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대한제국, 일본제국 식민지라는 서로 이질적인 국가 체제의 변화가 약 5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급박하게 이루어진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초에, 한국인은 봉건적 유교 질서의 해체, 급격한 서구 문명 유입, 일본에 의한 식민 통치라는 다중적 위기에 직면했다. 급속한 시대 변화의 의미를 일찌감치 알아차린 양반 가문의 자제나 지식인, 특히 남성은 이런 변화에 빠르게 대처해, 변화된 사회에 걸맞은 위상과 사회적 신분의 유지, 혹은 신분상승을 기득권 세력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이루어 냈다. 그러나 신분 및 성별 질서가 여전히 확고부동했기에, 평민과 천민 등 사회 하층민, 여성, 경제력을 갖추지 못한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 장애인과 병자, 시골 오지 거주자 등에게는 새로운 문명 질서가 부여한 최소한도의 기회마저도 차단되어 있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188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에 속속히 입국한 영어권 출신의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그들의 우선순위 사명인 그리스도교 전도에 그치지 않고, 당대 사회구조에서 배제된 존재들인 여성, 천민, 과부, 한센인, 병자들에 대한 포괄적 환대 실천을 위한 기반을 교육선교와 의료선교 등을 통해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은 서서히 한국 사회에 기존에는 없었던 새로운 공동체 질서 창출의 기반을 구축했다.
전통 유교 사회와 여성의 소외
조선 말기와 식민지 초기에 혼인, 교육, 재산권, 사회활동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여성과 사회적 약자가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대개 여성은 정식 이름이 없었다. 가부장제가 절대적이었던 시대인 만큼, 여성은 태어나면 아버지에게 속하여 누구네 집 딸로 불렸고, 결혼하면 남편에게 속하여 누구 마누라로, 남편이 죽으면 아들에게 속하여 누구 엄마로 불리는 종속적 존재였다. 출신 지역을 따서 경주댁, 대구댁, 전주댁, 평양댁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결혼 전 어린 시절에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태어난 달을 따서 별 의미 없이 삼월이, 사월이, 오월이 등으로 불리거나, 아이가 태어난 공간을 따라 분녀나 분이로 불리거나, 아들을 선망했지만 딸을 낳아 실망한 부모가 더는 딸을 낳지 말자는 의미를 담은 끝숙이나 말자로 불렸다. 그나마 가졌던 이름도 결혼하여 시집에 가고 나면 아예 사라졌다. 결혼한 여성은 출가 외인으로 취급되어, 원래 속해 있던 가족으로부터도 배제되었다.
양반의 딸이라고 해서 상황이 특별히 나은 것은 아니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글이나 학문을 배울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다. 신분에 상관없이, 남편이 먼저 사망하여 과부가 된 이는 남편 가문의 짐이자 수치로 여겨졌다. 남편의 죽음에 딱히 원인을 제공하지 않은 경우에도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는 사회적 비난을 받아야 했다. 아이, 특히 아들이 먼저 죽으면 “자식 앞세운 어미”라며 비난을 받았다. 과부의 재혼은 제도적으로 원천 봉쇄되었다. 문중의 질서, 친족 조직 및 제사의 계승 같은 주제를 다루는 규약을 담은 종법(宗法)에 따라, 여성은 호적이나 족보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호적과 족보상의 선대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를 위한 음식 준비 및 손님맞이 등의 모든 일은 철저하게 여성의 몫이었다. 이렇게 거의 모든 준비를 하고도 여성은 제사 참여를 금지당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로 이어지는 근대 이행기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전파한 그리스도교(개신교와 천주교)뿐만 아니라, 평등을 강조한 동학, 개화 유학 등도 여성에 대한 의식과 인권 향상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 여성들이 따로 자체적인 계(契)조직을 결성한 사례도 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사회 전반의 차별적 인식이나 편견이 크게 교정된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 낙인 집단(질병환자, 한센인, 고아, 노비)
구한말과 20세기 전반기에 질병, 장애, 신분에 따른 차별은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집단적 공포에 빠진 사람들은 전염병(천연두, 콜레라 등)에 걸린 이들을 거의 당연하다는 듯 길거리에 버리거나, 산, 동굴 등에 격리했다. 특히 병에 걸린 아이가 아들이 아니라 딸인 경우, 버려질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 한센인은 무엇보다도 외모가 혐오스러웠기에, 온갖 왜곡된 소문과 풍문을 덮어쓰고 가족 및 마을에서 내쫓겼다. 이들은 죽은 후에도 가족의 외면을 받아 아예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부모나 돌볼 가족이 사망하고 없는 생물학적 고아는 말할 것도 없고, 부모가 버렸거나 부모와 헤어진 무의탁 어린이의 비율도 높아 ‘사회적 죽음’ 상태가 만연했다. 이런 아이들은 대개 노예나 창기, 기생, 풍물패, 도적, 폭력 집단의 일원이 되었다.
선교사를 비롯하여 서울에 살던 외국인들은 서울에 천연두나 콜레라 같은 급성 집단 전염병이 발병했을 때, 병에 걸린 어린 여자 아이를 도망치거나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공터 나무에 묶어두고, 사망 시 4대문 밖 집단 시체터에 내다버린 현장을 목격했다는 기록을 여러 차례 남겼다. 의학과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기였으므로, 전염병과 질병의 원인이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민간인 대부분은 질병을 불러온 ‘손님마마,’ 즉 강력한 힘을 가진 귀신을 달래는 의식으로 병을 막거나 치료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전염병 시기에 굿, 제사, 부적 등의 미신이 더 극성을 부렸다. 당연히 이런 행위들의 치료 효과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병자, 혹은 병자의 가족을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장악한 무당과 판수, 주술사, 무자격 의사로 인해 질병 창궐기에 사회적 혼란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 빈자, 사회적 소외자들의 해방 및 존엄성 회복은 도저히 사회 내에서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1]
내한선교사들의 사회윤리적 기여: 스크랜턴 가문의 환대 실천 실례
한국 개신교 선교 및 발전 역사에서 감리교가 차지한 역할은 고유하고도 독특하다. 1880년대 이래 한국에는 미국 북장로회, 미국 남장로회, 호주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등, 영어권 배경의 네 개 장로회 선교회가 입국하여 활동했다. 첫 북감리회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는 1885년 4월에 첫 북장로회 복음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와 함께 한국에 입국했으므로, 한국 개신교의 시작을 장로교회와 함께 공유했다. 그러나 4개 선교회가 활동한 장로회와는 달리, 감리교의 경우, 미국 북감리회와 남감리회 2개 선교회만 활동했다. 투입된 인력과 재정, 활동 공간이 장로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했다. 따라서 한국에서 감리교회는 교세, 성장 속도, 영향력, 지명도 모두에서 장로교회를 이은 2인자 자리에 머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리교회가 역사적으로 담당한 특별하고 탁월한 업적을 많은 역사가들은 인정한다. 한국 감리교회는 한국 여성을 위한 교육과 의료 활동 분야에서의 공헌도와 영향력이 다른 교파, 다른 종교, 심지어 한국 근대사의 어떤 조직이나 단체보다 뛰어나다. 이 공헌과 업적은 한 여성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에게서 기인한다.
종편방송 JTBC는 2015년 12월 24일에 성탄절 특집 다큐멘터리 한 편을 방영했다. “조선을 향한 생명과 사랑: 윌리엄 스크랜턴”이라는 제목의 이 다큐멘터리는 첫 내한 감리교 선교사 중 하나인 윌리엄 스크랜턴과 그의 가족을 텔레비전 방송 사상 처음으로 조명한 프로그램이었다. 종교 배경을 갖지 않은 종편 방송인 JTBC가 이 다큐멘터리를 홍보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스크랜턴을 소개했다.
“한국 선교사에 잊혀진 이름, 윌리엄 스크랜튼. 130년 전, 엘리트 선교를 담당했던 아펜젤러와 함께 버림받은 ‘강도 만난 이웃’이었던 민중을 위해 생애를 바친 ‘선한 사마리아인’의 표상.”[2]
널리 알려진 감리교회 첫 선교사 아펜젤러가 엘리트 선교를 담당했고, 스크랜턴은 민중을 위해 생애를 바쳤다는 광고 카피는 사실을 왜곡한다. 이런 이분법은 당연히 정당하지 않다. 아펜젤러도 양반 지식층만 아니라 가난한 민중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교회와 학교를 개방했다. 스크랜턴도 가난한 이들만 아니라 사회 지도층과도 교류하고 관계했다. 한국 초기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두 대표 선교사가 각각 상향성과 하향성을 추구하면서 서로 반대되는 선교정책을 취했다는 식의 이미지를 만들어 대립 구도를 조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크랜턴 가문의 활동이 아펜젤러보다 한국 바닥층 민중의 삶에 더 가까이 닿아 있었다는 평가는 대체로 사실에 가깝다.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의 가족은 거의 같은 시기에 한국에 들어와 한국 감리교를 개척한 두 가문으로, 둘 모두 한국 감리교회의 탁월한 개척자로 동등한 인정과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스크랜턴이 상대적으로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것은 아마도 그가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목사가 아니라, 간접 선교에 해당하는 의료 활동을 펼친 의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 세워진 첫 서양식 의료기관은 광혜원(제중원)이었다. 1884년 12월에 발생한 갑신정변에서 첫 개신교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장로교인 호러스 뉴턴 앨런이 자객의 칼에 목숨이 위태로웠던 민영익을 구하자, 고종은 서양 근대 의학의 뛰어남을 인지하고 국립 광혜원(제중원)을 세워 앨런을 원장에 임명했다. 이듬해 입국한 감리교 의사 스크랜턴은 원장 앨런을 도와 광혜원에서 함께 일했다. 그러다 몇 달 후에는 감리회 민간병원인 시병원(施病院), 즉 시혜(施惠)를 베푸는 병원을 따로 설립해서, 의료 혜택을 일평생 거의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가난한 한국인 환자들을 치료했다. 국가가 세워준 광혜원(제중원)은 주로 왕실과 양반층 환자를 중심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스크랜턴에게 특이했던 점은 아내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까지 함께 한국 선교에 동참했다는 것이다. 스크랜턴의 어머니 스크랜턴 여사(혹은 대부인)는 한국 입국 당시 50대 중반의 과부였다. 40세에 과부가 된 그는 남편도 없는 미국에서 외로이 노년을 보내느니, 차라리 아들 부부와 함께 미지의 선교지에서 더 의미 있는 여생을 보내자는 뜻에서 한국 선교를 결단했다.
그런데 이 스크랜턴 대부인의 존재가 한국 내 감리회 선교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남녀 선교사들은 장로회와 감리회를 막론하고, 모두 20대 중후반의 젊은이였다. 따라서 50대의 스크랜턴 대부인은 한국 내 모든 선교사, 심지어 거의 모든 서양인의 어머니나 마찬가지였다. 따뜻하고 후덕한 어머니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조직 경영 능력도 갖춘 지도자였던 대부인 덕에, 남녀유별 유교 문화 배경에서 남성이 다니는 학교나 병원에서 공부하거나 치료받을 수 없었던 한국인 여성이 신앙을 갖고, 교육과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스크랜턴 대부인이 아펜젤러의 남학교 배재학당에 대응하는 여학교로 세운 교육 기관이 바로 이화학당으로, 오늘날의 이화여고, 이화여대의 전신이었다.
이화학당과 관련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아펜젤러가 세운 감리교 남학교 배재학당은 개교 이후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학교에 입학한 학생도 대부분 양반층 자제였다. 당시는 개화기였으므로, 전통적인 과거제도가 유명무실해진 상태에서 유교 양반층의 이상인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실행할 수 있는 길은 서양 학문, 특히 영어를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 이화학당은 배재학당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스크랜턴 여사는 한국에 온 이듬해 1886년에 이화학당을 세웠지만, 배재학당과는 달리 학생 모집이 쉽지 않았다. 여전히 유교질서가 지배적인 19세기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자들이 교육 받는 것을 허용하는 시대가 아직 아니었다. 특히 양반층은 여성의 사회활동에 대한 관점이 더 보수적이었으므로, 이화학당에 자기 딸을 보내지 않았다. 15세면 결혼을 하는 조혼의 시대였으므로, 학교에 보내기보다는 시집을 보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궁여지책으로 스크랜턴 여사는 양반층이 아니라, 하층 여인들을 학생으로 모집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이렇게 해서 이화학당에 처음에 들어온 학생 중 하나는 콜레라에 걸렸다는 이유로 부모가 길거리에 버린 여자 아이였다. 이미 언급했듯, 당시 선교사나 외국인의 기록에는 천연두, 콜레라,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도시에서 유행했을 때, 몇 주안에 수만 명씩 죽어 나갔다는 기록이 여러 번 등장한다. 이런 유행병 시기에는 하층민, 그중에서도 여자 아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전염병에 걸렸을 경우, 제사를 모실 남아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살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여자 아이의 경우 다른 가족에게 전염병을 옮기지 못하도록 환자들이 모인 깊은 산 속 격리공간에 버리거나, 거리에 세워진 기둥에 도망가지 못하도록 묶어 두는 경우도 흔했다.
전염병에 걸려 거리에 버려졌다가 스크랜턴 부인이 데리고 와서 선교병원에서 치료받은 이런 아이들이 이화학당의 첫 학생들이었다. 시집 온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이 죽어버린 젊은 과부도 이화학당의 첫 학생 중 하나였다. 우리나라에서 과부의 재혼이 법적으로 허용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때였다. 이화학당이 세워진 후 8년이 지나야 과부 재혼이 최소한 법적으로라도 가능해지는 것이었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던 시대에 과부가 된다는 것은 그의 인생이 사실상 끝났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들은 스스로 유곽에서 몸을 파는 여인이 되거나, 부양해야 할 입을 덜기 위해 어린 딸을 팔아 기생으로 만들곤 했다. 말하자면, 여러 이유로 버림받은 길거리의 어린 소녀들, 무력한 과부, 부모가 맡기고 간 딸, 학교 일꾼의 딸 등이 이화학당의 첫 학생이 되었다. 물론 우리가 지금 아는 대로, 신여성 시대 이후에는 이화의 위상이 완전히 바뀐다.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개신교 신앙을 가장 이른 시기에 수용한 여성들이 바로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메리 스크랜턴은 1887년에 이화학당 근처에 여성 전용병원인 보구녀관(普救女館)을 설치하여, 혜택받지 못한 여성들에게 의료 혜택도 제공했다. 보구녀관의 후신이 오늘날의 이화여자대학 부속병원이다.
근대 초기 한국 사회의 빈민, 여성의 지위 향상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감리교의 이화학당, 시병원, 보구여관을 들었지만, 장로교가 했던 선교 사역도 그 정체성이나 목적, 역할에서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교회, 학교, 병원은 예배와 교육, 돌봄, 구호사업의 혜택을 먼저 가난한 이들, 과부와 고아에게 제공했다. 이들 중 다수는 일정한 학업 과정을 마치고 나면 국내 상급학교로 진학하거나 일본, 미국 등지로 유학하여 정식 교사 자격을 취득했다. 귀국한 이들 대부분은 자신의 모교, 혹은 전국의 기독교계 학교에 교사로 채용되어 자신들이 어린 시절 학교에서 선교사들을 통해 배우고 익힌 것을 이번에는 자기 학생들에게 전수했다. 전도자, 간호사로 성장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보구녀관(1880년대)
고대 그리스도교 환대 전통의 역사적 배경: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를 중심으로
2세기에 집필된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고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로마 제국의 주류 이교도 사회 속에서 자기들만의 구별된 신앙과 윤리를 어떻게 실천했는지에 대해 증언한다. 이 편지의 알려지지 않은 저자(혹은 마테테스)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나라에 살지만 체류자로 살아간다. 시민으로서 모든 것을 공유하지만 외국인처럼 모든 것을 견딘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지만 자녀를 버리지 않는다. 식탁은 공유하지만 침대는 공유하지 않는다. 육체 안에 있으나 육체를 따라 살지 않는다. 모든 이방의 땅이 그들의 조국이고, 모든 조국이 이방 땅이다”고 기록한다.
이 사상은 사회에 동화되는 길도 아니요, 격리되는 길도 아닌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오히려 세상 한복판에서 약자와 이방인, 환란 당한 이를 적극 품는 대안 공동체의 원형을 제시한다. 세상에서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는 않고 구별되어 사는 그리스도인의 이중 정체성을 강조한다. 이 편지 6장에 “몸에 대한 영혼의 관계가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 관계다… 영혼이 몸의 모든 지체에 퍼져 있듯, 그리스도인은 세상 모든 도시에 흩어져 있다. 영혼은 자신을 미워하는 육체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인도 자신을 미워하는 자를 사랑한다…”라는 핵심 구절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 포용, 환대로 세상을 돌보고 보존하는 존재라고 편지의 저자는 선언한다. [3]
2세기에 무명의 그리스도인 저자가 이교도 지도자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나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담은 이상화된 구호나 선언문 같은 것이 아니었다. 다음 세기의 고대 교회 지도자 키프리아누스, 테르툴리아누스 등은 2세기 무명의 저자가 묘사한 더 이른 시대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도 실제로 살아내고 있다고 증언했다. 고대에 끊임없이 찾아와서 인간 삶을 위협했던 전염병, 재난, 전쟁 등이 일어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병자, 고아, 과부, 노예, 위기에 처한 이교도 등을 아무 제한이나 조건 없이 돌보는 것을 공동체의 핵심 가치로 삼았다.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에 따르면, 전염병 시 그리스도인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보여준 돌봄과 환대가 비그리스도인보다 월등했다. 이런 현실이 교회 성장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신뢰도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313년 이후 로마제국을 통치하며 전통 종교의 부활을 꿈꾸었던 비그리스도인 황제 율리아누스조차 그리스도교인만이 자기 종교 공동체를 넘어 다른 종교인까지 구제한다며, 자신이 속한 종교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환대를 본받아 구제 조직을 신설하라고 명령한 바 있었다. [4]
초대교회와 고대교회 전통은 가장 취약한 사회적 약자를 가족 및 공동체에 받아들이고, 이들에게 주체적 역할과 존엄을 부여할 때, 교회가 사람과 사회에 줄 수 있는 생명력과 영향력이 가장 극대화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려준다.
내한선교사들의 선교활동: 고대 교회 환대 전통의 역사적 계승
초기 내한선교사들은 당대 해외 선교운동 중 주류 교파에 속한 선교사들이 취했던 소위 ‘삼각선교 정책’의 원칙을 따랐다. 전도활동에 집중하는 복음선교사(목사와 전도자), 의료활동에 전념하는 의료선교사(의사, 간호사), 교육에 집중하는 교육선교사(교장, 교사)가 구분된 역할을 맡아, 각각 교회, 병원(약국), 학교를 세워 활동했다. 그러나 한국처럼 신분과 성차별이 심한 전근대적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선교활동에는 삼각선교만으로는 온전히 채우지 못하는 소외 영역이 있었다.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세워도, 이 세 기관의 지도자 대부분은 남성이었으므로, 한국인 여성과는 접촉할 수 없었다. 따라서 특수 영역으로서 여성 사역이 추가되어야 했다. 여성을 전담하는 여성 선교사가 따로 도시와 시골에서 한국인 여성을 대상으로 전도하고 심방하고 상담해야 했다. 실제로 한국교회 역사 내내 여성 신자의 비율이 남성보다 훨씬 높았는데, 여기에는 여성 선교사의 전도 순회에 늘 동행한 한국인 여성 전도자, 즉 전도부인(Bible Women)의 기여가 있었다. 여성을 치료하는 여성 의료선교사, 특히 간호사의 헌신도 뚜렷하다. 여성들만을 위한 여학교 운영도 대부분 여성 선교사들, 특히 결혼하지 않고 일평생을 보낸 독신 여선교사들의 몫이었다.
본 글에서 따로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흔히 문둥병, 나병 환자로 알려진 한센인 사역도 초기 선교사들이 실천했던 가장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사회윤리적 기여의 중요 영역으로 평가할 만하다. 한겨울 나주에서 광주로 가는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죽어가던 여성 한센인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가서 치료했던 윌리 포사이드 선교사의 환대가 광주나병원의 시작이었다. 이 병원은 얼마 후 여수 애양원으로 발전했다. 한국 정부, 일본 식민지 정부, 한국인과 일본인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지극히 작은 소자였던 한센인이 이렇게 처음으로 선교사들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
초기 선교사들이 가난한 이들, 여성, 전염병 환자, 한센인에서 보여준 선교적 실천은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및 고대교회 교부들의 글에서 확인되는 고대 그리스도교의 이방인, 약자, 병자, 나그네, 과부, 고아를 중심에 둔 환대 공동체 전통을 계승한다. 선교사들은 이 전통을 구체적 실천과 제도화 과정을 통해 한국에 뿌리내리게 도왔다. 오늘날 국가정책적 복지, 과학적 의료 체계, NGO 단체들의 전문적 활동 등이 이전에 선교사와 교회가 했던 역할 대부분을 대체한다. 그럼에도, 21세기가 20년이나 훌쩍 지난 오늘에도 제도적, 문화적, 법적 차별은 여전히 만연해 있다. 제도와 법을 세우는 것이 교회의 1차 역할은 아니지만, 1세기 초대교회와 한국 근대 초기의 교회는 모두 보편적 환대와 사랑의 공동체로 존재하고자 고투했다. 인간 존엄, 섬김의 대안 공동체를 현실화한 내한선교사들의 유산은 오늘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환대, 나눔, 포용, 인간됨의 지침이자 실천적 모범이다.
각주
- 로버트 네프, 『서양인의 조선살이: 구한말 한국에서 체류했던 서양인들의 일상』, 정성화 역 (서울: 푸른역사, 2008), 244ff.
- JTBC 인터넷 홈페이지 다시보기(http://tv.jtbc.joins.com/replay/pr10010098/pm10024769/ep10026555/view.)
- “The Epistle of Mathetes to Diognetus,”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1.htm.
- 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손현선 역 (서울: 좋은 씨앗, 2016), 122-138.

이재근 교수는 예장 합동 총회의 신학교인 광신대학교 신학과에서 교회사와 역사신학을 가르치며, 호남 첫 교회인 전주서문교회에서 30-40대 청년부를 지도하며 역사관에서도 봉사한다. 강의, 연구, 목회 외의 시간에는 산과 들, 호수와 바다 등, 자연으로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는 것, 조용한 공간에서 책과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