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민 노동자 솔롱고와 한국인 여성과의 사랑을 주제로한 뮤지컬 ‘빨래’
경계를 의심하고 샬롬을 선포하다
오래전, 교회 청년 시절이었다. 매주 토요일이면 우리나라에 최초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한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많은 공단을 찾아갔고, 주일에는 교회에서 한국어 교실을 운영하던 형님, 언니들 틈에 나도 자연스레 끼어 있었다. 21세기에 접어들며 북한이탈주민 한두 가구를 방문해 정착을 돕는 자원봉사를 잠시 했다. 몇 년 뒤에는 다문화·다민족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연구소에서 결혼이주여성 지원과 관련한 연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 사이 대형 교회들은 예배 동시통역을 도입하거나 여러 언어로 예배를 진행하며 다문화 프로그램을 확대해 나갔다. 명절이면 도심과 관광지에서 오랜만에 휴식을 즐기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은 어느덧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대학가에서도 몇 해 전부터 외국인 유학생 유치가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인구가 줄어드는 지방 도시들까지 가세해 더 많은 나라에서 유학생을 불러들이려 애쓰며, 졸업 후 정착 기회까지 제공하겠다는 분위기다. 돌아보면, 나의 경험은 그저 이주민들의 언저리를 오가던 개인적 발걸음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으로 온 나그네들은 ‘외국에서 출발했다’는 하나의 공통점만으로 묶을 수 없을 만큼 다채로운 모습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2024년 기준 장·단기 체류 외국인은 2,660,783명이다. 이는 전체 인구의 5.2%에 해당하며, 20명 중 1명이다. 취업자격 체류 외국인은 566,961명이며, 임금근로자 약 2,169만 명 대비 2.61%에 해당한다.[1] 즉, 100명이 급여를 받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중 2~3명이 외국인이라는 의미이다. 결혼이민자는 181,436명이며, 최근에는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북한 이탈 주민 누적 입국자는 31,408명이다.[2]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전 영역에서 ‘글로벌’이 기본값이 되면서 여행에서 정착을 위한 이주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머무는 외국인들의 목적, 유입 경로, 출신 국가 비중, 성별 및 세대 비중 등이 역동적으로 변화해 왔음을 많은 국민들이 경험하고 있다.
이번 글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주노동자이다. 이주민의 성격과 상황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는 이주노동자와 우리 사이의 거리이다. 크고 작은 산업재해에는 항상 이주노동자가 더 많이 포함되어 있어, 안타까운 현실이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이주민을 돕고 예배 장소를 제공하는 교회들도, 사회가 제공하는 복지와 구별되는 사역이 무엇인지, 선교적 차원이나 이웃사랑 실천의 측면에서 바람직한 내용과 방법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고용허가제의 두 얼굴, 인권·주권의 이분법 현실
인권 침해, 불법 체류, 송출 비리 등 문제가 많았던 산업 연수생 제도를 대신하여 2007년부터 고용 허가 제도가 시행되었다. 고용 허가 제도는 한국 정부와 2024년 현재 17개국 정부가 각각 MOU를 체결하고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 정한 절차에 따른다. 내국인 우선 고용의 원칙 하에 최소한의 외국인을 수용하되,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성을 인정하여 국적에 따른 차별을 없애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사용자 측은 내국인 근로자에 대한 역차별이나 임금 상승 등 기업 경영 효율성 측면에서 불합리하다고 비판하였고, 노동자 입장에서는 고용을 허락한다고 하면서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부여하지 않아 현대판 노예제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근로를 개시한 최초의 사업장에서 계속 근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인권 문제 등으로 근로 관계 지속이 어려운 경우에만 최대 3회까지 사업장 변경을 허용한다. 그런데 퇴사 후 3개월 이내에 새로운 사업장을 구하지 못하면 출국해야 하므로 부당한 고용 환경을 감수하게 된다. 재취업도 사업주만 신청할 수 있다. 이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근로 허가가 아니라 그야말로 사용자의 고용권을 보장하는 제도이다.
제도의 양면성만큼이나 이주노동자의 권리 인정에 대해서도 논쟁점이 되는 부분이 있다. 외국인이 국내 법원에서 권리를 구제받고자 할 때, 사회적 기본권으로 호소하면 헌법상 ‘국민’이 아니므로 불완전한 주체로서 한계에 부딪히고, 반면 인권에 호소할 경우 국제 규범의 영역으로 판단되어 불완전한 관할의 한계에 부딪힌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가 ‘시민권’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기존의 국적 중심적 이해를 벗어나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거주하며 생활 또는 노동의 조건을 충족하면 시민으로서 요건을 갖춘 것으로 보고 권리 보장의 대상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논의도 있다.[3]
이주노동자를 보편적 인간으로 보고 국제법의 형식으로 규정된 인권의 영역 속에 위치시키는 것은 이주노동자 보호의 출발점이다. 국제 인권 협약의 하나인 이주노동자 권리 협약은 이주노동자 본인뿐 아니라 그 가족도 보호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4], 차별 금지 원칙에 근거하여 이주 및 체류 자격에 상관없이 생명권, 자유, 집단 추방으로부터의 보호, 적절한 노동 조건 보장 등 기본 인권을 보호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주 관리는 기본적으로 국가 주권의 영역임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협약 제8조 및 제39조에 따르면, 이전의 자유와 거주지 선택에 대한 권리는 ‘국가 안보, 공공 질서, 공중 보건이나 도덕 또는 다른 사람의 권리 및 자유를 보호하는 데 필요’하다면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런 성격의 조항이 여러 개 포함되어 있음에도 한국은 아직까지 협약을 비준(批准)하지 않고 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교회의 환대와 한계
제제와 배척이 먼저였던 법률과 사회 환경과 달리, 이주노동자의 보호를 위해 가장 먼저 나선 곳은 바로 교회와 목회자들이었다. 인권 보호에서 출발한 사역은 이주노동자의 한국 사회 적응을 위해 교육 사업, 문화 사업, 실태 조사, 의료 및 법률 서비스 등으로 확대되었고, 지역 교회는 돌봄과 더불어 예배 처소를 제공하며 내국인과 이주민, 이주민과 이주민을 통합시키는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이주노동자의 어려움과 문화를 이해하고자 공부하고 고민하며 이주민을 환대하고 포용하고자 하였으며, 출신 국가로 돌아가게 될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복음 전도의 기회는 기존 해외 선교의 연장을 넘어 확장된 비전으로 공유되었다.
이주노동자 돌봄의 기반이 된 대표적인 성경 말씀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대접하라는 것이었다(신 10:18, 약 1:27). 교회는 이들을 환대하고 권익을 보호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음이 재강조되었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동일하게 지음 받은 하나님의 백성(창 1:26; 9:6)’이라는 말씀은 이주노동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되었다. 이주노동자 문제를 논의하는 여러 연구들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뿐 아니라 그분의 공의를 나타냈다. 바로 그 때문에 자선 사업뿐 아니라 사회 정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존 스토트)”는 글과 맥락을 같이하는 다양한 주장들을 제시하였다.[5] 그리고 기독교가 이주노동자를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 판단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이주민들의 현실과 필요를 잘 아는 교회와 목회자들의 환대실천의 앞선 걸음은 국내법 개정과 사회복지제도 보완을 이끄는데 기여했다.
그런데 분명하고도 아름다운 성과들이 있음에도 이주노동자의 비참한 주거 실상[6], 증가하기만 하는 사망 산업재해, 내국인과의 심리적 물리적 차별과 폭력의 소식은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7] 심층면접을 통해 이주노동자 선교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고찰한 연구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는 교회 안에서도 무시당하는 경험을 하고, 필요한 것을 준다고 교회에 오라고 하면서도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는 관심을 주지 않으며, 교회에 사람을 데려가면 돈을 주기도 하지만 친구가 되어주지는 않음을 경험한다.[8] 한편 극우주의 정치세력들이 기독교 입국론[9] 즉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시적으로 내세우고 정치활동 과정에서 기독교와 대척점에 있다고 보는 ‘이슬람’ 배척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 영향으로 무슬림권 출신 이주민들에 대하여 혐오를 부축이는 현상도 심해지고 있다.
이상의 내용보다 더 근원적인 한계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견지해야 할 정교분리 원칙의 적용에서 한국적 특수성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국가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할 의무를 가지고 있고 교회는 국가의 좋은 시민으로 충성을 다하고 국가를 위해 기도할 것이라는 약속을 한다. 국가와 교회의 역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복음주의자의 의도와 달리 현실 정치를 만나면서 정교분리가 아닌 권위적 정부에 협력하고 국가 권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승인받은 신성한 권력으로까지 인지한다. 이러한 ‘유사분리형 정교분리’[10] 형태는 바람직한 삶으로 이끌지 않는다. 국가 혹은 사회가 만드는 불의를 용인하게 된다 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빗겨 적용된 국가관은 이웃을 곤경에 빠트리는 불의를 구분하고 인지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비롯된 국가관은 이주민의 위급한 상황에 대해 현행법들이 기본권 존중과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는지, 혹은 위험한 상황을 방관하거나 암묵적으로 조장할 가능성을 살피지 못하게 하거나 문제 삼지 않도록 만든다. 이주민 선교 사역 중에, 이주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부당한 일을 당해 소송을 제기할 때, 추방 명령을 받았을 때 이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 앞장서는 것을 주저하게 하고, 국가가 법으로 자격을 부여하지 않은 자들을 위한 환대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극히 작은 자인 난민에 대해 ‘자국민 우선’이라는 간판을 달고 혐오와 배척을 쏟아내는 교회 밖 사람들의 대응과, 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정의를 부르는 소리, 샬롬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나그네 된 이주민을 섬기는 교회가 이러한 한계를 넘어설 방법은 무엇일까? 교회는 선교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나그네를 환대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걸어왔다. 확대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관점이 점차 정립되었고, 최선의 방법을 찾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빠진 퍼즐 조각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샬롬을 위한 교육」의 저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샬롬의 특징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정의와 행복(well-being)은 비록 다양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별되어야 하며, 샬롬은 이 둘 모두를 필요로 한다. 마치 자신의 권리가 존중받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불행한 사람이 있을 수 있듯이, 사람들은 그들의 권리가 침해 당하는 상황에서도 매우 만족하게 느낄 수 있다. 그 어떤 상황도 샬롬이 아니다. (중략) 정의에 대한 구약의 선포에서 충격적인 것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삶 가운데서 완전하고 안전한 지위를 부여받을 권리가 있다고 하는 강력한 주장이다. (중략) 정의는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을 필요로 하며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11]
이주노동자의 샬롬을 위해 희생하며 지원해 왔지만, 정작 정의—즉, 공동체 속에서 안전한 지위를 보장받는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기거나 감수해야 할 몫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 사랑을 실천해왔다고 하지만,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분명히 하지 않았거나,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을 묵인한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교회는 섬김을 통해 얻은 성과를 인정하되,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단순히 사회복지 지침이나 일반 시민단체들의 주장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교회만이 제시할 수 있는 연합된 한 목소리로 이주민의 권리를 회복할 길을 모색해야 한다.
포용과 연대를 막는 모든 경계 의심하기
외국인들이 보험료 대비 의료서비스를 지나치게 이용하여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위기로 몰았다는 주장이 나돌았다. 가짜뉴스다. 직장가입자격으로 보험료를 납부하고 있으며, 지역가입자인 경우 내국인의 보험료 평균보다 높은 금액으로 보험료를 부과한다. 그럼에도 이주노동자는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이기도 하고 열악한 근로환경으로 인해 의료서비스를 자주 이용하지 못한다. 검색어 몇 개면 외국인 대상 의료보험의 흑자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의료보험 재정 걱정으로 포장된 이런 주장은 위험한 칼을 품고 있다. 의료보험제도 운영 관련하여 자국민과 외국인이 분리되도록 외국인을 잠재적 가해자로 규정하여 외국인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것을 마음대로 해도 되는 이유를 생산한다.
노동을 상품으로만 보면서, 피부색·언어·종교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열악한 근로 조건을 감수하게 하고 차별 대우를 일삼는 행위들이 쌓이면, 결국 한 사회의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서로를 존중하지 못하게 된다. 이주노동자보다 유리한 대우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만족감은 잠시뿐이고 고통만 길어질 뿐이다. 국적·인종·출신국의 사회경제적 환경 등 자기 의지로 선택할 수 없는 조건으로 정당화한 차별과 무시의 화살은 곧바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학력·기업 규모·성별·기혼 여부·연령·비정규직 여부·지역 등 노동의 가치를 결정할 수 없는 기준에 임의로 우위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국 누구도 확장되는 차별의 그물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그 결과 중 하나로, 안전교육과 대비가 부실한 현장이나 보건의료를 포함해 근로 환경이 불평등한 현장에서 일어나는 질병과 산업재해는 이주노동자와 자국 근로자를 가리지 않고 발생한다는 사실을 날마다 목도하게 된다. 또한 이는 앞서 언급한 가짜뉴스와 동일한 효과를 낳기도 한다. 노동자로서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연대의 기회가 애초에 차단되면서, 서로 다른 인종·학력·소속 기업 규모로 분리되고 만다.
선한 의도였다 해도, 사람들을 구분하는 행위는 동등한 인간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자국민으로서 이주민을, 기독교인으로서 타 종교인을, 유복한 가정으로서 과부와 고아를, 부유한 자로서 가난한 자를, 봉사하는 자로서 지원받는 사람을 ‘대상’으로만 접근하게 되면, 의도하지 않더라도 결과적으로 시혜자와 수혜자의 경계가 생길 수 있다. 나와 너를 구분하는 이러한 경계 만들기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앞서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했던 “내 이웃이 누구니까(눅 10:29)”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대답하신 예수님의 핵심은, 경계 밖에 있는 이웃이 누구인지 찾기보다 이웃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주노동자를 환대해야 할 나그네로만 규정하며 선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넘어, 나그네의 현실을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이들의 필요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행복이든 필요이든, 이주노동자들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스스로 규정하고 표현한 것이 곧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만약 생각을 멈추고 의식하지 않는다면, 바로 우리가 차별의 주어가 될 수도 있다.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주장과 의견 가운데 서로를 배척하거나 무관심과 혐오를 조장하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는 감수성을 기르는 것 역시 우리의 책임이다.
교회 공동체는 감당할 수 있다
효율성·합리성·준법성·우리 민족·내 가족 우선이라는 ‘친절한 얼굴’로 다가오는 경계 긋기는 힘이 세고 교묘하다. 한 사람이 이를 개별적으로 발견하고 대응하기란 쉽지 않다. 레비나스의 타자 중심 윤리에 따르면, 비참한 상태에 놓인 타인이 간청하며 호소해 올 때 그 호소를 외면할 수 없음이 곧 책임이 되고 윤리가 된다.[12] 그런데 낮고 비참한 자리에서 호소하는 이주노동자의 간청에 대해 환대의 윤리를 실천하는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접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불안정성이 높은 세계 경제 상황과 약육강식 수준으로 경쟁이 과열된 한국 사회 속에서 사는 한 개인은, 낯선 이주노동자들을 보며 염려할 수 있다. 알지 못하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타자 중심 윤리적 실천을 개인적으로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윤리적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이주노동자의 호소를 듣지 않아야 하는데, 호소를 듣지 않을 수도 없고 대면을 피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각자의 ‘나’들은 어려움을 호소하는 주체를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대상’으로 구분하고, 환대하거나 돌보아야 할 가치가 없는 존재로 규정해 버리기도 한다. 이는 사회복지 전사(前史)에서 흔히 보이던 현상과 유사하다. 보호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 보호가 필요한 자를 오히려 사회 문제의 원인이나 혐오 대상으로 몰아 희생양을 만드는 것이다.
국경의 의미가 약해진 노동시장의 이동과 분절 현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는 것 자체를, 곧 자신의 안위를 우선으로 하는 경계 긋기를 정당화하거나 받아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러한 현상과 맞닥뜨린 나 자신도 샬롬을 찾고 있는 한 사람이며, 한국에 무기한 거주할 뿐 일하면서 생존을 아슬아슬하게 이어 가는 이주노동자와 같은 처지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두려움을 없애고 선한 의지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환대 윤리를 실천하는 주체가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나그네 돌봄을 행복을 위한 지원에서 그치지 않고 정의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곳이 바로 교회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희년선교회[13]가 설립한 희년의료공제회는, 이주노동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돌보는 데 있어 신앙 공동체의 조직화된 노력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다. 이주노동자의 필요에 즉각 대응하고자 무료진료소 운영에 그치지 않고, 기존 사회 환경과 제도조차 포용하지 않았던 미등록 노동자들을 위해 보험의 원리와 상호 부조, 자원봉사와 후원 등을 활용하여 사회 제도 밖의 의료보장제도를 만들어 냈다.
이 글에서 희년의료공제회에 주목하는 이유는, 적법성을 방패 삼아 사회가 외면하는 미등록노동자를 ‘주권’을 넘어 보호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주 배경 이웃들이 공적 의료보장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것을 당연시하지 않고, 자국민과 동등하게 건강 ‘권’을 지닌 존재로 인정했다는 점이다. 희년의료공제회의 이러한 실천적 관점은 병원·사회단체·공동모금회·기업 등이 이주노동자와의 경계를 허물고 동참하게 한 선도성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이주노동자의 샬롬을 선포하기 위해 교회는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월터스토프가 빈부의 문제를 샬롬에 비추어 설명한 내용이 등대가 될 수 있다. 우리를 샬롬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당시의 ‘가난한 자’는 자기가 받을 몫을 빼앗긴 자였다. 우리 시대의 가난한 자는 ‘자신의 권리를 박탈당한 자’, 즉 정의를 빼앗긴 자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공존하는 사회에서 가난을 ‘샬롬이 결여된 상태’로 인정한다는 것은 곧 어느 편을 드는 일을 의미한다. 가난한 자의 편을 든다는 것은 그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다.
월터스토프는[14] 우리가 악을 피할 뿐 아니라 선을 행할 책임도 지닌다고 말한다. 가난에 대한 관심은 자선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이며, 권리란 사회의 작은 자들이 자신으로서는 도무지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경제적·정치적·물리적 힘을 규제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가난한 자의 위치에 이주노동자를 대입해 적용해 볼 수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호소를 가장 가까이서 들은 교회 공동체는, 불공정한 고용관계나 근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근로 환경, 고용주의 의무 소홀, 책임을 묻지 않는 근로 감독 등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노동하는 인간으로서 일할 권리를 우선 보장하는 다양한 정책을 제안하고 입법 제안 활동에 참여하며, 이주노동자의 기본권리에 관한 국제협약을 우리나라가 비준하도록 촉구하는 활동도 함께해야 한다. 또한 이주노동자에 대해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를 조장하는 잘못된 정보와 관점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환대의 메시지’가 목회자를 통해 전달되어야 한다.
자신을 지키고자 세운 울타리가 타인과 나를 함께 소외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소극적 노력을 넘어, 내가 처한 시대에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이들과 나그네가 누구인지 찾아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가난한 자를 만들어 내는 사회적 상황과 구조적 원인을 규명하고, 이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는 과정도 필수적이다. “우리는 인간이 스스로 어떤 자격을 지녔는가가 아니라, 모든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고 존경과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칼뱅의 선언은[15] 그들과 우리를 분리하는 경계를 허무는 강력한 원리가 된다. 그리고 호소하는 자의 정의와 행복을 함께 외칠 때, 이웃과 나를 함께 살리는 ‘환대 윤리’의 관계가 형성된다. 샬롬은 조용한 폭풍으로 선포된다.
각주
- 국적으로는 한국계중국인 포함한 중국 36.2%, 베트남 11.5%, 태국 7.1%, 미국 6.4% 순이다. 국제결혼가족 자녀 소위 다문화 초중고 학생 수는 198,814명이다(국가통계포탈 KOSIS, 2024). 참고로 한국에서 30여 년 동안 난민 신청자는 12만 건이 넘는데 2024년 기준 난민 인정률은 1.6%, 전세계 190개국의 2000년~2017년 난민인정률 평균이 30%에 육박하는 것에 비춰보면 낮은 수치다(경향신문 2025년 2월 3일자)
- 같은 말을 사용하는 한 민족이지만 그들에게도 남한은 정착 지원이 필요한 타국 살이 시작이었고 남한 주민들 모두가 이들의 정착과 지원에 대해서 지지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 이다혜, 2014. “시민권과 이주노동”. 『사회보장법연구』 3(1). pp.195-239.
- 김희강·임현. 2019. “이주노동자의 권리- 인권 대 주권의 이분법을 넘어서-”. 『법학논집』 42(4). pp.133-174.
- 김기원. 2003. “이주노동자 문제해결을 위한 기독교의 역할”. 『통합연구』 16(2). pp.45-89.
- 이기호. 2023. “이주노동자 주거 문제의 인권적 접근: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를 중심으로”. 『인권연구』 6(2). pp.189-243.
- 이러한 결과 때문이겠지만 이주민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높이고 기독교윤리적 접근과 활동을 위하여 성찰하고 탐색하는 연구와 논의가 계속되는 것은 그 중 다행스러운 일이다.
- 김선, 2014. “현상학적 연구방법을 통한 한국교회 이주노동자 선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한국기독교신학논총』 92. pp.261-286.
- 전광훈 목사 주축의 자유통일당은 이승만의 건국이념을 ‘기독교입국론’으로 명시하였으며, 한미동맹을 이스라엘과 미국동맹을 뛰어넘는 가치 동맹과 신앙동맹으로 승격시킬 것을 목표로 한다(김혜령, 2024:217).
- 김혜령, 2024. “주권 국가의 ‘이주민 환대’의 어려운 가능성에 대한 기독교 정치윤리학적 연구”. 『기독교사회윤리』 59. p.229.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지음. 신영순·이민경·이현민 옮김. 2014. 『샬롬을 위한 교육』. SFC.
- 강정희, 2018. “환대의 윤리 관점에서 본 이누노동자 정책과 한국 교회의 과제” 『신학과 사회』 32(2). pp.73-108.
- 희년선교회는 비전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세계복음주의 협의회 (WEF)의 ’74 로잔 언약 및 89 마닐라 선언’에 나타난 신앙고백과 대도시 선교(URBAN MISSION) 개념에 입각한 총체적 선교 전략을 실천함으로써 공단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복음화함에 두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외국인 이주민들의 인간성 회복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성 회복에 전념함으로써 세계 전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 핍박받는 사람들의 삶 속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도록 하며 한국 사회로 하여금 이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식을 버리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맞이하도록 노력한다(창 1:26-28).” (https://jubileekorea.tistory.com. 2025.2.28.검색)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홍병룡 옮김. 2012.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때까지』 IVP. pp.153-198.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홍병룡 옮김. 2012.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때까지』 IVP.

배화숙 교수는 부산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울산발전연구원, 부산대학교사회과학연구소 등을 거쳐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상담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역사회복지를 위하여 현재 부산금정구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민간위원장, 부산공동모금회 배분분과위원 등으로 참여하고 있다. 관심 분야는 사회보장제도, 노동문제, 사회복지 교육이며, 사회복지 철학으로 관심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