디에나 존재하고 모든 것을 통제할 것이다.”[1] 하라리의 전망은 하나의 가상적 시나리오에 불과하지만, 이미 오늘날의 기술은 인간의 자유와 정체성, 의미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획기적으로 새롭고 편리함을 주는 기술과 그 적용의 결과물들에 익숙해지는 과정들 속에서도 인간의 정체성과 방향성은 길을 잃고 표류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나침반 삼아야 합니다(엡 4:24).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이기에 그 형상의 원형이신 예수님 안에 그 모든 것들에 관한 진리가 있음을 믿고 그에게서 듣고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충돌되고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나는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담대히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엡 4:20-21). 

하늘 보좌에서 이 땅으로 성육신하사 하늘과 땅의 초연결성을 실현하신 예수님 안에 가장 완전한 기준과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 있습니다. 그분만이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전에 멀리 있는 우리를 당신 안에서 한 몸으로 가까워지게 하사 참된 초연결성을 이루십니다.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성전이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이 영광스러운 초연결성을 통해 부여, 확인되는 정체성과 사명에 충실할 때 가장 소중한 것을 상실하는 문제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

교회는 기술의 초연결성이 제공해주는 정보와 영향력 중에서 부정적일 수 있는 것들을 소극적으로 피하고 벗어나는 것을 넘어서서, ‘옛 사람’을 벗어 버릴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최첨단 기술들이 실현해주는 초연결성이 그 자체로 궁극적 선을 실현해줄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 한편으로는 과학기술에 대한 지나친 거부감, 불신, 무관심에 빠지는 지나친 반작용도 벗어나야 합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기술들과 그 결과물들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야 할 대상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씨름을 감당함에 있어서 특별히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실, 만물의 머리이심을 확신함과 동시에 교회가 각기 다양한 은사와 지체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보좌에 좌정하시되 당신의 몸인 우리도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엡 2:6)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땅에 부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영과 은사를 받은 새 몸, 교회를 통해 통치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교회는 만물을 통일(초연결)하실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연결되어있으되 그분의 몸을 함께 이룬 지체들과의 초연결성 속에 있습니다. 사도신경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우리는 교회가 오직 하나의 보편 교회로 존재함을 믿고 선포합니다. 이 고백의 실제화, 즉 통시적, 공시적 전체 교회의 초연결성이 확인되고 활용되는 것이 오늘날의 영적 씨름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인 과학자

과학기술과 그 성과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될 대상들로 바라봄에 있어서 상당한 불편함이나 무력감이 교회 안에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과학과 기독교는 충돌한다’는 통념[2]이 오늘날까지도 대중 담론 속에서 광범위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충돌 모델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로는 ‘존 윌리엄 드레이퍼(John W. Draper)’와 ‘앤드루 딕슨 화이트’(Andrew D. White)가 있으며, 이들은 19세기 말에 과학과 신학이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3]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오늘날 대다수의 과학사 및 종교사 연구자들에 의해 과도한 단순화와 역사 왜곡의 요소가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중 문화나 언론에서는 ‘과학은 진보, 종교는 억압’이라는 식의 이분법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버트 K. 머튼(Robert K. Merton)이 제시한 이른바 ‘머튼 명제’는 과학기술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관계를 보다 입체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유할 수 있는 선구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머튼은 17세기 영국 과학의 눈부신 발전이 청교도적 윤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과학 발전의 동력으로서 신앙의 기여를 강조했습니다. 이는 마치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가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말한 것처럼, 기독교 신앙이 과학적 활동의 동기를 제공하고 윤리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을 뒷받침합니다.

하지만 20세기 초 머튼 명제는 과학계로부터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는 과학계가 종교의 후원이나 승인 없이도 자율성과 권위를 지닌 독립적 권위로 자리잡은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종교의 권위 아래에 있었던 과학기술이 이제는 종교보다 더 강력한 사회적 권위와 영향력을 지닌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시대 흐름의 변화라기보다는, 기술과 과학이 그 자체로 근대 이후 인간의 새로운 신적 권위가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후 머튼은 과학사회학의 창시자이자 중심 인물로 재조명되었고, 그의 명제 또한 비로소 과학기술의 사회적, 윤리적 조건을 조망하는 시금석으로 재평가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과학에 대한 메타적 성찰이 자리잡는 과정이었고, 맹목적인 과학 신뢰에 대한 균형 있는 시각의 회복이었으며, 과학기술이 더 이상 여타의 사회적 활동과 동떨어진 ‘절대적 진리의 대리자’가 아님을 인식하는 성숙의 계기였습니다.

따라서 머튼 명제를 통해 우리는 과학기술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역사적 연대와 협력의 가능성을 회복할 수 있으며, 동시에 오늘날 기술 권위의 우상화에 대한 분별과 반성의 지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과거에도 과학기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앞으로도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책임 있는 청지기 정신을 바탕으로 과학기술을 통합적이고 윤리적으로 조율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앞선 시대의 성도들이 남긴 흔적들에 연결되고 보면 이런 편협되고 왜곡된 관점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4]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을 위한 통시적, 공시적 동역 모델

지난날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볼수록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이 얼마나 다양하고도 풍성하게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다양하고 풍부한 공급을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과학혁명기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프란시스 베이컨이 쓴 유토피아적 소설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 이상적 국가로 제시되는 ‘벤살렘(Bensalem)’에 있는 일종의 연구소, ‘솔로몬의 집(Solomon’s House)’에서 제시되는 이상적 활동의 모습은, 오늘 본문 16절을 반영하는 지체들의 협업을 보여주는 연구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과학과 기술이 전문화와 분업화를 통해 협업과 융합적 발전을 이루어오는데 성경적 세계관과 신앙인들이 많은 역할을 감당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루어져갈 과학과 기술의 발전 역사 속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머리되신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은사와 사명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 영역에서 선한 청지기로서의 열심을 나타내는 것이 적극적으로 권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시대 한복판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했던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 속에도 하나님께서 통시적, 공시적 연결성을 중히 여기심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공개적인 신앙 대결을 벌여 하나님이 참되신 분이심을 온 이스라엘 앞에 증거했지만, 그 승리의 기세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굳건한 아합과 이세벨의 위협 앞에서 엘리야는 낙심하고 하나님 앞에 죽기를 구하는 처지에 이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엘리야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시며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연대를 이루어 감당할 사명을 주십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동역자 엘리사를 세우게 하시고,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7천 명의 신실한 동역자들이 여전히 시대 속에 남아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시대의 거센 흐름을 거슬러 사명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결코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초연결성’ 안에서 ‘새 사람’을 덧입어야 합니다.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의 사역도 이 시대 속 하나님 나라 초연결성의 한 지점으로서, 어딘가에서 신실하게 씨름하고 있는 수많은 이 시대의 ‘7천 명’ 동역자들에게 격려와 위로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속도로 발전하는 기술 문명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그 기술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피조세계를 섬기는 도구가 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인간의 정체성을 왜곡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 현실은 우리에게 깊은 우려와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일수록 더욱 분명히 확인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이룬 지체들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진정한 초연결성 안에 부름받았습니다.

그 연결 속에서 우리는 각자에게 맡겨진 은사와 자리에서 충성하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야 합니다. 내 자원과 경험만으로는 너무 미약하지만, 교회는 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방식으로 연대하고 협력할 수 있습니다. 바로 성령 안에서, 진리와 사랑으로 한 비전을 품고 자라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벨탑의 허망한 연대를 무너뜨리셨지만,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셔서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이들을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 날 교회는 참된 초연결성, 곧 ‘하늘의 의사소통과 연대’라는 새로운 현실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정보의 연결이 아니라 사랑의 연결, 단지 데이터의 통합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의 연합이었습니다.

이 은혜의 초연결성은 인류 역사상 그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하늘의 실재와 영원한 가치를 지닌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오늘 우리는 다시 초대받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새 사람’으로서, 영원한 공동체의 일부로 살아가라고.

 

진리로 연결된 초연결성과 영원한 공동체, 교회

기술이 약속하는 미래 사회는 실로 눈부십니다. AI, 생명공학, 만물인터넷의 결합은 이전 세대가 상상할 수 없었던 수준의 초연결성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기술이 제공하는 연결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하며, 때로는 인간성을 해체시키는 방향으로 흐르기도 합니다. 그에 반해, 우리가 부름받은 연결은 ‘영원한 초연결성’입니다 —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지체된 몸의 연합 안에 실현되는, 하늘과 땅, 시간과 영원을 아우르는 거룩한 연대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더 많은 연결’을 통해 ‘더 큰 성취’를 갈망하든 혹은 ‘더 큰 소외’를 경험하고 있다 하더라도,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참된 연결, 사랑의 연합, 성령의 교통 안에 거함으로써 그 시대의 한계와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는 선언은 단지 교회 조직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존재론적 선언입니다.

우리는 기술의 수혜자일 뿐 아니라, 그 발전의 중요한 동역자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술과 문명이 종국에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의미와 목적을 가질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기술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 — 하나님 형상의 영광,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어진 ‘새 사람’의 정체성 —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더욱 빛나야 할 진리입니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다만 고르게 분포되지 않았을 뿐이다.” 첫 장편 SF소설이자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단어를 널리 알리게 된 작품, 『뉴로맨서(Neuromancer)』의 저자인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의 이 말은 교회에 더 깊은 함의를 던집니다. 기술이 예견하는 미래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미래는 이미 성령 안에서 오늘 우리 안에 임해 있습니다. 그 나라는 결코 인공지능이 설계하거나 조작할 수 없고, 오직 믿음과 사랑 안에서만 드러나는 거룩한 초연결성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키며 각자의 은사와 사명으로 충성합시다. 기술 사회의 초연결성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초연결성을 드러내는 사명에, 낙심치 말고, 그리스도의 몸된 연결 속에 혼자가 아니라는 진리를 붙들고 다시 일어섭시다.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시고, 허물로 죽었던 우리도 그 안에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덧입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 능력과 지혜로 오늘도 우리를 통해 기술의 시대를 품고 감당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초연결성을 드러내고 선포하게 하십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굳게 연결된 ‘새 사람’된 성도 여러분, 기술이 빚어내는 초연결성의 시대 속에서도 진리를 따라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며,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충만함을 이 땅에 드러내는 영원한 공동체로 동역해 갑시다.


각주

  1. 유발 하아리, 김명주 옮김,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김영사, 2017, pp. 529–530.
  2. 최근에는 리처드 도킨스와 다니엘 데닛 등을 중심으로 강력한 무시론 운동으로 확산되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 외, 김명주 옮김, 『신 없음의 과학』(서울:김영사, 2019) 참조. 이런 도전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을 보인 책으로는 존 C.레녹스, 노동래 옮김, 『현대 무신론자들의 헛발질』(서울:새물결플러스, 2020) 참조.
  3. 과학과 종교(기독교)의 관계를 갈등, 충돌, 전쟁 모델로 제시한 대표적 두 인물, 존 윌리엄 드레이퍼(John William Draper)와 앤드루 딕슨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가 19세기 말에 쓴 책들(『The History of the Conflict between Religion and Science』, 1974, 『A History of the Warfare of Theology with Science』, 1896)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적 입장을 담은 논문들을 묶어 펴낸 아래의 책 참조. David C. Lindberg & Ronald L. Numbers (eds.), God and Nature: Historical Essays on the Encounter between Christianity and Scienc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6).(지금은 절판되었으나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출판한 “신과 자연”이란 제목의 상,하권 번역본이 존재)
  4. 과학기술의 발전상을 누적적인 점진적 성취로 보는 관점(현재의 이론과 기술 속에 과거의 옳고 유용한 버전이 모두 담겨있다고 간주하여, 과거를 극복되고 폐기된 것들의 역사로 간주)을 벗어나서, 그 발전상을 패러다임이 겪는 혁명적 변화로 보는 토마스 쿤의 입장을 따르면 과학기술 역시 과거와의 통시적 연결성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더 나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도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과학기술의 발전상을 있는 그대로 살펴봐야 한다는 ‘토마스 쿤’의 입장(『과학 혁명의 구조』 참조)은 교회에게는 더욱 필요한 태도입니다.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철학 부전공) 고려신학대학원 신학석사(M.Div)과정을 졸업한 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97년부터 2011년까지 서울영동교회와 샘물교회에서 청년사역을 담당하다가 2012년 좋은나무교회를 개척하여 지금까지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2006년부터는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과학철학 전공으로 석,박사통합과정을 수료하였다. ‘총체적 진리를 총제적 삶으로 실천하는 주님의 몸된’ 좋은나무교회에서 안으로 ‘기드온의 삼백 용사’를 세우고 밖으로는 ‘엘리야의 7천 동역자’와 협력하는 사역을 위해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