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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창립 기념 사진이다(1912.9.1).

 

한국선교 140주년

올해는 한국선교 1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미국 북장로회에서 파송 받은 호러스 언더우드 선교사와 미국 북감리회에서 파송 받은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도착을 함으로써 한국선교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선교했습니다. 

한국선교의 특징 중 하나는 미국 북장로회, 남장로회, 북감리회, 남감리회, 캐나다 장로회, 호주 장로회 여섯 선교부가 한국의 지역을 분할하여 선교를 한 것인데, 아주 좋은 선교 정책이었습니다. 또한 이 땅에 처음 온 선교사들은 단지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근대 교육과 의료, 사회 개조와 악습 폐지, 애국의식 고취와 민족역량 강화, 평등사회 구축과 약자들 돌봄,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사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단시간에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0세기 동안 폭발적인 선교와 전도가 이루어졌고, 전국 방방곳곳 마을마다 교회당이 들어서게 되었고, 많은 기독교 학교와 의료시설 그리고 사회봉사단체들이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세월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부자의 나라로,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다방면에서 발전하게 하신 은혜가 큽니다. 가장 큰 은혜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마을마다 교회들이 세워지고, 전국민의 20%가 넘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한 것이었습니다. 선교지 나라에서 선교하는 나라가 되었고,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은 선교사와 재정을 보내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복음화의 기운이 너무 빠르게 식어가고 있습니다. 불과 20-30년 만에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의 수는 절반이 되어 버렸고, 젊은 세대들이 이탈하여 교회마다 젊은이 숫자가 급감하였습니다. 대학교에서는 기독교인을 찾아보기 힘들어서, 이제는 선교지가 되었다고들 합니다. 더 젊은 세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선교적 교회 (Missional Church)

레슬리 뉴비긴이라는 선교사는 1936년에 인도네시아로 가서 38년을 사역하다가 은퇴하고 1974년에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선교를 하던 영국사회가 오히려 선교지로 변한 것을 보면서 엄청난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가 선교사로 나가 있는 동안 영국은 탈기독교사회를 넘어 반기독교사회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선교지보다 더한 선교지가 되었고, 세속적이고 다원주의적이고 복음을 저항하고 반항하는 문화에 물들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사회에서 복음은 어느덧 소수자가 믿는 것이 되었고, 교회는 그 사회와 문화에서 아무런 공적 진리를 제시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지역교회의 교인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줄어들었고, 많은 교회들은 문을 닫았고, 복음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렸고, 선교사를 보낼 형편이 더 이상 되지 못했습니다.[1] 

이런 상황을 본 뉴비긴 선교사는 “모든 교회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선교적 교회는 교회가 서 있는 그 자리가 선교지임을 자각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선교에 동참하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단지 선교를 많이 하는 교회와는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교회”로 존재하는 교회입니다.[2]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는 “선교적 교회”가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교회로 존재한다면 당연하게 하나님이 보내신 목적을 성취해야 합니다. 

첫째는 교회가 해외선교를 계속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초기 내한선교사들을 파송한 나라와 교회가 사람과 재정이 남아돌아가서 우리에게 나눠준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들이 여유가 많아서 헌신한 것 아닙니다. 그들은 없는 가운데서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선교명령에 순종을 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선교를 지속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 일을 감당할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가 존재하는 곳에서 지속적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당연히 한 지역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전도하여 구원하는 사역을 하라고 하나님이 보내신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교회는 자기 지역을 전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으로 알고 실행할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가 존재하는 곳을 하나님나라로 만드는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사람들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빛으로 존재하면서 어둔 곳을 밝히고, 소금으로 존재하면서 부패한 곳을 고쳐야 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곳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치유해야 합니다. 세상으로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으로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교회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7:18-21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위하여 드린 기도문이고, 요한복음 20:21-23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두 곳 다 공통적으로 “보낸다”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선교의 영어단어 “Mission”은 라틴어 “mitto”에서 왔는데, 여기 “보낸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본문은 선교적 교회, 즉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으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선교적 교회

삼위일체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정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보내시는 동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7:18과 20:21을 보면 보낸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두 구절 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아들이 제자들을 세상에 보낸다”는 두 가지 사실을 강하게 결속시키는 이중구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내심에 대한 중차대성을 보여주고, 그 일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강한 확실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교(보내는 것)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관계에서는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보내시고, 또 성령 하나님도 보내십니다. 성자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을 보내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자 하나님은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여기 “보낸다”는 단어 “아포스텔로”는 사명을 주어 보낸다는 것으로, 그냥 보낸다는 의미를 가진 “펨포”와는 구별됩니다.[3]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사명을 주어 보내셨고, 성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 세상에 사명을 주어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명입니까? 전도하는 사명입니다.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한복음 17:20). 주님은 제자들로 인해 계속 믿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을 기대하시면서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은 교회이고, 제자들로 인해서 믿는 자들 역시 교회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교회를 어떻게 보시느냐 하면, 세상에서 자기가 할 일이 있어서 보내는 사람들 혹은 세우는 공동체로 보십니다. 우리는 이 근본적인 교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의 동아리,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신앙적 행위를 하는 기관, 기독교를 포교하는 조직, 다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모임, 사회봉사를 하는 단체, 등등 여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로 그런 요소들이 교회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교회 정체성은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께서 사명을 주어서 세상에 보낸 사람들 내지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존재의 출발도 하나님이고, 존재의 과정도 하나님이고, 존재의 목표와 결과도 하나님입니다. 

첫째, 교회의 출발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산(property)으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자산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린도전서 3:23). 교회는 그리스도의 자산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산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산인 그리스도를 투자하여 세운 게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투자하여 세우신 게 교회입니다. 그리므로 교회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것이면서 하나님의 것입니다. 

둘째, 교회의 과정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산으로 교회를 운영하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운영 자산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교회를 세상에 세우시며) 성령을 주십니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 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한복음 20:21-22). 교회에서 성령을 부으시고, 그 은사들로 교회가 움직이고 그리고 할 일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부으심으로 그리고 성령이 오심으로, 교회는 비로소 활동하고 사역하는 것을 사도행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하나님의 운영자산은 하나님의 세우신 일꾼들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다 너희의 것이요”(고린도전서 3:22). 하나님께서 교회의 일꾼들을 교회의 소유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맡은 일들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셋째, 교회의 결과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 일을 위하여 보내어 세우신 교회이니까 당연합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져서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구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는 선교 공동체입니다. 우리 신자는 보내심을 받은 자(사신)로서 선교를 수행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선교적 교회이고 선교적 성도라는 정체성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진리의 거룩함으로 무장하고 복음적 사랑으로 사역하는 선교적 교회 

그러면 선교적 교회는 어떤 무장을 하고 어떻게 사역해야 합니까? 교회는 진리의 거룩함으로 무장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19에 따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는데, 그렇게 하신 목적은 제자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한다고 합니다. “거룩하게 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위해서 사람이나 사물을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다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제사를 위해 성별 된 제사장으로서, 그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림으로써 스스로 구별된 제물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4] 이어서 예수님을 제자들도 거룩함을 얻게 할 것이라고 하시는 데, 제자들을 거룩 자체인 하나님께 드리도록 세상이라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거룩이란 단어는 분리의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드림의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세상과 구별하고, 세상과 구별하여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거룩입니다. 구약에서 거룩이란 말은 항상 하나님을 위한 사람의 사역과 연관해서 나옵니다. “너는…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출애굽기 28:41). 그러니까 교회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교회가 세상과 구별이 되어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그곳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세상과 분리하면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게 만듭니까?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작용을 하고, 거룩한 활동을 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세상과 구별시키는 작용을 하고, 우리를 하나님께 드려지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럼 진리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17절), 생명의 말씀이고, 복음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7:19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는 도구는 진리인데, 예수님이 자신을 거룩하는 도구는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그건 예수님 당신이 진리이고, 예수님의 복음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온전히 드림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는데, 그 십자가의 사랑이 진리입니다.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는 진리도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보냄을 받기 전에 거룩하게 하는 진리로 무장하여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역하여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5]

이것이 선교가 아니겠습니까? 복음으로 세상과 구별되고 복음적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는 것이 선교입니다. 복음은 당연히 세상과 구별되는 정신과 태도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교회는 세상과 동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지도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으로 파송을 받습니다. 세상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복음적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습니다.  

19세기 말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내한선교사들은 그렇게 사역했습니다. 한기윤의 이번 달 이슈가 “한국선교 140주년, 선교사들의 사회윤리적 기여”인데, 광신대 이재근교수가 쓴 글을 참조하면, 선교사들은 복음적 사랑으로 선교했습니다. 당대 사회에서 배제된 여성 천민 과부 병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교육선교와 의료선교를 겸하여 하였습니다. 의료기관으로 광혜원(제중원)을 세워 일반인들을 치료하였다면, 시병원을 세워 의료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했습니다. 배재학당을 세워 남자들을 교육했다면, 이화학당를 세워 여성들을 교육했습니다. 특별히 이화학당의 경우는 하층여인들도 받아들였는데, 길거리에 버려진 소녀 과부 하층민의 딸 등도 입학을 하였습니다. 이화학당의 첫 입학생 가운데는 콜레라에 걸려서 부모가 길거리에 버린 여자 아이도 있었습니다. 또한 가난한 여성들을 치료해주는 보구녀관을 설치하였습니다.[6] 그렇게 전한 복음에는 감동과 능력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교회와 신자의 무기는 오직 복음이고, 사역 방법은 복음적 사랑 곧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사랑입니다. 교회와 신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존재로서 복음을 전해야 하고 복음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데, 곧 복음적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가 되어야 하는 선교적 교회

그러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교회의 내적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교회가 어떤 모습일때 선교가 효과적으로 됩니까? 예수님의 기도에서 놀랍게도 교회가 하나가 될 때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21). 교회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기에 동일한 기도가 11절과 22절에도 나옵니다.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하나가 될 때, 세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존재라는 걸을 믿게 된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됨은 교회를 어떤 획일적인 조직으로 묶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온 세계교회를 한 조직 밑에서 움직이는 그런 단체로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됨을 말합니다. 먼저 진리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에베소서 4:3).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 곧 지식과 믿음에 있어서 하나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똑 같은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똑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되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진리로 하나가 됩니다. 

둘째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에베소서 4:16). 우리는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몸을 하나로 세우기 위해서는 지체가 사랑 안에서 서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하늘에서 우리가 하나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진리로 하나가 되고 사랑으로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무엇이 있습니까? 당파 허영 다툼 원망 시비가 하나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각 사람들이 아예 교제가 없이 따로따로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고립된 인간이나 교회는 기독교신앙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배타적으로 자기 혼자만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일수록 건전한 신앙생활과는 거리가 멉니다. 나 홀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 중에 예수님이 보내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거의 보지 못합니다. 교제하면서 하나가 되지 못하면, 주님이 보내시는 일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하고 하나가 되면 주님이 보내신 일을 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 하나됨에 반응을 하고, 매력을 느끼고 동참하려고 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사함과 구원의 열매를 맺는 선교적 교회

교회의 목표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혼들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 20:23). 주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의 사역에 대한 선언적 언급입니다. 제자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여 믿고 회개하는 자는 죄사함을 얻을 것이나, 그렇지 못한 자들은 죄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제자들, 그리고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와 결과가 죄사함이고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복음적 사랑으로 섬긴다면서, 사회봉사 의료봉사 교육 구제를 하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그것은 보내심을 받은 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듯이 지옥에 들어갈 영혼들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에게는 영혼구원이 가장 중요하고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교회는 원래 선교적 교회라는 것, 신자는 원래 선교적 존재라는 것을 상기합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보내신 공동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되고, 복음적 사랑으로 사역해야 함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함께 하고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영혼을 구원해야 하는 것을 최종적 목표인 것을 기억합시다. 

 


[1] 손승호, “선교적 교회”, 『고난과 선교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한국동남성경연구원, 본문과 설교 No. 12), SFC, 2021, 251-52.

[2] 손승호, “선교적 교회”, 252-53.

[3] “펨포”와 “아포스텔로”의 용례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송영목, “요한 문헌의 선교(적 교회)”, 『고난과 선교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한국동남성경연구원, 본문과 설교 No. 12), SFC, 2021, 474-76.

[4] 권해생, 『요한복음』 (고신총회 성경주석), 총회출판국, 2021, 578.

[5]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WBC 성경주석), 솔로몬, 2015, 570-71.

[6] 이재근, “무명의 조선여성들, 신앙으로 이름을 되찾다: 한국 선교 140주년, 선교사들의 사회윤리적 기여”, 한국기독교윤리원 2025년 이슈리포트, https://koreanchristianethics.com/issue-report (2025.8.8. 접속). 

 


<참고자료>

게리 버지, 『요한복음』(NIV 적용주석), 김병국 옮김, 솔로몬, 2015.

권해생, 『요한복음』(고신총회 주석), 총회출반국, 2021.

그랜트 오스본, 『요한복음』(LAB 주석), 전광규 옮김, 성서유니온선교회, 2005.

브루스 밀른, 『요한복음 강해』(BTS 시리즈), 정옥배 옮김, IVP, 1995.

비슬리-머리, 『요한복음』(WBC 주석), 이덕신 옮김, 솔로몬, 2015.

신동우, 『선교학, 이론과 실제』, 예루살렘, 1993.

이재근, “무명의 조선여성들, 신앙으로 이름을 되찾다: 한국 선교 140주년, 선교사들의 사회윤리적 기여”, 한국기독교윤리원 2025년 이슈리포트,

https://koreanchristianethics.com/issue-report (2025.8.8. 접속).

콜린 G. 크루즈, 『요한복음』(틴데일 신약주석), 배용덕 옮김, CLC, 2013.

한국동남성경연구원, 『고난과 선교,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본문과 설교 No. 12), SFC, 2021.

연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후, 고신대 신대원(M.Div.), 스텔렌보쉬대학교에서 수학했다(M.Th. cum laude, D.Th.). 바울서신과 사회수사학적해석을 전공하며, 현재 진주삼일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