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직업 지형 변화
지난 5년 사이 인공지능, 그중에서도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I)은 단순한 기술 혁신의 차원을 넘어 노동의 구조 자체를 흔드는 힘으로 부상했다. 대규모 언어모델의 등장은 인간만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글쓰기, 분석, 코딩, 설계, 기획과 같은 고도의 인지적 과업을 자동화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였다. 우리는 어느새 “기계가 인간을 보조하는 시대”를 지나 “기계가 인간의 전문적 과업을 대체하거나 재편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이 변화는 더 이상 미래에 대한 추상이 아니다. 이미 노동시장 지표 속에서 구체적인 흔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 기업의 이력서와 채용 공고 데이터를 분석한 한 연구에 따르면, 생성형 AI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기업에서는 주니어 직급의 고용이 유의미하게 감소했다. 반면 시니어 직급은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다. 특히 고용 감소는 해고의 증가가 아니라 신규 채용 축소를 통해 이루어졌다.1) 기업들이 당장의 생산성 변화뿐 아니라 ‘앞으로 자동화될 가능성’까지 고려해 경력 초기 인력의 진입을 선제적으로 조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를 일상의 장면으로 바꾸어 보면 이렇다. 과거에는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고 자료를 정리하며 데이터를 정돈하는 역할을 신입 사원이 맡았다. 그러나 이제는 인공지능이 몇 분 만에 초안을 만들고 통계를 요약하고 기초 분석을 수행한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굳이 그 역할을 사람으로 채울 필요가 줄어든 셈이다. 문제는 그 ‘첫 자리’가 사라질 때 젊은 인력이 어디서 경험을 쌓고 성장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영국 노동시장 분석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관찰된다. 대규모 언어모델에 대한 노출도가 높은 기업일수록 전체 고용은 감소했고 그 영향은 저연차·초급 직급에 집중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변화가 저임금 부문이 아니라 오히려 고임금·고숙련 직군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2) 과거 자동화가 주로 중간 숙련·루틴 직무를 대체했다면, 생성형 인공지능은 초급 분석, 문서 작성, 데이터 처리와 같은 ‘지적 루틴 업무’를 먼저 압박하고 있다. 자동화의 방향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 충격은 청년층에만 머물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30일 보도된 중앙일보 영문판 진지민 기자의 기사에 따르면, 통계청 자료 기준으로 11월 40대 취업률은 1995년 이후 같은 달 기준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40대 관리직의 퇴직은 늘어나고, 재취업은 IMF 외환위기 이후 가장 어려운 상황이라는 분석도 덧붙여졌다. 그 원인 중 하나로 “인공지능 확산에 따른 관리직 수요 감소”가 지목되었다. 이제 인공지능은 경력 초기 인력뿐 아니라 중년의 중간 관리자에게도 구조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제 질문은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없애는가, 늘리는가”라는 이분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일의 수’를 조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누가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가”라는 기준 자체를 다시 쓰게 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산업화 이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온 직업 구조는 지금 전환의 문턱에 서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레 묻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직업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면 인공지능이 바꾼 일의 지형과 상황 때문에 일을 그만두거나 다른 직종으로 옮기는 것은 옳은 일인가?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선택해야 한다면 이전의 일은 하나님의 소명이 아니었던 것일까? 새로운 일을 선택할 때에도 여전히 ‘소명’이라는 기준으로 하나님께 묻고 결정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인공지능 시대에 ‘일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직업 소명의 핵심을 다시 짚어보고자 한다. 그 전통 속에서 오늘의 기독교인이 직업과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AI시대의 직업
지난 3년 동안 ‘시대예보’ 시리즈를 통해 AI 시대의 변화를 한발 앞서 짚어온 빅데이터 전문가이자 미래학자인 송길영은 『호명사회』에서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핵심 개념으로 ‘본진(本陣)’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본진은 단순한 직무가 아니다. “소득을 벌기 위한 수단”을 넘어 자신의 정체성이 자리 잡는 고유한 영역이다. 명함에 적힌 직업이 아니라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자연스럽게 불리게 되는 자리다.3)
왜 그는 직업보다 본진이 중요하다고 말할까. AI가 인간의 일을 대체하고, 새로운 직무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시대에는 한 사람이 평생 하나의 직업만으로 살아가기 어려워진다. 이미 많은 이들이 두세 개의 일을 병행하는 ‘N잡러’로 살아간다. 앞으로는 한 생애 동안 여러 직업을 오가는 일이 더 흔해질 것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중심을 잃기 쉽다는 데 있다. 송길영은 “본진도 없이 곡예사처럼 여러 일을 저글링하는 것은 정체성의 기반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장 중심에 있어야 할 코어가 불안정하면 결국 “그 사람이 누구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구조”가 된다는 것이다.4) 그래서 그는 강조한다. 복수의 정체성을 추구할수록 오히려 더 깊이 뿌리내린 주력 분야, 곧 본진이 필요하다고. 여러 일을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꿰는 중심축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통찰은 최근 경제학 연구와도 맞닿아 있다. 2004년의 한 보고서에서 코리넥(Anton Korinek)은 AGI가 현실화될 경우 경제의 기본 생산요소 구성 자체가 변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그의 핵심 주장은 문제는 일자리 숫자가 아니라 “무엇이 희소한가”의 변화라는 점이다.5) 경제학에서 희소성은 단순히 “모자람”이 아니다. 공짜가 아니며, 쉽게 대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얼마나 대신하기 어려운가가 가치를 결정한다. 공장에서 찍어낸 복제품은 값이 싸다. 그러나 한 작가가 직접 그린 원본 그림은 비싸다. 파일은 무한 복제가 가능하지만 ‘원본’이라는 지위는 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치의 중심에는 언제나 대체 불가능성, 곧 원본성이 있다. 그러므로 코리넥은 경제사를 ‘상대적 희소성이 이동해 온 역사’라고 설명한다. 과거에는 토지가 희소했고 산업화 이후에는 인간 노동이 희소했다. 그래서 노동은 존중받았고 임금은 상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AI가 인간의 인지 노동을 광범위하게 대체할 수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알고리즘은 복제할 수 있고, 모델은 확장할 수 있으며, 데이터는 무한히 저장할 수 있다. 복제 가능한 이러한 능력은 시간이 갈수록 값이 떨어질 것이다. 반대로 복제할 수 없는 것의 가치는 더 중요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AI는 수천 편의 설교를 학습해 그럴듯한 설교문을 작성할 수 있다. 보고서도 강의안도 기사도 빠르게 만들어 낸다. 그러나 한 사람이 자신의 실패와 회복, 삶의 굴곡을 통과하며 길어 올린 하나님 앞에서의 고백은 복제할 수 없다. AI는 문장을 흉내 낼 수 있지만 살아낸 시간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데이터를 정리하는 일은 자동화될 수 있다. 그러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신뢰를 구축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판단은 여전히 개인의 경험과 인격에 기대어 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복제 가능한 것은 싸지고 복제 불가능한 것은 귀해진다. 이것이 인공지능 시대의 역설이다. 그래서 인공지능 시대의 질문은 바뀐다. “어떤 직업이 살아남는가?”가 아니라 “이 일은 나의 본진, 곧 나의 원본성을 요구하는가?” 매뉴얼로 환원될 수 있는 일, 규칙과 데이터로 정리될 수 있는 일은 장기적으로 자동화의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특정한 삶의 맥락에서 길러진 관점, 관계 속에서 쌓인 신뢰, 통합적 판단과 책임은 쉽게 복제되지 않는다.
산업화 시대에는 노동 그 자체가 희소했기에 ‘성실함’만으로도 비교적 안정적인 보상이 따랐다. 그러나 이제는 단지 많이 일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생산은 늘어나되 복제 가능한 노동의 가치는 낮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각 개인에게 남는 과제는 분명해진다. 기술을 이길 또 다른 기술을 쌓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쉽게 복제할 수 없는 영역으로 자신을 세우는 것, 자신만의 관점 해석 관계 신뢰 그리고 삶의 이력에서 나오는 통찰을 쌓는 일, 그것이 송길영이 말하는 본진이며 현대 경제학이 말하는 희소성의 이동과도 맞닿아 있다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이 하는 일 가운데 정말로 당신만이 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희소성의 중심이 이동하는 시대, 더 이상 직업의 간판만으로는 자신을 설명하기 어렵다. 자신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영역, 복제되지 않는 자리를 찾아야 한다. 결국 AI 시대의 경쟁은 속도의 경쟁이 아니라 우리와 각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고유한 특성, 곧 원본성과 본진을 확보하는 경쟁일지도 모른다.

AI 시대, 창조자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일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질문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원본성과 본진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리고 단지 생존 전략으로서가 아니라 신앙의 언어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의 신학을 연구한 볼프(Miroslav Volf)는 성공적으로 일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 일을 완수해야 한다. 둘째, 일을 탁월하게 해야 한다. 셋째, 그 일을 통해 공공선을 이루어야 한다. 그는 여기에 더해 끈기와 집중력, 위기 대응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창조성’을 강조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구별되는 지점이 바로 이 창조성에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에 단순히 주어진 것을 반복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를 다시 발견하고 재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재창조’의 능력을 지닌다는 것이다.6) 이 지점에서 우리는 AI 시대의 논의와 자연스럽게 만난다. 기계는 반복할 수 있고 모방할 수 있다. 그러나 의미를 부여하고 원본을 만드는 창조성은 쉽게 복제할 수 없다.
이 통찰을 더 선명하게 풀어낸 인물이 있다. 옥스퍼드의 작가이자 신학 사상가였던 세이어즈(Dorothy L. Sayers)다. 그는 『창조자의 정신』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의 의미가 창조성에 있다” 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과 인간의 공통된 특징은 무엇인가를 만들려는 욕망과 능력이다.”7)
세이어즈는 인간의 일을 창조적 행위로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의 창조는 ‘무(nothing)에서의 창조’라는 점에서 인간과 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인간 역시 재료를 조합해 전에 없던 형태를 만들어 낸다. 작곡가는 음을 엮어 선율을 만들고, 목수는 나무를 다듬어 식탁을 만든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닮은 행위다. 그녀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창조적인 예술가의 작업과 닮아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성공 역시 예술적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세이어즈가 남긴 유명한 문장이 있다. “나사렛의 그 목수 가게에서 만든 물건 가운데 구부러진 식탁 다리나 잘 맞지 않는 서랍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 식탁은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자의 손이 나무를 다듬어 만든 작품이다. 만일 그것이 삐뚤어져 있다면 그 자체가 예수님이 창조자라는 사실을 거짓 증언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대목은 AI 시대의 우리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는 시대에 우리는 ‘그럴듯한 결과물’에 만족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 일에서 성공하는 것은 AI처럼 복제와 흉내 낸 완성도가 아니라 존재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창조성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세이어즈는 에덴 이후 인간의 일이 저주 아래 놓여서 인간은 ‘경제적 인간’으로서 성과와 이익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한다. 성공은 수치로 환산되고 존재는 성취에 종속되어 있다.8) 그러나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다른 길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분의 일은 단순한 업적의 나열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진리였다. 시작하신 일은 끝까지 완수하셨고 이 탁월함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극치인 십자가의 사랑으로 극에 달하였다. 이리하여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어떻게 온전히 구현되는지를 본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앞서 말한 ‘본진’과 ‘원본성’은 단순한 자기 계발 전략이 아니라 존재의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제학자들과 송길영이 조언하는 것처럼 AI시대에 일과 직업의 영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과 구별되는 기술과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더 본질적인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창조적 존재로 굳게 서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문장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작곡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한 사람의 내면을 빚어 성화의 길로 이끄시는 일은 결코 복제될 수 없다. 결국 신자의 일과 직업, 그리고 그것을 통한 성공은 외적인 성취에 도취되는데 있지 않다. 그것은 자신을 변화시키시는 성령의 역사에 기꺼이 참여하는 데 있다. 일이 창조적이고 탁월해질수록 그 탁월함이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참된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증언하게 되는 상태, 바로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성공이며 그리스도인의 일의 본질이다.
AI 시대의 경쟁이 본질과 원본성의 경쟁이라면, 그리스도인의 본질과 원본성은 더 깊은 곳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남들이 쉽게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능력이나 어떤 일을 떠올리면 특정한 이름이 곧장 호명되는 이른바 ‘호명 사회’의 특성에 있지 않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사실, 바로 그 진리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스레 다음 질문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 근원적 원본성을 지닌 그리스도인은 이 시대 속에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

AI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일해야하는가?
독일 신학자 에밀 부르너(Emil Brunner)는 직업 소명 사상을 두고 인간 정신이 오랫동안 품어 온 가장 근원적인 진리이자 세계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하고도 압도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종교개혁자들이 밝힌 직업 소명의 사상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중심 진리로서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를 비추고 있다.
마틴 루터는 소명을 ‘영적인 소명’과 ‘외적인 소명’으로 구분하며 소명과 직업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려 한 최초의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터에게 영적인 소명은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을 뜻했다. 반면 외적인 소명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구체적인 자리와 역할로 부르신 것을 가리켰다. 아버지와 어머니로서의 책임, 교회의 직분, 그리고 각자의 직업이 모두 여기에 속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루터는 고린도전서 7장 20절,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는 말씀에 주목하였다. 그는 여기서 말하는 ‘부르심’을 단지 회심의 사건으로 한정하지 않고 성도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를 ‘일’을 뜻하는 독일어 Beruf로 옮김으로써 ‘소명’이라는 말이 더 이상 영적인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직업과 노동의 영역까지 아우르는 언어로 확장되는 길을 열었다.9)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루터는 이 Beruf의 개념을 비기독교인의 ‘일’에까지 확장하여 적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소명을 철저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곧 그리스도인에게 한정하였다. 다시 말해 ‘소명’이라는 표현은 모든 인간의 노동을 포괄하는 일반 개념이 아니라 믿음 안에 있는 이들의 직업과 일에만 적용되는 신학적 언어라는 것이다.
소명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는 구원의 부르심을 뜻하며, 이차적으로는 그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속에서 감당하는 일과 직업을 가리킨다. 달리 말하면, 전자를 ‘내적 소명’ 혹은 ‘일차 소명’이라 하고 후자를 ‘외적 소명’ 혹은 ‘이차 소명’이라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이차 소명이 언제나 일차 소명의 범위 안에서 수행될 때에만 온전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컨대 교사라는 직업은 단순한 생업의 수단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임을 삶으로 드러내는 자리여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자녀로서 직업과 일을 통해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예수께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막 12:29–31; 눅 10:27).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계명이 곧 그리스도인의 소명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의식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직업 활동과 노동은 생계와 소비를 위한 행위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는 소명이라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소명의 핵심 질문은 ‘일을 거룩하게 볼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일이 과연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길이 되는가’이다.
AI 시대, 소명의 재발견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소명이 왜곡된 시대를 살고 있다.10) 일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통로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표현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무엇을 하는지 얼마의 보수를 받는지가 곧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좋은 직업 → 뛰어난 능력 → 높은 소득 → 높은 가치”라는 연결 고리 속에서 자신을 이해해 왔다. 교회와 그리스도인 역시 이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공지능이라는 혁신 기술의 등장은 이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제 AI는 반복 업무를 넘어 문서 작성, 데이터 분석, 번역, 코딩, 설계, 의사결정 보조와 같은 전문 영역까지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만일 AI가 많은 업무를 인간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하게 된다면 직업의 이름과 능력, 소득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던 방식은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는다. “AI가 내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으로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경제학자들은 복제할 수 없고 쉽게 대체되지 않는 ‘원본성’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또한 송길영과 같은 미래학자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탁월한 능력, 이른바 ‘본진’을 구축해야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조언은 공통적으로 개인의 탁월함에 기대고 있다. 탁월한 능력이 없다면 정체성은 흔들릴 것이고, 불안정한 정체성 위에서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깊은 의미를 찾기 어렵다고 경고한다. 기쁨도 안정도 기대하기 힘들며 경제적 빈곤 역시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 말한다. 그러니 늦기 전에 준비하라는 것이 이 시대의 메시지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러한 ‘원본성’과 ‘본진’을 구축할 만큼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사회는 각 개인이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얼마나 오래 기다려 줄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미래 사회에서 희소성의 원리에 따라 곧 돈과 권력이 된다면 역사가 반복해 보여 주었듯 결국 소수의 엘리트에게 집중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던졌던 근본적인 질문, 곧 “소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종교개혁 전통에 따르면 소명은 성취를 통해 획득하는 지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먼저 주어지는 부르심이다. 루터와 칼뱅은 소명을 특정한 종교적 직분에 한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모든 신자의 삶 전체에 주어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소명은 “무엇을 이루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요청이다. 이 관점에서 직업과 일은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하나님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사회 속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삶의 방식이다.
이러한 직업과 소명 이해는 AI 시대에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 능력을 대체하거나 능가할 가능성이 커질수록 “직업 = 정체성”이라는 공식은 점차 힘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맞닥뜨린 직업의 위기는 단순히 노동의 종말이 아니라 직업을 통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고 정당화해 온 산업화와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의 흔들림이며 어쩌면 그 종말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일자리의 감소만이 아니라 무엇을 하는지 얼마를 버는지와 같은 기준에 기대어 세워 온 자기 이해의 붕괴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담론을 조급히 좇으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태도도 막연한 공포에 잠식되는 마음도 아니다. 전환기의 혼돈 속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요청되는 것은 오히려 ‘잠잠함’이다. 그리고 인간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신학적 재정립이다.
마무리: AI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
끝으로 이 지점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피할 수 없는 사명이 주어진다.
첫째,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가 변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능력이나 성과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두는 삶은 기능과 효율, 능력을 수상하는 사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질서를 조용히 증언하게 될 것이다.
둘째, 그러한 삶은 자연스럽게 질문을 낳는다. “왜 저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가?” 그 대답은 시장의 평가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의 정체성을 두기 때문이다. 이때 교회는 단순히 윤리를 가르치는 공동체가 아니라 혼란의 시기에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와 나침반이 될 것이다. (*)
주)
- Seyed M. Hosseini & Guy Lichtinger,Generative AI as Seniority-Biased Technological Change(2025), 3–6쪽.
- Bouke Klein Teeselink, Generative AI and Labor Market Outcomes: Evidence from the United Kingdom(2025), 2–4쪽.
- 송길영, 『시대예보: 호명사회』 (파주: 교보문고, 2024), 155.
- 같은 책, 156.
- Anton Korinek, Economic Policy Challenges for the Age of AI, NBER Working Paper 32980 (2024), 6.
- Miroslav Volf, “God At Work,” Word & World 25.4(2005): 389.
- Dorothy Leigh Sayers, The Mind Of The Maker, 『창조자의 정신』, 강주현 옮김(서울:IVP, 2007), 40-41.
- Dorothy Leigh Sayers, “Vocation in Work,” in Callings: Twenty Centuries Of Christian Wisdom On Vocation, ed. William C. Placher (Grand Rapids, Mich: Eerdmans, 2005), 407.
- William C. Placher, Callings: Twenty Centuries Of Christian Wisdom On Vocation (Grand Rapids: Eerdmans, 2005), 7.
- Os Guinness,The Call: Finding and Fulfilling the Central Purpose of Your Life(Nashville: Thomas Nelson, 1998), 38-41.
이춘성 목사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세운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에서 사역하였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석사(M. Div.), 고신대에서 기독교 윤리학 박사(Ph.D.)를 하였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 목사, 한기윤 선임연구위원으로 섬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