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종영한 인기 드라마 ‘프로보노’(공익변론을 의미)에서 화제가 된 장면이 있다.[1] 하지마비 증세를 안고 태어난 12세 소년이 ‘장애가 있는 삶은 고통일 뿐이니 자기를 태어나게 만든 하나님에게 손해 배상을 청구하겠다’고 공익 변호사를 찾아왔다. 신에게 소송을 걸 수는 없으니, 결국 그를 출산하게 한 병원을 상대로 소송이 진행되었다. 변호사들의 조사 결과, 미혼모였던 소년의 어머니는 당초 임신중절을 원했으나, 독실한 기독교 장로가 설립한 해당 병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출산을 강력하게 권유하는 곳이었다.
드라마 속 변호인단은 이 지점을 파고든다. 의료진이 태아의 장애 가능성을 인지하고도 이를 제대로 알리지 않음으로써 산모의 선택권을 침해했고, 결과적으로 의뢰인의 주장대로 ‘태어난 것 자체가 손해가 되는 상황’을 유발했다는 논리다. 거기에 과도한 종교적 신념까지 개입된 것으로 의심된다. 언뜻 황당하게 들릴 수 있는 소송이지만, 이는 단순한 흥미 소재를 넘어 인간 생명의 가치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보이는 현상 너머, 생명의 본질을 응시하다
공교롭게도 이 재판의 주심 판사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원고와 피고 양측의 치열한 공방이 끝난 후, 판사가 최종 판결을 내릴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미리 준비된 점자 판결문을 손끝으로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얼굴은 방청석을 향해 있었으나, 앞이 보이지 않는 시선은 원고나 피고 그 누구도 특정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공정한 판결을 위해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 ‘디케(Dike)’를 연상케 했다. 디케가 편견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눈을 가렸듯, 판사는 육신의 눈을 닫음으로써 세상이 씌운 이해득실과 명분이라는 껍데기를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시선은 타인을 제압하려는 날 선 눈빛 대신, 오직 자신의 내면과 진실 그 자체만을 응시하는 담담하고 초월적인 표정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심판의 칼을 휘두르는 대신, 점자를 어루만지는 손으로 판결의 무게를 감각하는 듯했다. 법정 안에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고뇌가 담긴 판결문이 차분하고 또렷하게 낭독되었다.
“피고 병원이 원고의 장애 가능성에 대한 진단 및 설명 의무를 고의적으로든 과실로든 이행하지 아니하였다는 점인데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원고를 낙태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겠죠. 그로 인한 피고의 손해 배상 의무를 인정하려면 우리는 ‘아주 어려운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이 사건에서 원고가 승소하려면 열두 살 소년 강훈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보다 아예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 나앗다. 그의 삶 생명 자체가 손해에 불과하다. 이런 ‘참담한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한 개인으로서는 저 역시 원고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법정에까지 왔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법관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은 장애가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부자든 가난하든 모든 사람의 생명은 똑같이 존엄하다는 것을 가장 근본적인 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헌법상 생명보다 존귀한 권리가 없는 이상 생명이 없는 상태가 생명보다 나았다는 가정적 판단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생명이 존재할 가치가 있는지, 어떤 삶은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나은지 이런 판단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원고 김강훈의 출생을 손해로 인정할 수 없으므로 원고의 청구는 이유 없어 이를 기각합니다.”

논리적 정교함을 넘어서는 존재의 울림
원고인 소년에게 결과는 기각, 즉 패소였다. 그러나 그 판결문은 장애로 인해 차별과 고통을 받아 온 그의 천부적 존엄함을 재판정에 준엄하게 선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년과 모친의 표정에는 뜻하지 못한 위로와 존중을 받은 기색이 감돌았다. 실제로 메이킹 영상을 보면 드라마 속뿐만 아니라 배우, 감독, 스태프들까지 이 장면에 숨죽여 몰입했고, 판결 낭독이 끝나자 격한 감동의 박수갈채를 보냈다.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그토록 세차게 흔들었을까? 소송의 내용은 서늘했고 법리는 보수적이었으나, 그 울림만은 따뜻하고 묵직했다. 이 순간이 명장면이 된 것은 판사의 논리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어조와 태도에서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아우라’ 때문이었다. 인간을 향한 그녀의 깊은 응시는 법정을 기계적인 판결의 장소가 아닌, 범접할 수 없는 생명의 존엄이 흐르는 성소(聖所)로 바꾸어 놓았다. ‘생명 우선’(pro-life)이냐 ‘선택 우선’(pro-choice)이냐 하는 치열한 논쟁의 프레임 밖에서, 이 판결은 더욱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인간이 과연 다른 인간 삶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가’라는, 진실한 인간이라면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겸손한 문제의식 앞으로 우리를 이끈다.
시선을 돌려, 오늘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마주하는 우리의 얼굴은 어떠한가? 낙태나 성(性) 윤리와 같은 문제에서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가는 이 시대에, 기독교적 가치를 전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고 시급한 과제다. 그러나 기독교적 가치와 신념이 무기화되어 정죄와 비난에 열을 올리고 이념적 대립에 가담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 아닌 위력의 과시로 흐를 위험이 있다. 그렇게 되면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생명을 살리고 보듬는 일보다는 서릿발 같은 차가운 결기만이 세상에 전해질 것이다.
진리의 설득은 결국 ‘에토스’가 답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그리스도인이 낙태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것은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자녀들을 환영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어야 한다.[2] 기독교가 낙태에 반대하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의 고유한 덕목 및 성품과 연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명 판정의 시기를 놓고 논쟁하거나 예외 가능한 사례를 궁리하는 것보다, 더 깊은 기독교적 신념을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그는 “낙태라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않게 할 인간상 확립 및 공동체 구현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3] 교회가 기독교적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 바로 그 숙제가 낙태를 반대하는 저변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군가를 설득하는 수사학의 요소로 진리의 내용을 의미하는 로고스(logos), 감정적 호소인 파토스(pathos), 그리고 전달자의 인격과 신뢰성인 에토스(ethos)를 꼽았다. 그는 특히 “화자의 성품은 청중에게 신뢰를 주는 데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강조했다.[4] 드라마 속 판사의 판결이 큰 울림을 주었던 건, 논리적 정교함만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의 가치를 깊이있고 섬세하며 진정성 있게 품어내는 ‘에토스’ 때문이었다.

진리는 ‘에토스’로 완성된다
기독교가 표방하는 생명의 숭고함은 결코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가치다. 하지만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그 숭고함은, 모든 생명을 대하는 우리의 일관된 예의와 존중, 그리고 신념을 담아내는 정중한 태도에 의해 더욱 설득력 있게 공유된다. 세상은 논쟁에서 승리한 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끝까지 곁을 지키며 함께 울어준 자의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벧전2:22-23) 우리가 따라야 자취를 남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이기 때문이다. (*)
주)
- 방송 정보 및 주요 에피소드: 방송국: tvN, 방영 시기: 2025년 12월 13일 (3화 방영), 3화 에피소드 제목: 『태어난 것이 손해라는 소년의 절규』, 주요 내용: 선천성 하지마비 장애를 가진 소년이 자신을 출산하게 한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을 시각장애인 판사가 심리하며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와 함께 생명의 존엄과 가치를 드러내는 울림 있는 판결을 내린 에피소드.
-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회됨』 (서울: 북코리아, 2010), 374.
- 위의 책, 402.
-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서울: 현대지성, 2020), 18.
김선일 교수는 아신대에서 신학(B.Th.)을 공부한 뒤, 도미하여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 Div.) 과정을 마치고 동 대학원에서 실천신학을 전공하여 박사(Ph. D.)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에 귀국하여 캠퍼스 선교와 지역교회 목회 사역을 하였으며, 현재는 경기도 용인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실천신학과 선교와문화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 연구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도의 유산>(SFC, 2014), <기독교적 회심의 해석과 실천>(새세대, 2023)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