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밤 11시, 과제를 마친 대학생이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집어 든다. “딱 10분만.” 그렇게 시작된 시청은 어느새 한 시간을 훌쩍 넘긴다. 한 출연자의 눈빛, 누군가의 선택, 그리고 이어지는 반전. 댓글 창에는 “도파민 터진다”는 말이 줄지어 선다. 같은 날 점심, 그는 친구와 마라탕을 먹는다. 혀를 찌르는 매운맛, 이어지는 탕후루의 달콤한 설탕 코팅. 자극적인 맛이 쌓인 피로를 밀어내는 듯하다. 화면과 음식,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사실은 같은 지점을 두드린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기대, 긴장, 그리고 보상을 추구하는 ‘도파민의 공화국’의 문 앞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의 일상은 물론, 신앙생활과 예배의 지형까지 바꾸어 놓고 있는 이 도파민 추구의 문화를 진단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지, 함께 생각해 보려 한다.

도파민 터지는 요즘 문화

넷플릭스의 〈솔로지옥〉과 SBS Plus·ENA의 〈나는 솔로〉는 이러한 감각의 문법을 정확히 읽어낸 대표적인 콘텐츠다. 제한된 공간, 촉박한 시간, 급변하는 관계 속에서 사랑을 찾는 이야기지만, 시청자는 설렘보다 갈등에 더 크게 반응한다. 누군가의 실수와 오해, 스튜디오의 탄식을 따라 우리는 화면 속 인물의 감정에 동조한다. 분노하고, 응징을 기대하며, 때로는 댓글을 통해 직접 개입한다. 감정의 고저가 클수록 다음 장면을 누르는 손가락은 더 빨라진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자극이 특히 10대와 20대에게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청소년들과 청년은 디지털 영상 콘텐츠가 제공하는 즉각적인 보상 시스템과 달리 길고 느린 보상을 견디며 살아간다. 입시의 시간은 길고, 취업의 문은 좁고 언제 열릴지 불분명하다. 인턴과 계약직, 스펙과 공모전이 이어지는 동안 “잘하고 있다”는 신호는 드물다. 노력과 보상의 간격이 넓을수록 뇌는 더 짧고 확실한 보상을 찾는다. 연애 리얼리티는 그 틈을 파고든다. 한 회차 안에서 만남과 배신, 선택과 탈락이 모두 일어난다. 현실은 불확실하지만 편집된 서사는 빠르게 결론을 향해 달린다. 시청자는 짧은 시간에 ‘감정의 완결’을 경험한다.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도파민을 단순한 ‘행복 물질’로 보면 안 된다. 도파민은 현재의 만족이라기보다 “곧 얻을 것 같다”는 기대와 동기를 만드는 신호다. 그래서 우리는 화면을 계속 넘기고, 다음 화를 누르며, 새로운 자극을 찾아 나아간다. 기다림 자체가 이미 보상이 된다. 스탠퍼드 의과대학의 중독의학 교수 애나 렘키(Anna Lembke)의 『도파민네이션』Dopamine Nation에서 현대 사회를 “쾌락이 과잉 공급되는 환경”이라 진단한다.[1] 그는 쾌락과 고통이 하나의 저울 위에 놓여 있다고 설명한다. 강한 쾌락 뒤에는 균형을 맞추려는 반동이 따라오고 그 결과, 우리는 같은 만족을 위해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된다. 자극이 줄어들면 기쁨 대신 공허와 불안이 먼저 찾아온다.

연애 리얼리티의 자극적 갈등 서사나 끊임없는 피드 넘김 같은 ‘도파민-스크롤링’ 현상은 이런 보상 루프를 보여준다.[2] 약물, 술, 포르노, SNS 같은 매체도 같은 구조를 따른다. 잠시 공허를 덮어 주지만 결국 더 큰 공허를 남긴다. 그래서 렘키는 우리가 불행해지는 이유가 어쩌면 불행을 피하려 지나치게 애쓰기 때문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흔들리는 믿음의 기둥들과 불안

렘키는 이러한 현상의 배경으로 인류가 결핍의 시대에서 풍요의 시대로 전환한 지 채 100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오랜 세월 결핍에 적응해 온 우리의 신경계가 갑작스럽게 과잉 자극의 환경에 놓이면서 생물학적 불일치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분명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어디까지나 진화론적‧신경과학적 틀 안에서의 해석이며 인간을 주로 물질적 존재로 바라보는 한계를 지닌다.

인간은 단지 자극에 반응하는 신경 회로 이상의 영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그 근본 원인을 보다 깊은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과도한 자극 추구는 단순한 뇌의 오작동이 아니라, 현대인이 직면한 믿음 체계의 붕괴에서 비롯된 불안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기대어 설 기둥이 없다고 느낄 때, 사람은 확실한 진리보다 즉각적인 보상에 몸을 맡긴다. 도파민은 원인이기보다 증상일지 모른다. 붙들어야 할 믿음과 신뢰가 무너질 때, 인간은 더 강력한 자극으로 그 빈자리를 대신 채우려 들고 있다는 것이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 곁에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신뢰의 기둥들이 있었다.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았고 이혼하지 않는 부부 관계와 쉽게 깨지지 않는 가정이 이상(理想)이 아니라 현실에 가까웠다. 학교에는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는 스승이 있었고 교회에는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해 주는 어른들이 있었다. 천국과 지옥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공동체는 개인을 감싸안는 울타리였고, 이러한 기둥과 울타리는 좀처럼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그 구조는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국과 지옥을 만든 신의 존재는 의심받고 있으며, 평생직장은 신화가 되었고, 고용은 유연해졌으며, 관계는 느슨해졌다. 결혼과 출산은 선택이 되었고, 이혼은 일상적이며, 공동체는 더 이상 개인의 생애를 책임지지 않는다.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교회는 더 이상 한 사람의 삶을 끝까지 품는 울타리라기보다 나의 선택을 기다리는 여러 공간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변화가 모두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개인의 자유는 확대되었고 과거의 불합리하고 억압적인 구조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믿고 ‘기대어 설 기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이 스며들었다.

이러한 현대인의 불안은 어떤 특정한 사건에서 비롯된 공포라기보다 사방에서 조금씩 금이 간 듯한 막연한 균열에 가깝다. 믿음은 완전히 붕괴되었을 때보다 오히려 미세한 균열이 생겼을 때 더 크게 흔들린다. 겉으로는 서 있지만 속으로는 금이 간 기둥처럼 말이다. 더 두려운 것은 한 번 마음 깊이 스며든 이 불안이 예전처럼 단단한 믿음으로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균열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

믿음은 서서히 쌓이는 것이다. 시간과 반복, 관계와 신뢰가 필요하다. 그러나 불안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당장 숨을 조여 오고 지금 무엇인가로 덮어야 할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빠른 처방을 찾는다. 도파민이 터지는 순간들—강렬한 콘텐츠, 즉각적인 칭찬, 분명한 반응, 눈에 보이는 성취—이 그것이다.

도파민 터지는 요즘 예배

예배도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불안한 시대에 사람들은 확신을 갈망한다. “괜찮다”는 선언, “하나님이 반드시 복 주신다”는 약속, “지금 이 자리에서 회복된다”는 즉각적인 선언과 체험 등. 그리고 긴 찬양과 고조되는 사운드, 집단의 열기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파도는 잠시나마 불안을 잠재운다. 그 순간만큼은 사람들은 혼자가 아니라고 확신하며 열광한다. 그러나 의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감정의 고조가 사라진 뒤에 우리의 불안은 사라졌는가. 눈물과 결단 이후, 월요일의 현실은 달라졌는가. 반복되는 삶의 자리에서 여전히 우리는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도파민은 균열을 잠시 가려 준다. 그러나 균열을 메우지는 못한다. 기독교 신앙이 본래 제시했던 길은 다른 방향이었다. 신앙은 불안을 즉시 제거하는 기술이 아니라 불안 속에서도 함께 머무는 관계였다. 시편의 기도는 늘 담담했다. “언제까지입니까”라는 탄식과 “그럼에도 나는 주를 신뢰합니다”라는 고백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확신은 폭발적 체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신뢰의 연습 속에서 자란다.

예배, 느린 신뢰의 감각

1980년대 평범한 찬송가 한 절을 매주 부르며, 일상의 음성으로 기도하며, 조근조근한 설교를 듣는 시간은 격렬하지 않다. 그러나 그 시간은 우리의 감정을 흥분시키기보다 우리의 존재를 천천히 들여다보게 한다. 믿음은 도파민의 급격한 상승 곡선이 아니라 서서히 이어지는 완만한 곡선에 가깝다. 불안한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자극이 아니라 더 견고한 관계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서로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공동체의 관계, 화려하지 않아도 요란하지 않아도 매주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고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과의 관계 말이다.

평범한 예배는 감동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도파민에 속고 있기 때문에 밋밋해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밋밋함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단단해질 것이다. 불안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해도 불안과 고통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힘을 기른다. 도파민의 공화국에서 어쩌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예배의 모습은 느리지만 신뢰하는 믿음의 감각인지 모른다. 도파민의 감정이 터지는 순간이 아니라, 조용히 버티는 것 말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


주)

  1. Anna Lembke, Dopamine Nation: Finding Balance in the Age of Indulgence(New York: Dutton Books, 2021), chapter 1.
  2. T. Sharpe and R. A. Spooner, “Dopamine-Scrolling: A Modern Public Health Challenge Requiring Urgent Attention,”Perspectives in Public Health145, no. 4 (July 2025): 190–191.

이춘성 목사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세운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에서 사역하였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석사(M. Div.), 고신대에서 기독교 윤리학 박사(Ph.D.)를 하였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 목사,  한기윤 선임연구위원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