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초고령사회, 홀로 죽어가는 사회가 던진 질문
어느덧 한국은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일반적으로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라 부른다. 한국은 이미 2017년 8월 고령사회로 진입했고 놀랍게도 서구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불과 7년 4개월 만인 2024년 12월에 초고령사회가 되었다. 아이보다 노인이 두 배 더 많은 사회가 된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2040년에는 노년층 비율이 34.3%를 차지하고 2060년에는 43.8%에 이르게 된다는 경고가 나온다. 이런 초고령사회 현상은 의료와 요양 연금 돌봄 수요를 급증시켜 복지재정 부담을 가중한다. 나아가 안락사와 연명치료 및 호스피스라는 생명윤리 문제를 낳는다.
초고령사회가 던지는 핵심 질문과 화두는 노화와 죽음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나이 들어가는 노화(Aging)란 죽어가는 과정이다. 즉 노화는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기독교는 이 문제에 답을 제시해야 하며 성도들이 노년과 죽음을 준비하도록 도와야 한다(벧전 3:15).
1. 고대 철학과 현대 의학이 바라보는 노화와 죽음
고대 철학의 이원론: 영혼과 육체의 분리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핵심 화두였다. 이들의 사상은 ‘이원론(dualism)’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인간이란 존재는 영혼과 육체의 결합체이며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소멸하는 것은 물리적 육체일 뿐 영혼은 비물질이어서 소멸하지 않으며 영원하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의 영육 관계와 죽음 논의는 세부적인 차이가 있지만 결국 몸이 불멸하는 영혼으로부터 분리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혼이기에 플라톤은 인생의 목표를 ‘죽음을 연습하는 일’ 즉 최대한 스스로를 육체와 격리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현대 철학의 일원론: 고장 나는 기계로서의 인간
그러나 현대 철학은 이에 대해 다른 가능성을 제기한다.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육체의 죽음 이후까지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육체가 소멸할 때 영혼도 얼마든지 함께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예일대 철학과 교수인 셸리 케이건은 이원론에 반대되는 물리주의적 일원론(monism)을 제기한다. 즉 인간은 육체라는 한 가지 기본 요소로만 이뤄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특정한 형태의 물질적 존재에 불과하다. 케이건 교수는 이원론과 일원론을 주제로 500쪽이 넘는 책을 썼다. 책을 마무리하는 에필로그에서 그는 사람들이 영생을 가능성으로 남겨두려 하는 이유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이며 죽음을 떠올릴 때 우리 머릿속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케이건은 인간이 그저 기계에 불과하다고 결론짓는다. 물론 일반적인 기계가 아니라 사랑하고 꿈꾸고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놀라운 기계다. 그러나 기계가 작동을 멈추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 케이건에게 죽음이란 결국 컴퓨터가 고장 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상이다. 모든 기계는 언젠가는 망가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의 저속노화와 죽음의 불가피성
의학은 어떠한가? 일반적으로 의학은 죽음을 생물학적 노화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본다. 따라서 의학이 지향하는 건강한 삶은 노화를 최대한 지연시키고 활력 있게 나이 들도록 돕는 일이다. 의학자들은 노화를 늦추고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요즘은 ‘저속노화’가 대세다. 저속노화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정희원 교수는 지중해 식단이나 마인드(MIND) 식사법 등을 통해 혈당과 혈압을 관리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저속노화 식단을 철저히 실천하며 산다 해도 죽음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공포와 같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다. 느리게 늙든 빨리 늙든 인간은 어차피 늙어 죽어가는 유한한 존재이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그 불확실성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맞이할지 삶의 종착점은 온통 불확실하다. 오직 인간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만 확실할 뿐이다. 케이건은 나 혼자만 일찍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란 모든 인간의 공통된 운명이기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차피 모두가 죽는다면 그것이 과연 진정한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세속적 학문이 지닌 근본적 한계
철학자들이나 의학자들은 인간이 왜 죽는지 그 근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다. 의학자들이 노화를 늦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작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노화가 왜 시작되었는지는 규명하지 못한다. 이처럼 의학자들이 노화를 늦추고 과학자들이 인공지능(AI)을 필두로 눈부신 성과를 낸다 해도 그들은 결코 죽음을 막지 못한다.
2. 성경이 밝히는 노화와 죽음의 실상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말하는 노화와 죽음에 대해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오직 성경만이 인간이 마주하는 노화와 죽음의 참된 진실을 온전히 밝혀주기 때문이다.
2.1. 창조 질서가 아닌 죄의 비극적 결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창조물이다(창 1:26; 2:7).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축복하고 명령하셨다(창 1:28).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지으실 때 원래의 계획 속에는 죽음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첫 창조에는 인간이 죽을 것이라는 어떠한 암시도 없다.” 결국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죄의 비극적인 대가이자 결과이다(창 2:16-17). 아담은 죽음이 정확히 무엇인지 경험해보지 못한 채 그에 관한 경고의 말씀을 먼저 들었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갔다면 결코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은 의학자들의 생각처럼 인간 본성에 내재된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이 아니다. 죽음은 철학자들의 주장처럼 생명과 존재의 자연스러운 순환 또한 아니다. 죽음은 “자연의 필연적인 섭리가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세상은 죽음을 자연 질서의 일부로 보는 반면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인간의 본래 상태가 아닌 타락한 창조 세계의 왜곡된 질서로 본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인간의 삶은 고난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 삶은 죽음을 향한 예비 과정이자 끊임없는 죽음의 연속이 되었다. 죄로 말미암아 사람은 단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죽어가는 존재가 되었다. 사람은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늘 죽어가고 있다. 그의 삶은 결국 죽음과 벌이는 짧고 허망한 투쟁일 뿐이다.”
2.2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인들의 상태를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자들”이라 표현했다(히 2:15). 왜 그런가? 죽음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자 형벌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바울이 말한 대로 분명한 죄의 삯이다(롬 6:23). 그렇기에 죽음은 사망의 쏘는 독침이며 죄의 열매이다(고전 15:55-56).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이치이며 그 후에는 심판이 따른다(히 9:27). 아담이 범죄한 이후 창세기 4장이 출생의 계보를 강조했다면 5장은 “죽었더라 죽었더라”를 끝없이 반복한다(창 5:5, 8, 11, 14, 17, 20, 27, 31). 이처럼 죽음은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이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형벌이다.
2.3 죄와 사망을 정복한 그리스도의 영생
그러나 놀랍게도 성경은 죽음에서 해방되는 구원의 길이 있으며 더 나아가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선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토록 죽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셨다(요 11:25-26).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죄를 씻고 구원을 받아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롬 8:17; 엡 3:6).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으심으로 사망을 멸하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기 위해서는 예수님 자신이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가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셨다. 예수님은 참으로 죽음을 정복하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셨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그분의 의와 생명을 우리에게 선물로 값없이 거저 주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신뢰하는 믿음이야말로 죄와 사망을 이기는 유일한 길이다.
2.3.1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참된 해방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는 죽음이 새롭게 다가온다. 믿음 있는 신자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기다리고 환영한다. 바울은 신자들이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했다(롬 8:23). 죽음이란 신자를 탄식하게 하는 죄의 종말이다. 바울은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 했다. 선을 행하기 원하나 악을 행하는 자신이 사망의 몸에 매여 있기 때문이었다(롬 7:17-24). 따라서 바울은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원했다(빌 1:23). 이로 볼 때 신자의 죽음이란 육신으로 사는 열매를 그치는 일이다(빌 1:22). 더 나아가 죽음이란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바와 같이 의인들을 악한 자들 앞에서 불러가시는 것이다(사 57:1). 하나님께서는 종종 신자가 감당하기 힘든 비극과 재앙을 직접 겪지 않도록 그를 불러 가신다. 청교도 목사인 토마스 왓슨은 “신자들은 죽을 때 모든 죄와 근심들에 대해 영원한 작별을 고하게 된다. 그때에 그들은 완전무결한 상태에 들어서게 될 것”이라 말했다. 또 다른 청교도 목사인 토마스 보스톤은 이를 가리켜 영광의 상태 즉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라고 불렀다.
2.3.2 지상 수고의 종결과 영원한 안식
신자의 죽음이 귀중하고 유익한 것은 이제 신자가 지상에서의 모든 수고를 그치고 영원히 안식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수고스러운 것이며 가끔씩 즐거움과 환희의 순간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슬픈 것이다(시 90:10). 그러나 죽음은 그런 수고와 슬픔의 종결을 뜻한다. 요한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의 복에 대해 예언하면서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기 때문이라 했다(계 14:13). 선을 행하는 것은 종종 낙심을 가져오는 일이다(갈 6:9). 죽음을 통한 천국의 입성은 바로 이런 수고를 그치고 안식함을 뜻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신자는 천국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밤낮 기쁨으로 예배한다(계 7:15). 신자는 다른 모든 구속받은 신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한다(계 21:22-26). 천국은 종종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비유된다(마 22:2; 25:10; 계 19:9). 혼인 잔치는 시끌벅적하고 즐겁고 기쁘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안식이다.
2.3.3 하나님과 성도를 향한 온전한 대면과 교제
신자에게 죽음이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며 도리어 복된 것은 신자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누리기 때문이다. 바울은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며 부분적으로 안다고 했다(고전 13:12). 그러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주를 온전히 알 것이라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하시면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다. 집을 준비하고 나면 다시 와서 그들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 함께 거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4:1-3). 사도 요한은 주님이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고 했다.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참모습을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요일 3:2). 이처럼 우리는 죽음을 통해 입성한 하나님 나라 천국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될 것이다.
3. 성도와 교회, 노화와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이처럼 성도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소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축복이다. 그렇다면 초고령사회 속에서 성도와 교회는 노화와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3.1 세속적 허무를 딛고 일상의 가치 회복하기
어차피 나도 죽고 너도 죽고 태양도 빛을 잃고 달도 사라지고 모든 것이 소멸된다면 의미를 가지고 살 이유가 무엇인가.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도 어차피 내 삶이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만일 그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일이며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선포한다(히 9:27). 그리고 심판 이후에는 영벌과 영생으로 나뉠 것이다(요 5:29). 그러므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그렇기에 현재 이 세상에서의 우리 삶은 허무하지 않다. 도리어 가까워지는 죽음 때문에 현재 우리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삶과 죽음은 쌍둥이와 같다. 죽음 덕분에 특별히 노년의 매일매일은 더욱 값진 것으로 거듭날 수 있다.
3.2 썩지 아니할 부활과 영생의 소망 품기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고 확언했다(고후 5:1, 4, 8-9). 디도서에서는 신자에게 영생의 소망이 있으며 그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된다고 했다(딛 1:2; 3:7). 성경에서 종종 천국은 영생으로 비유된다(단 12:2; 마 18:9; 19:16; 19:29). 그리스도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다(요 14:1-3). 천국에는 사망이나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 없다(계 21:4). 바울은 우리 몸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라 했다(고전 15:53). 우리 몸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활하여 죄를 지을 수 없게 된 영혼과 결합될 것이다. 신자는 이 세상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멋지며 가장 건강하고 가장 활력 넘치며 가장 기쁘고 즐거운 상태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다.
3.3 침묵을 깨고 천국과 지옥을 다시 선포하기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듣기 어려운 메시지의 주제가 있다면 바로 천국과 지옥이다. 교회는 자주 부지런히 천국과 지옥에 관한 설교를 통해 불신자들에게는 경고를, 신자들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전해야 한다. 성경은 천국만큼이나 지옥에 대해서도 풍성한 교훈을 준다. 우선 지옥에서도 심판을 받은 자들의 부활한 몸과 영혼이 결합되어 육체를 가진 상태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악인들의 고통은 세세토록 계속될 것이며 그들에게는 안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계 14:11; 사 34:8, 10). 하나님은 악인에게 평강은 없다고 선언하신다(사 57:21; 48:22). 따라서 지옥은 기쁨과 즐거움이 부재한 상태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진노와 심판으로 현존하신다(롬 2:5, 9; 계 14:9-11).
이와는 반대로 천국은 성도들이 영광스럽게 부활한 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곳이다. 사도 요한은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기록했다(계 14:13). 천국은 성도들이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곳이며 죄와 비참이 없고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으며 거룩하고 흠이 없는 곳이다(엡 5:27). 그러니 지옥에 비해 천국에 입성하는 성도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복스러운 일인가. 가이 워터스(Guy Waters)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을 보낼 것이다. 천국에서는 하나님이 사랑과 기쁨 가운데 아버지로서 자기 백성에게 임재하시지만 지옥에서는 하나님이 의로운 심판과 진노 가운데 죄인들에게 임재하신다.”
3.4 나이를 넘어선 소명, 내려놓음을 통한 선교적 삶
그렇다면 이제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확신 넘치게 부지런히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두셨다면 내가 늙었다고 해서 젊었을 때보다 세상에 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없다. 우리는 젊어서부터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다. 이런 삶이야말로 노년을 위한 가장 훌륭한 준비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노년을 위해서는 내려놓기가 필요하다. 내려놓기는 힘을 추구하는 의지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강력한 손으로 우리를 다시 붙잡으시고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그분을 의지한다.
나가며: 두 번 태어난 자의 복된 준비와 승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 태어난 사람들이다. 보통출생법이라는 하나님의 창조로 한번 태어나고 특별출생법이라는 하나님의 재창조로 두 번째 태어난다.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새 생명의 능력이 주는 산 소망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신 생명의 능력이다. 신자는 이 생명의 능력으로 죽어도 살 것이며, 살아서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한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의 능력을 덧입는다(요 11:25-26).
그러므로 이제 성도는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최고의 준비는 바로 살아 있을 때 더 늦지 않게 회개하고 구주 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일단 죽음이 우리를 영원한 상태로 옮겨가면 우리는 그 상태를 변경할 수 있도록 되돌아올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고의 부지런함으로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한다.”
청교도 목사 윌리엄 퍼킨스는 올바른 죽음 준비를 위해 다섯 가지 의무를 권면한다. 먼저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인생의 무상함을 직시하며 내세를 사모하는 ‘성찰’이 필요하며, 둘째로 죽음의 권세를 꺾기 위해 회개로 나아가는 ‘죄 죽이기’, 셋째로 자신의 생각과 육체 등 전인격을 주의 뜻에 복종시키는 ‘영생의 훈련’, 넷째로 바울처럼 매일 자기를 부인하는 ‘날마다 죽는 연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덤에 들어가기 전 시간을 아껴 모든 이에게 힘써 선을 행하는 ‘선행의 실천’(갈 6:10, 전 9:10)이다. 이처럼 다섯 가지 의무를 품고 살아가는 신자는 임종의 순간 깊은 위로와 평안을 누리게 된다.
신자에게 죽음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영원한 승리에 진입하는 관문이다. 바울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고 외친 후 즉각 승리의 찬가를 이어 부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그러므로 성경적 노화와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고 견실하게 붙잡아 주와 함께 노년기를 당당히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바른 길일 것이다. (*)
주)
- 셀리 케이건, 『죽음이란 무엇인가』, (경기: 웅진 지식 하우스, 2024), 113.
- 셀리 케이건, 『죽음이란 무엇인가』, 104.
- 셀리 케이건, 500.
- Ibid., 500. 케이건은 다음과 같이 책을 매조지 한다. “정말로 중요한 건 이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 정희원, 『느리게 나이 드는 습관』, (서울: 한빛 라이프) 143.
- 셀리 케이건, 『죽음이란 무엇인가』, 374.
- 가이 프렌티스 워터스, 『마지막 원수, 죽음을 맞이할 때』,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26), 26.
- Joel R. Beeke and Christopher W. Bogosh, Dying and Death: Getting Rightly Prepared for the Inevitable (Grand Rapids, Mich: Reformation Hertage, 2018), 19.
- 헤르만 바빙크, 『하나님의 큰 일』, (서울: 복 있는 사람, 2026), 364.
- 사무엘 밀러, 토마스 왓슨, 『자살 죽음 부흥에 대하여』, (고양: 고백과 문답, 2025) 100.
- 토마스 보스톤, 『인간 본성의 4중 상태』,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5). 제4부 영원한 상태(333-531)를 참조하라. 보스톤은 이 네 번째 상태를 가리켜 영광의 상태라 불렀다. 보스톤이 말하는 영광의 상태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non posse pecarre)를 뜻한다. 하지만 이런 분류는 보스톤이 처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의 분류법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전체가 가르치는 내용이기도 하다.
- 조광호, 『노화 그리고 죽음』, 157.
- 가이 워터스, 『마지막 원수, 죽음을 맞이할 때』, 248.
- 가이 워터스, 255.
- 투르니에, 『노년의 의미』, 363.
- 투르니에, 403.
- 토마스 보스톤, 『인간 본성의 4중 상태』, 351.
- 윌리엄 퍼킨스, 『크리스천 웰다잉』, 39-47.
신호섭 박사는 영국 런던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ThM)를, 리폼드 신학교에서 박사(Ph. D.)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일산 행신동에서 올곧은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면서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의학 겸임교수로 사역해 오고 있다. 목회사역가운데 끊임없이 연구하며 여러 목회자 아카데미에서 강사로 섬기고 있고 『교회다운 교회』를 비롯한 여러 저서들은 목회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