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누군가의 도움이 절박하게 필요했던 순간이 있었습니까? 새로운 직장에 들어가서 아무 것도 모를 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 가서 아무 것도 모를 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국내에서 이사를 가는 것은 괜찮지만, 해외로 이사를 갈 때에는 정말 막막합니다. 낯선 곳에 도착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가 공항으로 마중 나올지, 막막하고 두려운 심정입니다. 고향을 떠나서 다른 나라로 갈 때에는 누군가의 도움과 친절이 절박하게 필요합니다.
나그네를 사랑하라
1. 구약의 명령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일관되게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아, 과부와 더불어 함께 등장하는 것이 바로 나그네입니다.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시편 146:9). 성경에서 나그네는 고향을 떠나서 타국에 거주하는 이주민들을 뜻합니다. 21세기에도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하물며 3,000년 전에는 어땠을까요? 비행기도 없고 자동차도 없던 시절에, 고향을 떠나 타국에 사는 것은 정말 힘들었을 것입니다.
타국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사는 것은 고달프고 서러운 일입니다. 지금은 국제법이 잘 되어 있어서, 외국인에게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한 국가가 자국 내 외국인을 억압하면, 국제법에 의해서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제법이 시작된 지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국제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국제법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국제법이 생기기 3,000년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나그네를 보호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그네를 보호하라고 하셨을까요? 모세의 율법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명기 10:19). 이스라엘 백성이 나그네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 역시 과거에 애굽에서 나그네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그네로 살 때, 온갖 고난과 학대를 당했습니다. 그들이 고난 가운데 신음하는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에 가면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왜냐하면 과거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께 공짜로 받은 은혜를 공짜로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로운 일이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타국에서 나그네로 살며 고생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로서, 지금 내 주변에 있는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일입니다.
2023년 추석 때, 국내에 있는 중국 유학생들 집회에 설교 초청을 받았습니다. 한국에 온 중국 유학생들이 명절에 갈 곳이 없으니까, 일부러 그 기간에 집회를 한다고 합니다. 경기도 곤지암에 있는 기도원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추석이니까 차가 막혀서 가는 길에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집회장에 도착해서 중국 학생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고향을 떠나 유학 와서 생활하는 중국 학생들을 보니까, 예전의 제 생각이 났습니다. 저도 20대 후반에, 미국에 가서 7년 동안 고생하며 공부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타국에서 생활하면서 제일 서글플 때가 있습니다. 바로 명절 때입니다. 명절이라고 가족을 보는 것도 아니고, 명절 음식을 먹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울적한 기분으로 명절을 보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중국 유학생들은 명절 때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평소보다 훨씬 더 열정적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제가 외국에서 유학생으로 살아보았기 때문에, 한국에 온 유학생들을 보면, 그들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에, 그들 곁에 있는 나그네를 향한 사랑을 가지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 신약의 명령
신약 시대로 넘어와서, 나그네를 향한 섬김은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의지할 곳이 없는 나그네를 섬기는 것은 천사를 대접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씀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브리서 13:2). 나그네를 대접했는데 알고 보니까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혹시 성경에서 기억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왔던 세 명의 손님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환대하며, 물과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음식이 아니라,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손님은 그냥 손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이었습니다. 천사들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선물을 주었는데, 그의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손님들을 잘 영접하고 섬겼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서, 나그네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손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였습니다.
이런 일이 아브라함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사기에 보면, 기드온도 낯선 이를 만나서 섬겼는데, 알고보니까 여호와의 사자였습니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도 낯선 이를 만나서 섬겼는데, 알고보니까 여호와의 사자였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사건들을 염두에 두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다”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40). 마태복음 25장은 최후 심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 가운데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의인과 악인을 구분해서, 의인에게는 상을 주고, 악인에게는 벌을 주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태복음 25:35-36). 그러자 의인들이 놀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예수님께 먹을 것을 드린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 예수님을 만나서 먹을 것을 드리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40).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에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우리 주변의 연약한 자를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을 믿는다면, 교회가 왜 구제를 해야 하냐고 질문할 수 없습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에,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예배하고 기도하고 훈련을 받았으면, 그 다음에는 지역 사회로 나가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분이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교회가 왜 구제를 해야 합니까? 교회가 전도하고 선교하면 충분하지, 왜 구제를 해야 합니까?”
그 때는 제가 신학 공부를 하기 전이라서, 교회가 왜 구제를 해야 하는지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제안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명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구제는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하는 중요한 사역입니다. 교회가 왜 구제해야 합니까?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닮아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누가복음 6:36).
여러분, 자비를 행하지 않고,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말로만 자비를 말하고 긍휼을 말하면, 그 사람이 자비로운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실제로 자비를 행하지 않으면,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꼭 기도원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기도원에 가서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모습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CCM 가수 중에 Steven Curtis Chapma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분인데 그의 노래 중에 “What Now”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싶은데, 시간 관계 상 그럴 수 없습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노래가 나오니까, 나중에 집에 가셔서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곡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크리스천이 예수님의 얼굴을 보기 원한다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고아의 얼굴에서, 길거리 노숙자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는 내용입니다. 고아를 섬기고, 노숙자를 섬길 때, 마태복음 25장 말씀이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가 나를 영접하였다”는 말씀이 다가왔습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그의 마음 속에 세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토록 기다리던 나를 찾았구나. 네가 기대했던 모습은 아니지만 너는 드디어 나를 찾았구나. 그럼 이제 어떻게 하겠니? What Now?”
제가 아프리카 부룬디 선교사로 있을 때, 이 노래를 많이 들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을 섬길 때, 이 가사가 깊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신령하고 거룩한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지극히 작은 이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변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섬길 때, 그들 안에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인도 캘커타에서 평생 고아들을 섬겼던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Not all of us can do great things. But we can do small things with great love.”)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실까요? 얼마나 큰 일,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는지를 가지고 판단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큰 사랑을 가지고 했는지를 가지고 판단하십니다. 위대한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랑이 중요한 줄 믿습니다. 나그네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일임을 기억하고, 작고 연약한 자를 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는 나그네
1.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나그네를 돕는 것은 단지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스스로를 나그네로 여기며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베드로전서 2:11). 베드로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나그네 같은 너희에게 권면한다” 라고 말합니다.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은 나그네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외국에서 살 때 그 나라의 시민권을 취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주권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제적인 혜택에 있어서는 시민권과 영주권이 거의 비슷합니다. 다만 시민권을 취득하면, 그 나라 선거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에 사는 교민 중에서, 일부러 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 분야에서 국제적인 상을 받을 때, 외국인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은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외국에 살지만 한국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한국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녀들에게도 한국어를 가르칩니다.
이 땅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의 시민권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영주권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고, 우리의 가치와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에 대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히브리서 11:13-14).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입니다. 성경에 있는 믿음의 명예의 전당인데, 이곳에 기록된 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갔다는 점입니다.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같이 살았습니다. 나그네는 이 땅의 문화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 땅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땅에 궁극적인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나그네로 살면서, 제 안에 형성된 태도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행기로 이동하려면 여행 가방 2개만 들고 갈 수 있습니다. 여행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 물건은 어차피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까 물건에 대한 욕심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비행기 타고 갈 때에는 여행 가방 2개를 가져갈 수 있지만, 세상을 떠날 때에는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는 물건들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져갈 수 없는 물건들에 소망을 두고 기쁨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는 말씀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 모험에 참여하라고, 가는 길 고비마다 놀라운 일과 마주치게 되는 여행길에 나서라고 초청하신다.”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다시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나그네이기 때문에, 다른 나그네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줄 믿습니다.
2. 언어와 문화를 넘어선 형제 사랑
오늘 본문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과 형제 사랑을 연관하고 있습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Let brotherly love continue”) (히브리서 13:1).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과 형제 사랑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여기에서 형제는 타고난 형제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된 것을 뜻합니다.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한 형제가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나와 비슷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국제 학회나 행사에 유럽 사람, 아프리카 사람, 아시아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아시아 사람을 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나마 피부색이 비슷하고 문화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나와 비슷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인종과 문화와 언어를 넘어서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인류 역사에서도 대부분의 전쟁과 갈등은 민족주의적인 뿌리로 발생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 역시, 특정 민족과 특정 문화에 기반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기독교만이 인종과 문화와 언어를 넘어서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인종과 상관 없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고, 형제 자매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단기 선교의 큰 유익입니다. 단기 선교는 일반 여행과 차원이 다른 여행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행사를 통해서 베트남 여행을 다녀온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여행사를 통해서 베트남에 가면 무엇을 합니까? 좋은 리조트에서 쉬다가 관광지를 둘러보고 옵니다. 야시장에 가서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옵니다. 이런 여행의 경우, 베트남에 다녀왔지만, 베트남 사람하고 이야기할 일이 없습니다. 식당에서 서빙해 주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베트남으로 단기 선교를 가면 완전히 다릅니다. 베트남 교회를 방문해서 베트남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르지만, 우리가 같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너무 신기합니다. 베트남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고, 선교 사역도 같이 합니다. 진짜 베트남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단기 선교를 다녀오면 그 나라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단기 선교의 놀라운 유익입니다.
제가 대구동신교회에서 사역하면서 큰 기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인종과 문화와 언어를 넘어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때, 너무 기쁩니다. 2023년 11월 월드비전과 함께 아프리카 식수사업을 위한 기부 걷기 행사가 있었습니다. 대구에서 1,000명을 모집하는데, 우리 교회에서 10% 정도 담당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총 340명이 참여하셔서 대구 지역 참가자의 1/3을 우리 교회에서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식전 행사에서 우리 교회 성도들이 앞에 많이 나갔습니다. 사회자가 어디에서 왔냐고 물을 때마다, 동신교회에서 왔다고 하니까 사회자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좋은 전도 효과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회사에서도 오고, 학교에서도 오고, 개인적으로도 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는 것이 불신자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주었다고 믿습니다. 물을 길어오기 위해서 6km를 걷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귀한 사랑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한 형제인 줄 믿습니다. 전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형제 사랑에 힘쓰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주민 선교의 중요성
현재 우리나라에는 250만 명의 이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유학, 취업, 결혼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서, 한국으로 오는 이주민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주민의 증가는 한국 사회가 단일문화권에서 다문화사회로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환경에 온 이주민들은 새로운 관계와 아이디어에 마음이 열려있습니다. 본국에서는 전통과 관습이 중요하지만, 새로운 나라에 오면 열린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에 온 이주민들이 교회에 대해서 마음이 더 열려있습니다. 본국에서는 교회에 가는데 여러 가지 장애가 많았는데, 새로운 환경에서는 더 쉬워집니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 위한 실제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낯선 환경에서 외롭게 지내는데,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이주민들은 교회에 대해서 마음이 열려있습니다.
인구 절벽 시대에 들어선 한국 상황에서 이주민의 유입은 불가피한 현실입니다. 한국 사람이 하기 힘든 일을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외국인들이 우리 나라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 고마워할 필요도 있습니다.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해야 하는 험한 일이 있는데, 그분들이 그 일을 감당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이주민을 위한 사역, 다문화가정을 위한 사역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 선교사의 2.8%에 해당하는 1,100명 만이 이주민 사역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더욱 의식을 가지고, 우리 주변에 있는 이주민들을 섬겨야 합니다. 이주민 선교 전문가들은 FAITH 라는 다섯 단계의 이주민 선교이론을 제시합니다.
- 1단계는 Friendship으로,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서 우정을 쌓는 것입니다.
- 2단계는 Assembly로, 교회로 초청해서 예배와 훈련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 3단계는 Independence로, 이주민 스스로 모임을 운영할 수 있는 재량권을 주는 것입니다.
- 4단계는 Trans-Mission로, 훈련된 이주민을 본국으로 역파송 하는 것입니다.
- 5단계는 Hub로, 역파송된 이주민 선교사들과 현지 네트워크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이 다섯 단계를 거치면, 이주민 사역을 통해서 역파송 선교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교회는 어느 단계에 있을까요? 5단계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 외국인 예배부에서는 훈련된 이주민들을 본국으로 역파송했습니다. 또한 역파송된 이주민 선교사들과 현지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고, 지속적으로 협력하며 사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역파송된 중국인 선교사들과 우리 교회 중국인 사역자들, 선교부 담당 목사님이 제주도에서 생명사역 재교육을 위한 컨퍼런스를 가졌습니다. 현지인 선교사를 파송하고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훈련하고 기도하며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2025년은 대구동신교회의 중국어예배가 시작된지 22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 22년간 외국인 예배부서가 세워지기까지 귀하게 헌신해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하신 일은 단지 한국에 온 이방인과 나그네를 섬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천사를 대접한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이주민들, 유학생들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 더욱 더 놀라운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더 큰 기대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어떻게 사용하실지 너무나 기대가 됩니다. 여러분도 그런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주님께서 맡기신 생명사역에 충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짧은 인생을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귀하게 쓰임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 문헌
- David L. Allen, Hebrews,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n: B&H Publishing Group, 2010).
- Raymond Brown, The Message of Hebrews: Christ Above All, The Bible Speaks Toda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88).
- Donald Guthrie, Hebrew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83).
- Ray C. Stedman, Hebrew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Westmont: IVP Academic, 1992).

문대원 목사는 미국 고든콘웰 신학교(M.Div.)와 보스턴 대학교(Ph.D.)를 졸업했으며, 현재 대구동신교회 담임목사,국제로잔이사, 한국해외선교회(GMF)이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세계선교학회 학술서 African Initiative and Inspiration in the East African Revival(Brill, 2022)이 있다.