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동기에 따른 자선도 공공선이라는 판결
2024년, 위스콘신주 대법원은 가톨릭 자선국이 종교적 목적을 위해 운영되지 않는다며 실업보험세 면제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지난 주 목요일(6월 5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러한 판결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보고 이를 만장일치로 뒤집었다. “가톨릭 자선국 대 위스콘신 노동부와 산업검토위원회”(Catholic Charities Bureau, Inc. v. Wisconsin Labor and Industry Review Commission)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은 가톨릭 자선국이 종교적 사명을 바탕으로 운영된다는 점을 인정하며, 위스콘신 주의 판단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 정신에 반한다고 판시했다.
연방대법원의 소니아 소토마요르(Sonia Sotomayor) 대법관은 다수 의견에서, 수정헌법 제1조의 신앙‧자유조항(Free Exercise Clause)과 국교금지조항(Establishment Clause)은 본질적으로 “정부는 특정 종파를 공식적으로 선호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담고 있다고 밝혔다. 그녀는 위스콘신주 대법원의 결정이 이 헌법적 원칙을 위반했다고 지적하며, 가톨릭 자선국이 종교 단체로 인정받기 위해 오직 교인이나 신앙인을 위한 자선만을 해야 한다는 주 법원의 논리는, 오히려 기독교 정신에 깃든 보편적 사랑과 차별 없는 나눔을 특정 종파의 이기심으로 오도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이번 판결은 종교와 신앙을 개인의 내면에 한정해 온 현대 사회에 깊은 울림을 전하며, 종교적 신념에 기반한 활동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할 경우, 공적 영역에서 공공선(common good)으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전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세속 사회가 규정할 수 없는 종교의 자리
위스콘신주의 논리는 세속 사회가 지금까지 종교에 대해서 취해온 익숙한 논리이다. 사회복지, 교육, 의료처럼 국가나 비종교 단체도 수행하는 공적 서비스는 ‘세속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제공하는 종교기관의 활동은 고유한 종교 행위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첫째, 신앙은 행위의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적 동기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동일한 봉사일지라도, 그것이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이미 그 자체로 신앙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종교를 예배, 선교, 교리 교육에만 한정하는 정의는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들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오해이다.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모른 척 지나친 율법사와 제사장을 예로 들며, 오히려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이 자비를 베풀고 도움을 준 그 모습을 제자들에게 본받으라 가르치셨다(눅 10:25~42). 바울 사도 역시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행함으로써 비로소 증명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갈 5:6). 그러므로 교회의 자선이 그 대상을 기독교 신자에만 한정짓는다면, 오히려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셈이다. 소토마요르 대법관의 말처럼, 자선 활동을 통해 교리를 ‘표현하고 주입할 것인가’의 문제는 행정적으로 재단할 수 없는, 철저히 신앙의 영역에 속한다.
세속화의 ‘사적 – 공적’ 이분법을 넘어서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오늘날의 시대를 “신을 믿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시대”, 곧 세속 시대(Secular Age)라 정의했다. 다시 말해, 종교는 이제 공적인 영역에서 밀려나 개인의 취향이나 사적 신념의 수준으로 축소되었고, 그 결과 종교가 공공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2024년의 위스콘신 판결은 이러한 문화적 흐름을 고스란히 법적 판단에 반영한 상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병원과 고아원을 품은 중세 교회, 거리의 아이들을 돌본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George Muller) 목사, 노숙자를 돌본 19세기의 구세군, 그리고 오늘날의 월드비전과 굿 사마리탄에 이르기까지—기독교 신앙에 뿌리를 둔 이들 NGO는 오랜 세월 공공의 삶 속에서 사랑을 실천해왔다.
위스콘신 대법원의 판결처럼 만약 교회와 기독교를 예배당 안에만 가두려 든다면, 앞에서 열거한 역사의 중요한 단면들을 설명할 길을 잃게 된다. 신앙은 늘 교회 건물을 벗어나서, 고통받는 이웃의 필요를 향해 왔기 때문이다. 그 모든 자취를 지운 채 현대 사회가 교회를 공적 영역에서 지우려고 밀어붙인다면, 결국 기독교가 인류에 기여한 역사적 사실과 부딪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그 충돌이 드러난 생생한 사례라 할 수 있다.

First Things
한국 교회와 사회에 주는 시사점
우리 역시 비슷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동안 종교계가 운영해 온 학교, 보육원, 노숙인 쉼터, 노인요양시설, 장애인 복지기관, 아동센터 등은 국가 복지의 빈틈을 묵묵히 메워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정부는 “세금이 투입되는 사업에는 종교적 색채가 배제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기독교 사회복지법인을 보조금 심사에서 제외하거나, 종교성을 드러내지 말라는 요구를 늘리고 있다.
물론 공적 자금의 투명성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신앙에서 비롯된 동기가 자선과 환대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그것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 이번 미국 대법원의 판결은 바로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오히려 종교와 비종교 단체가 시민사회 안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할 때, 복지는 더욱 단단해지고 민주주의의 다원성도 그만큼 깊어진다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신앙과 믿음에서 비롯된 선행과 자선이 오히려 자기 희생적인 열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왔다, 그 감동은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믿지않는 이들까지도 자선과 환대의 길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교회의 역할과 공공선(common good)
끝으로, 공공선은 결코 국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한 ‘영역주권’처럼, 국가와 시장, 시민사회와 교회가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공공선을 추구할 때, 사회는 보다 건강하고 균형 있게 작동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기독교를 단지 ‘사적인 것’으로 가두려는 낡은 세속화의 틀을 넘어서야 한다. 교회가 공적 공간에서 책임 있는 주체로 인정받고,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보장될 때, 국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그늘에 숨어 있는 사람들도 숨 쉴 틈이 생길 것이다.
허기진 이에게 조심스레 내미는 밥 한 그릇, 적막한 하루를 위로하는 말 한마디, 장애인을 향한 다정한 손길—이 모든 작은 행위들 속에, 기독교인의 신앙 고백은 스며 있다. 그래서 아무리 세속 사회가 교회를 ‘사적인 취미’로 밀어내려 해도, 기독교인의 이웃 사랑은 여전히 공공의 언어로 이야기될 수 있고, 또 그렇게 이야기되어야 한다.

한기윤 선임 연구위원인 이춘성 박사는 대학에서 고분자 공학을 전공한 후에 20세기 기독교 변증을 대표하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세운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에서 10년 넘게 사역자로 일하면서 C. S. 루이스와 쉐퍼 등의 기독교 변증가와 기독교 철학을 공부하였다. 또한 한국과 영국 라브리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환대 사역과 기독교 변증과 세계관을 가르쳤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석사(M. Div.)를 하였으며,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신칼빈주의 직업 윤리”로 신학 석사(Th. M.), 고신대 일반대학원에서 신원하 교수의 지도 아래 “포스트모던 환대 윤리 사상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기독교 환대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연구”로 박사(Ph.D.)를 하였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 목사, 한기윤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 공저로 “그리스도 중심 성경읽기 1, 2, 3권(ivp)”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