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성경본문: 엡 2:11-18; 롬 14:1-4; 15:7

들어가며

한 선생님이 AI시대에 맞게 융합과 소통의 인재를 키우는 교육을 하겠다 결심하고, 아이들의 창의적 역량과 협업 능력을 기르기 위해 모둠으로 과제를 수행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공부 잘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왜 열심히 공부한 내가 공부 못하는 저 아이와 똑같은 점수를 받아야 하느냐는 불평이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협업하고 소통하는 게 진짜 공부라고 말해줘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이미 사회의 경쟁 논리를 체득한 것입니다. 기껏해야 대여섯 명의 모둠 안에서도 협업과 융화가 어려운데, 더 큰 조직과 사회, 나라는 오죽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는 다른 생각과 성향을 지닌 사람들과 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자기와 생각이 조금만 달라도 날을 세워서 비판하거나, 아예 멀리하고 절교합니다. 정치 성향, 경제 수준, 교육 정도, 개인 취향에 따라 자기들만의 클럽을 만들어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심지어 인격적으로 모욕하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특히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견제하면서도 선의로 경쟁하고 협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는 우리에게 소망의 빛을 던져줍니다.

오늘 성경은 ‘새로운 인류’의 등장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2천년 전 가장 이질적 집단이었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인종과 문화,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장벽을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융합된 한 ‘새로운 인류’(New Humanity)를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인종, 정치, 이념, 문화적 차이로 인한 대립과 반목을 뛰어넘는 초이념적, 초융합형 인류 공동체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로서 우리의 정체와 사명을 조명하고, 갈등과 반목이 깊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가까워진 새로운 인류

먼저, 교회는 모든 장벽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가까워진 새로운 인류입니다. 본문 11절에서 바울은 이방인에게 일어난 놀라운 반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여기서 “너희”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는 부정하고 불경하고 근본 없는 인간들이라는 이방인에 대한 경멸의 표현입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의 약속, 축복, 구원에서 배제된 저 멀리 괄호 밖의 존재였습니다. 12절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의 5중적인 소외를 말합니다. 그들은 1)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2) 선민 이스라엘이 가진 특권에서 소외되었고, 3) 믿음의 조상들에게 주신 언약과 상관없는 외부인이고, 4) 하나님도 없었고, 5) 아무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1]

1세기 로마 제국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 간의 장벽은 절대 허물 수 없는 견고한 벽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으로 가득해서 이방인들을 적대시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고 있지만 메시야가 오면 저 불경한 이방인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며 이를 갈았습니다. 이방인의 관점에서는 유대인처럼 골치 아픈 종족이 없습니다. 나라는 망한 주제에 자존심은 높아서 다른 민족과 섞이지도 않고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칩니다. 그러면서 학문, 상업, 기술 각 분야에서 너무 뛰어나니까, 한편으론 얄밉고 한편으로는 두렵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대립은 아마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적대감일 겁니다. 오늘날 중동에서 일어나는 이스라엘과 주변 나라들의 갈등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뿌리 깊은 장벽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런데 원수였던 그 둘 사이에 천지개벽할 반전이 생깁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13절) 여기서 이제는 앞선 11절과 12절의 그때와 대조됩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멀리있던 너희 즉 이방인들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예수 안에서 가까와졌다는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에서 소외되었던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수직적 화평). 원래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있는 특권은 오직 선민 이스라엘만이 가졌던 특권이었습니다(신 4:7).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멀리 있던”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에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원수였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적대감이 사라지고 “평화”가 임합니다(수평적 화평). 그리스도께서 그 둘 사이에 가로막힌 벽(담)을 허무셨기 때문입니다(14절). “중간에 막힌 담”이란 분리와 적대감이란 상징적 의미도 있지만, 실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던 예루살렘 성전의 벽입니다. 성전은 성소/지성소를 중심에 두고 제일 가까운 곳에 제사장의 뜰이 있었고, 성전 동쪽에는 이스라엘 남자들만 머무는 뜰, 그 바깥에 여인들의 뜰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한 레벨 아래 장벽으로 둘러싸인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성전을 우러러볼 수는 있지만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 장벽 사방에는 이방인은 이 담을 넘어가면 죽는다라는 경고문이 있었습니다. 이 벽은 이방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민으로부터 소외된 존재라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셨습니다(14절). 이방인이 경멸을 받았던 것도, 유대인들이 자부심을 가졌던 이유도 모두 “육체로” 인한 것이었습니다(11절). 이에 대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육체로” 그들 사이의 모든 장벽과 차별을 소용없게 만드신 것입니다.[2]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도 폐하셨습니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이란 할례법, 정결법, 음식법 등과 같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던 의식법(ritual laws)입니다. 이런 율법 규정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방 민족과 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하던 모든 법조문을 폐하셨습니다. 둘을 구분했던 법의 효력이 사라지면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배제와 소외, 분리의 담도 소용없게 되었습니다.[3] 그로 인해 멀리 있던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가까워졌습니다. 서로 분리되어 있던 둘이 하나가 되고, 원수였던 둘이 평화를 이루는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인간의 협상이나 평화 조약으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로 막힌 담을 허무심으로써, 분리와 적대감을 허무시고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가 평화가 되셨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무너지기 어려운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을 그리스도께서 무너뜨리셨다면, 오늘 우리가 직면한 다른 장벽도 그리스도 안에서 무너질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무너뜨리신 인간적 담을 우리가 다시 세우지 말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무너뜨리신 인간적 담을 우리가 다시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인간적 우월감”을 버려야 합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 사이에 담이 견고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선민이라는 우월의식이 있었고, 이방인들은 지배자라는 우월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월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폐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육체를 찢으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육체적인 조건이 무의미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는 인간의 조건이나 배경이나 성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보다 낫다고 우월의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반대로 내가 남보다 못하다고 열등의식을 가질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 5:17).

목회자로서 저는 교회에서는 정치 이야기를 피하도록 당부를 합니다. 그래도 교회 안에서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표현을 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분들 중 다수가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 성향의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착각하고, 상대방 진영의 약점과 흠집을 부각합니다. 이전 진보적 성향의 중년 엘리트 지식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얼굴이 너무 밝아서 제가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 물었습니다. 대답이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어주셔서 특정 후보를 당선되게 해서 기분이 너무 좋다’는 겁니다. 그분은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 진영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이 지나치게 강했습니다. 나중에 그분은 타종교로 개종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지지하는 쪽은 ‘절대 선’이며 반대쪽은 ‘절대 악’이라는 대결 구도로 서로를 판단합니다. 하지만 선과 악의 경계는 ‘나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성도 여러분, 죄는 분리를 만들고, 우월의식은 서로에게 담을 만듭니다. 세상 정신은 우리의 어떤 인간적인 면이 우리를 다른 사람보다 의롭게 만든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는 서로 다른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워지게 하여 더 큰 우리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참된 평화가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평화를 갈망하지만. 평화를 만들고 지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와 평화가 되신다는 진리가 여전히 우리의 유일한 위로이고 소망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죄로 인한 분리와 우월의식으로 막힌 담을 무너뜨리고,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화를 전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융합된 새로운 인류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로막던 담을 허무시고, 법조문을 폐하신 하나님은 이제 새로운 창조와 건설 작업을 하십니다.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15절b).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융합되어 새로운 인류로 창조되고 평화가 조성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 새 사람(One New Humanity)이란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둘이 결합된 제3의 종족, 새로운 인류 공동체입니다.[4] 유대인과 이방인의 반목은 너무 뿌리가 깊고 오래된 반목이라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 둘 사이에 완전히 새로운 결합, 새로운 융합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16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는 먼저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의 죄를 소멸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하게 했고, 이방인과 유대인을 원수로 만든 율법의 조문과 인간적 공로와 자랑을 무너뜨리심으로 이 둘의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이제 반목과 대립은 사라지고 진정한 화해와 평화가 가능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만드신 “새롭게 융합된 인류”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까? 17절은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다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가 “가까운 데 있는 자들” 즉 유대인뿐 아니라, “먼 데 있는 너희” 곧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52:7에서 평화의 소식을 전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했던 선지자적 꿈의 성취입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이 평화의 복음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향해 전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놀라운 일이 이루어졌습니다(18절). 과거 철저히 소외되었던 이방인들도 동등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고 가족이며 상속자가 되었습니다(19절), 원수였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제 서로 가까워진 정도를 넘어, 한 아버지께 나아가는 가족 공동체가 된 것은 오랜 인류가 소망해온 이상의 성취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대립으로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세상의 정치에 영향을 받아 교회도 좌우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평화의 복음이 1세기 교회 공동체에 있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반목과 갈등을 치유했다면, 21세기 한국 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반목과 대립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평화의 복음을 우리에게 적용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최고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최고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조차 보수와 진보가 갈라지고, 세대가 대립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정체성의 근원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상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이념의 문제를 절대적 진리의 문제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1세기 당시 정치적 우파에 해당되는 헤롯당에도, 정치적 좌파에 해당되는 바리새파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정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셨습니다. 성도는 정치 성향이 아니라 복음과 신앙고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서로 출신과 배경과 성향이 다른 사람들이 만나면 싸우고 헐뜯고 담을 세웁니다. 그러나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장벽과 담이 무너지고 ‘새로운 인류’로 하나가 됩니다. 세상은 진보냐 보수냐, 지식인이냐 노동자냐, 남자냐 여자냐, 젊은 세대냐 노년 세대냐, 끊임없이 인간적인 조건으로 분리하고 적대시하고 배제하지만,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하나만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그 둘의 차이를 없애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좋은 점을 다 없애고 이방인처럼 만든 것도 아니고, 이방인들을 유대인으로 개종시킨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 후반에서 율법과 음식으로 서로 반목하던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향해 권면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1, 3). 작년 가을 교회에서 <인생회고학교>를 할 때였습니다. 10주간 소그룹 모임에서 70이 넘는 어른 세대와 30~50대 젊은 세대들이 함께하는 자리였습니다. 그중 제가 강단에서 좀 더 “보수적 목소리”를 내어 주기를 은근히 바라셨던 어른이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태극기 부대” 중 한 분으로 인식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인생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어린 시절 6.25를 겪었고 청소년 시절 4.19 시위 때 나섰다가 총상까지 입으시면서 인생의 어려움을 극복하셨고 이 사회와 나라에 크게 기여하신 분이셨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미래 세대를 사랑하는 그분의 진심을 제가 주 안에서 받기로 했습니다. 저뿐 아니라 함께한 젊은 청년들 역시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치적 성향을 뛰어넘어, 윗세대가 살아온 인생 여정 자체를 진지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끌리고 다른 부류의 사람을 밀어내는 배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소외되고 멀리 있던 이방인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큰 은혜를 힘입었다는 것을 알면, 우리도 주 안에서 다른 사람을 맞이하고 가까이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15:7). 만약 내가 진보적인 성향을 가졌다면 보수적인 성도들을 먼저 주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로 받아야 합니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다면 진보적인 성도들을 주 안에서 형제자매로 먼저 받으셔야 합니다. 제가 자주 만나는 친한 분들 중에는 진보도 있고 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 성향이 다르다고 서로를 원수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서로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의 의견을 경청합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젊은 세대는 정치 논리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전쟁의 참상과 극한 가난과 싸웠던 산업화 세대 어른들의 상처와 아픔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하는 노년 세대의 중심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폄하하지 말아야 합니다. 노년 세대는 자기 세대의 내면에 있는 집단적 상처와 두려움을 주님께 맡기고, 아랫세대가 이 나라의 민주화와 국가 폭력과 싸워왔던 가치를 평가절하하지 말고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융합된 공동체를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각자 받은 소명과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각자 받은 소명과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정치를 소명의 영역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는 16세기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백성들에게 통치자에 대한 복종과 더불어 “백성의 관리” (magistratus popularis)의 저항권을 말했습니다(기독교강요, IV,20.31). 목회자는 먼저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목회적 소명 그 자체에 충실해야 하고, 그다음 공직이나 정치적 소명을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도록 말씀으로 지도해야 합니다. 만약 성도로서 여러분에게 정치적 소명이 주어졌다면, 겸손하게 섬김의 태도로 공공의 영역에 참여하고 특정 이념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정치적 분별을 구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 모두 각자의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바울은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14:4) 경고합니다. 우리가 주제넘게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설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를 세우든지 넘어뜨리든지 주인의 권한입니다. 최종적으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14:10). “우리가 다.. 모든 무릎…모든 혀”는 심판의 보편성을 말합니다. 서리라”(παραστησόμεθα), 무릎을 꿇는다(κάμπτω), 자백하다(ἐξομολογέω)는 심판대 앞에서 엄중함과 공정함을 표현합니다.[5] 우리 모두 하나님의 엄중하고 공정한 심판대 앞에서, 각자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직고할 날이 있을 겁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장 정확하게 우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맺으며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의 통치자이시고 삶의 주인이라는 진리에서는 결코 타협이나 물러섬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서로의 다름과 약함과 양심의 자유에 대해서는 존중과 사랑으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와 분별력을 항상 겸손히 구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가 비판보다, 내가 주님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해야 주님께 영광이 되고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에 비출 것인지, 각자의 부르심과 양심의 자유를 따라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주)

  1. 이방인들의 소외에 대한 자세한 주해는 Peter T. O’Brien, The Letter to the Ephesians (Grand Rapids: Eerdmans, 1999), 185-190. John Stott, The Messeage of Ephesians: God’s New Society (Downer Grove, Il: IVP, 1979), 정옥배 옮김, 『에베소서 강해: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 (서울: IVP, 2007), 115-18 을 참조.
  2. “중간에 막힌 담”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Antiquilies) xv. 11.5. 에 기록되어 있다. Clinton E. Arnol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Ephesians (Grand Rapids: Zondervan, 2010), 159-169 와 John Stott, 정옥배 옮김, 『에베소서 강해: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 (서울: IVP, 2007), 112-113 을 함께 참조.
  3. 칼빈은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구약의 할례법, 음식법, 안식법으로 규정한다. 고려신학대학원 길성남 교수는 “규정들로 이루어진 계명들의 율법”을 모세의 율법 전체로 해석한다. 길성남, 『에베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만물의 회복과 새 인류 (개정판)』 (서울: 성서유니온, 2016), 202-205. 어떤 해석이라도 “법조문으로 이루어진 계명의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허무셨다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4. 길성남 교수는 “한 새 사람”에 대한 몇몇 학자들의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제3의 종족”이라는 표현이 부적합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 새 사람”은 옛 사람 아담에게서 시작된 옛 인류와 대조되는 종말론적인 “새 인류”의 시작이자 ‘새 인류“ 그 자체로 본다. 굳이 설교문에서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함께 기술했을 뿐, 의미상으로는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종말론적인 새 인류이다. 길성남, 『에베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개정판)』, 205-206 참조.
  5. Thomas R. Schreiner.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Romans 2nd edition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8), 691-700.

 

배준완 목사는 청년들과 다음세대를 세우는 사역에 오랫동안 헌신했고, 현재 서울서문교회 담임목사로 세대와 세대를 잇는 사역에 힘쓰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수학(BS)과 철학(BA), 서양사(MA)를,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신학(M.Div), 미국 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기독교 교육학(Th.M)을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