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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

매년 9월 10일은 세계보건기구가 정한 세계자살 예방의 날입니다. 올해 세계자살예방의 날 전후에는 이전 해보다 자살 현황과 이에 대한 분석 그리고 이에 대한 다양한 대책들과 이에 대한 보도가 훨씬 많이 쏟아졌습니다. 지난 달 대통령은 자살에 대해 언급하며 “자살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재난”이라고 말했고, 그 뒤 국무총리는 한층 구체적으로  현재 자살예방대책을 더 보완하여 10년 뒤인 2034년에는 현재보다 자살자가 50% 줄어들도록 정부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뉴스를 통해 종종 들어온 대로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 자살률이 1위인 국가입니다. 2024년도에는 인구 10만 명당 인구 자살사망자 수를 가리키는 자살률도 28.3명으로 OECD 국가 평균의 두 배를 넘었습니다. 2003년 이후 20년 넘게 OECD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라는 부끄러운 타이틀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피부에 와닿게 말하자면, 지난 3년간의 수치를 보겠습니다. 2022년에는 1만 2,906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2023년에는 1만 3,978명, 그리고 2024년에는 1만 4,439명으로 해마다 그 수가 늘어났습니다. 2022년 하루 평균 35명이 목숨을 끊었다면, 2024년에는 그 수가 39.6명, 그러니까 거의 하루에 40명에 가까운 이들이 삶을 놓은 것입니다. 불과 2년 사이에 자살자 수가 10% 넘게 증가한 셈이지요. 연령대로 나누어보면, 여전히 노년층의 자살률이 가장 높습니다. 그러나 근래 들어 젊은 세대의 비율도 점점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어, 그 무거운 현실 앞에 우리는 말문이 막힙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자살의 유혹에 노출되기는 매한가지이고 실제로 성도들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해왔고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살 사건이 일어나면 교회와 성도들이 모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오랫 동안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 왔던 성도들은 아픔을 겪게 마련입니다.  유가족들은 말할 필요가 없고 비교적 가까이 지낸 성도들도 자책이 동반된 고통을 받게 마련입니다. 

오늘 이 시간은 자살의 문제에  대해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교회가 자살 문제를 설교 시간에 다루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고 조심스럽습니다만  교회는 성경이 이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를 진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과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통해 이 문제를 한번 살펴 보려고 합니다.   

 

 자살 사건과 성경의 평가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스스로 삶을 마감한 인물이 다섯 명이 나옵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 기록된 순서에 따라 자살한 인물들과 이들의 자살의 경위와 이유를 간단하게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 인물은 아비멜렉 왕입니다 (삿 9:52-54). 그는 사사 기드온의 첩에서 난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복 형제들인 왕자 70명을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 후 3년이 지난 때에 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아비멜렉은 반란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비멜렉은 망대 위에서 한 여자가 던진 맷돌을 맞고 머리에 치명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아비멜렉 왕은 여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수치스런 말을 듣지 않으려고 옆에 있던 병사에게 칼로 자신을 죽일 것을 명령했습니다. 아비멜렉은 자기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 병사에 의해 죽고 말았습니다. 아비멜렉 왕은 일종의 간접 자살을 한 것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둘째 인물은 사울 왕입니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와 전쟁을 하는 가운데 치명상을 입게 되자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에게 죽게 되는 수치를 당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수하 병사에게 자신을 찔러 죽일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그 병사가 그 명령을 거부하자, 사울은 스스로 자기 칼 위에 엎드려 죽었습니다(삼상31:1-6). 

셋째 인물은 다윗의 신하였던 아히도벨입니다. 사무엘하 17장을 보면 아히도벨은 다윗 왕의 책사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급하게 도성 밖으로 도주하였을 때 아히도벨은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의 편에 가담하고 남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압살롬에게 다윗을 공격할 계략을 제시했는데, 압살롬이 자신의 책략을 거부하고 다른 책사 후새가 제시한 책략을 받아들이자, 아히도벨은 낙향하여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삼하 17:23).

넷째 인물은 분열왕국 시대  북 이스라엘 왕 엘라의 신하였던 시므리 입니다. 어느 날 군사들이 전쟁에 나간 틈을 타서 그는 궁중에 남아있다가 반란을 일으켜 엘라 왕을 살해하고 왕이 되어 7일동안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장군과 군사들은 시므리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군대 장관 오므리를 왕으로 추대하고 나아가 시므리를 축출하기 위해 왕궁으로 진격합니다. 이 소식을 왕궁에서 전해 들은 시므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곳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왕상 18:15-18). 

다섯째 인물은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은 30을 받고 예수를 유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넘겨주고 난 뒤 자책에 견디지 못하여, 은을 성소에 던지고 성전 밖으로 나간 뒤 목매어 죽었습니다(마27:3-5). 

 

성경이 자살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자살 사건과 그 인물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살펴보면 한가지 공통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인물들이 심판, 수치, 배신, 탐욕과 관련되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울과 유다의 자살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수치스런 죽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행1:18). 역대상은 사울이 죽은 것은 그가 여호와께 범죄했기 때문이고, 여호와께서 그를 전쟁에서 죽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대상10:13-14). 그리고 아비멜렉 왕과 책사 아히도벨 그리고 시므리 왕이 자살한 것도 각각 탐욕, 배신 그리고 살인과 같은 흉악 죄들이 이것에 뒤범벅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묘사된 자살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달려가다가 극한 상황에 이르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 본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지 않는 사실도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들이 자살이라는 죽음의 방식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도 내리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들이 범죄한 것에 대한 형벌로서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자살로 죽게 하셨다든가 또는 그들이 자살로 생명을 끊었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했다,’ ‘구원받지 못했다’와 같은 설명이나 해석을 내리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자살에  관련된 성경말씀을 살펴본대로 자살한 사람은 용서받지 못한다든지. 구원받지 못한다든지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근거가 부족합니다. 비록 자살한 것은 큰 죄이지만 그이상의 주장을 덧붙이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6계명과 자살: “살인하지 말라”(출20:3)

그렇다고 하면 성경이 자살을 심각한 죄로 보거나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읽은 본문들을 살펴 보면 이에 대한 대답을 분명하게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읽었던 첫 본문은 출 20장 3절로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의 제 6계명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출20:13)입니다. 보통 이 계명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해하지 말라는 계명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계명을 뜯어보면 동사만 있고 목적어는 없습니다:“살인하지 말라”(Do not murder). 

이 6계명은 제10계명의 형식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10계명은 ‘네 이웃의 집이나 소유나 가축이나,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제10계명은 탐욕의 대상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명시합니다. 그런데 6계명은 그 금지 대상을 특정하거나 명시하지 않습니다.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타인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명도 살해해서는 안된다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제 6계명은 읽을 때 우리는 이웃을 살해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으로 이해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므로 이 6계명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도 금지하는 명령으로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1]  실제로 초대교회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이웃을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자살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자살이란 ‘자기 살인’과 다르지 않는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들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십계명의 하나로 주셨습니다. 이 계명 안에는 타인의 생명을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죽이는 것도 행해서도 안된다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노아언약의 명령을 통해 유추하는 자살 

이제 6계명과 아울러 자살이 지닌 성격을 유추할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성경구절인 창세기 9장 6절을 상고해 봅시다. 창세기 9장 6절은 소위 “노아언약‘의 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시기 전에 노아와 언약을 맺으면서 홍수로 정화된 이 땅에서 살아갈 인류들에게도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엄히 금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사람을 죽이면 반드시 사형으로 처벌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9장 6절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처럼 엄청난 중벌을 명령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6절 하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하나님은 이 세상과 그 가운데 존재하는 동물과 생물을 지으셨지만 오직 사람만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자로 지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 사역의 정점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생명을 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중악한 죄이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최고의 형벌 즉 사형으로 처벌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창9:5-6). 

창세기 9장 6절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 은 이웃의 생명을 고의적으로 빼앗는 극단적 악행을 말하는 수사적 표현이기에,  하나님은 이런 악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인간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처벌인 사형의 벌을 부과하셨습니다.  자살은 본인이 스스로 자기의 피를 흘리게 하는 악행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죄악입니다. 그 행위를 한 자가 이미 죽어버렸으므로 최고의 형벌을 가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자살자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심각한 잘못으로 보신다는 것을 성도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2]

 

자살과 기독교윤리적 문제

자살이 심각한 죄가 됨을 성경해석을 통해 살펴 보았는데 이제는 마지막으로 기독교윤리적인 측면에서 자살이 지니는 한가지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를 통해 태어났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출생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 부모를 통해 태어나게 하신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 생명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성경 말씀들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교리화한 웨스트민스트 대소교리문답은 제 1문답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문: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도록 하기 위함(엡1:12)이라고 말하고 성도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또 로마서 14장 8절에서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우리가 사나 죽으나 다 주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의 것이므로 주를 위해서 살고 주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창조자인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내진 이 땅에서 우리의 선한 행실과 의로운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고 우리를 통해 주위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사명을 갖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사명감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이 스스로의 생명을 중단해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때로는 우리 자신이 처한 삶이 너무나 버겁고 때로는 극한 상황에 내 몰려 자포자기하고 생의 의욕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조차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태어난 자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사명과 책임을 감당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재의식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자신이 지닌 육신의 가시로 인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더 좋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빌1:21-24). 왜 그럴까요? 자기가 육신으로 있는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붙여주신 성도들을 위해 더 유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 고통을 피하는 것보다 더 귀중하고 가치있는 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소망이 끊어질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도록 이 땅에 보낸 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 사실을 붙잡고 끝까지 인내하며 주의 손을 붙잡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간략하게 성도들이 자살에 대해 늘 던지는 질문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도들은 종종 “자살하면 지옥가는가, 구원받지 못하는가?” 하는 질문을 교역자들에게 하곤 합니다. 이에 대해 자세히 다룰 수 없지만, 간단히 원론적으로 답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는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지 그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한 어떤 특정 죄악도 그 사실을 변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살한 그 사람이 지옥에 가게 된다면 그 이유는 그가 예수를 믿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지 단지 그가 자살했기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그리스도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온 자라고 하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얻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고 하더라 그것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취소하거나 변개할 수는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37문답에 보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는 죽을 때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즉시 영광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믿는 신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살한 신자 당사자의 구원 여부는 그 자살 사건으로 환원하여 단정할 수 없고 단정해서도 안됩니다. 구원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작정과 주권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살 예방을 위한 교회의 사역: 관심과 돌봄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선진국가에 진입한 우리 나라, 우리 주위에서 현재 다양한 이유로 삶의 의욕을 읽고 생명을 포기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아무리 삶이 버겁고 빛이 보이지 않은 듯이 여겨져도 자살의 유혹과 속삭임에 자신을 방임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여전히 우리자신을 사랑하시고 피할 길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서 숫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이 도우시고 붙들어 오셨던 그 일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보고 나아가셔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살아갈 힘과 소망을 잃어버리고 맥을 놓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는지 조금만 더 주위를 살펴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상태에 놓여있는 이웃이나 성도들이 있다면, 조금만 더 나의 시간을 할애하고  찾아가서 말을 건네고 따듯한 사랑의 온기를 전해 주는 그런 우리들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혼자 지내는 노인들의 경우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서 가장 높고 다른 연령대에 비해 실제로 자살률이 높습니다. 교회는 외롭고 노쇠한 이들을 좀 더 자주  환대의 자리, 식사의 자리로 불러내어 대접하는 사역에 조금 더 힘쓰면 좋겠습니다. 교회의 이런 사역이 바로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는 사역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의 어두운 세력이 위협하고 위협하는 이 사회에서 우리 교회는 생명의 빛을 비추고 온기를 나누는 그런 생명의 공동체가 되도록 힘을 모으는 성도들이 되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아멘.

 


각주

  1. J. Douma, The Ten Commandments: Manual for the Christian Life, translated by Nelson Kloosterman (Phillisburg, N.J.: P&R  Publishing Company), 224. 
  2. Wayne Grudem, Christian Ethics: An Introduction in Bibilical Moral Reasoning,『기독교 윤리학 (중)』, 전의우 박문재 옮김(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8),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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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윤(KICE) 원장인 신원하 박사는 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B.A.)을 전공했고,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석사(M. Div.)를, 미국 칼빈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와 보스턴 대학교(Boston University)에서 기독교 윤리학으로 석사(Th.M)와 박사(Ph. D.) 학위를 하였다. 이후 고려신학대학원에서 30년 동안 기독교윤리학 교수와 원장으로 재직했다. 대외적으로는 한국 복음주의 윤리학회 회장. 기독교윤리연구소(기윤실부설) 소장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