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마지막 주간, ‘노화와 죽음’을 주제로 한 이 설교문을 ‘한기윤의 스페셜 설교’로 공유합니다. 새해 첫 달에 목사님들께서 이 주제로 성도들과 말씀을 나누어 보시기를 권해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성도들이 연초에 ‘노화와 죽음’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기독교 윤리적 성찰이 담긴 설교를 접한다면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 비록 육신은 유한하나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서 참된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을 더욱 아끼며 지혜롭게 살아가겠다는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생명의료윤리학 세미나(Th.M. 과정)의 학기 말 보고서로 제출된 손혜인 원우의 이 설교문이 목회자 여러분께 귀한 통찰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신원하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장)
들어가기 : 새해, 세계관 점검하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는 새로운 삶의 단위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삶은 태어남과 동시에 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단순히 어제가 오늘이 되고, 내일이 찾아오는 반복 속에서 새해가 특별하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해마다 삶을 점검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흘러가는 시간을 뚫어 들어오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특별한 일들을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의 작정 (Dvine Decree)”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영원 전 계획, 작정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셨고, 무의미하게 흘러가 버릴 우리의 시간을 “구원”이라는 특별한 목적이 채워지는 순간들로 바꾸어 가십니다. 이 은혜를 입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과 함께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인 “세계관”이 생깁니다. 이때에 우리는 성경의 렌즈로 “노화와 죽음”이라는 삶의 문제를 새롭게 해석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은 이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겉사람이 낡아지는 순간에도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이 시점에 우리 인생을 경주에 비유해서 성경적 세계관을 통해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믿음의 철인 3종 경기
성도 여러분, “철인 3종 경기 (트라이애슬론)”에 대해서 들어 보셨습니까? 한 선수가 수영, 사이클, 달리기를 쉼 없이 연달아 해내야 하는 극한의 스포츠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종목 사이에 옷을 갈아입거나 장비를 챙기는 시간까지도 모두 경기 기록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한의 체력과 인내, 그리고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을 견뎌내야 하기에, 이 대회를 완주한 선수를 ‘아이언맨’ 즉 “철인”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도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이 철인 3종 경기와 참 많이 닮았습니다. 우리는 태어남이라는 출발 신호와 함께 각자의 삶의 길을 따라 달립니다. 철인 3종 경기에서 경기 중 종목을 바꾸는 “바꿈터”가 있듯이, 우리 삶에도 특별한 전환점들이 찾아옵니다. 어린 자녀에서 장성한 어른이 되고, 가정을 꾸려 부모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는 이별의 바꿈터를 지나기도 합니다. 저마다 경기 시간은 다르지만, 모든 인생의 끝에는 예외 없이 “죽음”이라는 결승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인생의 경주를, 성경적 세계관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는 다르게 치러냅니다. 그 은혜의 철인 3종 경기를 함께 달려 보겠습니다.

첫 번째 코스 : 수영, ‘오픈 워터’의 공포와 섭리의 은혜
첫 번째 코스는 “수영”입니다. 잔잔한 실내 수영장이 아니라, 거친 파도가 치는 바다, 강, 호수에서 치러지는 “오픈 워터”입니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물, 예측할 수 없는 파도, 시야가 가려지는 혼란 속에서 선수들은 극도의 두려움을 느낍니다. 실제로 가장 많은 중도 포기자가 나오는 구간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도 “오픈 워터”가 있습니다. 바로 “노화와 죽음”입니다. 왜 인간은 죽음 앞에서 이토록 본능적인 공포를 느낄까요? 죽음은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가 아니라, “죄의 삯”(롬6:23)으로 찾아온 ‘낯선 불청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창조받은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 낯선 공포를 거부하고 저항합니다.
예를들어, 현대 세속주의 세계관은 노화와 죽음을 정복해야 할 “질병”으로 규정합니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유전자 기술이나 과도한 생명 연장술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물론 의학 기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의 한 영역이기에 모든 이들은 감사함으로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돌보는 것은 신자의 마땅한 청지기적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 의학 기술 그 자체를 우리를 구원해 줄 유일한 ‘구원의 방편’으로 여기는 태도는 위험합니다. 이는 인간이 생명의 주인이 되려는 비뚤어진 욕망입니다. 기독교 윤리학자인 길버트 메일렌더(Gilbert Meilaender)[1]는 이를 “하나님 놀이(Playing God)”의 한 단면이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역할 놀이를 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 존재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듯,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 속에 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성경은 “하나님 놀이”, 즉 인간의 힘으로 물리적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욕망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요? 모세는 시편 90편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모세는 생명을 연장하려는 인간의 노력과 자랑이 허무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어지는 11절은 함께 읽어 봅시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진리를 드러냅니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증언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롬5:12) 또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죄는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교만’이라는 ‘하나님 놀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곧 죽음이었죠. 그런데 이제 와 다시 의학 기술로 그 죽음을 넘어서려 한다면, 이것은 또 다른 교만일 뿐입니다. 결국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헛된 수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수영을 할 때 힘이 들어가면 물에 빠지듯, 인생의 파도를 내 힘으로 거스르려 합니다. 이때 우리는 더 깊은 물속에서의 공포와 마주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헛된 몸부림이 아닌, 파도 속에서 우리를 붙잡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에 온 몸을 맡긴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할 때 우리는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파도의 물살을 타며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이 놀라운 역설을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섭리를 통하여 우리의 흘러가는 시간을 뚫고 하나님의 구원을 시작하십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46장 4절을 통해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46:4)
세상은 우리가 낡아질 때, “이제 끝났다” 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쉽게 끝내지 않도록 몸부림 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낡아질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사46:4)
이 섭리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달라집니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에 대한 집착이나, 죽음에 대한 부정, 젊음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품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수영 선수가 물에 온 몸을 그대로 맡기듯, 나의 힘은 빼고 하나님의 등에 업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두 번째 코스 : 사이클, 믿음의 경주와 견인의 은혜
철인 3종 경기의 두 번째 코스는 “사이클”입니다. 차가운 물살을 헤치고 나온 선수는 젖은 몸으로 자전거에 오릅니다. 그리고 전체 경기 중 가장 긴 거리를 달려야 합니다. 이 구간은 태어나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인생의 가장 긴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의 삶과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긴 ‘인생’이라는 레이스에서 우리의 몸이 낡아지고 지칠 때, 하나님은 우리가 낙심하여 경주를 포기하지 않도록 어떤 섭리를 펼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아주 넘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특별한 “안전 고리”를 채워주셨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이것을 “구원의 황금 사슬 (The Golden Chain of Salvation)”이라 불렀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 말씀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놀랍게도 하나님은 아직 경주 중인 우리를 향해 이미 “영화롭게 하셨다”라고 선포하십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이미 다 이루어진 것처럼 완료형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구원은 결코 취소될 수 없는, 이미 확정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우리의 청사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가 약해질 때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황금사슬”이 우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노화”는 더 이상 죽음으로 끌려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대로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가는 과정” (롬8:29) 즉, 거룩해 지는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겉사람이 낡아지는 “노화”의 고통 속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7절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관절이 약해지고, 기억력이 희미해지는 흘러가는 시간은, 오히려 우리 영혼을 영원한 영광으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여전히 힘겹습니다. 늙어가는 몸은 점점 더 아파갑니다. 여기저기 쑤시는 육체의 가시는 우리를 더욱 고달프게 합니다. 이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 가시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세 번이나 없애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시를 뽑아 주는 대신 이렇게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바울의 가시를 제거해 주시기보다, 견디고도 남을 “족한 은혜”를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누린 “족한 은혜”는 무엇일까요? 인생이란 경주 속에서 “가시”로 인한 고통으로 남은 힘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이클의 페달을 계속 밟을 수 있을까요?
철인 3종 경기의 선수들은 자전거 위에서 달리며 바나나와 에너지 바, 스포츠 음료 등을 먹고 마십니다. 이것을 “영양 보급”이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경주를 끝마치지 못하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바울의 ‘가시’는 뽑아 주지 않으셨지만, 그가 끝까지 달릴 수 있는 “영적인 영양 보급”을 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영적 양식을 두고 “내게 족한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에게 주셨던 그 은혜를 “견인의 은혜”라고도 말합니다. 이는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보급의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적 양식을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의 길을 걸어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일 “만나”를 공급하여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식탁인 “성찬”과, 주일 예배에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넉넉한 영혼의 양식을 채워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속사람을 위한 보급식”을 충분히 섭취하고 계십니까? 겉사람이 낡아져 육체의 가시가 나를 찌를 때가,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고 누려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시는 힘으로, 남은 삶의 경주를 끝까지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 번째 코스 : 마라톤, 결승선을 향한 마지막 질주
철인 3종 경기의 마지막 코스 마라톤입니다. 3.8km의 수영을, 180km의 사이클을 완주함으로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에서, 선수는 또다시 42.195km을 달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언 코스’를 완주한 진정한 ‘아이언 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철인”이 되는 길은 녹록치 않습니다. 선수들은 사이클을 타던 근육에서 달리기 근육으로 전환될 때, 다리가 마치 벽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브릭(Brick)”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습은 죽음을 코앞에 둔 우리의 육체와 닮지 않았습니까? 생의 마지막 순간, 우리의 호흡은 가빠지고 손발은 굳어지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육체의 한계 속에서 극한의 고통과 무력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육체의 한계 앞에서 세상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마치 “경기 기권의 선언”과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기권패를 당하지 않기 위해, 여러 의학적 도움들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죽음은 “결승선 통과”의 순간입니다. 이제 시상대에 올라 영광스러운 승리의 트로피를 들어 올릴 일만 남았습니다. 또한 곧 시작 될 ‘천국 잔치’에 걸맞은 멋진 옷도 입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죽음은 겉 사람의 낡아짐에서 “부활의 몸”을 덧입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의 입성이기에 우리의 마지막 순간은 승리의 환호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인생이라는 철인 3종 경기의 마지막 결승 테이프를 끊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결승선 너머 함께 승리를 만끽하기 위해 두 팔 벌려 기다리시는 우리의 코치,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일 뿐입니다. 이 놀라운 비밀을 깨달은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1:21) 죽음의 유익함을 노래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라톤의 마지막 구간인 ‘늙어감’이 힘드십니까? 굳어져 가는 다리가 서러우십니까?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나타나는 “브릭” 현상은 우리가 구원의 결승선에 다다랐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구원의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중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과 기뻐하는 그 날을, 하나님 나라의 승리 입성을 기대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 시상대에서 전하는 소감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2026년이라는 새해의 출발선에서 인생이라는 “은혜의 철인 3종 경기”의 모든 코스를 미리 달려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믿음의 경주를 실제로 완주하고, 결승선 너머 하나님 앞에 서는 것뿐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시상대에서 우리는 어떤 소감을 남겨야 할까요? 남은 시간,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믿음의 사람 다윗은 노년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시71:18) 다윗은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새로워지는 구원 받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건강과 장수보다, 다음세대에게 믿음을 전수하는 사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다윗의 이 고백이 훗날 하나님 앞에서 외칠 우리의 “시상 소감”이 되길 소망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우리의 머리는 더 희어져 갑니다. 주름은 더 깊어집니다. 세상은 이것을 ‘쇠퇴’라 부르나, 하나님은 이것을 ‘영광’이라 부르십니다. 신자에게 노화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완성되어 가는 하나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거울 속 늘어가는 흰 머리를 보며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치열한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한 자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영화의 면류관”(잠16:31)입니다.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았기에, 사도 바울은 겉사람의 낡아짐 앞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흘러가는 시간은 분명 우리의 겉사람을 낡아지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날로 우리의 속사람을 새롭게 합니다.
“인생” 이라는 거대한 경주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 가장 긴 코스인 사이클의 구간을 고군분투하며 달리고 있는 청년 세대 여러분, 마지막 마라톤 구간을 인내로 달리고 있는 장년 세대 여러분, 그리고 이 길을 뒤따라 달리게 될 다음 세대 여러분. 비록 우리가 달리고 있는 코스의 시점은 각기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시는 “견인의 은혜”에 힘입어 끝까지 완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 앞에서 “영화의 면류관”을 쓰고, 바울과 같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노라”(딤후4:7) 라는 멋진 믿음의 소감을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각주
- 길버트 메일렌더(Gilbert Meilaender)는 미국 루터교 생명윤리학자이자 신학자이다. 그는 발파라이소 대학교(Valparaiso University)의 신학과 명예 연구 교수이며, 2002년 설립부터 2009년 해산까지 미국 대통령 생명윤리위원회(President’s Council on Bioethics) 위원으로 활동했다.
손혜인 전도사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후,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를 마쳤으며, 현재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윤리학(Th.M.) 과정 중이다. 총회교육개발원과 국제제자훈련원에서 어린이를 위한 성경공부 교재와 큐티 교재를 집필하였으며, 현재 부산 사랑의교회에서 다음세대와 장년 성도 양육에 힘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