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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거룩해 질 수 있다.

(로마서 1장 21-28절)

 

변화하는 성(姓) 인식과 문화

흔히 6월을 호국보훈의 달이라 부르지만, 요즘엔 ‘퀴어축제의 달’, 혹은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LGBT Pride Month)이라 하여 각 나라에서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동성애자들의 축제는 2000년대 초에 시작되어 많은 이들의 반감을 샀지만, 점차 인식과 규모가 모두 확장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1일에도 제25회 서울 퀴어축제가 “예스, 퀴어(YES, QUEER)”라는 주제로 서울 을지로에서 열렸습니다. 주최 측 추산으로 약 15만명이 그 날 행사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사실 다행스럽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유교적 문화가 여전히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동성애 문화가 아직까지는 대중적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6월 1일 퀴어축제의 날은 우리와 성격이 전혀 다른 주류 축제에 속합니다. 이 날은 동성애와 동성 결혼이 국법으로 인정받은 것을  축하하기 위한 축제가 열리는 날입니다.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 동성애와 동성 결혼은 아무도 비판할 수 없는 성역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을 비난 하는 말을 하거나 태도를 보이면, 그 사람은 차별했다는 이유로 바로 고소 당해서 법정에 서게 될 수  있습니다. 비록 한국에서는  이와 관련된 소식을 뉴스나 신문을 통해서 접하지만, 이러한 선진국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현재 젊은 세대의 성에 대한 의식을 보면, 동성애에 대한 태도가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호의적이게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젠더 이데올로기와 성혁명이 포스트모던 사회와 함께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변화는 학문과 문화 영역에서 발전되고 확산되다가, 이제는 매스 미디어에 어느 정도 견고히 자리 잡아 유연해진 대중 인식과 함께 문화와 기업에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즉, 우리의 예상과 달리 하루가 다르게 양상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우리의 다음 세대가 있습니다. 젊은 세대는 SNS 같은 가상공간과 미디어를 통해 동성애를 포함한 성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흡수하고 있습니다. 이제 TV 예능과 드라마에서 커밍아웃한 연예인들과 트랜스젠더 예능인들이 친근하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법적인 정당성을 얻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나라에도 젠더 이데올로기와 성혁명의 구조적인 변화가 자리 잡게 될 것이며, 이는 한국의 미래 사회와 교회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보수적 기독교가 이 문제에 대해 성경적 관점으로 ‘잘못됨’과 ‘심각성’을 말하며 대응하고 있지만, 우리의 그러한 인식 자체를 ‘혐오’의 관점으로 단정하고 억압하는 경우가 많아 소통이 어려운 실정입니다.

5월 가정의 달에 건강한 가정을 통해 교회를 세워나가려는 선한 의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6월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동성애 퀴어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또한 온라인 상에서는 지속적으로 젊은 세대에게 잘못된 성(姓) 인식을 왜곡하여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현실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성경적 태도와 답은 무엇일까요? 오늘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잘못된 성 인식, 특별히 동성애 현상의 원인을 알아보고 어떻게 성경적으로 반응할 것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진리를 막아선 사람들

오늘 읽은 로마서 1장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는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그 복음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하나님 앞을 떠난 인생을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고, 심판을 피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자는 구원, 즉 하나님 앞에 다시 서서 창조의 원리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18절에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앞에 불의로 반응합니다. 이후 19-32절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죄의 본질과 죄의 결과를 설명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본질적인 죄의 특성은, “진리를 막는”(18절)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를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로 막아섰습니다. 그 불의는 인간이 진리를 재정의한 것으로, 곧 선악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의로 판단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죄의 본질입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아서며 죄인이 된 인간의 모습이 21-22절에 그려집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진 것이 하나님을 떠난 죄인으로서 인간의 자아상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그 인간이 불의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막아서고 재정의하여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인간의 죄된 탐욕으로, 선악을 “바꾸는” 장면과 그 인간의 불의에 대한 진노로서 하나님의 “내버려 두심”이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성애 같은 잘못된 성 인식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 인간들

23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스스로 선악을 재정의했습니다. 피조세계를 통치할 수 있는 청지기로서의 권한을 위임받았음에도, 인간은 다스려야 할 피조물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 예배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했습니다(22절). 즉, 인간이 불의로써 진리를 막은 것이 “우상숭배”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는 24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셔서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정욕”과 “더러움”은 우상숭배의 모습이 성적 타락으로 나타난 것을 바울이 표현한 것입니다. 가나안의 종교들과 함께 로마의 여러 종교 역시 성적 타락을 수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는 창세기 2장에서 나타난 ‘하나님 앞에서 언약한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연합’인 결혼의 본질을 깨뜨린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들 마음의 정욕대로, 원하는 대로 육체를 취하고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 담긴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죄의 모습을 하나님은 내버려 두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에게 우상숭배는 돈, 쾌락, 명예,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 세상의 가치들은 일면 우리에게 만족을 주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죽게 하는 우상일 뿐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가치들을 하나님보다 우선하여 섬기기 시작할 때,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진리를 막아서 왜곡하게 됩니다. 또한 그 거짓 진리로 스스로를 속여 결국 자기 자신뿐 아니라 세상 속에 구조적 악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즉, 우상에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상에 지배당하기 시작하면 인간의 삶과 관계 전체가 왜곡되고 연쇄적인 악영향 속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서 하나님의 형상인 자기 자신과의 관계, 즉 자아상도 깨어집니다. 왜곡된 자아상을 가지고 타인을 왜곡하여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나아가 사회 내의 관계들이 혼란스러워지며, 남녀 간, 세대 간, 빈부 간의 극한 대립과 충돌이 일상화됩니다. 이는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간의 왜곡된 관계로 확장되고, 더 나아가 자연 세계와의 관계 자체도 왜곡되면서 심각한 환경 문제에 봉착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내버려 두심과 동성애

바울은 동성애를 우상숭배의 가장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실례로 지목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꾸면서, “남과 여”라는 성의 역할 구분을 바꾸어 선악을 재정의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연합을 통해 인간 존재를 규정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개인이 아닌 ‘남성과 여성’이라는 공동체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아의 욕망을 따라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로 관계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순리’를 ‘역리’로 바꾸어 사용한 것이라 표현합니다. “여자들이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26절)는 여성의 동성애를 나타낸 것으로, 이는 결혼 관계 안에서의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육체적 결합이라는 창조 질서의 원리를 바꾸어 버린 악행입니다.

이 ‘바꿈’에 대해 하나님은 그들의 부끄러운(부자연스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십니다. 여성들의 동성애 행위에 이어 27절에서는 남성들도 부끄러운 일(부자연스러운 동성 성교)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동성애가 나타나는 현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 본성이 왜곡되어,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부자연스러운 행위로 바꾸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우상숭배의 저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를 당시 그레코-로만 시대의 독특한 문화나 개인적 일탈로 보고 합리화하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이 동성애를 포함한 부자연스러운 성적 행위를 분명한 죄의 본질로 다루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동성애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27절에서 동성애를 행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상당한 보응(처벌)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에게 현재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나니”, 그리고 27절에서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두 구절에 나타난 동사 모두가 3인칭 현재입니다. 동성애 행위를 통해 에이즈 같은 특정 질병에 걸리는 것을 하나님의 현재적 심판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보다 본질적인 처벌입니다. 진리를 거짓으로 바꾼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왜곡되어 정당한 부부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성경적이고 정상적인 사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 즉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현재적 심판이라고 선언합니다. 동성애자 스스로는 거짓 진리에 지배되어 자신의 느낌과 생각대로 살아가겠지만, 그들의 실상은 하나님의 진노로서 내버려 둔 바 된 현재적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심판은 그들 스스로의 느낌과 성향과 행위가 지속될수록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을 왜곡하고 욕되게 만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에 대해 분명하게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며(21절), 경배하고 섬겨야 합니다(25절).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우상과 바꾸고, 하나님의 형상인 남성과 여성을 재정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바꾸는 것을 통해서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고자 했습니다. 인간이 우상숭배로 창조 질서를 파괴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심으로써 그들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28절). 이후 이어지는 29-31절의 악덕은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죄의 공장이 되어 악을 마구 생산해내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32절에서 바울은 이것들을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규정하지만,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인간들은 이를 행할 뿐 아니라 옳다고 판단합니다.

 

회복의 가능성

그렇다면 인간은 절망으로 끝나버릴 운명일까요? 썩어지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피조물의 우상으로 바꿀 때, 그 우상과 우상이 주는 유행과 가치 역시 유한할 뿐이므로 인간은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동성애 성향을 가진 이들이 성전환 수술을 받고 시간이 지난 후 후회하여 돌이키려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을 영미권에서는 디트랜스(Detrans)라고 부릅니다. 젊은 시절 문신을 했다가 나이 들어 후회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죄에 대해 명확히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우리 하나님은 죽을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상숭배의 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복음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누구든지 회개하여 돌이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동성애의 죄 역시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인 성향이나 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복음의 도전

이에 대해 바울은 동성애가 교회 속에까지 침투하였던 당대 교회들에 복음의 소식을 전합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복음의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어떤 죄든지 회개하여 회복될 수 있음을 도전합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죄들을 열거하면서 그들을 “불의한 자”로 통칭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을 선언합니다. 고전 6:9에 열거된 죄의 목록 중 “탐색하는 자(헬 malakos)”, “남색하는 자(헬 arsenokoitai)”는 각각 여성의 역할과 남성의 역할을 하는 동성애자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들이 비록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죄인으로서 “불의한 자”로 지칭되지만, 바울은 11절에서 강한 역전의 의미로 “그러나(헬 alla)”를 세 번 강조하여 그들이 부도덕한 삶의 방식에서 회복할 것을 강권합니다. “너희 중에 음행하는 자가 있느냐, 우상숭배하는 자가 있느냐, 간음하는 자가 있느냐? 동성애 행위를 하는 이들이 있느냐? 도적이나 탐욕, 술 취하고 모욕하고 속여 빼앗는 자가 있느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죄인이라도, 그러나 너희는 씻음받을 수 있다. 그러나 너희는 다시 거룩해질 수 있다. 그러나 너희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 그 어떤 죄인이라도 주 예수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씻김받아 거룩해지며 의롭게 될 수 있으니 돌이키라.” 바울의 이 확언은 그 어떤 죄인이라도 얼마든지 회개하여 온전히 회복할 수 있음을 소망 가운데 도전하고 있습니다.

둘째, 바울은 롬 1장에서 나타난 절망스러운 우상숭배적 죄의 모습에서 돌이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에 대해 롬 12장 이하에서 도전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바울은 온갖 죄의 공장이 되어버린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자 소망이 복음에 드러났음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본질을 재정의한 동성애자들을 포함하여 어떤 죄인이든 이 세대의 우상숭배적이고 타락한 성 문화들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기 위해 힘쓰고 애쓰라 강권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죄된 문화를 따라가는 내 뜻, 내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계속 분별하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습관이 제2의 천성’이라 말했습니다. 복음으로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크고 작은 죄의 성향과 행위에 대해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성경적이고 거룩한 습관들이 제2의 천성이 되기까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야 합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의 공동체성을 강조합니다. 실수할 수 있어도 함께 배우고 훈련받고 성숙해 갈 수 있는 실제적, 영적 관계입니다. 건강한 교회 안에서 죄인도 원수도 회복되고 되살아나는 간증들이 더 많아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가면서

진리와 거짓을 맞바꾼 인간은 하나님이 정하신 선과 악을 재정의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거절하고 진리를 거짓으로 바꾼 인간이 살아가는 깨어진 창조 세계이며 죄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은 자신이 다스려야 할 피조물에 의해 지배당하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서 이기적인 정욕과 욕망에 집착하는 죄의 화신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간은 깨어진 세상 속에서 축복의 통로가 아닌 욕망을 배설하고 빼앗고 지배하면서 고통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저주 받은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인 우리가 성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성 이데올로기에 전도되어 자신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잘못된 판단으로 동성애에 빠진 사람들과, 포르노 동영상, 매춘, 불륜 등 성적인 죄에 빠진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이 복음을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서 가르치고 배우며, 우리 삶 속에서 실천하며, 우리의 가족과 이웃,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는 사명자로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박석주 목사는 계명대에서 음악을 전공한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고려신학대학원(Th.M)을 졸업하고, 현재 동진주교회를 담임하면서 고신대 일반대학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박사과정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