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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21세기 전쟁: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20세기 말, 인류는 경제적 교류와 글로벌 협력의 시대로 인하여 더 이상 대규모 전면전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1] 그러나 지난 20여 년은 그러한 낙관을 무참히 무너뜨렸다. 9·11 테러로 상징되는 테러리즘은 세계 질서를 흔들었고, 국지적 분쟁이 전면전으로 비화하는 사례는 끊이지 않았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023년 이후 격화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은 이 전조들이 절정에 이른 대표적인 전쟁이었다.

1.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지 어느덧 3년이 지났다. 전쟁은 끝이 아니라 소모전으로 굳어졌고, 매일같이 전선은 피로에 젖어 있다. 수도 키이우 점령에 실패한 러시아는 인력과 포탄을 앞세워 밀어붙이고, 우크라이나는 드론과 정밀 타격으로 러시아의 숨통을 죄는 ‘천 개의 상처’ 전술로 맞서고 있다. 서방의 첨단 무기를 등에 업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를 공격하기에 이르렀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우크라이나 영토의 5분의 1을 거머쥐고 있다.

이 전쟁은 21세기 최초의 국가 간 전면전으로, 새로운 전쟁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의 러시아의 전차 돌격이 과거에 비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드론, 인공지능, 사이버 공격이 교차하는 ‘디지털 전쟁’으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다. 전선은 고착화되었고, 2025년 가을 현재 하루 160~190회의 교전이 이어지고 있다. 전력망과 주거지가 무차별 공격을 받으면서 민간인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으며, UN 인권고등판무관실(UN OHCHR)에 따르면 2025년 8월 31일까지 최소 14,116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고, 36,481명이 부상을 입었다. 실제 피해는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추정된다. 군 전력의 사상자 규모도 이미 양측을 합쳐 수십만 명에 달한다. 난민과 실향민은 천만 명을 넘어섰다.

2.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또한 단순한 무력 충돌을 넘어선다. 그 뿌리는 20세기 중동전쟁과 점령의 역사에 닿아 있다.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 팔레스타인의 땅은 ‘영구 점령지’로 굳어졌고, 그곳은 첨단 무기의 시험장이자 세계 정치의 화약고가 되었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대규모 공격이 이번 전쟁의 불씨를 다시 지폈다. 이스라엘은 ‘초토화 작전’이라 불린 대대적인 군사행동으로 응수했다. 그 뒤로 2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국제 사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현재까지 가자 지구에서만 6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의 보고에 의하면 2만명 이상의 어린이가 희생 당하였다고 한다. 가자는 이제 100년이 지나도 회복하기 어렵다는 절망적 전망이 나온다.

주목할 점은 이 전쟁이 첨단 기술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드론, 정밀 유도 무기, AI 기반의 자동화 시스템이 실전에 배치되며, 그 파괴력은 민간 주거지에까지 미친다. 알고리즘이 표적을 선정하고 공격 순위를 정하는 시대가 왔다. 그러나 효율의 이름으로 집행되는 이 폭력은 잦은 오판과 편향으로 민간인의 삶을 무참히 짓밟고 있다.

 

 

Ⅱ. 21세기 전쟁과 디지털 기술: 전쟁의 ‘도구’

전쟁은 언제나 폭력과 비극으로 평화를 파괴하는 기술을 낳았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기술의 진보’가 단지 무기의 성능을 올리는 것을 넘어 전쟁의 감각과 도덕적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장과 가자 전장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은, 디지털화·자동화·데이터화된 무기체계가 인간을 수단으로 환원하고, 전쟁을 마치 화면 속 게임처럼 경험하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참혹함을 은폐하고 전투자의 죄책감을 약화시킨다는 점이다.[2]

첫째, 전쟁에서 ‘누구를 공격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과정이 점점 인간의 손을 떠나, 차가운 디지털 기술로 넘어가고 있다. 이제는 정찰 드론이나 위성, 감청 기술, 얼굴이나 행동을 인식하는 프로그램, 그리고 사람들의 소셜미디어 흔적까지—이런 수많은 정보들을 인공지능이 모아 분석한다. 그리고는 어떤 사람이 위험한지 점수를 매기고, 누구나 무엇을 먼저 공격해야 할지 추천한다. 하지만 인도주의 단체들과 국제법 전문가들은 이런 기술이 오히려 민간인을 지키기 위한 전쟁 규칙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고 걱정한다. 기계가 잘못 판단하거나, 특정 집단에 편향된 결정을 내릴 경우, 무고한 사람들이 더 많이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컴퓨터 게임의 조이스틱과 같은 기계로 조작 가능한 ‘실시간 화면’은 전쟁을 마치 게임처럼 느끼게 만든다. 우리가 흔히 보는 1인칭 슈팅게임(FPS)처럼, 사람이나 팀이 화면 속 적을 조준하고 공격하는 방식이 실제 전장에서도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점점 현실감을 잃고, 자신이 하는 행동의 결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드론을 조종하는 사람은 실시간 영상과 열화상, 목표 표시가 나오는 화면을 보며 공격 대상을 정한다. 하지만 그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화면 속 점이나 모양처럼 보일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이런 방식은 공격자가 상대방에 대한 공감 능력을 약하게 만들고, 실제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도덕적 감각을 흐리게 한다. 그래서 폭력적인 행동을 더 쉽게 하게 만들고, 그로 인한 죄책감이나 책임감도 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전쟁이 새로운 기술을 시험하는 ‘실험장’처럼 활용된다는 점도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일부 전문가들은 가자지구나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군대와 기업이 함께 최신 무기나 감시 기술을 실제로 써보고 알리는 기회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국방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와, 사람을 감시하는 기술을 파는 산업이 손을 잡으면, 실제 전쟁터에서 신기술의 성능을 시험해보려는 유혹이 생긴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의 고통과 무고한 희생이 기술 실험의 ‘대가’가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런 구조는 전쟁을 기술 발전의 도구로 만들고, 사람들의 피해를 하나의 ‘비용’이나 ‘계약 조건’처럼 취급하게 만든다. 즉, 전쟁이 점점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산업과 연결되어 기술과 돈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는 뜻이다.

넷째,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공격 대상(장소와 사람)의 결정을 돕게 되면서, 책임소재가 모호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시스템이 특정 대상을 공격하라고 ‘추천’하고, 사람이 그 추천을 받아들이면, 그 결과로 생긴 피해에 대해 누가 책임을 져야 할지 불분명해진다. 사람이 직접 판단한 것이 아니고, 시스템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면, 법적이나 도덕적인 책임을 회피하려는 여지가 생긴다. 이처럼 책임이 알고리즘과 절차 속으로 흩어지면, 전쟁 중에 일어난 잘못을 밝혀내고, 피해자를 위한 회복이나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하는 일이 훨씬 더 어려워진다. 국제인권감시단체(HRW)나 적십자 같은 기관들도, 이런 구조 때문에 국제 전쟁법이나 인권법을 적용하기가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문제 되는 것은, 전쟁의 참혹함이 우리 눈앞에서 감춰지고, 사람들의 도덕적 감각이 무뎌지고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 시대의 전쟁은 영상 몇 초, 숫자 몇 개로 현실을 요약해버린다. 이렇게 잘게 나뉜 화면과 정보는 전장의 고통과 비극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한다. 게다가 ‘정밀하다’, ‘과학적이다’라는 말은 기술을 미화하면서, 그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통계 숫자나 성능 평가 같은 말들 속에서, 실제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점점 잊히기 쉽다. 군사 홍보나 소셜미디어는 보고 싶은 장면만 강조하고, 불편한 진실은 감춘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경우엔 사람들은 과도한 분노나 애국심에 사로잡혀, 더 큰 폭력과 잔혹함조차 정당한 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이 전쟁에서 누가 잘못했는지 묻기도 어려워진다. 악마 같은 적군과, 영웅으로 포장된 우리 편만 남게 된다.

기술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 기술이 어떻게 쓰이고, 어떤 사회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자동화된 무기와 실시간 감시는 전쟁을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만들지만, 동시에 인간을 단순한 ‘정보’나 ‘목표 점수’로 바꿔버린다. 그런 순간, 우리는 전쟁의 폭력을 쉽게 받아들이고, 더 넓게 정당화하게 된다.

기술은 전쟁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지 몰라도, 그게 정의(justice)는 아니다. 그리고 사람의 존엄함을 지켜주지도 않는다. 전쟁의 고통이 그저 화면 속 점으로만 보이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잃게 된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키고자 했던 그 인간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전쟁의 새로운 양상을 바라보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이 질문에 바로 답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보다 앞선 시대의 사람들은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해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의 논의들을 되짚어보는 일은, 지금 우리가 던지는 이 질문에 더 깊이 있고 실질적인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Ⅲ. 전쟁을 보는 두 세계관

인류는 오랜 세월 전쟁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관을 형성해 왔다. 하나는 전쟁을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온 진화의 산물, 발전을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이해하는 현실주의적 시각이다. 다른 하나는 전쟁을 윤리와 도덕의 문제로 규정하는 시각이다. 교회는 후자의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현실은 늘 만만치 않았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앞에서 현실주의가 목소리를 높였고, 도덕과 윤리마저도 전쟁을 합리화하는 장식품처럼 쓰이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도덕적으로 성찰하는 시각이야말로 더 큰 비극을 막아내는 마지막 안전망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다음에서는 전쟁을 둘러싼 현실주의적 세계관과 성경적 세계관을 비교하고, 교회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현실주의 세계관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법철학자 크리스티안 슈타들러(Christian Stadler) 교수는 전쟁을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인류 사회의 존재 방식이자 에너지원이라 말한다. 그는 “전쟁은 뿌리칠 수 없는 동시에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며,[3] 인류가 전쟁을 이해하고 다스리는 것은 실존적 과제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전쟁을 “모든 사건의 아버지요 왕”이라 하며, 전쟁이야말로 인간 존재와 문명의 동력이라 여겼다. 슈타들러의 해석처럼, 전쟁은 파괴만이 아니라 문명을 추동하는 필연적 힘으로 이해되었다.

전쟁을 현실주의적 시각으로 보는 관점은 근대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중세 기독교 세계관 아래 전쟁은 도덕과 신앙의 문제로 다루어졌지만,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며 이성 중심의 합리주의 시대가 열렸다. 마키아벨리 이후, 전쟁은 국가 간 힘의 투쟁으로 여겨졌고, 도덕적 판단에서 벗어나 일정한 법적 조건만 갖춘다면 정당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즉, 정당한 이유(iusta causa), 국가적 권위(auctoritas), 법적 형식(forma iuris)만 충족되면 전쟁은 ‘합법적’ 행위가 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인간의 이성에 기반한 낙관적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 30년 전쟁 후, 유럽은 종교 대신 이성과 사회 계약을 통해 평화를 꾀하고자 했으나, 이는 교회의 윤리적 기준이 무너지고 법과 계약이 그 자리를 대신한 결정적 순간이었다. 문제는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하다는 데 있었다.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결국 더 큰 비극을 불러왔다. 종교 전쟁이었던 30년 전쟁의 희생자는 약 8만 명이었지만, 20세기의 전쟁은 1억 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갔다. 역사는 법과 계약만으로는 전쟁을 막을 수 없으며, 도덕과 윤리가 결여된 평화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현실주의적 세계관이라는 쉬운 길을 선택하였다.

2. 성경적 세계관(도덕적 관점)

기독교는 4세기 이전까지 로마 군인이 되거나 전쟁에 참여하는 일을 거부하며 평화주의적 태도를 보여왔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곧 오늘날 재세례파 교회가 말하는 ‘비폭력 평화주의’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고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교회는 로마 제국의 박해 아래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머지않았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적하는 로마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군인이 된다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4]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그러나 312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리고 4세기 후반,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쇠락해 가는 제국의 마지막 희망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결정적인 계기는 410년, 로마 제국의 심장부였던 로마 시가 서고트족에 의해 함락당한 사건이었다. 이때 제국의 통치자들은 시민들을 보호하는 데 아무런 실질적 역할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가 평화 조약 협상의 중재자로 나서려 했으나 황제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로마는 철저히 유린당하고 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교회는 시민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구호와 장례, 난민 보호 활동을 주도하며, 무너진 제국 안에서 구제와 행정, 교육, 질서 유지의 중심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5]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히포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게 된다. 그는 오직 무자비한 전쟁을 통해서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던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허상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을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했고, 제국의 몰락은 곧 교회의 몰락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믿음을 반박하며, 『신국론』을 통해 하나님의 도성과 세속의 도성이라는 두 나라가 이 세상에 병존하고 있으며,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의 도성에만 있다는 신학적 통찰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자들이 이 땅의 세속 도시에서 어떠한 책임과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하였다.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비극 속에서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인간의 죄성과 세상의 불완전함 속에서 전쟁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무분별하고 탐욕적인 폭력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전쟁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의로운 목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즉, 전쟁은 복수나 이익 추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무고한 생명을 보호하고, 질서를 회복하며, 악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전쟁을 감행해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전쟁의 목적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 평화를 회복하는 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이후 13세기에 이르러,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정당한 전쟁이 되기 위한 세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첫째, 정당한 권위가 있어야 한다. 즉, 국가나 합법적 통치자만이 전쟁을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침략이나 약탈이 아닌, 불의에 대한 응징이나 자국 방어가 목적이어야 한다. 셋째, 올바른 의도가 있어야 한다. 전쟁의 목적이 복수나 영토 확장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를 회복하는 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이 세 가지 원칙을 통해 전쟁을 제한하고, 폭력을 윤리적으로 통제하려 했다.[6]

루터(Martin Luther)

종교개혁 시대에 들어서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은 이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적 상황에 맞게 발전시켰다. 루터는 국가의 역할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해하였다. 그는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칼을 허락하셨다”고 말하며, 국가의 무력 행사는 죄를 억제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라고 보았다. 따라서 루터에게 전쟁은 악을 제거하기 위한 ‘필요악(necessary evil)’이었다. 개인이 복수하는 것은 금지되지만, 국가가 정의를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보았다.

칼뱅(Jean Calvin)

칼뱅은 루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쟁의 정당성을 공공의 정의 개념과 연결시켰다. 그는 “불의가 세상에 만연할 때, 정의를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칼뱅은 전쟁이 불가피할 때라도 그것이 인간의 탐욕이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면 정당하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전쟁 중에도 도덕적 절제를 잃지 말아야 하며, 불필요한 살상이나 약탈을 금해야 한다고 가르쳤다.[7]

램지(Paul Ramsey)

현대에 와서 폴 램지(Paul Ramsey)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현대 윤리학의 언어로 다시 해석하였다. 그는 냉전 시대 핵무기 경쟁 속에서 전쟁의 도덕적 의미를 묻고자 했다. 램지는 전쟁을 단순한 국가 간의 권력 투쟁이 아니라, “이웃 사랑의 한 형태”로 이해했다. 그에게 정당한 전쟁은 ‘이웃을 지키기 위한 사랑의 행위’였다. 예를 들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폭군을 막기 위해 전쟁을 감행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그는 “진정한 사랑은 악을 방관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무저항적 평화주의의 한계를 비판했다.[8]

이렇게 발전해 온 정당전쟁론은 단순히 전쟁을 허용하는 이론이 아니다. 오히려 전쟁을 가능한 한 억제하고, 불가피할 경우에만 도덕적 통제 아래서 수행하도록 하는 윤리적 장치이다. 전통적으로 정당한 전쟁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전쟁 개시의 정당성 (jus ad bellum, justice toward war)과 전쟁 행위의 정당성(jus in bello , justice in war)이라는 두 전제에 의해서 파생되고 발전된 최소한의 원칙들 중에서 하나라도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신원하는 이 원칙을 8가지로 정리하여 설명한다.[9]

 

첫째, 정당한 원인(just cause)이다. 전쟁은 침략당한 나라가 스스로를 방어하고, 부당한 침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

둘째, 정당한 의도(just intent)이다. 전쟁의 목적은 복수나 상대의 전멸이 아니라, 깨진 평화를 회복하려는 진지한 의지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셋째, 최후의 수단(the last resort)이다. 전쟁은 모든 외교적·비폭력적 방법이 무력화된 후, 정말로 다른 선택지가 없을 때에만 선택되어야 한다.

넷째, 합법적 권위(lawful authority)에 의해 공적으로 선포(official declaration)되어야 한다. 전쟁은 국가의 정당한 정부가 선포한 경우에만 허용되며, 결코 사적인 집단이나 개인에 의해 수행되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승리의 가능성(feasibility of victory)이 있어야 한다. 무모한 전쟁이 아니라,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오히려 고통보다 더 큰 선이 도출될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 이는 전쟁 행위의 정당성(jus in bello)에 해당하는 원칙으로, 공격 목표와 무기의 제한(limited objectives)이 요구된다. 전쟁의 목적이 평화의 회복이라면, 결코 그 나라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사회의 기반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일곱째, 민간인의 철저한 보호(noncombatants immunity)가 이루어져야 한다. 전쟁은 군사적 충돌이어야 하며, 무고한 시민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여덟째, 공격의 비례성(proportionate means)이다. 전쟁은 자국이 입은 피해를 넘어서는 과도한 폭력이나 보복이어서는 안 되며, 사용된 수단이 정당한 목적에 비례해야 한다.

이 원칙들은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쟁이 폭주하지 않도록 붙잡아 두려는 윤리적 제동장치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정당전쟁론은 결코 전쟁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과 세상의 불의 속에서도, 가능한 한 정의롭고 절제된 방식으로 평화를 추구하려는, 말하자면 ‘비극 속의 윤리’인 것이다.

 

. 왜 여전히 ‘정당전쟁’인가?

물론 정당전쟁론이 폭력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수단으로 오용되었던 비극의 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탐욕과 권력욕으로 점철된 십자군 전쟁과 같은 종교 전쟁은 그 전형적인 예다. 그들은 자신들의 폭력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했고, 신의 이름 아래 더 무자비한 살육을 정당화했다. 이러한 참혹한 왜곡은 9·11 테러 이후에도 되풀이되었다.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인 아이시스(ISIS) 같은 극단적 세력이 성전(聖戰)을 내세우며 자행한 테러 역시, 그 나름의 ‘정당한 전쟁’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에게 정당전쟁의 원칙은 오히려 폭력의 논리를 강화하는 무기로 전락한 셈이다.

지금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처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무력 충돌 속에서, 각 국가는 저마다의 논리로 자기 전쟁을 정당화한다. 그 과정에서 ‘정당전쟁론’은 마치 도덕적 면죄부처럼 동원되어 폭력을 합리화하는 구실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정당전쟁론은 폭력 수단을 전면 배제하는 평화주의와 대비되는 극단적인 이론처럼 취급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라 할 수 있다. 정당전쟁론은 극단에 있는 평화주의와 현실주의를 중재하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  

평화주의는 무력 자체를 악하게 여기기 때문에 가족과 이웃의 부당한 희생 앞에서도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지양한다.  또한 비폭력적 행동이 궁극적으로 타인을 감동시켜 폭력을 멈추게 만들리라는 이상주의에 머무르기도 한다. 이때문에 이웃의 희생을 방치하고 실재적으로는 방관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와 정반대로 현실주의는 전쟁은 불가피하며 나아가 인류 진보의 동력으로 미화하는 극단에 위치하고 있다. 정당전쟁론은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더 큰 악과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부족한 윤리적 선택, 곧 차악(次惡)의 선택으로 중재의 역할을 한다.[10] 결국 정당전쟁론이란 망해가는 로마를 바라보며 교회 안에서 희망을 찾았던 로마의 시민들을 강도 맞은 이웃으로 여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웃 사랑의 명령을 끝까지 성실하게 실천하고자 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이후의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고뇌의 결실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현재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예를 들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사용되고 있는 인공지능(AI), 드론 등 디지털 기술의 활용은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윤리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특히 정당전쟁론에서 ‘전쟁 행위의 정당성(jus in bello)’과 관련된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원칙에 대한 더 깊은 논의에 참여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이 방관하고 있다면 이는 이웃 사랑의 계명에 성실하지 않은 무책임한 행동이다. 난민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하고 전쟁의 실상을 알리며 기도하는 것도 이웃 사랑과 평화를 위한 길이지만, 구체적으로 전쟁의 규칙을 정하고 무력 사용의 도를 넘지 않도록 국제적 협력과 법을 만드는 것은 궁극적인 평화를 위한 선재 조건이다. 21세기의 전쟁은 20세기의 전쟁과 완전히 다른 양상의 전쟁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국제법은 핵무기나 강력한 재래식 대량 살상 무기 사용을 제한함으로써, 전쟁의 윤리적 한계를 설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쟁은 ‘익명의 대량 살상’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겨냥하되 그것을 직접적 폭력이 아니라 게임처럼 느끼게 만드는 디지털 시스템에 의해 수행된다. 이는 도덕적 감각을 무디게 하고, 폭력을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디지털 무기 체계에 대해 새로운 기술적이고 윤리적인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 특히, 인공지능이 적군을 자동으로 식별하고 타격 대상으로 결정하는 시스템에 대해 과도한 신뢰를 보내서는 안 된다. 과거의 전쟁은 오류가 있었지만, 인간의 판단과 결단이 중심에 있었고, 인간은 윤리적 책임을 의식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그러한 책임을 인간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해버린다. 그 결과, 한 인간의 생명이 윤리적 고려 없이, 책임지지 않는 기계에 의해 결정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어쩌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우생학이라는 거짓 과학을 근거로 유대인을 말살한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기술을 통해 재현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 기술이 전쟁터에 깊숙이 스며들면 도덕적 판단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다시금 현실주의가 지배하는 전장이 될 수 있다. 이렇기에 우리는 오늘날의 전쟁이 비인격적이고 비윤리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도덕적이며 성경적  세계관에 기초한 정당전쟁론의 중요성을 더욱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시급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한 공동체로서 세상 속에서 전쟁이 종식되고, 그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오랜 역사 속에서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 신학자들을 통해 세상에 제시해온 ‘정당전쟁론’의 핵심 정신이다. 

 

. 나가며: 전쟁과 교회의 책임

전쟁은 기근과 전염병과 더불어 인류가 마주해온 가장 절망적인 사건이다. 이 중에서 전쟁만큼 옳고 그름의 분별이라는 하나님의 정의가 절실히 요청되는 사건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쟁은 과거와 다르다. 디지털 무기와 드론, 다양한 대량살상무기는 비대면 전투를 일상화시켰고, 공격과 방어의 구분은 점점 흐려지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모호해졌고, 정의는 진공 속에 놓인 채, 인간은 무도덕의 영역에서 버튼 하나로 수많은 생명을 사라지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버튼 위에 놓일 무기가 핵미사일이 아닐 것이라는 믿음의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아마 지금 이 믿음은 아무런 윤리적 통제도 받지 않는 무도덕의 영역에 방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 문제 앞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 4세기에서 5세기 초, 아우구스티누스와 교회 지도자들이 고심했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세상을 향한 ‘이웃 사랑의 윤리적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단지 기도의 영역에 머무를 일이 아니다. 고통의 현장을 향한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당전쟁론’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정당전쟁론에 관심을 가지고 지금의 현실에 맞게 더 정교하게 다듬고 발전시키는 데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정당전쟁론은 그 자체로 완전하거나 절대적으로 정당한 이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하게 명하시고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을 통해 실현될 참된 평화를 향해 전지하고자 하는 ‘신앙적 태도와 결단’에 가깝다는 것이다.[11] 세상 속에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려는 이들의 불완전한 고뇌와 실천, 그 믿음의 걸음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각주

  1.  Mark Leonard, The Age of Unpeace: How Connectivity Causes Conflict, 『비평화의 시대: 연합성이 어떻게 갈등이 되는가』, 김일곤·박상준·이영주·이하얀 옮김 (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2025), 7; 20.
  2.  황용하, “전쟁의 참상과 인공지능,” 서보혁 외, 『전쟁에게 평화를 묻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연구』 (서울: 모시는사람들, 2025), 113-136.
  3. Christian Stadler, 『유럽 정신사의 기본 개념 9: 전쟁(Krieg)』, 이재원 옮김 (서울: 이론과실천, 2015), 16.
  4. Roland H. Bainton, Christian Attitudes Toward War and Peace: A Historical Survey and Critical Re-evaluation(New York: Abingdon Press, 1960), 66; 74-76.
  5. 서을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쟁과 평화론〉, 『법철학연구』 제14권 제1호(2011), 14–20.
  6. 서을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쟁과 평화론〉, 30-35.
  7. 장 칼뱅, 『기독교 강요: 1559년 라틴어 최종판 직역 Ⅳ』, 문병호 옮김 (서울: 생명의말씀사, 2020), 제20장 10절
  8. Paul Ramsey, The Essential Paul Ramsey: A Collection, ed. William Werpehowski and Stephen D. Crocco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94), 60-83.
  9. 신원하, 『전쟁과 정치: 정의와 평화를 향한 기독교 윤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140.
  10. 신원하, 『전쟁과 정치: 정의와 평화를 향한 기독교 윤리』, 154.
  11. 변종찬,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로운 전쟁’ 이론,”신학전망제200호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18), 161.

이춘성 목사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세운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에서 사역하였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석사(M. Div.), 고신대에서 기독교 윤리학 박사(Ph.D.)를 하였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 목사,  한기윤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