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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 암울한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이 열심히 추구한 자유의 형태가 자살과 이혼이었다는 사실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나는 지금 그 둘의 도덕적 문제를 논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시대를 특징짓는 두 가지 절망의 조언, 곧 삶의 종말과 사랑의 종말을 지적할 뿐이다.[1] – G. K. 체스터튼 –

 

A. 들어가며

지난 21세기 초반 20년 동안, 한국 사회는 깊은 내면의 격변을 겪었다.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한 변화는 치솟는 자살률, 점점 줄어드는 출산율, 그리고 급격히 늘어난 이혼율이라 할 수 있다. 자살률은 코로나 팬데믹이 있었던 몇 해를 제외하고는 세계 1, 2위를 다툴 만큼 높았고, 출산율은 작년 뉴욕타임스에서 “중세 흑사병 이후 최악의 재난”으로 묘사될 정도였다. 이혼율 또한 20세기 말과 비교해 두 배 이상 증가하였으며[2], 최근 서울시 조사에 의하면 기혼자 4명 중 1명 꼴로 1년 안에 이혼을 심각하게 고민해봤다고 답하면서 우리 사회의 가족의 형태와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고 있다.[3]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의 이혼율과 자살율이 급등했던 전쟁전의 상황을 묘사한 체스터튼이 남긴 말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는 ‘삶의 종말과 사랑의 종말은 전쟁의 기운의 전조’라 했고, 그 말은 예언처럼 들린다. 총성이 없는 시대라 해도, 삶이 사라지고 사랑이 메마른 세상은 결국 회색빛 절망으로 물들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이름의 혁명을 꿈꾸게 될 것이며, 그 혁명의 끝이 반드시 평화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빈약한 기반 위에 서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처한 높은 이혼율은 개인의 행복의 극대화가 아니라 비극의 서막일 수 있다. 다만 비극을 외면하고 있는 현대인은 이혼을 행복을 위한 장미빛 미래인 것처럼 자기 최면 속에서 빠져나오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새로운 사랑이 만약 더 심각한 비극과 절망의 시작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B. 현대 문화가 그리는 이혼: 자기 선택권

최근 이혼을 주제로 한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첫 번째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비혼 남녀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짝짓기 프로그램이다. 대표적으로 2021년 이후 시즌 6까지 방송되었고, 올해 말 시즌 7을 앞둔 ‘돌싱글즈’, 그리고 ‘나는 솔로’의 돌싱 특집, 50세 이상 돌싱을 위한 ‘끝사랑’ 등이 있다. 이처럼 이혼한 이들의 재혼을 주선하는 예능 프로그램들은 주로 종합편성채널을 중심으로 제작되고 있으나,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할 만큼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다. 또한 지상파에서는 이혼한 남성들이 나와 이야기하는 토크 예능도 인기를 끌고 있다. 문화평론가 하재근은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사회적 편견을 완화하고, 위로의 역할을 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4] 전반적으로, 이혼을 다룬 예능 프로그램은 ‘두 번째 사랑’에 박수를 보내고 있으며, 이는 이혼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대한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흐름은 드라마에서 찾을 수 있다. 과거 이혼은 결혼 서사의 부수적 에피소드로 다루어졌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 이혼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그 대표작이 2018년 방영된, 일본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최고의 이혼’이다. 이 드라마는 “결혼은 과연 사랑의 완성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혼을 자아 실현을 위한 주체적 선택으로 그려냈다. 과거 드라마가 외도, 도박, 폭력 등 유책 사유가 있는 배우자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혼을 다루었다면, ‘최고의 이혼’은 행복을 위한 자발적 선택으로서의 이혼을 강조했다.

2023년 방송된 ‘신성한 이혼’ 역시 같은 흐름을 이어간다. 드라마는 유책 배우자조차 외도를 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으며, 그들 또한 피해자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혼한 사람도 새로운 사랑을 찾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2024년 방영된 ‘굿 파트너’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혼 전문 변호사가 주인공인 이 드라마는, 타인의 이혼 소송을 승리로 이끌어왔던 주인공이 자신의 가정 문제를 맞닥뜨리면서, 이혼의 진정한 의미를 탐구하게 된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이혼 후에 이렇게 말한다. “내 손으로 해내는 끝은 누가 뭐라 해도 아름답다. 끝이란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는 걸 알기에 이별이 아프지만은 않다.”

현재 방영 중인 ‘이혼 보험’에서는 이혼 과정에서의 금전적 문제를 다루고, 이혼 이후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라고 권한다. 이러한 드라마와 예능의 공통점은 이혼과 재혼을 단순히 실패가 아닌, 개인의 행복을 위한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으로 보는 시각에 있다. 자녀가 상처를 입을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이혼 후에도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한다면 이혼은 개인의 행복을 위한 필요 조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대중문화 속 이혼의 새로운 시선은 법제 변화와도 맞닿아 있다. 대한민국은 1965년 대법원이 축첩한 남편의 이혼 청구를 기각하면서 유책주의(有責主義)[5]를 확립하였다. 이후 2022년 6월 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유책주의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2023년, 법무부 가족법 특별위원회가 출범하여 가족법, 이혼법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시작했고, “유책주의 폐지 논의 본격화”라는 소식이 언론에 잇따라 보도되었다.[6] 현재 민법 현대화 작업이 진행 중이며, 연내 가족법 개정안이 입법 예고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파탄주의(破綻主義)[7] 부분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아지리라 예상된다. 여성 및 인권 단체들은 이혼 역시 혼인과 마찬가지로 자기결정권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혼에서 유책 배우자의 선택을 제한하는 것은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행복 추구할 수 있는 국민의 기본권을 저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C. 자기 표현, 효능감의 문화와 이혼: 이기적인 사랑

현대 사회를 특징짓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자아’의 부상이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이를 ‘표현적 개인주의(expressive individualism)’라 명명했고, 심리학자 알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는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이라는 심리적 메커니즘으로 설명하였다.[8] 표현적 개인주의란, 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드러낼 때 비로소 행복과 만족을 느끼며, 이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자기 효능감은 어떤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개인의 신념이 있을 때, 개인은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 두 개념은 상호 보완적이다.[9]

과거에는 공동체가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했으나, 이제 개인은 자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공동체를 선택하는 주체가 되었다. 또한 개인이 선택한 공동체 안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받을 수 있을 때 자기 효능감이 충족된다. 결과적으로, 개인은 자아를 표현하지 못하고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는 공동체 속에서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와 국가 역시, 이제는 개인의 행복을 위해 그들의 표현과 능력 발휘를 최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책무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러한 표현적 개인주의는 1960년대 미국이 그러했듯, 1990년대 X세대의 등장을 통해 우리나라 패션계에서 먼저 드러났다. 배꼽이 드러나는 티셔츠, 시스루 의상, 그리고 파격적인 헤어스타일은 “자기표현”을 상징하는 첫 세대적 징표였다. 이후 타투·피어싱 등 더욱 과감한 형태로 확장되며, 개인의 선택과 만족을 최고의 윤리적 가치로 여기는 ‘새로운 사회’를 탄생시켰다.[10]

이 문화적·윤리적 전환은 이혼법에도 변화를 촉발했다. 과거에는 배우자의 잘못을 따져 책임 있는 당사자의 이혼을 제한하는 유책주의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혼인 파탄 자체를 이혼 사유로 인정하려는 파탄주의의 흐름이 거세지고 있다. 테일러는 표현적 개인주의의 밑바닥에는 “진정성”이라는 새로운 윤리 기준이 깔려 있다고 하였다. 설령 불륜이라 하더라도, 두 사람이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그 관계를 존중해 달라는 요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파탄주의를 옹호하는 정치권과 법조계는 유책 배우자에게 징벌적 위자료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피해를 보상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결국 불륜을 정상적 사랑으로 공인해주는 면죄부에 지나지 않다.

C. S. 루이스는 이러한 흐름을 예언적으로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부적절한 사랑을 인정하고자 하는 흐름은 사랑 자체를 종교와 법, 곧 “신”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이며, 이는 제1계명을 거스르는 중대한 죄라는 것이다. 인간의 사랑이 절대화될 때, 하나님이 정하신 윤리와 법은 왜곡되고, 하나님 사랑을 배신한 인간의 원죄만 남게 된다. 이러한 왜곡된 사랑에 대해서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저질렀을 때 연인들은 흔히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는데, 이때 말의 어조에 주목해 보십시오. … 이는 “정상참작을 해 달라”는 태도가 아니라, 어떤 권위에 호소하는 태도입니다. 그 고백은 거의 자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 그들은 스스로를 ‘순교자로 느낍니다.’ … 사랑의 법 안에서. 이것이 요지입니다. ‘사랑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법’, 자신의 종교, 자신의 신을 가집니다.[11]

 

D. 하나님의 언약: 결혼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결혼을 성찬과 세례처럼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제정하신 거룩한 성례는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결혼을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제도로서 성례에 버금가는 신성함을 지닌다고 하였다.[12] 이러한 이유로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는 결혼을 성례로 이해하려는 흐름이 강했지만, 종교개혁자들, 특히 루터와 칼빈은 결혼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질서의 일부로 보았다. 그러므로  종교 개혁자들은 결혼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를 위한 제도이기 때문에 세속 국가가 관장해야 할 문제라고 주장하였다.[13]

비록 결혼이 교회의 은혜의 방편인 성례는 아닐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 직후 인간을 위해 세우신 최초의 제도였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 되는 결혼은 바로 그 형상의 반영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을 통해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 하였거니와… 성경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니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했을 때… 내 생각에 바로 그 두 사람의 결합—곧 혼인—이 이성적 피조물 안에서 지존한 삼위일체의 한 이미지”라고 주장하였다. 삼위 하나님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한 연합을 이루듯, 남자와 여자의 결혼도 그러한 사랑의 연합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혼인의 선은 두 사람의 결속 안에 머물며, 이를 끊거나 끊긴 뒤 다른 이와 결합하는 것은 합법이 아니”[14] 라고 힘주어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결혼 이해는 결혼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혼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맺는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불러 서로 사랑하게 하시고 맺어주신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합의만으로 이 언약을 깰 수 없다는 것이 결혼에 대한 성경의 원리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은 결혼까지 타락의 길로 끌어들였다. 창세기 3장 16절은 타락 이후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이렇게 묘사한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이는 처음 만났을 때 아담이 기쁨으로 고백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세기 2:23)는 말과 정반대다. 서로를 내어주는 사랑에서, 서로를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관계로 전락한 것이다. 그 결과, 결혼의 타락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이어 창세기 4장 19절에서는 가인의 후손인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나님이 세우신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배타적 사랑은 타락한 인간의 욕망 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하나님은 이러한 결혼의 타락을 고려하여 모세를 통해 이혼 증서에 관한 율법을 주셨다(신명기 24:1). 이는 인간의 죄성과 완악함을 고려한 임시적 조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모세 율법의 이혼의 조건인 “수치되는 일”에 대한 해석은 점점 광범위해졌다. 예수님 시대에는 유대교의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졌다. 미슈나에는 이렇게 전한다.

샴마이 학파는 ‘남자가 아내에게서 음행(부정함)을 발견한 경우가 아니면 이혼할 수 없다’고 말한다. 힐렐 학파는 ‘남편을 위해 만든 음식을 태워도 이혼할 수 있다’고 말한다.… 랍비 아키바는 ‘남편이 더 아름다운 여자를 찾았어도 이혼할 수 있다’고 말한다.[15]

특히 힐렐 학파의 관대한 해석은 예수님 당시 널리 받아들여져, 남편이 마음만 먹으면 아내의 사소한 실수라도 이유 삼아 이혼할 수 있는 불평등한 구조를 만들어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남성에 기울어진 시대적 관행에 맞서 산상수훈에서 남자의 간음도 중대한 죄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28) 또한 이어서 이혼에 대해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와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태복음 5:31-32)

마가복음과 마태복음(19:8)에서는 이 가르침을 더욱 깊게 풀어 설명하신다.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인간의 완악함 때문이었으며, 본래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의 의도는 하나 됨과 연합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가복음 10:9) 결혼은 하나님의 뜻이며, 이혼은 인간 죄의 산물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타락 이전, 창조 때의 결혼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신다고 가르치셨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결혼은 단순한 남녀의 계약이 아니라, 영원하고 신비한 사랑의 언약이라는 것이다.

 

E. 가능한 이혼과 불가능한 이혼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불행한 결혼조차 하나님의 뜻일까? 사실 하나님의 창조에는 불행한 결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죄가 결혼을 불행하게 만든 것이고, 이 불행을 줄이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혼을 한시적으로 허락하셨다. 

불신자에게 이혼은 선택의 문제일 수 있다. 그들에겐 결혼 또한 인간 간의 약속일 뿐, 하나님의 언약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빠진 결혼은 그저 둘 사이의 계약일 뿐이다. 반면 결혼을 ‘언약’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결혼의 창시자이며, 첫 결혼의 주관자이심을 믿는다. 이 믿음이 결혼을 단순한 계약에서 언약으로 격상시킨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7장 1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는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된 배우자가 신앙을 이유로 박해를 받고, 결국 불신 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하며 떠날 때, 그 이혼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구약에서도 발견된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여자들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그 자녀들은 히브리어를 배우지 못했고, 율법 책도 읽지 못했다. 이에 학사 에스라는 그들과의 이혼을 명하고, 이방 여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낸다(에스라 10장). 이는 불신자와의 결혼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충분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그렇지만 바울은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불신 배우자가 그리스도인 배우자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결혼을 유지하라고 권면한다(고린도전서 7:13). 이는 불신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거룩함에 이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전도를 목적으로 불신자와 결혼해도 된다는 근거로 삼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그리스-로마 전통 신들을 더 이상 숭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들은 민족도, 언어도, 신분도 가르지 않고 함께 예배드렸다. 이 모습은 유대교처럼 경계를 지키려는 종교와 달리, 유일신 사상을 로마 제국 전체에 퍼뜨리려는 급진적인 행위로 비쳤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불온한 존재로 여겨졌고, 로마 사회를 위협하는 ‘사회악’이라 불릴 수밖에 없었다.[16] 그러므로 자신의 아내나 남편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로마와 그리스의 신들에게 저주 받는 일이며, 무엇보다 신전을 중심으로 모든 상업 행위가 이루어지던 당시에 사회로부터 철저히 고립되는 어려움을 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함께 살기를 택한 불신 배우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어느 정도 믿음의 향기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런 배우자와의 이혼은, 신자 간의 이혼에 준한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자가 이혼할 수 있었던 정당한 이유는 무엇일까?[17]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32절과 19장 9절에서 “음행(porneia)” 외에는 이혼의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치신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 예수님 시대에 음행은 서로 성격을 거슬리게 만드는 것, 요즘 말로는 성격 차이에도 적용 가능할 정도로 매우 광범위하며 작위적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불륜, 간음과 같은 부부간의 성적인 죄로 한정하신다. 그 근거가 바로 다음에 나오는 10절에서 제자들의 반응에서 알 수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러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항변한다. 예수님의 음행에 대한 해석과 적용이 일반인이 지키기에는 너무 높은 윤리적 기준이었다는 것이다.

 

F. 이혼을 통해 결혼을 말씀하신 예수님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음행’ 외에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셨을까? 만약 심각한 정신적·육체적 폭력 속에서, 극도의 외로움과 공포에 시달리는 이가 있다면, 명확한 ‘음행’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이혼하지 말라고 해야 할까?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런 경우 별거를 허용했다. 식탁을 따로 하고, 침소를 나누는 별거는 실질적으로는 이혼에 가까웠지만, 재혼을 금함으로써 법적 이혼과는 구별되었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이 문제를 피해가지 않았다. ‘음행’과 ‘유기’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에 대한 해석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넓기도, 좁기도 했다.[18] 그러나 그들이 한 가지에만큼은 뜻을 같이했다. 하나님은 이혼이 없는 온전한 결혼, 곧 창조의 때 주신 본래의 결혼을 우리 안에 다시 회복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음행’이라는 조건을 매우 좁게 해석하시고, 높은 윤리의 문턱을 제시하신 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사정을 외면한 채 차가운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분은, 감정에 따라 결혼을 쉽게 끝내고, 가정을 무너뜨리며, 자녀를 불안정한 삶 속에 방치하고, 욕망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시대를 향해 말씀하신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은 가벼운 것이 아니며 그것은 세상 어느 제도보다 신성하고 고귀한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결혼은 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이 직접 언약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만드신 사랑의 제도이다. 인간은 그 신비한 울타리 안에서 비로소 진짜 사랑을 배우고, 삶의 안정을 누릴 수 있다. 이 결혼과 가정이라는 안전한 울타리를 떠난 최초의 인물, 가인은 평생 방황하고 안전을 위한 성을 쌓으면서 전쟁과 죽음의 공포 가운데 살았다. 그의 삶엔, 평안이 없었다. 그리고 라멕과 같은 가인의 자손들은 한번의 결혼에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결혼을 욕구하였다(창 4:19). 이렇듯 하나님의 결혼에서 떠난 사람에게는 만족할만한 지속적인 행복이란 없다. 

 

G. 나가며: 결혼을 찬양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

오늘의 시대와 문화는 이혼을 찬양한다. 이혼은 더 이상 숨겨야 할 수치가 아니며, 오히려 개인의 행복을 위한 ‘용기 있는 선택’으로 포장된다. 그러니 누군가가 이혼을 결심하면, 사회는 말한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건 정당한 결정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박수를 보내고, 응원을 보낸다.

그러나 성경과 예수님은 정반대의 목소리를 낸다. 이혼을 말하시되, 실상은 결혼의 고귀함과 본질을 일깨우신다. 왜일까? 이혼은 죄로부터 비롯된 인간의 불행한 선택이지만,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의 언약이기 때문이다. 그 언약은 인간을 사람답게 하고, 살 맛나게 하며, 세상의 첫 공동체인 가정을 이루게 한다. 결혼은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제도였다.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랑을 배우고, 용서를 배우며, 하나님이 주신 진짜 행복의 형태를 조금씩 알아간다. 이러한 이유로 이혼이 행복의 조건이라 여겨지는 이 시대에, 교회는 오히려 결혼의 신비와 그 깊은 의미를 더 정성스럽게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세상 앞에,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하는 아름다운 결혼의 모습을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삶으로 증언해 보여야 할 것이다.

 


각주

  1. G. K. Chesterton, The Superstition of Divorce (London: Chatto & Windus, 1920), 24~25.
  2. 1990년~2023년 통계청 인구동향조사 및 연도별 인구 및 가구 동향 참고.
  3. 목회데이터연구소, “한국인의 결혼, 부모됨 그리고 가족의 삶,” Numbers vol. 285(2025), 5.
  4. https://www.dailian.co.kr/news/view/1013190, 2025년 5월 1일 검색.
  5. 유책주의는 혼인 파탄의 책임이 있는 배우자는 이혼을 요구 할 권리가 없다는 법적 용어이다.
  6. 네이버 뉴스의 경우 1주 200건에서 480여 건으로 급상승 하였다.
  7. 파탄주의는 부부 중 한쪽의 책임 여부와 상관없이 혼인 관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되었다면 이혼을 허용하는 것을 말함.
  8. Albert Bandura, “Self-Efficacy: Toward a Unifying Theory of Behavioral Change,”Psychological Review 84, no. 2 (1977), 191~215.
  9. Charles Taylor, Varieties of Religion Today: William James Revisited. Vienna Lecture Series(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 Pr, 2003), 80.
  10. 김선욱, “서평 : 표현적 개인주의와 현대 미국의 종교의 특징(Charles Taylor, Varieties of Religion Today: William James Revisited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미국학 25. (2002), 348~350
  11. C. S. 루이스, 『네 가지 사랑』, 김종태 번역 (서울: 홍성사, 2005), 190~191.
  12. John Witte Jr., From Sacrament to Contract: Marriage, Religion, and Law in the Western Tradition, 2nd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2), 65.
  13.  바빙크의 경우 결혼이 시민의 제도이기는 하므로 법적인 판정이 필요하나 결혼을 계약으로 보는 사조는 창조 질서와 사회 안녕을 파괴한다고 하였다. Herman Bavinck, Reformed Ethics 3: Christian Life in Society, ed. John Bolt, with Jessica Joustra, Nelson D. Kloosterman, Antoine Theron, and Dirk van Keulen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25),173~185. 
  14. Augustine of Hippo, “On the Good of Marriage,” in St. Augustin: On the Holy Trinity, Doctrinal Treatises, Moral Treatises, ed. Philip Schaff, trans. C. L. Cornish, vol. 3, A Select Library of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First Series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Company, 1887), 397.
  15.  Mishnah, Gittin 9:10.
  16.  Larry W. Hurtado, Destroyer of the Gods: Early Christian Distinctiveness in the Roman World, 『처음으로 기독교인라 불렸던 사람들』, 이주만 역 (고양: 이와우, 2017), 242.
  17.  Wayne Grudem, Christian Ethics: An Introduction to Biblical Moral Reasoning(Wheaton, IL: Crossway, 2018), 805~828. 웨인 구르뎀의 기독교 윤리학의 이혼과 재혼의 논의는 가장 균형 잡힌 복음적인 논의를 하고 있다. 다양한 논의를 소개하고 균형 잡히고 현실에 적확한 결론을 도출한다. 
  18.  바빙크는 다음에서 종교 개혁자들의 논의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Herman Bavinck, Reformed Ethics 3: Christian Life in Society, ed. John Bolt, with Jessica Joustra, Nelson D. Kloosterman, Antoine Theron, and Dirk van Keulen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25), 195~196. 또한 위티 주니어는 책의 한 장을 통해 개혁주의 전통에서도 다양한 논의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John Witte Jr., From Sacrament to Contract: Marriage, Religion, and Law in the Western Tradition, 2nd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2), 155~216.

한기윤 선임 연구위원인 이춘성 박사는 대학에서 고분자 공학을 전공한 후에  20세기 기독교 변증을 대표하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세운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에서 10년 넘게 사역자로 일하면서 C. S. 루이스와 쉐퍼 등의 기독교 변증가와 기독교 철학을 공부하였다. 또한 한국과 영국 라브리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환대 사역과 기독교 변증과 세계관을 가르쳤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석사(M. Div.)를 하였으며,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신칼빈주의 직업 윤리”로 신학 석사(Th. M.), 고신대 일반대학원에서 신원하 교수의 지도 아래 “포스트모던 환대 윤리 사상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기독교 환대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연구”로 박사(Ph.D.)를 하였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 목사,  한기윤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 공저로는 “그리스도 중심 성경읽기 1, 2, 3권(ivp)”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