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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대중 문화와 적극적 안락사 

한 달 전, 한 신문사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최근 시작한 지상파 드라마를 아느냐는 물음이었다. 제목을 듣고야 며칠 전 우연히 첫 회를 보고 마음이 서늘해졌던 그 작품임을 떠올렸다. 충격이 가시지 않아 제작 배경을 찾아보니 ‘국내 최초로 안락사를 정면으로 다룬 드라마’라는 소개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다만 제작진과 배우들은 안락사를 미화할 의도는 없다고 못 박았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목은 캐나다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메리 킬즈 피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번역하면 ‘마리아가 사람들을 죽인다’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세례명 ‘마리아’를 가진 여성 의사다. 그는 어떤 계기를 통해, 임종을 앞둔 말기 환자들에게 불법으로 마약성 약물을 주사해 죽음을 앞당기는 적극적 안락사를 돕는다. 알다시피 ‘마리아’는 예수를 낳은 인간 어머니의 이름이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했다. 당시 관습대로라면 혼인 전에 임신한 여인은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 돌팔매질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받아들여 태아를 지켰고, 약혼자 요셉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낳았다. 또 헤롯의 칼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해 아기 예수를 살려 낸, 생명의 수호자다. 그런 이름을 가진 의사가 ‘죽음’을 돕게 된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는 것, 그것이 이 드라마가 전하려는 메시지다. 삶의 마지막에서 겪는 극심한 고통 대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라는 논리. 선택의 자유가 존엄의 근원이며, 안락사는 인간이 맨 마지막에 쥘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주장 말이다.

지난 9월 12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어 국내 1위, 아홉 개 나라에서 10위 안에 오른 “은중과 상연” 역시 안락사를 정면으로 다룬다. 어린 시절 단짝이자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은 사회생활로 멀어졌다가 마흔이 넘어 다시 만난다. 늘 은중의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던 상연은 그에게 어려운 부탁을 털어놓는다. 스위스의 안락사 기관에서 마지막을 맞기로 했으니, 그 길을 함께해 달라는 것이다. 작품은 두 사람이 아이에서 어른이 되기까지의 우정과 갈등을 차분히 쌓아 올린 뒤, 현재로 돌아와 둘이 함께 스위스로 향하는 장면에서 결말을 맺는다. 약물이 주입되는 순간까지 곁을 지키는 은중의 모습은 상연의 선택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인상을 남긴다.

작년 초, 노인 자살과 안락사를 다룬 영화 “소풍” 이후 한국 사회의 관심은 한층 높아졌다. 이번 두 드라마가 다른 점은 무대의 중심이 더 이상 ‘죽을 날이 머지않은 병든 노인’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 창창한 청년, 운동선수, 평범한 직장인들까지 서사의 가운데에 선다. 그리고 이 서사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이들이 그 선택에 이르기까지는 저마다의 사적이고도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를 사회와 가족, 친구들이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더 나아가 의사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배운 의술로 이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때로는 그 선택을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이렇듯, 최근 한국 사회에서 ‘죽음’을 개인의 선택으로 정당화하는 흐름이 대중문화를 통해서 더욱 강화되고 있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2024년 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국민 82%가 조력 존엄사 합법화에 찬성했으며, 이는 2년 전보다 상승한 수치(76%)다. 또한 한국은 오랫동안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해왔다. 20년 이상 자살예방 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조성돈 교수는 자살율 1위의 오명은 한국 사회 전반에 ‘죽음을 방치하는 문화’가 뿌리내려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해외 사례를 근거로 ‘선진국 수준의 인권’을 말하면서,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처럼 적극적 안락사의 도입을 주장한다. 그러나 적극적 안락사를 도입한 네덜란드의 경우 2024년 한 해에만 정신과적 사유를 포함해서 9,958명이 안락사로 생을 마쳤는데, 이는 전체 사망의 5.8%에 해당한다. 네덜란드 인구가 한국의 3분의 1임을 감안하면, 한국에서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할 때-게다가 상대적으로 사회보장 제도가 취약한 현실까지 겹치면-그 수가 연 10만 명(한 해 평균 사망자 약35만명) 가까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한국은 이미 연명의료결정법을 통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 선을 넘어 의사가 죽음을 돕는 적극적 안락사가 허용된다면, 사회적으로는 돌봄보다 비용 절감을 선택하는 구조가 굳어지고, 의료 윤리마저 약화될 위험이 있다. 무엇보다 죽음을 개인적 선택으로 치부할 경우에 살아 있는 이들을 돌볼 공동체적 책임은 약해질 것이고 약자들은 보이지 않는 죽음에 대한 압박 속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될 수 있다.

 

나가며: 교회와 기독교 윤리적 책임

아직 우리 사회는 “내가 죽을 권리가 있는가”보다 “우리는 끝까지 서로를 보살피는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할 단계이다. 생명의 문화를 만들지 않고 죽음의 문화를 더 강화하는 것은 결코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의 첫 번째 강령(manifesto)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선언이다(창 1:27). 생명은 내 소유가 아니라 받은 선물이며, 죽음의 시점과 방식은 개인의 고독한 결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공동체적이고 신앙적인 문제라는 것이다(롬 14:7-8). 개인의 선택이 돌봄의 의무를 지워 버린다면, 그 ‘선택’은 사실 구조가 강요한 체념과 포기, 그리고 무책임함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살률이 높은 한국 사회에서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일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며, 우리 앞에 놓인 죽음의 문화를 더 굳게 고착시키는 것이다. 복음이 말하는 품위는 ‘빨리 떠나는 법’이 아니라 ‘끝까지 함께하는 법’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생명의 품위를 사회 속에 증언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죽음의 문화를 넘어 생명의 문화를 세우는 길이며, 진정한 인권의 시작일 것이다.

이춘성 목사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세운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에서 사역하였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석사(M. Div.), 고신대에서 기독교 윤리학 박사(Ph.D.)를 하였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 목사,  한기윤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