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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톨킨(J.R.R.Tolkien)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에 ‘골룸’이라는 특이한 인물이 등장합니다.[1] 원래 ‘스미골’이라는 이름의 평범한 호빗 종족이었지만, 절대반지를 발견한 이후 친구를 죽이고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존재입니다.[2] 반지를 끼면 사람들이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힘으로 악한 일을 일삼다가 스스로 고립됩니다. 점점 절대반지에 대해 병적인 집착을 하는데, 정작 집착의 대상인 절대반지가 골룸의 삶을 지배합니다. 골룸은 죽는 순간까지 절대반지를 ‘My precious(나의 보물)’라 부르며 애지중지하지만, 절대반지의 힘은 골룸의 인생을 비참한 괴물로 전락시키고 맙니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3]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괴물과 싸우려는 사람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심연을 바라봅니다. 분명히 내가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내가 들여다보던 그 심연이 어느 순간부터 나를 바라보며 영향을 주다가 어느새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중독이란 바로 이런 ‘심연’과 같습니다. 나의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주도권을 빼앗아 가는 힘, 내가 통제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를 통제하는 절대반지와 같은 악독한 주인이 바로 중독입니다. 함께 읽은 로마서 말씀은 바울의 내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처절한 고백입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느니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7:18-19)

  바울은 현재 자신 안에서 두 힘이 충돌하고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선을 원하지만 죄라는 강력한 법이 그를 끌어내립니다(롬7:23). 처음부터 악을 선택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좋은 것에 대한 갈망, 선에 대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갈망이 길을 잃고, 그 지식이 왜곡되면서 위태로워집니다.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하지 않겠다’고 결심도 하는데 결국 다시 그 길로 돌아갑니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는 신자의 선한 마음을 거슬러 방향을 틀어버리곤 합니다.[4] 중독의 힘도 이와 같습니다. 바울의 고백은 마치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중독의 늪에 빠진 이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1.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가?

  중독이란, ‘어떤 물질이나 행동, 또는 태도에 습관적이거나 강박적으로 몰입하여 통제를 잃고, 자신과 타인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상태’입니다(12월 이슈 리포트 ‘중독’ 참고). 술이나 약물 같은 특정 물질이나 도박, 게임, 스마트폰, 일과 같은 행동에 대해 통제력을 잃고 강박적으로 추구합니다. 그로 인해 부정적인 결과가 초래됨에도 불구하고 벗어나지 못하고 반복하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과학은 중독이 뇌의 보상 시스템을 변화시키고, 뇌 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쳐 벗어나기 어렵게 만든다고 합니다. 이처럼 중독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적 관점으로 판단해 볼 수 있습니다. 중독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의 피조물들 중에서 자신의 특정한 욕구를 충족시킬 대상을 찾아 추구하다가 그것을 의지하고 그것에 삶을 맡기면서 점점 자신을 잃어버리는 행위입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걷어차고 하나님의 선하신 사랑이 미치지 않는 영역으로 발을 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태를 바울의 언어로 말해본다면 ‘죄의 종’이 되는 것 아닐까요?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하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6-18)

  이 말씀은 우리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우리 삶의 중심을 두고 거기에 끊임없이 매달릴 때, 집착을 넘어 결국 그것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삶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그 사람의 주인입니다.  전 칼빈신학대학원 총장 코넬리우스 플랜팅가(Cornelius Plantinga, Jr.)는 중독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시작이 어떻든 중독은 결국 고통으로 집중되고 그 고통을 경감시켜 줄 매개물을 찾는 자멸적인 선택으로 이어진다. 사실상 고통을 초래한 바로 그것으로 고통을 치료하려 하는게 중독자가 덫에 걸리는 전형적인 메커니즘이다.”[5]

  내 허전한 마음을 채워줄 보조물이었는데, 어느새 그것이 나를 고통으로 인도하는 또다른 매개물이 되어 있습니다. 생각과 마음을 좌우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중독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다른 어떤 것에 삶의 중심을 둡니다. 그러다가 삶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영적 노예 상태’로 전락하는 것, 그것이 중독입니다.

  오락실이 유행하던 시절 초등학생이었던 저는 한 게임 캐릭터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장풍을 쓰고 삼단 돌려차기를 하는 그 남자가 어찌나 멋있었던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떠올렸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학교 수업 중에도 그 사람 만날 생각뿐이었습니다. 학교를 마치면 오락실로 달려갔고, 돈이 떨어지면 돈을 구할 궁리를 하다가 어머니의 지갑에 몰래 손을 댄 적도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이불 위에 누우면 천장에는 화려한 발차기를 하며 뛰어다니는 그 남자의 모습이 다시 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일종의 중독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 제 일상의 주인은 ‘RYU’라는 이름의 게임 캐릭터였습니다. 어머니의 회초리 세례가 있기 전까지 저의 모든 일상은 그 사람에게 매여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애교 같은 이야기일지 몰라도, 지금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삶 전체를 사로잡아 무너뜨릴 수 있는 중독의 요소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 요소들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만나 영적, 화학적 반응을 일으킵니다. 여러분의 하루를 사로잡고 있는 주인은 현재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2. 사망의 몸에 묶인 우리

  로마서 7장은 죄의 문제를 다룹니다. 바울은 죄가 가진 중독적인 속성과 그 영적 위험성을 확인했습니다. 자신의 경험으로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며 고백합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20) 

  ‘내 속에 거하는 죄’의 힘은 단순히 기분을 나쁘게 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죄는 사람의 생각을 은근히 결박하여 좋지 않은 그 일을 반복하게 만듭니다. 절대반지를 ‘내 보물’로 삼은 골룸은 서서히 반지의 힘에 잠식되어 비극적인 일들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중독은 우리의 마음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서서히 육체적, 사회적, 영적 파괴를 일으킵니다. 바울의 솔직한 고백을 들어 봅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4)   

  누군가 건져내지 않으면 파국을 맞이하게 될 상태, 사망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첫째, 내 몸과 마음을 상하게 만듭니다. 알코올, 약물, 니코틴과 같은 물질 중독은 물론이고, 스마트폰이나 게임 중독으로 인한 수면 부족, 신체 활동 저하 등은 우리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해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명령합니다.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중독의 노예가 될 때, 우리의 소중한 몸과 마음은 상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에서 멀어집니다.   

  둘째, 사람을 잃습니다. 중독은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사회적 고립을 초래합니다. 도박이나 약물 중독은 건전한 인간관계를 해치고 경제적 파탄을 불러오기 쉽습니다. 성 중독은 개인적으로는 심한 수치심, 후회, 허탈감과 자괴감을 낳고, 그런 행동으로 인해 가족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 고립됩니다. 사랑했던 가족이 해체될 수도 있으며, 타인의 인생을 무너뜨리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무서운 죄로 확대될 수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은혜마저 단절됩니다. 중독에 빠지면, 그 대상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삼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인간에게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가 생깁니다. 제1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중대한 착각으로 인한 이 선택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손합니다. 결국 하나님 안에서 누려야 할 생명의 호흡을 방해합니다. 끊임없는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고 절망감으로 우리의 영혼이 황폐해집니다.

  처음부터 심연에 뛰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바라보다 보면 그 속에서 손짓하는 힘에 끌립니다. 스마트폰이 내 손 안에 있으니 내가 주도할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습니까? 스마트폰 OTT를 통해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은 평범한 일상입니다. 그러나 자칫 이 작은 행위가 일상의 중심이 되어 다른 중요한 것들을 흡입해 버릴 수 있습니다. 가족들과 대화할 기회를 놓치고, 내 몸을 돌볼 시간까지 포기하면서 영상 속 사건과 인물만 탐닉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 역시 자연스럽게 잊혀집니다. 만약 중독 상태라면, 실제를 살아가는 나를 잃고, 다른 사람도 잃고, 하나님마저 잃을 수도 있습니다. 지나친 비약일까요? 예수님은 악한 생각과 욕망이 우리 마음에서 나온다고 경고하는데(막7:20-23), 중독은 이 악한 생각과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게 만드는 강력한 통로입니다. 중독에 빠지면, 우리는 사망에 몸에 갇혀 샬롬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3. 누가 나를 건져내랴? 

  다시 한번 바울의 목소리를 들어봅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중독의 사슬이 우리 몸을 꽁꽁 묶어 버렸다면, 과연 누가 우리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수 있단 말입니까? 바닥이 보이지 않는 악한 욕망을 추구하면, 어느 순간 그 욕망이 우리를 지배해서 끝까지 끌고 내려갑니다. 도박이, 마약이, 술이, 섹스가, 때로는 쇼핑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벗어나야 합니까?

  스킨 스쿠버를 하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동해바다는 물이 차갑고 푸르다고 합니다. 깊이 들어가다 보면, 새파란 어둠에 둘러싸여서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겠고, 나중에는 위아래 또는 방향 구분이 안됩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나와야 하는지 헷갈리는 순간이 있다고 합니다. 자칫하면 패닉상태가 되어 공기 소모도 빨라지고 판단력도 흐려집니다. 그래서 초보자는 혼자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반드시 인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혼돈스러운 순간이 오면 인도자의 곁에서 조금씩 상승하며 빛을 향해 가야 합니다.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던 바울은 심연에서 헤매기보다, 빛을 뿜어내는 소중한 인도자를 의지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7:25-8:2) 

  심연에 들어가 그것을 마주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는 방향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것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그것의 장악력은 더해집니다. 중독은 지금의 고통을 벗어나려고 택한 바로 그것으로 인해 더 큰 고통을 겪는 질병입니다. 죄의 장악력이 그와 같습니다. 그 장악력으로부터 빠져나오려면 그것을 가장 잘 아시는 분, 그것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분의 인도와 도움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고통의 문제를 다루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 문제의 중심으로 나아가 십자가로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를 이루신 그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심연 속으로 들어와 빛이 되어 주십니다. 그 빛 안에서 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주위가 보이고, 길이 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은혜의 길을 하나씩 찾아낼 수 있습니다. 

  먼저, 자신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중독을 질병으로만 보아 회피하거나, 나의 나약함으로만 치부하며 자책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식하고 회개합시다. 말씀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살피며 겸손히 은혜를 구합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용서는 무한하며, 주님의 치유의 손길은 완전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다음으로, 믿음의 동역자들과 나누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몸이 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 돌아보아 섬기고 회복하는 믿음의 여정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목회자와 소그룹 멤버들에게 기도를 요청합시다. 믿음으로 은혜의 그릇을 준비하면, 하나님께서 그 그릇에 은혜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치유 받은 사람이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며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교회는 정죄의 공간이 아니라 치유의 공간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일반은혜의 영역을 신뢰하며 전문가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중독은 영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의학적, 심리적인 측면도 강하므로 겸손하게 전문가(상담사, 의사)의 도움을 받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구체적이며 전문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을 만나는 것 또한 신앙적인 접근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궁극적인 해법은 오직 한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심연을 비추시며 인도하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앞선 말씀드린 방법들이 주님께서 마련하시고 비춰주신 길이라 믿으며, 예수님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죄의 유혹에 저항하고, 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롬 8:2). 예수님만이 우리를 중독이라는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실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나가며…

  설교의 서두에서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골룸을 소개했습니다. 이제, 골룸과 정반대의 길을 가려는 주인공 ‘프로도’ 이야기로 오늘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프로도는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원정대를 조직하여 기나긴 모험을 떠납니다. 그러나 정작 반지를 파괴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 프로도 역시 자신의 의지력으로는 반지를 놓지 못하고 반지의 영향을 받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바울이 고민했던 바로 그것,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속성과 같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신실한 친구 샘과 동료들이 프로도를 도왔고, 골룸의 탐욕이 오히려 반지를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작가 톨킨은 하나님의 수단과 섭리를 보여주는 듯한 장면들을 창조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골룸처럼 평생 ‘내 보물’이라 부르며 죄의 노예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도 당신의 방법으로 역사하시며 우리에게 온전한 자유를 주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어떤 중독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믿음의 공동체에 도움을 구하십시오. 필요한 치료를 받으십시오. 무엇보다, 우리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시는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물론 쉬운 치유는 없습니다. 기다림과 인내, 넘어짐과 일어섬을 반복하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대반지보다 강한 권능으로 우리를 해방시키시는 분,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각주

  1.  J.R.R.톨킨, 『반지의 제왕』 김보연 외 2인 옮김, 파주: 아르테, 2021.
  2. 골룸의 첫 등장은 『호빗』(J.R.R.톨킨, 이미애 옮김, 파주: 아르테, 2021)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반찬국 역, 파주: 아카넷, 2018.
  4.  참고. 변종길, 『로마서』,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2014. p.227.
  5. 코넬리우스 플랜팅가, 『우리의 죄, 하나님의 샬롬』, 오현미 역, 서울: 복있는 사람, 2017. p.209.
  6. 존 오웬,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문근주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9. p.61.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John Owen)은 “정욕도 열매를 맺을수록, 그들 속에서 더 자주 격동하고 증가됩니다. 정욕은 자기를 먹고 자라는데, 스스로 독을 집어삼킴으로써 더 자라게 됩니다. 사람들은 죄를 범할수록 죄로 끌리는 성향도 강해집니다”며 죄의 중독성과 영향을 지적한 바 있다.  

김정용 목사는 경희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고려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와 기독교 윤리학 석사(Th. M.)를 하였다. 한때 부유한 삶을 인생 목표로 즐겁고 잘할수 있는 일을 고민하던 중 다행이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행복한 목회의 길을 걷고 있다. 현재 부천 온새로교회에서 담임 목회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