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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과 현실 

  오늘날, 중독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닌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2025년 청소년 미디어 이용습관 진단조사」에 따르면, 청소년의 17.2%에 해당하는 약 21만 명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과도한 사용으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마약 문제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2024년 세관에 적발된 마약은 866억 원 규모였으나, 2025년에는 불과 7개월 만에 1조 원을 넘어섰다. 이를 연간 추세로 환산하면, 전년 대비 마약 적발 물량은 약 6배, 금액은 무려 21배에 달한다. 음주 역시 예외가 아니다. 2023년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고위험 음주율은 13.8%로, 이는 성인 인구 7명 중 1명이 건강을 해칠 정도로 술을 마신다는 뜻이다. 이처럼 중독은 이미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현대 사회는 우리를 점점 더 중독에 취약하게 만들고 있다. 손안에서 펼쳐지는 디지털 화면은 끊임없는 자극을 제공하고, 사회문화는 더 강한 쾌락과 더 빠른 보상을 촉구하며, 끝없는 경쟁과 초개인주의가 낳은 사회적 고립은 우리의 심령을 더욱 공허하게 만든다. 이런 현실 가운데 우리는 알코올이나 약물, 성, 관계, 스마트폰 콘텐츠, 게임, 도박, 쇼핑, 일, 종교에 이르기까지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중독 현상을 목격한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각 개인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영혼을 지배하는 영적 사로잡힘이다. 중독이란 결국, 하나님이어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자리 잡은 상태다. 그래서 중독은 단지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사랑과 예배의 문제다.

 

 

중독은 사랑의 질서가 깨어진 상태

  중독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랑의 질서가 무너진 상태다. ‘중독(addiction)’이란 어떤 물질이나 행동, 또는 태도에 습관적이거나 강박적으로 몰입하여 통제를 잃고, 자신과 타인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상태를 말한다(Lembke, 2022: 27). 이 단어의 어원인 라틴어 ‘additus’는 ‘굴복하다(surrender)’ 혹은 ‘넘겨주다(hand over)’는 뜻을 가진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전쟁 포로로 잡혀 주인에게 넘겨진 노예를 지칭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신성만, 2018: 59). Fransis F. Seeburger(1993: 40-41)는 대부분의 중독자들이 개인적 혹은 환경적 요인의 복합적인 결과로,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무엇인가에 ‘자기 노예화(self-enslavement)’된다고 말한다. 즉, 중독자는 삶의 주도권을 어떤 대상에 넘겨주고 그 앞에 굴복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들은 통제력을 상실한 채 중독 대상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며, 생각과 의지, 선택과 행동이 모두 그 대상에 종속된 삶을 살아간다.

  결국, 중독은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본래의 방식을 상실한 채, 오히려 그 피조물에 지배당하고 의존하게 되는 왜곡된 사랑의 질서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무언가를 갈망하고 의지하며, 그로부터 삶의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을 잃은 상태다. 이처럼 깨어진 사랑의 질서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2017: 1.4.4.)는 ‘향유(frui)’와 ‘사용(uti)’의 구분을 통해 설명한다. ‘향유’란 어떤 대상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아, 그 자체로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반면 ‘사용’은 피조세계를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향유의 궁극적인 대상이며, 돈과 일, 성, 관계 등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사용’되어야 할 대상이다. 이 사랑의 질서가 무너질 때, 즉 사용해야 할 대상을 향유하려 할 때, 그것은 ‘남용(abusus)’ 또는 ‘오용(abusio)’이 된다(Augustine, 2017: 1.4.4.; 1.32.35; 1.33.36–37).

왜곡된 사랑의 질서는 결국, 향유할 수 없는 대상을 향유하려는 욕망을 낳고, 이는 남용과 오용을 넘어 병적인 집착, 곧 중독이라는 현상으로 드러난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랑의 관계가 깨어질 때, 죄된 인간은 그 공허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한다. 썩어 없어질 세상의 향락과 기쁨으로 영원의 결핍을 채우려 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이 깊은 목마름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될 수 없다(Augustine, 2016: 1.1.1). 그리하여 사람은 더욱 세상의 것에 집착하고, 그것을 갈망하며, 결국 그것의 노예가 되어간다. 사람이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은 일종의 예전(ritual)과 같다(Smith, 2016: 46). 우리는 무엇인가를 반복할수록, 그 행위 자체를 통해 무언가를 예배하게 된다. 반복적으로 술을 마시면 육체는 점점 술에 의존하게 되고, 반복적으로 영상을 시청하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점점 ‘보는 것’에 지배당한다. 한 기독교인 형제는 매일 밤 유튜브를 시청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가치관과 기준이 유튜버의 말투와 시선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반복된 행위는 어느덧 우리의 사고와 감정을 사로잡고, 삶의 방향마저 이끌어간다. 모든 실천에는 방향이 있다. 우리가 어떤 물질이나 행위를 통해 행복과 만족, 즐거움과 성취를 느낀다면, 그 실천은 곧 우리의 마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다. 그러므로 중독 문제의 본질적인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지금,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하나님보다 더 기뻐하고, 더 즐거워하고, 더 필요로 하는 무언가가 있는가. 하나님 외의 어떤 것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생기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사랑해야 할 자리에 그 피조물을 그 자체로 사랑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길이 아닌 우상을 향한 길, 거짓된 예전의 길,곧 중독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중독의 영적 본질은 자기 사랑이란 우상 

  『참 목자상』의 저자로 우리에게 익숙한 Richard Baxter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도박에 빠져 가계에 많은 빚을 지게 했고, 그것을 또 다시 도박으로 채우려는 중독적 성향을 보였다. 그랬던 그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회심하게 되자, 도박을 끊고 기도와 말씀, 경건 생활을 중시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경건의 삶은 Baxter의 성장 과정에 영향을 주어 오늘날까지 귀한 목양의 본보기가 되게 했다. 

  성경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어떤 것을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랑하고, 그것을 삶의 주인으로 삼아 과하게 의존하는 것—그것이 곧 중독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독은 단순한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영적인 문제다. 다수의 기독교 학자들이 중독을 ‘우상숭배’로 정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May, 2005: 45; Welch, 2001: 47). 중독은 마음의 왕좌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앉히는 일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을 대체한 우상의 자리다.

  성경은 우상숭배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이며,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지 못하게 하는 심각한 죄임을 분명히 경고한다(신 5:7–10; 엡 5:5). 우상은 단순히 땅의 재료로 만든 형상이나 이방 종교의 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 세워진 충성과 헌신의 물리적 표현”이다(Welch, 2001: 48). 즉, 우상숭배의 본질은 형태가 아니라 방향에 있다. 하나님께로 향해야 할 사랑이 다른 대상을 향할 때, 사랑의 질서는 무너지고 마음은 혼란에 빠진다. Timothy J. Keller(2011: xviii)는 돈, 성공, 소원, 사랑, 권력, 문화, 심지어 종교까지도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는 “내가 만든 신(counterfeit gods)”, 곧 우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장 뿌리 깊은 우상은 우리가 중독적으로 추구하는 대상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물질이든 행위든 간에 상관없다. 오히려 그 대상을 통해 나 자신이 유익과 만족을 얻고자 하는 ‘마음’에 중독의 본질이 있다(Welch, 2001: 49).

 결국 우상은 나를 위한 수단일 뿐이며, 중독은 하나님을 떠난 자기 사랑의 왜곡된 형태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랑은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의 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창 3:5).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스스로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시도—이것이 곧 중독의 영적 본질이다. 중독은 단순한 우상숭배를 넘어선 자기숭배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독의 진정한 문제는 술이나 약물, 인터넷이나 게임, 성과 같은 수단에 있지 않다.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잃고, 자신을 숭배하기에 이른 우리의 “마음”이다. 성경은 이렇게 권면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중독의 원인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부재

  중독이라는 우상숭배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 사라질 때, 사람은 우상을 따르게 되고, 그렇게 시작된 우상숭배는 다시 우리의 지성을 미혹하여 거짓과 허상 속에 존재와 삶을 붙들리게 만든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8). 이 말씀은, 우상숭배로서의 중독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왜곡시키는지를 잘 보여준다.

  눈도 없고 귀도 없으며 감각도 없는 우상의 형상처럼, 그 우상을 따르는 사람들 또한 점점 눈이 멀고 귀가 먹으며 감각이 무뎌진다. 하나님의 창조 은혜가 보이지 않고, 말씀은 들리지 않으며, 마음은 마침내 돌덩이처럼 굳어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을 잃고 만다(시 115:4–7). 이러한 인간의 영적 상태에 대해 성경은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사 44:18)고 말한다(Welch, 2001: 50).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이 없고, 그분이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죄인은 결국 세상 그 자체에 집착하고, 물질을 갈망하게 된다. 삶의 스트레스와 불안, 트라우마, 관계의 상처와 같은 부정적 정서를 피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중독 물질과 행위에 빠지게 하고, 이는 곧 신경계에 변화를 일으켜 결국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 중독 대상이 주는 자극과 보상에 마음을 빼앗기게 만든다(김규보, 2023). 이러한 역동이 반복될수록, 사람은 그 대상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고, 결국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북미 지역에서 청장년의 사망 원인 1위로 알려진 마약 ‘펜타닐’은 본래 암이나 극심한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개발된 약물이다. 제대로 사용될 경우, 고통을 줄이고 삶을 견딜 힘을 주며, 하나님의 창조 은혜에 감사하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물질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을 망각한 채, 그것을 쾌락의 도구로 오용하고 남용하며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목숨마저 잃고 있다.

본질적으로,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칼빈은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밝히 보여주는 거울이자 표징”이라 표현하며, 모든 피조물 속에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이 드러나도록 설계되었음을 강조한다(Calvin, 2020a: 198).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종교의 씨앗이라 불렀던 것을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주셨을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 자기를 드러내시고 날마다 공공연히 보이신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눈을 열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받게 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작품 각각에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확실한 표지를 아주 명확하게 새기셔서, 아무리 거칠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 무지를 핑계 삼을 수 없도록 하셨다”(198).

곧,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비출 때에야 비로소 존재의 타당성을 갖는다.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를, “누구든지 행복에 이르는 문”에 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 말한다. 곧 “복된 삶의 최고 목표”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시려는 것이었다(Calvin, 2020a: 198).

참된 만족과 유익이 있는 복된 삶은 바로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주시며, 모든 만물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예: 창 1:1; 느 9:6; 시 93:1; 146:1–10; 전 3:11; 사 45:18; 요 1:1–3). 이 진리는 중독을 일으키는 모든 물질과 행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모든 피조물과 그 안에서의 행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할 때에야 비로소 정당성을 얻는다. 즉,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지식 안에서 물질을 바르게 사용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피조세계를 사랑할 수 있으며,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중독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는 전혀 다른, 타락한 피조세계의 왜곡된 질서를 만들어낸다. 중독에 빠진 사람은 창조 세계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 그 대신, 술과 마약, 게임과 인터넷, 쇼핑, 부적절한 관계 등 세상의 다양한 물질과 행위를 통해 하나님이 아닌 세상적 쾌락을 추구하거나,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한 직면을 회피하거나, 불편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강박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잊은 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통해 스스로 만족과 유익을 얻으려 한다.

이러한 중독은 일시적 만족감으로 사람을 미혹하고, 신경계는 내성과 금단의 악순환 속에서 더 강한 자극을 갈망하게 된다. 처음에는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이었던 물질과 행위가, 결국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무 능력도 없는 허망한 우상에게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고 매달리는 어리석은 모습과 다르지 않다(사 44:17).

 

중독 치유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중독으로부터 자유를 경험할 수 있는가? 중독의 궁극적인 해결은 오직 그리스도께 있다. 중독이 본질상 깨어진 사랑의 질서이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통치에 대한 무지이며, 궁극적으로 우상숭배라면, 그 회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밖에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우리는 가장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되신 그리스도와 분리된 인간의 참된 회복과 변화를 가정할 수 없다. 

  성경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죄의 저주와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의롭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화목과 평안을 누림을 증거한다(e.g., 골 1:13-20; 엡 1:17; 롬 3:24; 5:10-11, 8:21; 딛 2:11-14).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는 육체의 소욕을 떠나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갈 5:16-24).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는 “불필요한 일들에 속박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서 충만한 평온”을 얻고, “의에 대한 소망”과 “사랑의 수고를 다하는 참 자유”를 얻는다(문병호, 2013: 239). 즉, 죄인된 인간을 불필요한 속박, 곧 죄뿐만 아니라 중독으로부터 온전히 구원하고 평안과 소망과 자유를 주시는 이는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성도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분께 배우며, 그분을 좇는 삶을 사는 참된 자유인이 됨으로써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마11:28-30, 16:24; Calvin, 2020b: 533-50). 사람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행 17:28). 따라서 중독 치유의 궁극적인 방향은 그리스도를 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중독 치유의 근원이라는 말이 “하나님, 이 중독 행위를 끊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단순하게 기도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닮음(Christiformity)’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전인의 질서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성품과 질서를 담아내고, 전 존재와 삶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점진적으로 영원토록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다(김규보, 2025).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함 가운데 생각과 정서, 마음의 동기, 의지적 실천, 삶의 태도와 습관, 관계 등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담아내는 실천이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분을 영원토록 닮아갈 때, 중독 물질과 대상은 더 이상 우리를 사로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지배하시기 때문이다. 

 

중독 치유의 첫 번째 단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질서를 회복함 

  그리스도가 우리를 지배하실 때, 우리의 사랑의 질서는 변화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이 반복적으로 행하는 실천은 마음의 방향을 가리키고, 몸과 마음의 기울어짐은 사랑의 대상을 향하며, 왜곡된 사랑의 대상을 향해 형성된 중독은 결국 하나님 사랑을 대항하는 거짓 예전이 된다. 기독교 철학자 James K. A. Smith(2016: 11-12)는 사람이 원하고 갈망하고 욕망하는 바가 결국 그 사람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을 형성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사랑하는 것을 향하고 그 대상이 결국 사람의 존재와 삶의 내용을 채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향은 하나님 사랑의 재형성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하고 그분의 말씀과 뜻을 기뻐하며 경건한 삶의 습관을 형성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성도의 존재와 삶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선언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가 되어 간다. 이런 예배적 삶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성도가 누리는 참된 자유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에 중독이라는 우상과 거짓 예전은 견뎌낼 수 없다. 세상의 어떤 중독물질과 대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기쁨을 아는 성도는 결코 세상의 것을 다시 예배할 수 없다. 빛이 어둠을 비추면,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요 1:5). 

 

중독 치유의 두 번째 단계: 그리스도 안에서 참 지식을 회복함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를 지배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고, 그 지식은 우리를 경건으로 이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한 지적 깨달음이나 통찰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령의 조명 아래 믿음 안에서 “경건한 정서”(Calvin, 2020b: 57)와 “확실한 감화”(Calvin, 2020b: 62)를 불러일으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과의 영원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형성되는 하나님에 관한 전인적 앎, 곧 삼위 하나님과 거룩한 사귐 가운데 한평생 그분의 뜻을 알아가고,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며, 그분의 의지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경건을 낳는 지식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을 계신 것과 행해야 할 마땅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한 삶이 결국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Calvin, 2020a: 172; 문병호, 2013: 47-48). 조직신학자 John M. Frame(2015: 112)은 “인간의 의무를 규정하는 궁극적인 근원은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며 “신학은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작업”이라고 강조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이 모든 영역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의무를 정해주는 생활 전반의 규범이자 실제적 윤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참으로 알면, 자기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삶의 방향과 실천이 점차 달라진다(고후 5:17).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참으로 알면,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만들지 않으며 불경과 위선 가운데 종교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그 대신 두려움과 경외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게 된다”(Bayly, 1994: 25).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술 취함이 가능한가? 하나님 앞에서 마약에 취하고, 부적절한 성적 관계에 취하고, 도박에 빠질 수 있는가? 만일 그러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진정 아는 사람의 삶이 아니다. 이에 Calvin은(2020a)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은총을 아는 지식이 그것[경건]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빚지고 있다는 것, 자기들이 그의 부성적 돌보심에 의해 양육된다는 것, 그가 그들 자신에게 모든 은총을 베푸는 조성자시라는 것을 지각해야만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 밖에서 찾지 않게 된다”(174). 어떤 것도 하나님 밖에서 찾지 않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를 중독이 지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적 관점의 중독치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공유한다. 이는 단순히 성경공부를 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는 믿음을 갖는 것이며, 더 나아가 모든 삶의 순간에서 자기 주권을 내려놓고 자기 성공과 만족을 지향했던 삶의 선택과 행동을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는 전인의 질서 가운데 그리스도가 임하는 것이다.  

 

나가며: 멈추지 않는 여정

  끝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그리스도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독으로부터의 회복과 변화된 삶은 인내와 성화의 과정을 포함한다. 그러나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함 가운데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안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중독 행위에 대해 스스로 합리화하며 그리스도가 피 흘려 구원하신 자기를 결코 죄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무한한 사랑과 은혜로 거듭난 하나님의 형상임을 알기에 성도는 비록 부족하고 때로는 넘어지지만 다시 그분을 의지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


참고문헌

김규보 (2025). 『성경적 상담학 개론(상)』. 서울: 생명의 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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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호 (2013). 『30주제로 풀어 쓴 기독교 강요』. 서울: 부흥과 개혁사.

신성만 (2018). “중독상담의 기독교적 접근: 동기균형과 동기강화상담.” 한국기독교상담 심리학회(편저). 『중독과 영성』, 59-83. 서울: 학지사.

Augustine. (2017). 기독교교양 (김종흡 역, De Doctrina Christiana). 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 (원전 397 출판)

Bayly, L. (1994). The practice of piety. Morgan, PA: Soli Deo Gloria. 

Calvin, J. (2020a). 『1559년 라틴어 최종판 직역 기독교 강요1(문병호 역,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서울: 생명의 말씀사. 

Calvin, J. (2020b). 『1559년 라틴어 최종판 직역 기독교 강요3(문병호 역,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서울: 생명의 말씀사.

Frame, J. M. (2015). 『기독교 윤리학(이경직 역, The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서울: P & R.

Gorman, M. J. (2010). 『삶으로 닮아내는 십자가: 십자가 신학과 영성(박규태 역, Cruciformity: Paul’s narrative spirituality of the cross)』. 서울: 새물결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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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ke, A. (2022). 『도파민네이션(김두완 역, Dopamine nation: Finding balance in the age of indulgence)』. 서울: 흐름 출판. (원전 2021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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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보 교수는 총신대학교 상담대학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복음주의상담학회의 회장으로서 기독교 상담학의 학문적 발전과 교회 현장의 실천적 적용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임상심리사 1급이자 감독상담사로 활동하며, 학문적 연구와 임상 경험을 균형 있게 겸비한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성경적상담학 개론(상)』(생명의 말씀사, 2025), 『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되는가』(생명의 말씀사, 202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