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헌법불합치, 그 후
2019년 4월,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형법」 제269조 제1항(자기낙태죄)과 제270조 제1항 중 ‘의사’에 관한 부분(의사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로부터 어느덧 6년이 흘렀다. 그러나 입법은 제자리에 머물렀고, 새로운 법 제정은 지연되어 왔다. 그 사이 낙태는 여전히 금기와 현실 사이에 놓인 채, 우리 사회가 OECD 국가 중 출산율 최하위이자 낙태율 1위라는 오명을 벗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7월 11일,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 외 10인이 발의한 모자보건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다시 한 번 사회적 논쟁의 중심에 섰다. 이번 개정안은 낙태의 정의와 범위를 확장하고, 배우자의 동의 요건을 삭제했으며, 건강보험 급여 적용과 의료인 처벌 조항의 폐지를 담고 있다. 이는 단순한 법조문 수정이 아니라, 생명을 대하는 우리 공동체의 윤리적 기준을 다시 묻는 일이다. 이제, 남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이 개정안의 네 가지 핵심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중절수술’에서 ‘중지’로
첫째로 주목할 변화는, 모자보건법에서 ‘낙태’를 규정하는 용어가 기존의 ‘인공임신중절수술’에서 ‘인공임신중지’로 바뀐 점이다. 단어 하나의 교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변화는 낙태를 윤리적 문제로 보기보다는 가치 중립적인 행위로 인식하게 하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종전 법령은 제2조 제7항에서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태아가 모체 밖에서 생존할 수 없는 시기에 수술로 태아와 그 부속물을 인위적으로 배출하는 행위”로 정의하고 있었다. 이는 곧 태아가 자궁 밖에서 생존 가능한 상태에 이른 경우, 낙태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낙태의 허용 여부는 생명에 대한 의학적 판단을 바탕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개정안에서는 ‘인공임신중지’라는 용어를 채택하면서, 기존 정의에서 ‘의학적 판단’이라는 기준을 삭제하고, 대신 “수술이나 약물 등 의학적 방법으로”라는 문구로 대체했다. 이 변화 속에는 태아의 생존 가능성이나 의료진의 윤리적ᄋ과학적 판단 기준이 빠져 있다. 그 결과, 산모의 의사만으로 낙태가 결정될 수 있게 되었으며, 의사는 생명을 지키는 주체가 아니라 생명을 종료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더불어 ‘의학적 방법’이라는 광의의 표현은 약물과 수술 모두를 포함하면서, 임신 초기부터 후기까지 거의 모든 시기의 낙태를 사실상 가능하게 하는 문을 열어두고 있다.
공동체에서 지워진 생명
둘째, 개정안은 제14조를 삭제함으로써 배우자나 가족의 동의 없이도 낙태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는 낙태라는 중대한 결정에 있어 가족과의 논의, 혹은 사회적 숙고의 여지를 차단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새로운 생명이 몸 안에 깃든 순간부터 그 결정은 단지 개인의 자유 영역에 머무르기 어려워진다. ‘개인’은 고립된 섬이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산모의 권리와 태아의 생명은 서로 충돌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보호받아야 할 소중한 가치라는 점에서, 생명을 둘러싼 결정은 보다 깊이 있는 사회적 논의 위에 서야 할 것이다.
보험급여라는 유인
셋째, 새로 신설된 제14조 제2항은 낙태 관련 모든 의료 행위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물론 경제적 형편 때문에 안전한 시술이 제한되어선 안 된다. 그러나 국가가 생명의 중단에 재정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경우, 사회 전체의 생명 존중 의식은 점차 희미해질 수 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치러야 하는 개인의 비용은 늘고, 생명을 포기할 때의 비용은 줄어드는 구조 속에서, 국가가 후자에 지원을 보태게 된다면, 젊은 세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 선택이 생명보다는 편의와 경제성에 기울어질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윤리에서 배제된 의사
넷째, 이번 개정안은 기존 모자보건법 제28조, 즉 합법적인 낙태 시술을 한 의료인에게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한 조항을 삭제하였다. 이는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무력화된 의사 처벌 규정과 함께, 낙태 관련 의료 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의 근거를 전면적으로 제거하는 조치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수술이든 약물이든 낙태를 시술하거나 처방한 의료인에게 그 어떤 법적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낙태는 사실상 제한 없이 허용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으며, 의료인은 생명을 살릴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에 대해 윤리적 기준 없이 개인의 판단과 선호에 맡겨지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생명의 무게를 가늠해야 하는 의료현장이, 그 무게를 더는 묻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남인순 의원을 포함한 10인의 국회의원이 발의한 이번 모자보건법 일부개정안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극대화하는 데 모든 초점을 맞춘 법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산모 개인의 선택과 행복이 중요하다고 해서, 생명을 지키려는 의료인의 의무와 윤리까지 뒤로 미루어도 되는가 하는 질문은 남는다. 이는 생명을 보호해야 할 의사에게 오히려 생명을 배제하라는 요구일 수 있으며, 그 윤리적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에 대해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헌법적 가치를 경시한 법안이라며 강도 높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기독교의 눈으로 본 태아와 산모의 생명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생명의 종교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존엄한 존재임을 뜻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분은, 인류에게 더 이상 죽음이 아닌 생명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인간이 살아야 할 존재임을, 그 삶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진리를 가르친다. 그 생명의 가치는, 이미 세상에 나와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이들뿐 아니라, 아직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눈과 코, 입이 채 형성되지 않은 태아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생명은 단지 생리적 기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미 귀하게 지어진 존재라는 신앙 고백이기 때문이다.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모태에서 지어지던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을 고백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의 기원을 되짚으며 생명 그 자체가 얼마나 경이로운 선물인지를 노래한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편 139편 13~16절)
또한 예레미야 1장 5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으며,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단지 출생 이후의 존재로 보신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태중에서 형체조차 갖추기 전부터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여기셨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형상이 채 갖추어지기 이전부터 아시고, 생명으로, 또 그 생명 안에 담긴 사명과 존귀함으로 기억하셨다. 인간의 생명은 그 시작부터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고, 그분의 계획 속에서 고유한 의미를 지닌 존재로 불리운 것이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인간의 생명이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교한 손길과 섭리로 형성된 경이로운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시편 139편을 주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태중에서 최초로 잉태되었을 때의 배아는 아무런 형체가 없다. 다윗은 자신이 아직 형체 없는 덩어리였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셨다고 말한다. 논증 방식은 ‘더 큰 것에서 더 작은 것으로’이다. 그가 아직 어떤 분명한 형태를 갖추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 알려졌다면, 하물며 지금이라고 어찌 하나님의 살피심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는 이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덧붙인다. 곧 그의 형성 과정 전체가 하나님께 완전히 알려졌다는 뜻이다.[1]
기독교는 언제나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왔다. 그중에서도 스스로 생명을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의 생명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 태아는 그 누구보다도 연약한 존재이며, 동시에 산모 역시 출산과 양육의 무게를 홀로 감당해야 하는 취약한 상황 속에 놓여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느 한 편만을 선택할 수 없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면서도, 산모가 안전하게 출산하고 아이를 기를 수 있도록 제도적, 정서적 지지를 아끼지 않는 것-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개정모자보건법에 바란다
그러므로 개정될 모자보건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먼저, 생명을 경시하는 ‘낙태’라는 야만적 방식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생명의 존엄을 지키는 윤리적 기준을 분명히 명시해야 한다. 부득이하게 낙태가 허용되어야 한다면, 그 시기를 의학적 기준과 사회적 합의, 숙려 기간을 통해 제한하고, 충분한 상담과 정확한 정보 제공을 제도화해야 한다. 또한, 의료인의 양심적 거부권을 보장하는 조항도 마련되어야 한다. 더불어, 미혼모와 저소득 가정을 위한 실질적 지원 체계를 강화함으로써, 여성이 낙태 외의 ‘생명’이라는 선택을 할 수 있는 현실적 기반을 제공해야 한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다. 그 생명을 지키는 일은 단지 여성이나 태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윤리이며, 이 사회 전체가 함께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생명을 둘러싼 갈등을 외면하지 않고 생명에 반하는 이같은 법 앞에 진지하고도 진심으로 마주서야 할 때다.
- John Calvin and James Anderson,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vol. 5 (Bellingham, WA: Logos Bible Software, 2010), 217-218.

한기윤 선임 연구위원인 이춘성 박사는 대학에서 고분자 공학을 전공한 후에 C. S. 루이스와 함께 20세기 기독교 변증을 대표하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세운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에서 사역하였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석사(M. Div.)를 하였으며,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신칼빈주의 직업 윤리”로 신학 석사(Th. M.), 고신대 일반대학원에서 신원하 교수의 지도 아래 “포스트모던 환대 윤리 사상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기독교 환대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연구”로 박사(Ph.D.)를 하였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 목사, 한기윤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